<시민교육센터 교육학 기고 1>
교육관 개선하기 - 경험으로서의 ‘교육관’
[1] 첫 번째 편지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고민을 많이 하다가 울리히 로스님이 올려주신 답변에서 힌트를 얻어 ‘나의 교육관’을 성찰하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보려고 합니다.
[2] 제가 그동안 공부하는 바닥에 있으면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교육학을 공부하는 것’의 본질이 ‘교육학에 관한 책을 읽는 것’, ‘교육학자들의 강의를 듣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제게 있어서 ‘교육학을 공부하는 것’은 ‘스스로의 교육관을 학문적인 방식으로 개선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3]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교육학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은 우리가 ‘교육에 대한 특정한 이해를 얻은 사람이 문자라는 상징체계를 통해 그의 생각을 표현해 놓은 것을 해독하는 작업’에 해당합니다. 즉, 책이나 강의라는 것은 일단 그 자체로는 ‘표현체’에 불과하며, 그러한 ‘표현체’를 해독하는 것이 ‘공부’와 연결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는 것입니다(*나중에 우리는 ‘교육’이라는 것을 하나의 인식구조가 다른 인식구조의 변화에 간섭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가르치고 배우고자 하는 내용의 표현과 해독의 과정이 없이 일어나는 인식구조의 변화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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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먼저, 문자와 같은 상징체계가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히려 상징체계는 그것을 사용하는 집단 사이에서 공유되는 맥락(context)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교육’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는 상징체계 자체의 내력보다는 사람들이 그것을 공유하는 ‘맥락’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상징체계와 그것이 속한 맥락 간의 관계에 대한 이 말이 잘 이해가 가시는 분들은 [8]부터 읽으셔도 됩니다).
[5]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예전에 이경규가 진행하는 쇼 프로그램을 보다가 거기에 나오는 어린아이가 ‘삼촌이 자주 교육을 한다’라고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이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니 ‘삼촌이 막대기를 들고 와서 때릴 때마다 교육한다고 하기 때문에 자기는 교육하는 것을 싫어한다’ 고 하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사람들이 모두 한바탕 웃습니다. 왜냐하면 상식적으로 ‘비교육적’이라고 하는 행동을 아이가 너무도 당연하게 ‘교육’이라고 생각하고 겁을 내는 것이 코믹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6] 이 장면은 상징체계와 맥락 간의 관계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이것은 앞으로 ‘교육어’와 관련하여 중요한 문제로 다루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동안 삼촌과 아이는 ‘교육한다’는 말을 ‘삼촌이 막대기를 들고 와서 아이를 때리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써왔던 것입니다. 즉, ‘교육’이라는 단어로 지칭되는 공유된 경험이 있는 것이지요. 이 둘 사이에 공유된 경험이 삼촌과 아이가 ‘교육’을 같은 뜻으로 쓰도록 맥락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그 장면에서 ‘삼촌이 자주 교육을 한다’는 아이의 말만 듣고 다른 채널로 돌렸다면, 아마도 저는 아이가 ‘교육한다’고 하는 것을 ‘제가’ 평소에 ‘교육한다’고 할 때 의미하는 대로 이해해 버리고 ‘아, 삼촌이 아이에게 교육을 자주 하는구나.’ 라고 생각해 버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이와 삼촌이 공유한 그 경험이 제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 만약, 평생토록 한 번도 누군가에게 맞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이 이야기를 듣고 웃게 될까요? 아마 그에게 이 이야기를 이해시키려면 우리는 그에게 ‘맞는 것’을 경험하게 하여 이 이야기가 왜 우스운지를 설명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7] 제가 이 이야기를 통해 하려는 말은, 이와 같은 일이 우리가 책을 읽을 때나 강의를 들을 때에도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저자나 강의자가 독자가 기존에 했던 경험을 이용해서 설명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독자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하고는 그것을 진술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사실 이 부분이 우리가 공부하려는 교육과 가장 관련이 됩니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표현체만 접하게 될 경우에 우리는 위에서 말한 ‘평생 맞아본 적이 없어 아이의 말이 왜 우스운 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 같은 처지가 됩니다. 또는 ‘삼촌이 자주 교육을 한다’는 아이의 말만 듣고 다른 곳으로 채널을 돌리고는 그 말을 자기가 평소에 알고 있던 교육으로 이해해 버리고 마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되지요. 따라서 ‘책을 통해 간접경험을 한다’는 것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책을 통해서 경험한다’라는 말로 이해되는 것은 과장된 것입니다. 저자와 독자가 같은 경험을 했다면 독해를 통해 자연스러운 공감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독자가 저자가 한 경험을 하지 못한 경우에 독자는 저자가 독자의 다른 경험을 빗대어서 어떤 경험을 설명한 것을 그럭저럭 이해하는 정도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사실적이지요.
[8] 이쯤 되면, 여러분의 초점이 책이나 강의와 같은 매체(media)에서 ‘경험’으로 옮겨왔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개선하려고 하는 ‘교육관’ 또한 책이나 강의의 형태로 표현되기 이전에 하나의 경험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우리의 사고가 상징체계에 의존하여 발달한다는 심리학적 사실은 지금의 맥락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생각이 언어 자체가 아닌 경험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 경험이 언어로 표현될 때 부각되는 사고요소의 논리적 연결 이외에도 여러 가지 감정적 요소, 가치관의 반영, 정체성의 문제들이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교육관과 더불어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들, 자신의 교육관이 까닭없이 부정될 때 느끼는 분노, 자신의 교육관을 드러낼 때 느낄 수 있는 자존감 등등이 결합되어 있지요.
[9] 우리의 경험이라는 것은 무의식적인 측면을 많이 갖고 있으며, 교육관 또한 의식 수준에 다 드러나는 것이 드물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교육관이라고 할지라도 그 내용을 다 알기 어려우며, 의식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다 알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어떤 것이든 간에 ‘교육’에 대한 의견을 드러낼 때에는 분명 우리의 교육관이-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전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스로의 교육관을 성찰할 때 무작정 '내가 교육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만 쳐다보면서 생각을 정리하기 보다 그러한 생각이 전제되어 있을 다른 구체적인 의견들-나는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사교육비는 줄여야 하는가-을 먼저 서술해놓고 시작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교육에 대한 어떤 의견을 제시하더라도, 적어도 스스로가 ‘교육’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를 전제하고 의견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데, 바로 이것이 자신의 ‘교육관’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교육’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말하면서도(ex. 사교육비를 줄여야 한다던가) 교육관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면 ‘교육관이 없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교육관이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기보다는 1) 지적으로 탁월한 사람들의 대단히 체계적인 교육관만이 교육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2) 교육에 대한 산발적인 의견 속에 전제되어 있는 스스로의 교육관을 성찰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10] 본 강의는 ‘탁월한 사람들의 탁월한 교육관’을 제시하는 것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탁월한 사람들의 탁월한 교육관’을 그들의 수준에서 이해하지 못한 채 외워서-여러 번 읽다가 우연히 외우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의 교육관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의 문제는 그러한 사람이 실제로 교육에 대한 여타 사안에 대한 의견을 제시할 때에는 자신이 외운 ‘탁월한 사람들의 탁월한 교육관’과 전혀 상관이 없는 무의식 속의 자신의 교육관을 반영시키는 데에 그치고 만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이한’님과 함께 진행했던 ‘민주주의 학회’에서도 사람들이 스스로의 생각을 드러내고 그것을 개선하기 보다는 ‘이한 씨의 생각은 무엇이냐’,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 강의자인 이한 씨의 답을 내어 놓아라.’라는 방식의 질문이 많았던 점이 참 아쉬웠습니다. 사실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는 자신의 머리 속에 있는 것의 개선이며, 따라서 ‘문제에 대한 나의 답은 무엇인가’,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이며 모르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편이 나은 것입니다.
[11] 어쨌든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자신의 질문으로 받아들이면서 교육학 공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함께할 ‘교육관의 개선’이란 ‘교육에 대한 학문적 이해, 즉 경험으로서의 학문적 이해의 개선’을 말합니다. 공부를 시작하시는 분들께서는 이전에 자신이 '경험'한 교육관이 무엇인지를 이 시점에서 한 번 A4 용지 한 장에라도 적어보기를 권합니다. :) 이러한 경험으로서의 교육관, 교육학에 대한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 번 글에서는 ‘이론(학문)과 실천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고찰’에 관한 이야기가 한 번 더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첫 번째 편지는 여기에서 마칩니다.
2007년 3월 9일
김신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