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꼼수다의 사회적 기능은 무엇이고 한계는 무엇인가?

“나는 꼼수다”에 대하여 호의적 의견과 부정적 의견이 분분하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새로운 시도를 섣불리 비판하거나 무조건적으로 옹호하기 보다, 그 활동에서 새로운 점이 무엇인가, 그 새로운 점이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신중한 평가를 할 필요가 있다.

나꼼수가 잘 수행할 수 있는 사회적 기능, 그리고 초기 나꼼수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원인이 되기도 했던 기능을 살펴보면, 그것은 바로 "부패에 대한 집중적 조망" 기능이다. 부패를 조망하는 데에는 별달리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지 않는다. 기존의 분절화된 '부패에 관한 기초사실'들을 하나로 잘 모아서 재미있게 들려주면 된다. 그 다음에는 청취자들이 그 기초사실들을 기초로 경험칙에 비추어 일정한 결론을 추론하게 된다. 그리하여 분절화된 상태에서나, 몇 가지 중요한 정보들이 빠진 상태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부패의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러한 추론은 부패에 대한 사법적 단죄를 가져올 수 있는 입증의 정도를 획득하지는 못한다. 혹자는 그러한 이유로 나꼼수의 부패조망 기능을 폄훼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높은 기준을 설정해 놓고 이를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해서 정치적 평론으로서의 그러한 추론을 의미 없는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사법적 단죄는 매우 고도의 입증책임을 요구하지만, 어떤 정치집단이나 정치인을 신뢰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하여 그 기초자료로 삼는 정보가 그러한 고도의 직접적인 입증책임 기준을 만족시키는 추론에만 한정해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가상적 사례를 생각해보자.

A는 인체의 건강을 연구하는 학자다.

A는 담배회사가 피고인 손해배상 소송에서, 전문가증인으로 나서서 담배가 몸에 나쁘지 않다는 연구결과를 증언한다.

A가 일하는 연구소는 담배회사로부터 C, D, E 기관을 통하고 통하여 많은 연구자금을 지급받았다.

A는 증인여비로는 이례적인 금액인 8백만원을 담배회사로 지급받았다.

B는 그 담배회사의 직원이었는데, 담배가 몸에 나쁘다는 회사의 자체 연구보고서를 빼돌리려다가 보고서는 그대로 뺐기고 퇴근하던 길에 12시간이나 감금 폭행을 당한 뒤 회사에서 잘렸다. B의 해고무효확인 소송은 현재 진행중이다. B는 자신을 감극 폭행한 괴한들이 회사의 사주로 그리하였다고 경찰에 수사 의뢰하였으나 경찰은 수사할 단서가 없다는 이유로 사실상 수사 종결한 상태이다.

B는 6일 전에 길을 가다가 괴한으로부터 칼에 찔렸다. 그래서 B는 지금 병원에서 치료 중이다.

B는 예전부터 회사로부터 협박 전화를 몇 번 받았으나 당시에는 녹음을 해두지 않아 B의 진술 이외에는 회사가 협박 전화를 했는지를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공중전화에서 B의 전화로 걸려 온 전화가 몇 통 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

담배회사에 불리한 전문가 증인으로 나선 C가 속한 연구소는 국책 연구기관인데, C는 재계약을 거부당하였다. 그의 연구실적은 상당한데도 말이다. 그 국책연구기관의 소장은 정부의 수장을 당선시키는데 공로를 세운 공신이고, 정부의 수장은 담배회사CEO와는 같은 학교 동문이자, 같은 교회 출신이다. 』

자, 이러한 사실이 문장별로 뉴스1, 2, 3, 번호가 붙여지고 한 데 모이지도 않고, 노출도도 들쭉날쭉 달리하여, 분절화되어서 배포된다고 하였다고 해보자. 더 나아가 그 담배회사가 광고에의 영향력이 매우 커서 기자들이 확인한 사실들도 데스크에서 잘려서 아예 발표되지 못하는 중대한 기초사실도 있다고 했을 때, 대중들은 이 사건에 관하여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고 따라서 사안의 심각성도 알지 못하게 된다. 물론 위와 같은 사실들로 부터 담배회사의 CEO를 살인교사 미수, 위증교사죄, 소송사기죄에 대하여 유죄 판결을 내릴 수는 없다. 재판을 100번 열어도 그렇게 될 수는 없다. 살인교사 판단을 하려면 최소한 정범이 잡혀야 하고 그 정범과의 연결관계가 명확한 증거(정범의 진술이나 정범에게 돈을 송급하였다는 등의)에 의해 드러나야 한다. 위증교사는 더욱 어렵다. 왜냐하면 A가 증언한 것이 거짓이라고 입증하는 것 자체가 사법적 판단으로는 어렵기 때문이다. 담배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 같이 상당히 명백해 보이는 부분조차도 깊이 파고 들어가면 연구의 결론이 분분해질 수 있으며 미묘한 추측에 따라 그 영향의 정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학계에서 A의 연구결과는 설득력이 없다는 판단은 광범위하게 내려질 수 있으나, A가 위증했다고 사법부가 결론을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소송사기죄 역시 회사가 내부적으로 생산한 문서와 전문가증인을 동원하여 거짓말을 한 것을 밝혀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담배의 규제에 관한 정치적 판단이나, 위 담배회사의 CEO가 정치인으로 나섰을 때 그에 관한 정치적 판단을 할 때에는 이러한 기초사실로부터 매우 개연성 있게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결론을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추론이 시민들 사이에 유통되는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는 부패의 자유도(부패를 저지르는 사람들의 운신의 폭)가 달라진다.

문제는 이런 추론이 시민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유통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보통의 신문들은 그날그날의 뉴스를 전형적인 정보원(기업, 국가기관, 정당)으로부터 받아적는 것에 그치고, 하나의 스토리를 이루는 부패의 기초사실들을 집약하는 내용을 보여줄 지면이 없기 때문이다. 주간지에는 그런 지면이 있다. 그러나 주간지 중에서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인 주간지는 손에 꼽을 정도이고(한국에서 대표적으로 그런 주간지는 시사IN을 들 수 있다) 그 구독자 수는 한 줌도 안될 정도이다. 게다가 이런 주간지를 구독하는 사람은 민주주의에 기여한다는 심정으로 구독료를 내고 있는 것이며, 실제로 뉴스가 겉으로 보기에 공짜로 생산되고 있는 사회에서 구독료를 내며 자본과 권력에 독립적인 주간지를 꾸준히 사서 본다는 것은 부패를 감시하는 데 필요한 시민의 수보다 훨씬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일일 수 밖에 없다.

뉴스는 물론 공짜로 생산되지 않는다. 보통의 뉴스는 광고비에 의해서 비용을 지원받아 생산되며, 이 광고비는 모두 제품과 용역의 가격으로 전가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광고에 의한 뉴스의 생산은 자본과 국가권력에 신문을 매우 의존적으로 만든다. 따라서 광고비에 의해 뉴스를 생산하는 사회는 실제로는 공짜로 뉴스를 얻지 않으며(왜냐하면 제품 가격으로 전가되니까), 또한 권력에 편파적인 정보를 생산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큰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야구경기나 축구경기의 비용이 광고비에서 충당되는 것과는 달리, 뉴스 생산 비용이 광고비에서 충당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사회에 중대한 손실을 가져오는 이유다.

그런데 정보에 대한 욕구는 보통의 제품의 욕구와 상당히 차별화되는 것이, 어떤 류의 정보를 접하지 아니하면 그 정보에 대한 욕구 자체가 아예 생성되지 않을 가능성이 점점 높아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국가권력과 자본에 의해 통제된 편파적인 정보에 길들여진 사람은 그에 맞춰서 자신의 세계관을 형성하기 마련이며, 그 세계관을 확증시켜주는 정보만을 찾기 때문에 그 세계관을 수정해야 하는 심리적 비용을 수반하는 정보를 돈을 주고 본다는 것은 더욱 생각하기 힘들게 된다. 이러한 사태는 인터넷 포탈을 통해서 자신이 뉴스를 선택함에 따라 더욱 심해진다. 이로써 자신의 세계관을 확증시켜주는 정보만을 구독하는 성향은 자기강화적인 노선을 따르게 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부패에 대한 정보를 주간지가 실었을 때 그 정보는 그리 흥미롭게 읽히지 않는다. 부패는 늘상 많은 이들이 저지르는 일이며, 사회적으로 소통력이 크지 않은 주간지에 부패에 대한 정보가 실렸을 때, 그것을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논의하고 공분할 수 있는 통로도 그만큼 적어지게 때문이다. 그리고 주간지에 실리는 부패 정보는 글 형태로 되어 있어서 따라읽기가 힘들며 대충 훑는 형태로 넘어가기 마련이다. 정보 역시 네트워크의 자기강화적 성격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재화이다. 인셉션처럼 빅 히트를 친 영화가 더욱 매력적으로 되는 까닭은 주위 사람들이 그 영화를 보아서 그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더욱 더 재미있게 된다. 반면에 아무도 보지 않는 존 롤즈의 저작을 읽는 사람의 외로움은 더할 나위가 없다. 존 롤즈의 정치철학으로서의 가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존 롤즈를 읽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부패에 관한 기초사실의 정보 역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네트워크의 소통 구조 속에 있을 때 더 자세하고 세밀하게, 그리고 짜임새 있는 이야기 구조 형태로 유포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나는 꼼수다>는 여러 모로 획기적이고 기발한 기획에 따른 사회적 현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을 전적으로 기발한 아이디어와 기획 그 자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이처럼 광범위한 사회 현상이 된 것이 전적으로 그 참여자들의 천재적인 기획력에서 나온 결과는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적 추세를 잘 잡았다는 것 역시 그 능력의 일부이고 게다가 좌담을 진행하면서 사람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는 그만한 대중적 매력을 지닌 사람들이 흔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들 참여자들의 고유한 속성이 수행했던 역할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 그 점은 차치하고, 위에서 그린 ‘분절화된 부패 정보의 들쭉날쭉한 사멸’에 상치되는 새로운 현상의 특성을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나는 꼼수다>는 독립적인 정보 생산자다. 그들은 어떤 기업에서도 광고를 받지 아니하며, 커다란 조직체가 아니며 프로페셔널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자본이나 권력에 의해 밥줄이 직접 끊기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특히 <나는 꼼수다>가 유명해져서 그 참여자들의 책이 잘 팔리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이로써 사람들은 이러한 유용한 정보를 생산해낼 때 보상을 받는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고, 이것은 앞으로도 향후 비슷한 독립적인 정보 생산자들의 탄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둘째로 <나는 꼼수다>는 권력자의 비리를 캐는 일이 직업의 중요한 일부인 사람들 둘(국회의원, 주간지 기자)과, 재미있게 추론을 도출하며 논평을 할 수 있는 사람들 둘(정치․문화평론가, 교수)로 이루어져, “하나의 스토리를 가진 이야기 구조”로 부패의 기초사실들을 집적하여 보여준다. 따라서 이 프로그램 이전에는 BBK, BBK 하지만 도통 BBK가 무슨 회사인지, 왜 그것이 문제인지, 어떤 종류의 부패인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도 몰랐던 사람들도 이 프로그램을 듣게 되면 머리에 부패의 밑그림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더군다나 이 프로그램을 들은 사람들이 홈페이지나 블로그에 내용을 포스팅하기 때문에, 기초사실을 까먹더라도 언제든지 검색을 통해 다시 그 내용들을 확인해볼 수가 있게 된다. 셋째로, <나는 꼼수다>는 본론과는 별로 상관없는 자기자신에 대한 자화자찬 등 웃긴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이것이 상당한 엔터테이먼트 요소를 준다. 사람들은 잘 알려진 인물들의 허랑하고 격식 없는 모습을 보기 좋아하며, 이러한 요소를 즐기는 성향은 이미 <무한도전>이나 <1박2일>, <영웅호걸> 등을 통해서 단련이 되어 온 바이다. 아무나 정보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가 잡힌 ‘그들이’ 생산하는 정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듣게 된다. 넷째로, <나는 꼼수다>가 초기에 집중한 것은 가카라는 권력자 개인의 커다란 악덕을 부패의 밑그림을 구성하는 기초사실들을 집적하고 폭로하는 일이었는데, 이것이 현재 정권 말기에 먹고 사는 일에 어려움을 느끼는 많은 시민들의 분노에 적확하게 부응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가쉽을 좋아한다. 그리고 미덕에 대한 가쉽보다는 악덕, 수치스러운 일에 대한 가쉽을 좋아한다. 물론 모든 가쉽이 민주주의에서 의의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일전에 나는 지인으로부터,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급하게 결혼을 하게 된 어느 배우가 실은 탄자니아의 국왕과의 사이에 흑인을 낳았다는 가쉽을 들었는데 무척 충격적이었지만 그것이 민주주의에 기여하는 바는 없음은 물론 나나 그 이야기를 해준 사람의 삶에 일고의 영향도 없는 신빙성도 없는 정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재미있기 때문에 이런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널리 퍼진다. 그만큼 사람들은 ‘남 이야기’를 하기 좋아한다. 심지어 어떤 학자들은 인류 언어가 이토록 정교하고 풍부하게 된 것은 부족 사회였던 시절 서로 뒷담화를 깐 덕택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따라서 무미건조한 정보의 나열이 아니라 캐릭터가 잡힌 매력적인 중년 아저씨들이 껄껄거리고 웃는 가운데 이야기 형식으로 기초사실을 제시하고, 한 인물에 대한 가쉽의 형식(꼼꼼하시다)으로 그것이 추론이자 가설이라는 점을 밝히면서도 부패의 밑그림을 정리해서 제시하는 일은 민주주의적 감시에 필요한 부패에 관한 정보 전달에 엔터테이먼트의 요소를 매우 효과적으록 결합시킨 탁월한 성취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매체는 SNS와 인터넷으로 훨씬 광범위하게 연결된 개인들의 사적 ․ 사회적 관계망을 통해 널리 선전될 수 있게 된다. 20세기 같으면 직장 생활을 동일한 공간에서 하던 친구에게나 추천할 수 있던 것이, 이제는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에서 구축된 관계망 구조 내에 속하기만 하면 광범위하게 추천할 수 있던 것이 된다. 이로써 초기의 재미가 확실하게 보장되었을 때, 광범위한 청취자를 확보할 수 있고, <나는 꼼수다>를 들었다는 것 자체가 다시 그 사적 ․ 사회적 관계망을 즐길 수 있는 재료가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위 가상적 사례에서 만일 대중들이 <나는 꼼수다>와 같은 매체를 가졌다면 담배회사의 사업을 규제하고 그 담배회사 CEO출신의 정치인에 대한 분노를 형성하는 정치적 자원을 훨씬 쉽게 가졌을 것이라는 점만 보아도 이러한 현상이 가지는 새로운 의미는 명백하다.

이제 나꼼수의 한계와 그 전망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나꼼수의 한계는 나꼼수를 성공시켰던 요소들 속에 존재한다. <나는 꼼수다>는 청취자에게 특별한 전문지식이 전제되어 있을 것을 요구하지 않으며 새로이 민주주의 시민으로서 필요한 지식을 훈련하도록 요구하 지도 않는다. 20세 이상의 시민이라면 누구나 갖추고 있을 만한 ‘기초 사실로부터 개연성 있는 추론’을 할 수 있는 능력만을 필요로 할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추론 능력을 일상적인 인간관계나 직장 생활에서 늘상 활용하고 있으며, 당연히 새로운 훈련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제시된 기초 사실이 증거가 있는가에 관한 확인 뿐이다. 그리고 <나는 꼼수다>는 명예훼손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음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확인은 그 구조 자체 내에서 이루어질 수 있게 된다. 또한 기초 사실에서 제시된 가설이나 추론이 적정한가 여부는 이러한 상식 수준에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사회의 시민들이 갖추고 있는 지식 수준은 심의적 민주주의에 충실히 참여하기에는 여전히 낮은 편이며, 이러한 사태는 충분히 개선될 수 있다. 그러나, 껄껄껄 웃는 좌담에서 이러한 개선을 꾀하기는 어렵다. 필요한 것들은 고도로 구조화된 규칙들의 세계이며, 이 규칙들을 뜯어보고 논증하는 능력은 주의를 기울인 훈련을 통해 습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훈련이 종래의 형태보다 더 즐거울 수 있느냐는 가르치는 사람들의 역량에 달린 문제다. 그러나 <나는 꼼수다>의 참가자들이 그러한 ‘교육’에까지 나갈 수 있는 역량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황우석 사건과 D-War 사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체결한 한미FTA에 대한 평가에서 보듯이 참가자들 중 일부의 사실과 규범에 관한 정교한 판단 능력은 높은 신뢰를 부여하기에는 어려운 수준이며, 그 중 누구도 (정치문화나 정치전략에 대한 논평이 아니라) 실질적인 정책적 ․ 원리적 쟁점에 대하여 경청할 만한 이론을 제시해 온 적이 없다. <나는 꼼수다>가 만일 누구나 갖추고 있는 능력을 넘어서는 문제, 첨예한 정치적 ․ 사회적 쟁점에 대하여 참가자들의 견해를 일응 제시할 경우 ‘삼척동자도 이해할 수 있는 문제’라거나 ‘편파성이 우리의 모토’라는 방어막만을 가지고는 광범위한 설득력을 확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예단할 수는 없다. “부패에 대한 조망” 문제와 “정책 및 원리 판단”은 상당히 질적으로 다른 지식 생산 구조를 가지며, 전자에서 후자로 그 기능을 확장할 때에는 그에 상응하는 안전장치와 노력이 있어야 현재 보유하고 있는 광범위한 팬층을 유지하거나 더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꼼수다>에 대한 팬덤은 그 자체로 유용한 기능을 수행하기는 한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표현의 자유 영역을 끊임없이 자각시키고 지키는 기능이다. 김용옥 교수가 출연하여 "단군 이래 이러한 지도자는 없었다... 연산군도 지랄발광을 한 것은 궁정에서의 일이었지.. 국토를 다 뒤집어 파내는 이런..." 이라고 일갈할 때 청취자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시민의 대표로서 권력자를 조롱하거나 격한 비판을 하는 주체의 존재가 건재하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자유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준 주체가 권력에 의해 공격받을 때, 보통의 시민이 소리소문 없이 공격할 때와는 다른 방어의 진영이 동원되고, 이런 방어를 통해 축조된 영역의 성채는 보통의 시민들에 대한 방어막으로서의 역할도 해주게 된다. 최근 SNS 법안이나 심의와 검열에 대한 끝없는 야욕에 대한 감시의 눈초리는 이러한 팬덤으로부터 비롯된 것도 분명히 일부 존재한다. 

그러나 그 팬덤 현상은 현재의 트렌드에 타이밍 맞게, 민주주의에 꼭 필요하지만 과소 생산 ․ 과소 유통되는 부패에 관한 이야기 구조를 성취해낸 부분, 표현의 자유의 건재를 확인하는 부분을 벗어나서까지 확장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팬덤은 정당화될 수 있는 팬덤은 아니며, 그것이 본질적으로 탁월한 부분을 넘어서까지 신뢰를 부여하는 것이다. 만약 오로지 이 팬덤의 힘에 의해서 다루는 논의의 확장을 꾀한다면 그것이 “부패의 조망”기능처럼 긍정적인 효과로 평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팬덤을 가진 인물들의 발언에 가쉽거리를 다룰 때 필요한 지성의 판단력에 따라 지지를 보내는 서로 분열된 다수 집단으로 나뉘어질 것이고, 이것은 <나는 꼼수다>가 나오기 이전의 우리 사회의 정치 문화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대중적 인기는 본질적으로 희소한 재화이며 자기강화적 구조를 갖기 때문에 <나는 꼼수다>의 인기가 어디까지 확장될지는 예견할 수 없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을 이야기할 수는 있겠다. 부패는 그 자체로 개인이나 집단의 악덕의 성격이 큰 문제로서, 가쉽의 요소가 밀착되어 있다. 그러나 다른 사회적 ․ 정치적 쟁점은 그렇지 않다. ‘가카 헌정’이라는 방송의 시발점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엔터테이먼트 요소는 자연스러운 결합의 성격을 잃게 되고, 그야말로 내용 자체의 흥미로움에 의존해야만 한다.

이상과 같은 한계에 대한 이야기의 구체적인 부분은, 가상적으로 “낙태가 헌법적으로 허용되어야 하는가?”의 문제를 (그 시기에 쟁점이 되었기 때문에) 나꼼수에서 다룬다고 하였을 때의 프로그램의 진행, 사람들의 반응, 그 프로그램에서 제시된 발언에 주어져야 할 무게, 그 프로그램의 향후 인기에 대해서 추측해보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다루어야 할 내용들을 실시간으로 전달하려다 보니 문제제기의 무게나 기초사실의 신빙성이 납득할만한 수준에 달하지 못하는 일이나, 아니면 민주주의의 공적 영역에서 다루어야 할 부패라는 악덕과 일 개인의 개인적인 사생활의 문제 사이의 경계가 흐려질 수 있는 문제가 있다. 가쉽에서 인기를 얻은 매체는 가쉽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추동력을 갖게 마련이며, 이것은 민주주의에서 그 프로그램이 하고 있는 중대한 역할과 경계에 대한 정립된 확신에 따라 지도되지 않으면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선이다.

우리는 이 새로운 실험이 가져온 부패감시 기능과 정치에 대한 새로운 열광을 환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엔터테이먼트 요소를 결합시킨 Pdocast에 의한 민주주의에 필요한 정보의 소통이라는 새 길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지는, 이 기획을 시작했던 네 명의 매력적인 사람들과 그들에 대한 팬덤에만 맡겨둘 수는 없는 문제다.

2011. 11. 10.
 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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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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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병모
    2011/11/17 09:51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나꼼수가 대중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으며 사회정책을 평가하고 심의하는 지점에 이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 많이 듭니다.
  2. 사과남
    2011/11/20 11:19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나꼼수는 총선/대선 승리라는 명확한 목표와 가카퇴임시까지라는 명확한 데드라인을 갖고 있는 방송이니까, 심도 깊은 논의를 하고자 하진 않겠지요. 다만 일부 맹신자들이 교조적으로 따르며 세상만사에 대한 답을 구하려하는 것이 나꼼수에게도 부담이 되겠지만, 이미 그 위험을 인지하고 있고 그에 흔들리지 않고 본연의 소임을 다하고자 하는 중심은 잡고 있다고 보입니다.
    팟캐스트라는 새로운 채널의 개척이, 미디어권력 불균형 및 이슈소통구조의 왜곡을 해소하는 중요한 기획이었다는 데에 가장 큰 의의를 둘 수 있겠죠.
  3. 이한
    2011/12/15 13:33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위 글과 반대되는 취지의 미국 한인의 글 - 나 꼼수가 직접 자기 영역을 확장하기 바라는 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111214182744&section=01&t1=n
    그러나 나꼼수의 스타일과 내용, 주역들의 역할은 부패의 조명이고, 부패 정부의 몰락 촉구에 한정되는 것이고, 한정될 수 밖에 없다. 정책에 대한 판단이란 어떨 때엔 책 한권이 아니라 책 백권을 읽어도 어려운데, 한 마디로 정리하자는 것은 부패의 조명 이상의 섬세하고 정교한 논증, 현재 대중의 삼척동자 수준의 생각과 다른 소수자 견해의 개진이 나꼼수의 영역 바깥의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이상의 일은 다른 사람들이, 더 걸맞는 형식과 매체로 해야 할 몫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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