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연양은 연명하기 위해 떡갈나무 밑에서 도토리를 줍는다. 그녀가 그것을 줍는 순간, 그것은 그의 소유가 되었다. 그런데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인류의 동의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아무런 권리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모든 사람에게 공통으로 속하는 것을 자신이 그렇게 차지하는 것은 강탈인가? 만약 그런 동의가 필요하다면, 가련하게도 그녀는 전 세계의 사람들로부터 동의를 얻기 전에 굶어죽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자연에서 어떤 부분을 떼어가지는가는 모든 공유자의 명시적인 동의에 의존하지 않는다.
즉, 인류의 공동재산으로 남아있는 저 거대한 대양의 물고기들, 석유, 지하자원들은 먼저 가져가는 놈이 임자인 것이며, 이 소유권은 원초적인 자연법에 의해 정당화 될 수 있다. (다른 말로 아메리카의 광활한 목초지를 서구인들이 높은 생산력으로 개간하는 행위나, 제국주의의 식민지 경영도 “노동을 투여했다”는 의미에서 하등에 나쁠 것이 없다)
ⅱ. 만약 대지로부터 취득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권리를 준다면, 누구든지 그가 원하는 만큼 많은 양을 독점하게 될 것이다는 반론에 대하여
자연은 소유권의 한도를 인간의 노동의 정도와 삶의 편익에 따라 적절하게 규정한다. 다시말해 소유권을 부여하는 동일한 자연법이 소유권을 제한한다. 신은 우리에게 얼마만큼 주셨는가? 즐길 수 있을 만큼. 어느 누구든지 노동으로 취득한 생산물이 썩기 전에 삶에 이득이 되도록 사용할 수 있는 만큼만 소유할 수 있으며, 그것보다 많은 것은 그의 몫을 넘어서며, 다른 사람의 몫에 속한다. 즉, 그가 소유하게 된 것들이 적절히 사용되지 않고 상하게 되면, 곧 그가 소비하기 전에 과일이 썩거나 사슴고기가 상하게 되면 그는 공통의 자연법을 위반한 것으로, 처벌받게 된다. 그는 이웃의 몫을 침해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가 사용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그에게 삶의 편익을 제공해줄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것을 가질 권리를 결코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자연은 너무도 풍성하여, 한 인간이 자신의 근면으로 그 풍성함의 일부를 차지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손해가 될 정도로 그것을 독점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화폐를 사용함으로써 앞서 지적했던 소유권의 한계들이 극복된다.
ⅲ. 대지 자체의 소유권은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는가
대지에서 나오는 짜잘한 것들 뿐만 아니라 대지 자체에 대한 소유권도 마찬가지이다. 한 인간이 개간하고, 파종하고, 개량하고, 재배하고, 그 산물을 이용할 수 있을 만큼의 토지가 그의 소유이다. 그는 그의 소유인 노동을 토지에 첨가함으로써 토지를 자신의 소유로 만든 것이다. 최초에 세계의 거대한 공유지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을 때, 신은 인간에게 노동을 명했고, 인간은 궁핍으로 인해서 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은 인간에게 대지를 정복하라고 명함으로써 수취할 권한을 주었고, 노동과 작업할 물자를 필요로 하는 인간의 삶의 조건 때문에 필연적으로 (토지소유권을 포함해서) 사유재산이 생기게 되었다.
또한 처음에는 토지가 충분했으며 토지 독점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 (모자라는 걱정을 안해도 될 만큼 토지는 많았다고 하면서 로크는 계속 궁시렁대며 딴지거는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일침을 놓는다. “신은 세계를 근면하고 합리적인 자들이 사용하도록 주었지, 싸우기 좋아하고 언쟁을 좋아하는 자들의 변덕과 탐욕을 위해서 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족들이 증가하고 근면을 통해 자산이 확대됨에 따라, 동의를 통해 그들은 상이한 영토적 경계를 확정하게 되었고, 그들과 그들의 이웃간의 한도에 관해 합의하게 되었으며, 그들 내부에서는 법률을 통해 사회 구성원들의 소유권을 확정지었다.
게다가 자신의 노동에 의해 땅을 수취하는 사람은 인류의 공동자산의 가치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대시키는 것이다. 공유지에 울타리를 쳐서 경작한 1에이커의 땅에서 생산되는 식량은 똑같은 비옥도를 가졌으나 개간되지 않은 채 공유지로 방치된 1에이커의 땅에서 생산되는 양의 10배이상이나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때문에 땅을 울타리로 막아서 10에이커의 땅으로부터 대단히 많은 삶의 편익을 얻는 사람은 자연에 방치된 100에이커의 땅으로부터 동일한 편익을 얻는 자보다 실로 90에이커의 땅을 인류에게 되돌려주고 있는 셈이다.
ⅳ. 모든 가치는 노동으로부터
결론적으로 노동에 의해 발생되는 소유권은 토지에 대한 공유권을 압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실로 모든 사물에 상이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노동이기 때문이다. 로크는 인간에게 유용한 모든 산물의 대부분의 가치는 노동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그래서 땅이 넓은 것보다 인구가 많은 것이 중요하고, 광활한 자연 자원보다 이를 개조할 수 있는 인간의 생산력이 중요하다는 논지를 편다. 그리고 이를 정치적으로 뒷받침해 줄 사회조직이 필요하다. (......확립된 자유의 법을 통해서 인류의 정직한 근로를 권력의 탄압과 당파의 편협성으로부터 보호하고 장려하는 것을 보장할 정도로 현명하고 신과 같이 유능한 군주는 머지 않아 이웃나라들에게 매우 다루기 어려운 존재가 될 것이다.......). 노동은 개인에게 공유물의 일부에 대한 소유권을 부여한다.
ⅴ. 화폐의 출현과 부의 축적
탐욕스런 꿈을 가진 김규식군은 100푸대의 사과를 자신의 정당한 노동으로 모을 수 있었다. 그가 만약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저장하려 한다면 그것은 부정의한 일일 뿐만 아니라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는 동안 그것들이 상해서 무용지물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 일부를 다른 누군가에게 준다면, 그는 그것을 이용한 셈이다. 만약 그가 또한 1주일이 지나면 썩었을 법한 자두를 주고 1년 내내 상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호두와 교환했다면, 그는 아무런 피해를 끼치지 않은 셈이다. 그의 수중에서 어느것도 무용하게 상하지 않는 한, 그는 공동의 자산을 낭비하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에게 속하는 재물의 일부분을 파괴하지 않은 것이다. 다시한번 만약 그가 그의 호두를 주고 한 조각의 금속이나 조개껍질, 다이아몬드를 받는다면, 그리고 그것들을 자기 곁에 평생 동안 보관하고 있다면, 그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은 셈이며 따라서 그는 그러한 내구재들을 그가 원하는대로 많이 쌓아놓을 수 있다. 그가 정당한 소유의 한계를 초과하여 가지고 있는가의 여부는 그가 가진 소유물의 크기가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이 상해서 무익한 것이 되었는가에 달려있다. 여기에서 금, 은, 다이아몬드는 실제 용도가 크거나 삶을 부양하는데 필요한 것들은 아니지만, 기호나 합의를 통해 그런 것들보다 더 많은 가치를 부여받게 된 것들이다. 바로 화폐이다.
화폐를 사용함에 따라, 부의 축적이 더 이상 타인의 권리에 대한 침해가 되지 않았고, 축적할 수 있다는 능력은 사람들이 소유를 늘리는 좋은 유인이 되었다. (영구성이 있으며, 희소한 그리고 저장해둘 만큼 가치가 있는 무언가가 없다면 인간은 토지가 비록 비옥하고 그 토지를 취득하는 것이 아무리 자유롭다 할지라도 그 토지의 소유를 늘리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잉여생산물과 화폐교환을 통해 계속적인 부의 확대가 가능해지면서, 그 결과 토지를 불균등하고 불평등하게 소유하는데도 합의했을 것이다. 즉, 오늘날 불평등한 사유재산제와 같은 사물의 분배가 이루어지게 된 것은 인간이 사회의 경계밖에서 아무런 협정도 없이 단지 금과 은에 가치를 부여하고 화폐의 사용에 암묵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ⅵ. 결
바야흐로 자본주의라는 전대미문의 생산력 증대를 앞두고, 서구사회는 새로운 사회질서, 조직, 철학, 윤리를 요구했다. 기백이 넘치는 부르주아계급이 개혁의 선봉장을 자임했고, 로크의 소유적 개인주의와 같은 학설들이 그 무기가 되었던 것이다. 새롭게 요구되는 국가의 법은 1차적으로 소유권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경제활동의 자유, 재산축적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했다. 축적된 재산이 어떤 외부의 권력이나 침해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져야만 했다. 근대적인 시민사회는 소유권을 위한 법과 정부조직을 골간으로 하여 출발했다.
생각해 볼 꺼리
☞ 공유지의 비극
☞ 오아시스의 문제. 황량한 사막에 오아시스가 하나 있다. 이 오아시스에 먼저 도착한 사람이 그것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 “노동으로 취득한 것은 인간의 것, 토지는 하느님의 것”이라는 헨리조지의 주장에 대해
☞ 개인주의에서 노동에 대한 개인의 소유권(즉, 개인의 생산력에 대한 개인의 배타적 소유권)이 가지는 의미와 사회주의 내지는 꼬뮨에서 사회적 생산력에 대한 공유를 비교해보자. 과연 노동은 공유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 백인들이 아메리카에 갔을 때 인디언들은 토지에 대한 소유권의 개념이 없다고 한다. 원주민들이 낮은 생산력으로 광활한 땅을 놀리고 있을 때 이것을 개발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가? 높은 생산력으로 그 땅들을 외부인이 개발하고 많은 돈을 들여 투자했다면 그것에 대한 소유권은 그들이 갖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