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탁고 - 탁구고백법>이라는 일본 만화책이 나왔다.
이 만화는 공동체주의자들의 허황된 주장을 잘 지적해주는 교보재이기 때문에 여기에 이렇게 기록해 둔다.
'탁고'는 '탁구고백법'을 줄인 말이다. 탁구고백법이란 무엇인가? 이 말은 이중적 의미를 가진다.
(1) 하나는, '법'(law)의 의미로, 일본 총리가 중국에 매번 탁구를 지자, 중국을 이길 만큼 온국민이 탁구를 잘 치도록 만들기 위해 만든 법이라는 뜻이다. 이 법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20살이 되기 전의 미성년들, (주로 청소년들)은 이성과 사귀기 위해서는 탁구 시합을 신청하여 그 탁구 경기에서 이겨야 한다는 법이다. 만약 이 법을 어기고 탁구 시합을 해서 이기지도 않고 상대의 신체에 터치를 하게 될 시에는 감시자의 벌이 내려진다. 주로 전기 충격이나 무자비한 폭행이다. 감시자들은 항상 우리 주위에 있으며 신체 접촉의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2) 다른 하나는 위와 같은 법law에 따라 탁구를 통해 고백하는 법(way)을 말한다. 그러니 탁구고백법에 따라 고백하는 방법이 탁구고백법이다.
물론 이 법이 통과된 결과 일본 국민들은 무지막지하게 탁구를 잘 치게 된다. 이런 법이 통과되는 사회는 공동체주의적 사회(communitrian society)로, 공동선(common good- 이 경우에는 탁구를 잘쳐서 국위를 선양한다)을 증진시키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정책이라면 개인의 권리와 상관없이 통과시킬 수 있는 것이다. (애초에 개인의 권리는 다수나 공직자가 승인한 공동선과 별개로 설정되지 않기 때문에 권리를 침해한다고조차 말할 수 없다)
이 탁구고백법에 의해 한 쪽이 탁구경기를 신청하면 상대방은 그 경기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둘 다 좋아하는 경우라면 문제가 없다. 탁구를 잘 치는 쪽이 경기를 신청하고 이기면 공식 커플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한 쪽은 짝사랑 하지만 한 쪽은 사귀고 싶어하지 않는 경우다. 그럴 경우에도 탁구를 신청해서 신청한 쪽이 이기면 사귀게 된다. '강제로 사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탁구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과 사귀기 위해서만 잘 쳐야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신체의 자유를 방어하기 위해서도 탁구를 잘쳐야만 한다. 매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한 번만 방어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몰려드는 (마음에 들지 않는) 구애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고도의 탁구 도사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재능 있는 자의 노예 상태(slavery of talented)다. 여기서 '재능'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천부적 자질(natural endowment)는 신체적으로 매력적임(attractiveness)이다. 자유주의 사회에서 신체적 매력은 온전히 그 사람의 것으로 취급된다. 그 매력을 활용하여 누구와 사귀건, 사귀지 않건 그 사람의 자유다. 존 롤즈의 질서정연한 사회(well ordered society)는 신체적 매력이 뛰어난 사람들에게, 가장 신체적 매력이 낮은 사람들과 사귀라고 강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양립가능한 자유에 관한 정의의 제1원칙이 최우선 원칙이고,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차등 원칙의 적용을 이 경우에는 개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샌델은 롤즈의 차등 원칙은, 롤즈가 사실상 공동체 내의 구성원들을 묶어서 생각하고 개인주의를 버렸기 때문에만 가능하다고 왜곡한다. 즉, 개인의 정체성은 개인 독립적으로 구성되지 않고 공동체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에 사회 전체의 재능의 풀(pool)은 공유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정말 롤즈가 이런 식으로 생각했나? 그렇다면 롤즈는 재능있는 자의 노예 상태를 지지했을 것이다. 재능 공유제 사회에서는, 아름답고 멋진 사람은 그 사회의 누구라도 사귀자고 하면 사귀어야 한다. 거기다가 아무나하고 사귀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선으로 선정된 탁구라는 탁월성을 성취한 사람과 사귀는 것이라면 더 할 나위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을 발명할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자신은 놀거나 시인이 되고 싶어도 강제로 과학 연구에 매진해야 한다. 변호사나 회계사, 의사들은 자신의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을 바쳐 일만 해야 하며, 그렇게 해서 번 돈을 최소수혜자를 위해 줘야 한다.
우리는 원초적 입장의 사람들이 천부적 재능의 '분포'(distribution of natural endowment)를 공동 자산(common asset)으로 간주한다는 합의를 오해해서는 안된다. 재능이 공동 자산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재능의 사람들 간의 다양함과 차이가 공동 자산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샌델이나 노직이나 이 부분을 완전히 오해해서 재능의 공유제라고 계속 자기 오독을 고집한다. 사람들이 완전히 틀렸다고 지적해줘도 막무가내다. 귀가 막힌 듯 하다. 나의 아름다움, 나의 독똑함이 '사회에 속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나의 노력과 무관하게 형성되었으니 다른 사람에게 다 나눠줄 의무가 있다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내가 남들보다 '더' 똑똑하거나 '더' 아름다운 것에 대해 응분을 가지지 않는다는 도덕적으로 자명한 사실을 롤즈는 지적했을 뿐이다.
공동체주의자들의 정치 공동체에서는 이런 탁구고백법이 통과되고 시행되지 않을 '권리'에 대한 논변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탁구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거나, 연애에 대한 공동체의 공유된 이해를 위배한다는 논변만이 존재할 것이다. 결론은 같다 하더라도 논증은 완전히 다르다.
한편, 이 탁구고백법에 의해서 끝없이 자신의 신체를 방어해야 하는 매력 있는 자의 상태는 또 다른 시사점도 가지고 있다. 선호를 무차별적으로 결집해서 그 결론이 무엇이든 실시하는 공리주의 사회에서는 외적 선호(external preference)의 만족을 내적 선호(internal preference)의 만족과 똑같이 중시한다. 공리주의의 틀에서 보면 '저 사람이 나와 사귈 수 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으면 한다'는 외적 선호와 '나는 내가 사귀고 싶은 사람이 아니면 사귀기 싫다'(내적 선호)는 선호를 차별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좀 더 일상 정치에 가깝게 보자면 '흑인들이 투표권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선호와 '나는 공연을 좋아하니까 우리 지방자치단체에서 공연관람장을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다'라는 선호가 똑 같이 취급되는 것이다.
탁구고백법은 외적 선호를 관철시킬 수 있게 한다. 외적 선호의 관철은 노예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공동체주의 역시 외적 선호에 대하여 아무런 방비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동체주의는 외적 선호의 관철이 공동체의 안정적 탁월성을 보장하기 위한 필수적 조건이라고 한다.
결국 역사적으로 형성된 노예들이, 그 노예의 역사를 성찰의 권위적 지평(authoritative horizon)으로 바다들이고 노예들 자신의 관념 속에서 끝없이 노예로서의 자아를 발견하며, 계속해서 노예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 공동체주의의 논지다. 그렇지 않다고? 그렇다면 그들은 모두 헛소동을 벌인 것에 불과하다.
2011. 10. 9.
이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