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제 폐지론의 한 논거
(1) 유형의 분류
어떤 미치광이 연쇄살인마의 공격을 받고 있고 그 공격을 벗어나는 방법이 그를 죽이는 것 밖에 없다면 정당방위를 하고, 그를 죽이는 것에 대해서는 처벌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의 죽임을 정당화하는 것이 곧 다른 상황에서의 죽임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비약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당방위 제도를 옹호하는 사람이 예비살인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안락사의 경우, 사형의 경우, 정당방위의 경우 각각의 구조를 달리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근본주의적 태도로 <생명을 헤쳐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명제만을 들고 나갈 경우, 정합적인 규범체계를 세울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근본적 명제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더 이상의 설득을 목적으로 하는 논증을 할 수 없다는 문제점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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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사형제 찬반의 문제는 생명을 빼앗는 문제 일반에 대한 포괄적인 명제 하나로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합당한 규범을 어긴 사람에게 그에 대한 응보로서 생명을 빼앗는 것이 정당화되는가?”라는 특수한 유형의 문제에 천착하여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통상 사형제에 찬성하는 대중의 언술 속에서 <생명이 다 소중한걸까요>라는 언술은 표현이 그러할 뿐, 기본적으로는 응보의 태도(A)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원문 전체의 취지상 나타나 있습니다) 극악한 범죄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의 삶을 사회가 평가하여 그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는 주장(B)은 전혀 포함하지 않고 있으므로, 후자(B)를 논박함으로써 전자(A)를 함께 논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2) 오판과 악법 -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규범적인 문제
이 글에서는 오판의 문제와 악법에 의한 처벌이 사형제와 관련된 형사사법체계에 던지는 근본적인 문제만을 우선 다루어 보겠습니다. 저는 이것이 순수히 기술적인 문제라고 보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그것이 <무조건적 생명존중>의 도그마로부터 출발하여 모든 유형의 생명 박탈에 동일하게 적용하는 주장에 심정적인 공감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포괄할 수 있는 규범적인 논지 중 하나라고 봅니다.
모든 형사재판에는 오심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오심은 판사의 증거능력, 증거력 판단의 문제에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경찰관의 수사과정, 감정인의 감정의 정확성 여부, 증인의 완벽한 허위진술 플랜, 검사의 기소과정, 변호사의 능력 등등 많은 과정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문제입니다. 최근에 미국에서도 LA 경찰이 선량한 시민을 죽여놓고 흑인 범죄자에게 이를 뒤집어 씌운 체계적인 스캔들이 발각된 적이 있고, 또한 DNA와 같은 과학수사로 보이는 증거들도 경찰관이 마음만 품으면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어(물론 그 경찰관은 100%의 심증이 있어서 그 놈을 어떻게서든 잡아 넣어야 겠다는 오직 공익적 일념에서만 그렇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강간으로 30년 형을 받은 사람이 8년 뒤에 유전자 검사에서 조작이 있었다는 것이 진범이 잡히고 나서 밝혀져 풀려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심>이라는 제도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재심을 통해 무죄가 밝혀지면 형사보상을 받게 됩니다. 즉, 형사사법제도 내에 <오심이 있을 수 있다>이라는 인식론적 문제가 규범적으로 통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형제도를 형벌체계 내로 도입하게 되면, 그 순간 형사사법제도는 다른 형벌을 받을 때 당연히 제도적으로 해소되어 있는 인식론적 문제점을 그대로 놓아두게 됩니다. 이는 법구조의 통합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통합성은 한 사회의 법제도나 법해석이 규범적 정당성을 가지기 위한 요건입니다. 주민등록번호가 짝수인 사람은 낙태를 해도 합법이고, 홀수인 사람은 낙태를 하면 불법이라는 법은, 그것이 낙태반대자와 낙태찬성자의 견해를 절충한 타협안이며, 각각의 입장에서 <아예 못하는 것보다 낫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하더라도 통합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정당성을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보통 인식론적으로 <절대 오심이 아니다>라는 확신 비슷한 것을 가지게 되는 때는 바로 피고인이 자백했을 떄입니다. 이로써 두가지 문제가 생기는데, 첫째는 자백강요의 위험이고 둘째는 자백하지 않은 경우와의 형평성 문제입니다. 보통 자백은 수사와 공판절차에 대한 협조로 양형에 긍정적으로 판단되는 요소입니다. 그런데 자백을 근거로 인식론적 확신을 기초지우고, 사형을 때리고, 반면에 자백을 하지 않고 무죄를 주장하는 사람은 그러한 무오류성의 주관적 확신을 주지 않아 무기징역을 내린다면 이는 양형과 관련한 부정의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남한에서 사형판결을 내린 경우 중, 범죄자가 자백하지 않은 경우도 여럿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남편을 죽인 죄로 아내가 기소되었는데, 아내는 간통하던 남자가 교사했다고 증언하고는 감옥에서 자살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간통남은 그 유일한 증거로 사형을 받았지요. 물론 그 남자는 판사와, 수사관과, 검사에게 모두 귀신이 되어 나타날 것이다, 나는 억울하다고 주장하며 처형장으로 향했습니다. 이때 만일 그가 자백을 했다면, 무오류성의 확신이 더해져서, 사형이 정당한 것이 되고, 자백을 하지 않은 그 상태에서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그러한 비일관성 자체가 잘못된 것이겠습니다.
이와 더불어, 통상 또한 기술적인 문제로 드는 <정치범의 사형 가능성> 문제 역시 규범적인 논지인 것입니다. 정치범에 대한 사형은 더 널리 보아 <악법에 의한 사형>으로 볼 수 있는데 여기서 법이란 입법뿐만 아니라 사법살인과 같이 의도적인 증거능력의 부정한 평가나 법리왜곡을 통해 이루어지는 법해석의 결과로서의 법도 포함하는 의미입니다.
즉, <악법에 의한 사형> 역시 우리의 헌법적 규범 체계 내에 통합될 수 없습니다. 현재는 민주주의 사회이지만, 이 사회가 일부 집단의 쿠데타와 같은 것으로 일시적으로 독재사회가 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하고, 헌법전문에도 그리고 그 전문을 해석하는 헌법이론가들도 저항권을 이론적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즉, 헌법구조 내에서는 독재집단의 집권과, 그것을 뒤집어 엎고 규범적으로 민주사회를 복원하는 구상이 통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 헌법에 위반되는 악법이 존재한다면, 그 악법은 헌법재판소에 의하여 위헌으로 판결되고, 위헌으로 판결된 처벌조항에 근거하여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은 재심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헌법재판소법 제75조제7항) 즉, 여기서도 형벌을 규정한 법 자체가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오류성의 가정이 사법체계 내에 체계적으로 통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독재 정권이 아니라도 어떤 사회는 다수에게는 대체로 정의로우면서 소수에게는 커다란 부정의를 부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민권운동 이전의 흑인에 대한 태도가 그러하였고, <아버지의 이름으로>라는 영화에도 나오듯이 IRA 테러범의 혐의를 받고 있는 자에 대한 영국사회의 태도가 그러하였습니다. 길포드3인방으로 불리는 이 영화의 주인공은 결국 재심을 통해 풀려나왔고 명예를 회복했지만 영화의 말미에 나오듯이 감옥에서 죽어버린 아버지는 <여전히 유죄>인 것입니다.
어떤 정권이 독재정권이거나 소수에게 현저히 부정의한 체제일 때는, 그 당시에는 사법심사제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힘든 상황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헌법소원이나 위헌법률심판을 통해 위헌판결을 끌어내어 재심을 받는 것은, 사법심사제도가 정상적으로 복구되었을 때 그 이전의 부정의를 형식적으로나마 교정할 수 있음이 제도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독재정권이 몰수한 재산은, 민주화된 이후에 원래의 소유권자에게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교정의 원칙이 사형의 경우에는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이 또한 명백합니다. 불의하게 사형을 집행당한 사람에게는 저항권의 행사도, 헌법재판소의 인용판결도, 재심도 그에게 가해진 불의를 <법적으로라도> 교정시킬 수 있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 것으로, 이 사회의 헌법구조는 통합성을 희생함으로써 그러한 처지의 사람들을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물론 독재정권이 버젓이 존재하는 법을 개폐하여 사형제도를 새로이 도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기술적인 문제>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현재 정당성을 부여하고 살아가는 법체제는 그러한 기술적인 문제야 어쨌든, 정합적이고 일관되게 부정의를 복구할 것을 예정해야만 합니다. 또한, 실제적으로 보아도 사형제에 대한 이런 통합적인 측면에서의 규범적인 논지가 많은 국민들에게 공유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사형제도를 새로이 도입하는 것은 독재정권에게 상당한 부담이 될 것이고, 헌법개정을 통해 이점이 명기되었을 때는 초절차적 조치를 통하지 않고서는 이것이 어려울 것입니다.
(4) 결론적으로, 통상 기술적인 문제이며 부차적인 논변으로 치부되던 <오판의 문제>와 <악법에 의한 사형>의 문제가 사실은 규범적인 문제이고, 우리가 통합성 있는 법구조만이 정당성을 갖춘 법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이것은 충분히 사형제도를 폐지하여야 하는 강력한 규범적인 논거로 재구성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가석방과 사면 없는 종신형을 도입함으로써 사형제를 대체해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