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는, 모두가 정치적 문제에 참여할 정도로 사회과학적 소질이 있고 지식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모두가 정치적 문제에 참여할 정도로 동기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고
셋째는, 모두가 정치와 행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정치행정이 (자본주의 발달에 따라) 단순화될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 전제가 모두 진실이라면, 우리는 마르크스가 그 단상을 구성했고 그 이후 인터내셔날의 사회주의자들이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발전시켰던 ‘피라미드형 직접 민주주의’가 매우 잘 작동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언제든지 소환가능하고, 구속된 위임의 권리만을 갖는, 순환직으로 아무나 공직을 맞는 그러한 대의원제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위 첫째 둘째 셋째는 모두 거짓입니다.
첫째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자연과학의 문제나, 미술작품을 만들거나 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이 소질과 규모의 경제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소질이 없으면 백날 고민해봐도 얼빵하고 논리적으로 말도 안되는 답만 낼 것이고, 그 문제에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지 않으면 잘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치적 문제에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면 그 밖의 다른 문제에는 어느 정도 무지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저 같은 경우만 해도 인문학-특히 고고미술학, 문학, 고대 역사 등-에 매우 무지하고, 자연과학 지식도 고등학교 수준에 멈추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당구, 스타크래프트, 고스톱, 포커, 볼링과 같은 많은 오락물들을 할 줄 모릅니다)
둘째로, 정치적 참여 대신에 다른 게 하고 싶은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직접 민주주의는 정치적 참여의 동기를 그만큼 더 불러일으키겠지만, 그게 ‘기회비용’이라는 절대 없앨 수 없는 비용을 없애지는 못합니다. 그 시간에 애인이랑 데이트를, 자연과학 실험을, 애 돌보기를, 책 읽기를, 바둑을, 야구를 하고 싶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균등하지 않은 정치적 참여는 직접 민주주의의 작동에 많은 문제를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셋째는, 완전히 거짓임이 사실로 판명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반론은 제가 민주주의 강의록에 더 자세히 설명한 바 있습니다. 어느 회였는지는 모르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직접 민주주의에 대해 자세히 비판한 장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회주의자들이 구상하고 있는 이상적인 민주주의는 실시될 수도 없고, 따라서 기존의 국가기구를 물리적으로 파괴한다 하더라도, 그것이랑 거의 빼닮은 국가기구를 다시 건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야말로 필요없는 파괴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 사회에서 환경 정책을 실시한다고 하여봅시다. 환경문제에 대해 정보를 조사하는 국가기관이 있어야 하고, 이것을 잘 조사해서 행정이 실현가능한 법률로 만드는 전문가가 있어야 하고, 이 법률제안을 토의하고 통과시킬 기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첫째 둘째 셋째의 제약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지금 존재하는 행정기구나 의회와 별반 다르지 않은 기구가 필연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먹고 살면서 그런 거 정보 수집하고 일일이 다 논의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기존의 국가기구가 필요하다면, 국가기구의 파괴라는 것은 사실상 허상을 좇는 헛짓이며, 괜히 낭비만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혁사들은 이 낭비를 매우 진지하게 추구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비에트’나 ‘노동자 평의회’ 같은 잘 짜여진 직접 민주주의 기구가 혁명과정에서 정치권력을 쥐게 되고, 이를 통해서 모든 정치나 행정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상상했습니다. 그런데, 혁명과정에서 이런 기구들이 권력을 쥐고 나서 잘 작동이 될려면, 평소에 이런 기구들이 국가의 일을 다룰 수 있도록 숙련되고 전문화되어 있어야 합니다. 별 생각도 안하던 사람들이 혁명적인 마음만 가지고서 갑자기 혁명시기에 급조된 조직에서 진지하게 복잡한 사회문제들을 다루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혁명적 의식을 일깨우는 데에도 필요하고, 평소에 숙련화도 해야 되니까, 혁명시기가 아닌 혁명의 준비 시기에도 이 기구들이 어떤 자치적 기능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혁명의 준비 시기가 자본주의 국가라고 한다면, 이 자본주의 국가에서 정치력은 공식적인 국가기관-행정부와 의회-이 쥐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공식적인 권한을 부여 받지 않은 노동자들의 모임에서 무엇이라고 결정해 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결국 노동자들이 혁명의 준비시기에 무슨 평의회니 소비에트니 하고 모여서 뭔가를 자치적으로 할려고 해도 아무런 구속력도 공동체에 갖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동기도 안생깁니다. 이는 초등학교 때 학급회의 시간이 그토록 지루하고 동기가 안생겼던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이런걸 번드르르하게 만든다고 해서 몇 번 안해보고 망할 것입니다. 실제로 노동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현실정치에서 얼마나 집단적 행동을 통해 교섭력을 발휘하느냐입니다. 노동자들이 같이 파업을 해서 입법가들이 노동시간단축법안을 통과시키건, 아니면 생리휴가 폐지를 철회시키건 말입니다. 노동자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공식적인 권한이 인정되어 있는 현실의 정치공간입니다.
대안적인 정치공간이 힘을 가지는 순간은, 바로 혁명적 시기에, 정치권력이 전환될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지되었을 때입니다. 그때야 대안적인 정치조직은 공식적인 권한을 부여받게 될 것이고, 살마들은 참여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급조된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결국 첫째 둘째 셋째의 전제를 부정하지 못하는 이상 지금의 국가기구나 의회와 비슷한 모습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 괜히 어렵게 대안적인 정치조직이나 공간을 만들어서 고생하기 보다 기존의 것을 그냥 활용하고 개선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저는 현실의 의회에 대해서 욕을 하고 희망이 없다고 하는 혁사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대안적인 정치공간은 의회가 공식적으로 권력을 잃을 때까지는 아무도 참여할 동기가 안생기는 것이고, 그래서 그때까지는 관심도 안생기는 것이고, 그만큼 전문화도 덜 이루어지는 것이고, 아마추어적이 되는 것이고, 영 허접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혁사의 문제점은 이것입니다. 정치적 의사결정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는 것, 대안적인 정치와 행정 조직의 구체적인 대안이 없다는 것, 결국 사실은 같은 일을 하면서 두번이나 빙빙 돌려 어렵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행의 계곡은 사민주의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 사회주의에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대안적인 사회주의의 상이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사민당이 그 대안적인 사회주의 상을 주장하면서 투표로 이렇게 가자고 선동할 때에 오히려 반대표를 찍는 국민들이, 같은 이유로 봉기하자고 하면 얼씨구나 하면서 대중파업하고 소비에트 건설할 것 같습니까? 혁사들은 21세기 자본주의 대의 민주주의 사회에 살면서, 종종 19세기의 전제 러시아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전제 시대에는 대중이 정치참여의 정력을 집중시키고 투자할 공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정치적 열망은 오직 봉기로만 표현됩니다. 그러나, 의회 민주주의 시대에는 정치참여의 정력을 집중시키고 투자할 공간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만약 바라는 바가 있으면 의회를 통한 정치참여를 통해 얼마간 정력을 투자하게 됩니다.
물론 자본주의 국가에서 의회는 중립적인 공간이 아닙니다. 국가는 자본주의에 포획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사는 모든 사람들-노동자들까지도 포함한-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국가만이, 급격한 경제체제 변환 결정으로 인한 외국자본의 이탈을 걱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노동자 대중도 걱정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지에서 두가지 선박을 놓고 싸움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본주의라는 배를 타놓고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볼때, 의회경로를 이용하여 사회주의로의 전환도 가능성이 매우 낮기는 하지만, 사민주의 ‘고유의’ 문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민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는 혁명적 사회주의도 갖고 있는 문제이고, 혁명적 사회주의는 ‘국가기구의 파괴와 대안적 정치공간 건설’이라는 필요없는 우회로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더 문제가 많습니다.
문제는 얼마나 작동가능하고 효율적인 유토피아적 청사진을 대중에게 인식시키고, 자본주의의 체제 속에 그 실례들을 뿌리내리고, 조금씩 준비를 해나갈 수 있느냐입니다. 그리고 전환의 시기에 대중들의 지지를 어떻게 획득해낼 수 있을까입니다. 그것은 알랙스 켈리니코스처럼 노동대중은 ‘성찰을 통합 집단의식’을 획득했기 때문에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엄청난 희생할 준비를 갖출 수 있다고 막연한 거짓말을 떠벌림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첫째로, 얼마나 ‘전환의 비용’이 들지 않고, ‘이행의 계곡’을 삽으로 메꿔 평평하게 만드는, 그러한 체제전환의 방법을 제시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외국자본의 급속한 이탈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세계의 외환통제 공조체제의 실시, 자본주의 국가의 군사적 침략과 이로 인한 사회주의 사회의 군사화를 막기 위한 세계 평화체제의 구축과 같은 세계적 차원에서의 준비의 문제, 시장사회주의와 같이 기존의 경제기구들을 최대한 이용하고 소유권에 대한 권리 외에는 별 경제체제의 변화가 없는 안의 마련)
둘째로는, 얼마나 이러한 사회주의 상에 대해서 대중들이 진지하게 지지하며 정치참여 속에서 정책으로서 관철시키느냐 입니다. 이것은 진지한 대중교육 공간과, 대중의 개혁적 정치참여 경험을 통한 성찰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일군의 봉기주의자들이 ‘사회주의자요’라고 한마디씩 하고 들어가고 전단 뿌리고 막 잡혀가는거 신문에 나가고 하다가, 갑자기 불황 오니까 봉기하자고 대안도 없이 말하면 누가 들어주겠습니까? 스웨덴에서 임노동자 기금 문제에 대한 신정완씨의 분석은 이 문제가 얼마나 어려운지, 교육과 정치참여에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 두 가지의 과업을 혁사가 사민보다 더 잘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혁사는 사민보다 더 불필요한 길을 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 이유는, 현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못한 결과를 첫째와 둘째의 과업의 문제로 돌리지 않고, ‘의회’라는 정치참여 형식에 돌렸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속편하긴 하지만, 학문적으로 매우 엉성하고 불철저한 태도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 두가지의 과업을 얼마나 잘 수행하느냐입니다. 첫째로는, 계속적인 연구활동과 실험을 통해서 작동가능하고 효율적이며 사회주의자들의 목표-정치적 참여, 물질적 복지, 자아실현의 평등한 기회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대안체제와 그로 가는 스무스한 체제변환의 기술적 경로를 개발하는 일입니다. 둘째로는, 이 대안적 사회의 청사진을 교육하고 알리는 일입니다. 셋째로는, 근본적인 정치변환이 더 용이하도록 의회중심의 정치구조를 개혁하는 일입니다-이는 곧 직접 민주주의 요소를 가미한 심의 민주주의의 도입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세가지 과업을 명확하게 인식하는 정당을 발전시키는 일이 소중할 것입니다.
저에게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현실사회주의체제, 즉 계획사회주의의 실패의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효율적이면서도 평등한 경제체제의 대안은 무엇인가? 모든 국가들이 지금의 선진국 수준으로 산업의 발전을 할 것인가? 국가간 평등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혁명시 외국자본의 이탈은 어찌할 것인가? 환경 오염과 자연고갈 문제는 어찌할 것인가? 줄어들지 않고 있는 군사적 긴장완화와 군사 강대국들의 전횡은 어떻게 다룰 것인가? 사회주의 전환 시 외국의 개입 문제를 어찌할 것인가? 사회주의 사회의 정치구조와 조직은 어찌할 것인가? 과학의 개발 방향은 어떻게 할 것인가? 자아실현에 맞는 교육은 어떻게 실시될 것인가? 사람들의 성욕 만족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학력차별과 직무간 분단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19세기 봉기주의자들에게 이와 같은 질문들은 ‘혁명적 과정’에서 자연히 해결될 것으로, 현실사회주의 문제들은 모두 ‘그것은 사회주의가 아니었다’는 말장난으로 해결되는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적 견해의 차이가 아니라, 생각을 하고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들이 이와 같은 과업에 대해 명확하고 구체적인 해답을, 사민주의보다 더 나은 해답을 제시하지 못할때, 그들은 래디칼한 몇가지 언명으로 구성된 정치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사민주의자들과 대결하는 방식을 통해, 일생에 걸쳐 스스로를 세뇌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