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널드 드워킨의 <민주주의는 여기서 가능한가?> 제3장에 대한 강의였던 세번째 강의에서 간략하게 다루어졌던 부분을 민주주의 모델 세번째 강의 내용을 정리하여 보충합니다.
소유권 확정에서 자유와 평등의 양면 - 최초 소유와 이전 이론 비판
작성자: 이한 참고강의: 민주주의의 모델 세번째 강의 mp3 세번째. (http://www.civiledu.org/tt/attachment/1117139138.mp3)
노직은 소유권과 분배에 관하여 세가지 이론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최초 소유의 이론, 이전의 이론, 교정의 이론이다. 교정의 이론에 대해서는 책에서 그다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무정부, 국가, 유토피아>에서는 앞의 두 이론이 언급되고 있다. 이 책은 한국에서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이러한 제목 번역은 책의 내용을 잘 말 해주고 있는데, 무정부 상태의 개인들로부터 시작해서 이들이 사적결사체를 무리지어 구성하고, 이들 사적 결사체들 사이에 발생하는 갈등과 이해충돌을 조정하기 위해 국가가 생성되는 논리적 순서를 밟아 논의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초 소유의 이론은, 노동투여를 통해 물고기를 낚거나 땅에 울타리를 침으로써 그 대상을 온전하게 소유하게 된다는 것이고, 이전의 이론은 강박이나 사기를 통하지 않는 한 자유로운 성인들 사이의 합의에 의해 이전된 소유권은 완전히 정당한 것이라는 뜻이다. 이전이론에 따르면 거래의 결과가 일견 불평등하게 보일지라도, 의사를 왜곡하는 조건이 배제된 상태에서 자유로운 거래의 결과로 생긴 것이라면 도덕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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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직관적인 예로 노직은 두 가지를 든다. 하나는 챔벌레인의 예다. 화려한 농구선수 챔벌레인의 경기를 보고 가슴이 뛰어 흥분을 느낀 사람들은 경기장에 배치된 통에 돈을 넣어달라고 게시했을 때, 경기장의 사람들이 조금씩 넣은 돈이 평균 임금 생활자가 1년 동안 벌어야만 얻을 수 있는 돈이라고 할지라도 챔벌레인이 그 돈을 갖는 것이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점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통에 돈을 넣은 관객들은 원래 그 돈을 온전하게 소유하고 있었고, 통에 넣는 과정에서 어떠한 강박이나 사기도 없었으므로 그 소유권은 온전하게 챔벌레인에게 이전된 것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돈은 모두 그러한 과정을 거친 것이며, 그것이 합해져서 어마어마한 금액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중에 일부를 평등을 이유로 세금으로 가져갈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럴려면 이 중 일부가 분명히 챔벌레인에게 속하지 않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의 예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기업을 설립하여 생산활동을 하는 일군의 사람들이라는 예이다. 그 가상적 사회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하루에 6시간 밖에 일하지 않는데, 자기 수중에 남은 물품을 가지고 공장을 설립하여, 국가에서 제공된 일을 다 마친 다음에 공장에 모여 일을 해서 거기서 만든 물품을 시장에 갖다 팔고 그 교환의 결과로 다른 이득을 얻는다. 노직은 이러한 활동 어디에 부정의한 점이 있냐고 묻는다. 원래 자신에게 속한 것을 잘 조직하고 활용하여 새로운 부를 창출한 것이고, 이것은 전적으로 과외로 노동한 그들에게 속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불의한 점이 하나도 없다.
노직은 이 두 가지 예를 들면서 소유권 이전이론을 정당화하고 있다. 노직은 이러한 역사과정적 정의론에 대비하여 분배정형을 위한 개입 이론으로 롤즈와 센의 이론을 소개하고 있다. 분배정형을 위한 개입은, 어떤 정의롭고 바람직한 분배의 정형적 형태가 있다고 전제한다. 롤즈의 경우에는 최소 수혜자의 극대화가 그런 것이다.
노직은 첫째로, 이런 분배적 정형을 위한 개입은 성인들 간의 자유로운 합의의 일부를 필연적으로 파괴할 수 밖에 없다고 논한다. 챔벌레인이 기부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챔벌레인이 받은 것을 다 갖겠다는 의사가 표현된 것이다. 그런데도 챔벌레인이 받은 것의 일부를 국가가 가져가는 것은, 자유의 일부를 원인없이 제약하는 것이다.
둘째로, 분배적 정형을 위한 개입은 가족제도를 파괴한다. 동등한 양육조건을 위해 플라톤의 국가와 같은 환경을 조성하지 않는 한, 분배적 정형은 온전히 달성하지 않는다. 이는 현재 우리 사회의 가족제도를 파괴하는 것이다.
셋째로, 자원이전을 통한 분배를 위해서 세금을 걷는 것은 강제노동을 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세금을 한 달에 8만원을 내고, 하루에 버는 돈이 8만원이라면, 세금을 내기 위해 하루를 더 일하게 된 셈이며, 그 돈이 분배를 위해 쓰였다면 그러한 사회보장 프로그램을 통해 돈을 받은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노동을 강제한 것이다.
넷째로, 이는 이민을 허용하는 제도와 다르다. 분배정형을 위한 개입은 일종의 강제적 부조제도라 그 공동체 내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 부조제도에 참여하지 않는 방안은 없다. 그런 상태에서 이민을 가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대단히 모순적인 태도가 된다. 왜냐하면 남아 있을 때에는 그러한 부조제도에서 탈퇴할 수 없는데 이민을 간다고 해서 탈퇴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일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에는 각각 비판받아야 할 점이 있다. 첫째로, 분배적 정형을 위한 개입이 성인들 간의 자유로운 합의를 침해한 것이라고 본 것은, 챔벌레인에게 이루어진 증여라는 것도 시장행동의 결과라고 보면, 시장행동의 결과로 자신이 점유하게 된 것은 언제나 자신이 온전하게 소유되었다고 전제하고 있는데 이는 증명되지 않은 전제이다. 특히 이 점은 권리와 사물이 다르다는 점에서 다시 비판받는다.(후술)
둘째로 과세가 강제노동의 부과와 같다는 점은 비약이다. 강제노동은 인신을 구속하여 물리력의 위협 하에 노동을 시키는 것을 뜻한다. 반면에 소득의 변화를 강제노동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어떤 회사에서 신케인즈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효율성임금을 지급하고 있다고 하자. 완전경쟁 노동시장에서 형성되는 노동가격보다 더 높은 임금을 지불함으로써 회사에 충성하여 생산성을 높게 하도록 만드는 임금이 효율성임금이다. 이 때, 회사가 방침을 바꾸어 또는 회사가 사정이 어려워져서 효율성임금을 더 이상 지불하지 않기로 했다고 하자. 이 경우 분명히 동일한 시간을 일하면서 임금은 8만원이 줄었다. 그렇다면 노직은 회사가 그 회사의 노동자들을 이전과는 달리, 이제는 그만큼 강제노동시키고 있다고 말할 것인가? 또는 우체국이 민영화되어 우편 서비스 가격이 높아졌는데, 이 서비스를 직업상 많이 이용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 한달에 8만원 더 지불하게 되었다면 그는 그만큼 강제노동하게 된 것인가? 그러므로 소득의 하락을 단순히 강제노동으로 치환시키는 것은 다른 동일한 사례를 검토해 볼 때 올바르지 못한 논리의 전개다.
세번째로 이민이 허락되는 것과 모순되는가? 어떤 사회에서 발생된 소득은 그 사회에서 이루어진 협동적 경제활동의 결과물이다. 협동적 사회는 일단 국가단위의 모델을 전제한다. 협동적 사회에서 소유권의 경계는 그 사회의 권리분배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한 사람이 그 사회에서 탈퇴하여 다른 사회의 협동적 생산에 참여할 때 그 사회에 세금을 내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 노직의 논의에서, 이민을 허용하는 그 문제되는 사회만이 분배를 위한 세금을 걷고 다른 사회는 모두 야경국가라면 그 논의의 최소한의 전제는 성립된다. 그러나, 이 세계 중 어느 국가도 야경국가 역할만 하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노직의 논의는 현실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넷째로, 최초 소유권 성립은 노동투입만 가지고 이루어질 수는 없다. 영국 땅이 제한되어 있는데 누군가 울타리를 쳐버리면 다른 사람은 울타리를 칠 데가 없게 된다. 울타리를 치는 행위는 없던 것을 생산한 것이 아니라 노동을 투여하여 표식을 그은 것 뿐이다. 이러한 표식을 긋는 행위에 노동을 투여하는 것은 바다에 오줌을 누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바다에 제일 최초로 오줌을 누었다고 그것이 자신의 소유가 되는 것은 정합성있고 보편적인 소유권 이론으로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최초 소유권 이론에 로크적 단서의 수반은 필수적이다. 다른 사람이 쓸 것이 충분히 남아 있을 때, 최초 점유와 노동투여를 통한 사유화가 정당화될 수 있다. 로크적 단서를 충족하지 못하면 사유화의 요건을 결여한다. 따라서 로크적 단서가 충족되지 않으면 최초 소유권 이론의 첫번째 연결고리가 무너진다. 최초의 점유로서 정당한 권리가 생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로크적 단서의 충족여부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이루어져 왔다.
그 중에서 노직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A부터 Z까지의 사람들이 사유화를 시도하였는데, Y에서 모든 자원의 사유화가 끝나버렸다. X는 그 뒤 아무것도 쓸 것이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Y의 사유화는 로크적 단서를 충족하지 못하여 무효가 된다. 즉, Y는 사유화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전에 사유화를 한 X의 사유화 역시 로크적 단서를 충족하지 못하여 무효가 되고, 사유화할 수 없는 처지가 된다. 이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맨 처음 A의 사유화 역시 로크적 단서를 충족하지 못하게 된다.
노직은 이러한 비판을 약한 로크적 단서를 제시함으로써 피해 갈려고 한다. 즉,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 사유화할 것이 남아 있지 않아 사유화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러한 사유화로 인해 더 나빠졌는지를 검토하여 그렇지 않았다면 단서를 충족했다고 보자고 한다. 노직은 악화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논거로 첫째, 사유화는 생산수단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의 손에 생산수단을 쥐어줌으로써 그 사회의 생산성을 증대시킨다. 둘째,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험하고 실현하는 데에 생산수단을 가진 사람들 중 일부만 설득하면 되기 때문에 특정한 독점적 소수 집단이나 사회 전반의 동의를 얻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위험부담의 전문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즉, 어떤 사람은 아이디어를, 어떤 사람은 자본을, 어떤 사람은 노동을 제공하는 분업이 잘 이루어진다. 셋째, 피고용자가 되어 일을 하기 위해 특정한 소수 집단에 노예화되지 않고도 자유롭게 여러 곳 중에 골라잡을 수 있다. 결국 사람들은 사유화가 이루어진 사회에서 더 나아진다고 결론짓는다. 그러고는 이러한 정당화는 절대 공리주의적 정당화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거들 각각은 증명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공리주의 정당화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악화되었냐 아니냐의 비교 대상은 집산적 사회주의가 아니라, 사유재산이 평등하게 분점된 사회이기 때문이다. 토지가 소수의 손에 집중된 사회보다 토지가 다수에게 분점되어 있는 사회에서 지대소득은 다수에게 귀속될 것이기 때문에 분명히 다수는 더 나아진다. 노직은 자유권의 권리론을 전개하면서 뚱딴지 같이 공리주의적 정당화를 들이미고 있다. 생산성을 높이고, 생산물을 증대시키고, 직업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위험의 전문화라는 이야기는 참으로 코믹하기까지 하다. 사유재산이 소수의 손에 집중되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 소수는 제공할 자본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위험도 부담하지 않았을 텐데, 그러한 전문화가 전제 없이 정당화되는 것은 비약이다.
다섯째로, 노직은 교정의 이론을 개괄만 했을 뿐, 그 논지를 끝까지 밀고 나가 전반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당연한데, 왜냐하면 교정의 이론은 실천적 측면에서 불가능하며, 예상할 수 있는 어떠한 규범적 결론도 가져오지 않기 때문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토지를 소유했던 사람들의 소유권이 상속되어 계속 근대사회로 이어져 내려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면서 결국은 ‘악화된 것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들이밀면서 현실옹호적인 발언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여섯째로, 한 세대 내에서 역사과정적 정의가 온전히 충족되었다 하더라도, 세대가 바뀌면서 그 정의는 유지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노동을 투여한 것들을 교환하는 거래나, 최소한 무언가 기쁨을 준 바가 있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같은 세대 내의 증여와 상속은 다르다. 유류분 제도와 함께 시행되는 상속제도는 피상속인 입장에서도 온전히 자의로 시행되는 것이 아니고, 부모가 아무것도 물려 줄 것이 없는 경우에, 그 상속인인 자손들은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다. 그렇다면 전 세대 내에서는 로크적 단서까지 모두 충족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세대에서 시장거래의 결과로 불평등이 발생하여 자원이 소수 집단에게 독점된다면, 새로운 세대에서는 로크적 단서는 전혀 충족되지 않을 수도 있다. 상속은 세대 내 거래나 증여와는 같이 볼 수 있는 전적으로 자발적인 소유권 이전 형식으로 볼 수 없다. 같은 핏줄에 속한 사람은 한 몸으로 보아서 자연적으로 당연히 소유권이 이전된다고 세대의 문제를 회피할 수 없다. 만약 그렇게 회피하려면 한정승인제도를 부인해야만 한다. 한정승인 제도에 의하면 채무는 승계하더라도 책임은 한정승인신고를 통해서 제한된다. 피상속인의 적극재산이 빚보다 적다면, 상속인은 한정승인을 통해서 피상속인의 재산으로 갚을 수 있는 양을 넘어선 빚을 갚지 않을 것을 선택할 수 있다. 노직의 논리에 따르면, 자발적인 거래로 생긴 책임을 제한시킴으로써 받아야 할 빚의 내용을 공중에 분해시키는 이러한 제도는 명백히 부정의한 것이다. 이러한 제도는 소유권의 귀속에서 직계 가족이라 해도 같은 주체로 보지 않는 우리 사회의 공유된 전제를 표현하는 것이다.
일곱째, 분배정형적 개입이 가족제도를 파괴시킨다는 주장은, 평등 프로그램의 극단적인 경우, 즉 모든 조건을 동일하게 만드는 사후적 평등을 타겟으로 잡고 그 폐해만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에 반쪽자리 논변이다. 물론 사람들이 어떤 커리어를 쌓고, 자녀를 어떻게 키울지는 자유에 관한 문제이고, 사후적 평등을 완전히 관철시키는 프로그램은 이러한 자유를 행사한 선택의 결과를 모두 무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사전적 평등을 추구한 결과로 합당하게 예상되는 수준은 가족제도를 전혀 파괴시키지 않는다. 교육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어떠한 사회도 플라톤식 국가를 도입할 필요가 없다. 단지 어떤 사람이 부모의 소득에 따라서나 현재의 삶의 수준에 따라 교육의 기회가 평균적인 부를 각자 소유한 사람이라면 받았을 범위보다 훨씬 축소되는 것만 막으면 된다.
프리드만은 교육을 통해 인간자본을 축적시켜주는 부모의 자유는 침해하지 않으면서, 배짱이처럼 놀게 해주면서 돈을 상속시켜주려는 부모의 자유는 차별적으로 침해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묻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세제의 한 면만 본 것이다. 물론 부모의 의사 측면에서 이 둘은 차별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인간자본을 축적하여 높은 월급을 받는 직장에 다니는 자녀의 소득 중 일부도 세금으로 걷힐 것이다. 배짱이처럼 논 사람보다 더 많은 근로소득세를 낸다. 그렇다면 프리드만은 인간자본을 축적시킨 부모의 자유를 차별적으로 침해했다고 주장할 것인가? 프리드만의 질문은 인간자본을 축적할 기회, 고숙련직에 접근할 기회가 일부에게만 있는 사회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 애초에 그런 기회를 평등화하기 위해서 세금을 걷는 것이다. 그런데 다시 세금이 개선시키고자 하는 부당한 현실을 이유로 세금을 거부하니 이는 자가당착적인 논리다. 세대 간 자원분배 상태의 승계 문제는 부모의 의사나 자유 측면에서 접근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 세대 내의 정의로운 관계 측면에서 논해야 한다. 왕은 몇 명의 왕자를 골라 여러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우대해 줄 수 있다. 왕자가 아닌 사람과 왕자들의 관계가 정의로운가를 논하는데, 왕의 의사가 제한되었느냐 아니냐를 논하는 것은 논의의 부수적인 측면을 절대화하여 전면에 뒤덮으려는 전략에 불과하다.
노직의 최초 소유와 이전을 통한 권리 생성과 승계이론은, 다른 고려해야 하는 윤리적 요소를 모두 배제시킨 배타적인 경제적 권리 개념이다. 자연재해는 인간들 사이의 자발적 거래의 성격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지만, 불운하게 자연재해로 인하여 집을 잃어 버린 사람들을 굶어죽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정의감에 배치된다. 만약 이들을 살리기 위해 세금을 걷는 것이 허용된다면, 이는 세금의 피징수자의 경제적 권리가 온전하고 배타적인 성질의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또한 노직의 논리에 따르면 인두세와 같은 정액세를 제외한 모든 세금-누진세는 물론 비례세도-은 차별적인 강탈이 된다.
여덟째, C.B.맥퍼슨이 <Property-Mainstream and Critical Position>에서 논했듯이, 노직의 이론은 권리를 사물처럼 다루었다. 우리가 땅을 사고 팔거나 할 때는 매매계약을 맺고 돈을 내야만 할 뿐만 아니라 등기부에 소유권이전등기를 해야 한다. 아무리 돈을 내고 점유를 하더라도 땅의 소유자가 될 수는 없다. 만약 등기를 하지 않은 사람이 그 위에 건물을 세웠다 할지라도 새로이 매매계약을 맺고 땅을 산 사람은 그 사람의 건물을 철거시킬 수 있다. 땅을 점유하고 노동까지 투여했는데 이것이 우선되지 않는 이유는, 사회가 경제적 권리를 부여하는 절차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경제적 권리는 사물에 대해 맺는 실존적 양태나 관계와는 구별되는 사회의 승인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문화재를 우연히 발굴하여 그것을 암시장에 갖다 팔면 징역을 살 수도 있다. 왜냐하면 문화재에 대해서 그 사람의 노동투여에도 불구하고 그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제도를 사회가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공공 도서관을 활용하여 책을 빌려 보고 열람실을 이용하는 활동의 핵심에는 누가 그것을 점유하고 있느냐가 자리하고 있지 않다. 지역주민의 공공용물 사용권이라는 국가에 대한 권리가 사회적으로 합의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산림의 경우에도 국가소유의 땅은 사유화되지 않은 땅인데도 불구하고 그곳에 화전을 일구거나 울타리를 침으로써 자기 땅으로 만들 수 없다. 즉, 사물에 어떤 특정한 행위를 함으로써 노동을 투여한다고 하여도, 사회적인 승인 없이 독립적인 권리가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의 경제적 권리 분배 또는 경계 긋기와 무관하게 독립적인 권리가 성립된다고 보는 것은 사물과 권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착각이다. 어떤 사회에서 사람들이 전능한 소유권이라는 특정한 권리만을 창출하고 경계를 그어야 할 이유가 없다. 만약에 어떤 사회의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자원의 사용으로부터 배제되지 않을 권리라고 생각한다면, 전능한 소유권 대신 다른 권리를 창출하고 경계를 그어 분배할 것이다. 공공도서관의 사용권과 같은 것은 노직의 논리에 의하면 어디서 기원하는지, 왜 그 도서관 땅의 원래 주인이 모든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즉, 노직이 ‘무주물’이라고 본 것은 그 사회가 구체적인 권리를 창출하여 구성원들에게 어떤 도덕원리에 따라 분배하기 이전에는 사실은 ‘공유물’로 보아야 한다. 울타리를 친다는 행위는 그 행위와 권리를 연결시키는 사회적인 규범체계가 존재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없는 바다에 오줌 누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 사회적 규범체계를 통해야만 권리는 생성되고 구체적인 경계가 그어지고, 이전된다. 그리고 그러한 규범체계는 강박이나 굴종을 통해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당위 그 자체에 의해서 수용되는 것이어야만 한다. 어떤 사람이 사회에 존재하는 자원을 독점적으로 점유하는 실존적 양태를 갖추고서 힘으로 다른 사람을 억눌러 그 자원을 소유한다는 점을 인정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정의로운 소유권으로서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경제적 권리가 다수결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뜻이 아니라, 자연과 노동의 내재적인 성질-울타리를 친다, 열매를 딴다, 의자를 만든다-과는 다른 독립적인 사회윤리의 근거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회윤리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최고의 이념들을 같은 권리사태의 양면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최선의 해석에 의해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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