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번역하고 한울출판사에서 2005년에 출간된 에릭 올린 라이트의 <계급론>에 대한 설명과 소개가 담겨 있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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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올린 라이트의 계급 이론
에릭 올린 라이트의 계급이론은 전기와 후기가 있다. 전기 라이트의 계급이론은 ‘자율성’과 ‘억압’에 기초한 모순적 계급 지위 이론이다. 이것을 후기 이론 ‘자산보유에 기초한 착취’ 개념을 핵심으로 한 착취 관계 계급이론으로 바꾼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로머의 착취이론이다. 로머의 착취이론은 『General Theory of Exploitaion』이라는 책에 집대성되어 있는데, 이 책에서 로머는 전통적인 착취이론 즉 노동가치설에 기초한 착취이론을 포기하고 자산분포에 따른 새로운 착취의 일반이론을 제시한다. 로머가 노동가치설을 착취이론에서 빼버리는 이유는 그것이 역사상 나타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착취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 로머는 생산수단의 분포와 게임이론에 의거해 착취를 설명한다. 로머는 다음의 조건이 만족되면 행위자 연합S는 착취당하고, 다른 행위자 연합S'는 착취하게 된다고 정의한다.
(1) 가상적으로 S를 현재 상황보다 더 낫게 할 어떤 대안이 존재한다.
(2) 이러한 대안 하에서는 S'가 현재의 상황보다 더 나빠지게 된다.
(3) S'가 S를 지배한다. 즉 S가 대안적 게임을 못하도록 지배한다.
이러한 착취는 현실사회주의 사회(라이트가 postcapitalist라고 부르는)의 착취 뿐 아니라 노예제 사회의 착취도 설명할 수 있으며, 역사상 다양한 착취를 구분할 수 있게도 해준다. 예를 들어 로머는 ‘철회 규칙’에서의 차이를 통하여 자본주의적 착취와 봉건주의적 착취를 구분한다. 봉건주의에서는 농노가 자신이 점유하고 있는 자산을 갖고 개인적으로 봉건주의의 게임을 떠날 수 있다면(철회하면), 자신은 현재보다 나아지고 영주는 더 나빠진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자본주의에서의 노동자는 만일 자신의 개인적 자산(노동력)을 갖고 개인적으로 자본주의적 게임을 떠나면(철회하면) 더 나빠지고, 일인당 평균 자산을 갖고 ‘집단적으로’ 게임을 떠나면 더 나아진다. 이와 같이 철회의 규칙이 다른 것이 자본주의적 착취와 봉건적 착취를 구분하게 해 준다.
로머는 이어서 사회주의적 착취를 개념화한다. 만일 사람들이 ‘떼어놓을 수 없는 자산’의 평균을 나누어 갖고 게임을 떠나면 더 나아지고, 지배하는 S'는 더 나빠지는 경우 사회주의적 착취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자산이란 습득한 기술이나 지식 혹은 타고난 재능 등을 일컫는다. 쉽게 이야기하면, 숙련의 불평등이 사회내에 존재하면 숙련을 지닌 자들이 숙련이 없는 사람들을 착취한다. 그 이유는 숙련 소유자들은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 투자한 비용보다 훨씬 더 많은 보상을 받기 때문이다.
끝으로 로머는 ‘지위 착취’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 개념은 간단히 말하여 숙련이나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지위’ 그 자체에 의한 착취를 지칭한다. 이 경우 철회 규칙은 S가 자신의 고유의 자산을 갖고, 지위에 대해 불복종하며 게임을 떠나면 S는 나아지고 S'는 더 나빠진다.
로머는 맑스의 착취이론이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노동의 전이에 의한 착취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라고 본다. 그는 이러한 제한점에서 벗어나 착취의 일반이론을 구축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에서의 착취 뿐만 아니라 다른 형태의 착취가지도 설명할 수 있는 일반 이론을 구축함으로써, 맑스주의의 지평을 확장하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로머의 착취이론은 분석 맑시스트 세미나-이 세미나는 코헨, 로머, 엘스트, 라이트 등 쟁쟁한 분석 맑시스트 최첨단 슈퍼 천재 학자들이 1년에 한번 씩 공부한 것을 갖고 와서 좆나게 엄격한 비판과 논쟁에 자신들의 이론을 시험하는 세미나였다-에 참가하고 있던 라이트에게 많은 시사를 주었고, 라이트는 곧 자신의 전기 이론을 비판하며 새로운 계급이론을 구성한다.
라이트의 새 계급이론은 Classes라는 Verso출판사에서 나온 책에 집대성 되어 있다. Classes는 일찍이 코헨이 ‘걸작masterpiece’라고 표현한 바 있는데, 그 아이디어의 참신성 뿐만 아니라 엄격한 실증적 검증, 명제의 명료화, 명제 채택의 이유에 대한 상세한 설명, 모든 명제들을 반증할 수 있는 형태로 정식화하여 비판에 이론을 일부러 노출시키는 점 등에서 영미사회과학의 모든 장점들을 요약하였기 때문이다.
라이트는 책의 서두에서 계급의 이론은 생산수단의 접근에 따른 집단구분의 이론이라고 하며, 성과 인종 그리고 종교 등에 기초한 집단구분을 제외시킨다. (그 이유는 이러한 집단특징이 의미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경제구조 특성과 연관된 지배와 불평등이 바로 생산수단의 접근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뒤이어 자신의 전기이론을 비판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모순적 지위 중 설명이 잘 안되는 계급이익
어느 정도 자율적인 피고용인(semi-autonomous employee)의 경우, 그들이 왜 모순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고 이야기해야만 하는가? 그들의 소득이 쁘띠 브루주아와 같은 정도로 높은 경우에 왜 그렇다고 해야만 하는가? 아마도 유일한 대답은 그 노동자 층이 노동과정에 대한 ‘집합적인 통제’에 객관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밖에 없는데, 그것은 충분히 설득력 있는 답이라 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그 노동자 층은 일에 대한 ‘개별적인 통제’를 늘리는데 더 관심이 있을 수도 있고, 이것이 객관적이지 않다라는 근거도 없기 때문이다.
중소 자본가들의 경우는 어떤가? 대기업과 경쟁하는게 힘들 수도 있지만, 그것 자체가 대자본과 ‘반대되는’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고 보는 근거는 되기 힘들다. 자율성 이론은 이들의 모순적 계급지위를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2) 계급 구분 기준으로서 자율성
쁘띠 브루주아의 브루주아성이 자율성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은, 일종의 매뉴팩쳐 시대의 복고적인 이미지 때문이다. 실제로 쁘띠 브루자는 자신의 노동과정에 대해 커다란 통제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시장의 압력과 신용기관 그리고 기업과의 장기계약 등으로 인해 피고용인과 마찬가지의 구속을 받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기업에 고용된 피고용인들도 상당한 정도의 자율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작업현장에서 생산수단에 대한 일종의 장악력을 갖게 만드는 그들의 지식과 자율성이 그들을 ‘쁘띠 부르주아적’으로 만드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쁘띠브루주아의 특성이 자율성이라는 것은 맞지가 않다. 고도로 자율적인 숙련 기술노동자와 전문적 기술 노동자들은 자산을 갖지 못하면서도 자율성은 높게 가진 노동자 계층의 존재를 증명한다. 이들 계급을 프롤레타리아와 쁘띠 브루주아 계급의 특성을 혼합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산의 조직적 측면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자율성 기준은 계급지위를 구조적으로 확실하게 파악할 수 없게 만든다. 예를 들어 어떤 과학자가 A라는 연구소에서는 거의 책임을 부여받지 못하고 단순적이고 분절된 작업만 하다가 B라는 연구소에서는 팀장의 인덕 덕분에 많은 책임과 복합적 연계속에서 일하게 되었다면 이 사람의 계급적 지위의 성격은 바뀌었다고 보아야 하는가? 물론 아니다. 자율성 기준은 이러한 우연을 계급 성격으로 보는 잘못을 범한다.
마지막으로 자율성 기준은 사실상 실증조사가 힘들며, 조작가능한 변수를 잡기가 불가능하다.
(3) 현실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계급
전통적 맑스주의 계급이론과 마찬가지로, 라이트의 전기기준은 현실 사회주의 사회에서 계급을 구분하지 못하게 하며, 계급간의 착취와 억압, 지배 관계를 파악하지 못하게 한다. 그것에 대한 준거가 아예 없는 것이다.
(4) 착취로부터 지배이론으로 과도한 편향
라이트의 전기 이론에서 모순적 계급 지위 이론은 맑스주의의 핵심 개념인 착취로부터, 베버주의적인 ‘지배’개념으로 지나치게 뛰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첫째로, 객관적인 이해(objective interest)를 분석하기 힘들게 되고 복잡하게 얽혀버린 현실의 지배양태나 우연적인 요소 때문에 끼어맞추기 식이 된다. 예를 들어 부모는 아동을 지배하지만 이것이 부모가 아동의 이해관계와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객관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둘째로, 계급을 지배관계로 환원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구성체 분석에서, 계급의 지위를 다른 모든 집단구별기준과 아무런 차이도 없게 한다. 즉, 성별, 인종, 나이 분석과 질적으로 아무 차이도 갖지 않게 한다. 이러한 다중억압이론은 생산수단이나 생산관계의 고유한 설명력을 잃어버리게 하고 실제로 존재하는 모순을 놓치게 만든다.
라이트는 그러므로, 로머의 착취 일반이론을 기반으로 계급에 관한 일반이론을 만들어 내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 자산은 세 가지가 있다. 생산수단 자산, 기술 자산, 조직 자산. 이 중 각각의 자산이 많은 자는 자산이 적은 자를 착취하며 이 세 요소의 삼차원 공간에서 한 사람의 계급지위가 결정된다. 생산수단이 없다 하여도 기술자산과 조직자산이 매우 많은 자-예를 들어 대기업에 고용된 경영자-는 착취하는 량이 많아지므로 노동자 계급과 상치되는 이해관계를 가진다. 변호사나 의사, 과학자도 기술자산이 많다. 중간관리자는 조직자산이 많은 경우다.
라이트는 생산수단이 없으면서도 기술자산이나 조직자산이 많은 경우에 ‘모순적 계급 지위’를 구축한다고 자신의 이론을 재정의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실증조사를 행하는데, 그는 소득을 비롯한 삶의 질 측면이나 계급의식의 측면에서 착취에 기반한 계급이론이 다른 모든 계급 이론보다 주어진 데이터를 설명하는데 훨씬 우월함을 발견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이 계급이론은 현실 사회주의의 계급을 설명하는데에도 ‘조직 자산에 기반한 착취’라는 개념으로 훨씬 우월하다. 관료제 내에서 우위에 있는 자는 조직 자산이 더 많으므로 하위에 있는 자를 착취하는 자이며, 생산수단이 공적으로 소유되어 있다 하더라도 착취의 사실과 계급의 구분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생산수단 자체만을 보는 전통 맑스 이론은 관료제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과 일반 소련 노동자의 계급적인 관계를 파악할 수 없다)
Classes의 제7장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구조와 계급의식에 대한 실증조사를 담고 있는데, 조사대상은 자본주의 양식의 두 극, 스웨덴과 미국이다. 라이트는 앞에서 설명한 세가지 변수-생산수단, 기술, 조직-자산이 늘어남에 따라 단조적으로 친자본가적 계급의식이 발견됨을 발견하였다. 이 세 자산이 함께 늘어나는 함수에서도 그러하였고, 다른 두 자산은 그대로 두고 한 자산만을 늘렸을 때에도 역시 계급의식이 친자본가적으로 되는 것은 단조적인 함수의 형태를 나타내었다. 한편, 스웨덴과 미국은 소득불평등의 측면에서 아주 많이 다르나, 이러한 단조적 증가의 형태는 동일하게 나타났으며, 모순적 계급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계급의식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다만, 노동자 계급의 계급의식 수준과 계급연합전략의 강건성 정도는 정치적인 전략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미국의 민주당은 공공연히 계급분할 전략을 써왔으며 숙련기술자와 미숙련노동자들을 갈라놓는 노동정책을 지지하였다. 계급동원적인 정치적 수사도 정치의 공간에서 없애 버렸으며, 따라서 조그만 계급지위의 차이에서도 그 의식의 차이는 훨씬 더 크다. 반면에 스웨덴에서는 일찍이 농민당과 사회민주당이 계급연합을 형성하였고 사회민주당과 노조의 활동, 그리고 높은 과세율과 사회보장제도, 적극적 노동시장정책과 연대임금정책은 임노동자들이 모두 어쨌거나 ‘자신은 노동자’라는 의식을 갖도록 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스웨덴에서 사무직 노조와 육체노동직 노조의 차이는 점점 벌어지고 있지만, 어쨌거나 사무직 노동자들은 모두 노동자 계급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노동자의 지위에 관한 중요한 문제에서 육체노동직 노동자들과 같은 배를 타고 있는 듯이 행동한다. 스웨덴에서 이루어졌던 계급타협은 계급의식을 희석시키기보다는 강화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계급타협의 형식 그 자체가 아주 짧은 주기로 자신의 계급 정체성을 확인시켜주었고, 스웨덴 사민당과 LO의 대중교육 대중장악력으로 실질적인 교육 작업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라이트는 결론 부분에 가서 ‘착취에 기반한 계급이론’이 거의 모든 데이터와 관련해서 설명력이 다른 계급이론보다 높으며, 다른 반증이 나올 때까지 이 계급이론을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러한 계급이론의 ‘정치적 함축’을 다룬다. 착취에 기반한 모순적 계급지위는 고숙련 노동자나 변호사 등의 이해관계가 노동자 계급과 객관적으로 일치하지 않음을 보인다. 그러므로 라클라우 무페류의 ‘담론에 기반한 연대블록 형성’이 맘대로 아무데나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첫째로, 그는 민주주의가 사회주의에 갖는 의미를 다루는데, 조직적 자산 착취의 존재는 생산수단의 공유가 착취를 종식시킬 수 있는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한다. 그러므로, 조직적 자산을 평등화해야 하며 이것은 바로 의사결정 과정에서 동등한 영향력을 갖게 하는 민주주의의 온전한 실현을 의미한다. 즉, 민주주의는 단지 국가의 의사결정을 어떻게 하느냐만이 아니라 경제영역에서 착취를 종식시키기 위한 필요조건인 것이다.
둘째로, 착취에 기반한 모순적 계급이론은, 사회주의 혁명운동의 어려움을 분명하게 드러내준다. 이제, 사회주의 혁명은 수사적인 딱지를 ‘노동자’라고 붙임으로서 주체를 과반수가 되게끔 통계조작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말하자면, 혁명에 깔끔하고 유쾌 통쾌 무결한 객관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은 이 인구의 많은 부분을 어떻게 동의하게 하고 조직해 낼 것인가? 사회주의가 되면 효율성이 만빵 높아져서 모순적 계급 위치 있는 사람들도 더 만빵 좋아지니 사회주의 할 객관적 이해가 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사람은 전환의 비용을 생각 안했을 뿐 아니라,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효율이 더 높을지는 설득력있게 확정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생산노동에 들었던 시간이 의사결정참여 노동으로 돌려짐으로써 실제 노는 시간은 더 안늘어날 수도 있다. (특히 참여계획 사회주의에서) 그렇다면 의사결정참여 노동을 하는데에 이 사람들이 객관적인 이해를 갖고 있다고 하기에는 좀 거시기 하다. 다른 대응은, 소비 이외에 다른 활동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고취시키는 것이다. 자본에 의해 당하는 착취의 제거(이것은 특히 착취하는 양보다 착취당하는 양이 더 많은 대부분의 모순적 계급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다), 삶의 질, 진정한 자유의 확장, 폭력의 감소는 사회주의를 향한 계급연대의 기반을 제공해 준다. 그러나 단순히 이러한 알사탕들을 모순적 계급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지’시키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스웨덴과 미국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실제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전략이기 때문이다.
몇가지 예만 들어 보자. 미국과 스웨덴 노동법의 차이는 노조 조직률과 조직 대상에서 광범위한 차위를 가져왔다. 높은 과세율과 누구나 받을 권리가 있는(universal) 잘짜여진 사회보장제도는 기술이나 조직자산 배분에 따른 계급의식 차이를 줄여왔다. 선거제도의 차이는, 독일에서는 녹색당이 성공하고 미국에서는 그렇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시사는 사회를 결정짓는 제도와 그것을 둘러싼 투쟁이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 자체에 커다란 여파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지금 현재 존재하는 제도 부분 중에 계급연합을 어렵게 하는 이해관계를 증폭시키는 곳을 찾아내고, 이해관계의 차이를 줄이는 제도를 통과시킬 수 있다면, 그리하여 물질적인 이해관계의 차이를 제도적 디자인과 조직적인 연계를 통해서 줄일 수 있다면, 사회주의 혁명을 향한 프로젝트는 상정 가능한 의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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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올린 라이트의 계급 이론
에릭 올린 라이트의 계급이론은 전기와 후기가 있다. 전기 라이트의 계급이론은 ‘자율성’과 ‘억압’에 기초한 모순적 계급 지위 이론이다. 이것을 후기 이론 ‘자산보유에 기초한 착취’ 개념을 핵심으로 한 착취 관계 계급이론으로 바꾼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로머의 착취이론이다. 로머의 착취이론은 『General Theory of Exploitaion』이라는 책에 집대성되어 있는데, 이 책에서 로머는 전통적인 착취이론 즉 노동가치설에 기초한 착취이론을 포기하고 자산분포에 따른 새로운 착취의 일반이론을 제시한다. 로머가 노동가치설을 착취이론에서 빼버리는 이유는 그것이 역사상 나타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착취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 로머는 생산수단의 분포와 게임이론에 의거해 착취를 설명한다. 로머는 다음의 조건이 만족되면 행위자 연합S는 착취당하고, 다른 행위자 연합S'는 착취하게 된다고 정의한다.
(1) 가상적으로 S를 현재 상황보다 더 낫게 할 어떤 대안이 존재한다.
(2) 이러한 대안 하에서는 S'가 현재의 상황보다 더 나빠지게 된다.
(3) S'가 S를 지배한다. 즉 S가 대안적 게임을 못하도록 지배한다.
이러한 착취는 현실사회주의 사회(라이트가 postcapitalist라고 부르는)의 착취 뿐 아니라 노예제 사회의 착취도 설명할 수 있으며, 역사상 다양한 착취를 구분할 수 있게도 해준다. 예를 들어 로머는 ‘철회 규칙’에서의 차이를 통하여 자본주의적 착취와 봉건주의적 착취를 구분한다. 봉건주의에서는 농노가 자신이 점유하고 있는 자산을 갖고 개인적으로 봉건주의의 게임을 떠날 수 있다면(철회하면), 자신은 현재보다 나아지고 영주는 더 나빠진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자본주의에서의 노동자는 만일 자신의 개인적 자산(노동력)을 갖고 개인적으로 자본주의적 게임을 떠나면(철회하면) 더 나빠지고, 일인당 평균 자산을 갖고 ‘집단적으로’ 게임을 떠나면 더 나아진다. 이와 같이 철회의 규칙이 다른 것이 자본주의적 착취와 봉건적 착취를 구분하게 해 준다.
로머는 이어서 사회주의적 착취를 개념화한다. 만일 사람들이 ‘떼어놓을 수 없는 자산’의 평균을 나누어 갖고 게임을 떠나면 더 나아지고, 지배하는 S'는 더 나빠지는 경우 사회주의적 착취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자산이란 습득한 기술이나 지식 혹은 타고난 재능 등을 일컫는다. 쉽게 이야기하면, 숙련의 불평등이 사회내에 존재하면 숙련을 지닌 자들이 숙련이 없는 사람들을 착취한다. 그 이유는 숙련 소유자들은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 투자한 비용보다 훨씬 더 많은 보상을 받기 때문이다.
끝으로 로머는 ‘지위 착취’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 개념은 간단히 말하여 숙련이나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지위’ 그 자체에 의한 착취를 지칭한다. 이 경우 철회 규칙은 S가 자신의 고유의 자산을 갖고, 지위에 대해 불복종하며 게임을 떠나면 S는 나아지고 S'는 더 나빠진다.
로머는 맑스의 착취이론이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노동의 전이에 의한 착취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라고 본다. 그는 이러한 제한점에서 벗어나 착취의 일반이론을 구축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그는 자본주의에서의 착취 뿐만 아니라 다른 형태의 착취가지도 설명할 수 있는 일반 이론을 구축함으로써, 맑스주의의 지평을 확장하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로머의 착취이론은 분석 맑시스트 세미나-이 세미나는 코헨, 로머, 엘스트, 라이트 등 쟁쟁한 분석 맑시스트 최첨단 슈퍼 천재 학자들이 1년에 한번 씩 공부한 것을 갖고 와서 좆나게 엄격한 비판과 논쟁에 자신들의 이론을 시험하는 세미나였다-에 참가하고 있던 라이트에게 많은 시사를 주었고, 라이트는 곧 자신의 전기 이론을 비판하며 새로운 계급이론을 구성한다.
라이트의 새 계급이론은 Classes라는 Verso출판사에서 나온 책에 집대성 되어 있다. Classes는 일찍이 코헨이 ‘걸작masterpiece’라고 표현한 바 있는데, 그 아이디어의 참신성 뿐만 아니라 엄격한 실증적 검증, 명제의 명료화, 명제 채택의 이유에 대한 상세한 설명, 모든 명제들을 반증할 수 있는 형태로 정식화하여 비판에 이론을 일부러 노출시키는 점 등에서 영미사회과학의 모든 장점들을 요약하였기 때문이다.
라이트는 책의 서두에서 계급의 이론은 생산수단의 접근에 따른 집단구분의 이론이라고 하며, 성과 인종 그리고 종교 등에 기초한 집단구분을 제외시킨다. (그 이유는 이러한 집단특징이 의미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경제구조 특성과 연관된 지배와 불평등이 바로 생산수단의 접근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뒤이어 자신의 전기이론을 비판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모순적 지위 중 설명이 잘 안되는 계급이익
어느 정도 자율적인 피고용인(semi-autonomous employee)의 경우, 그들이 왜 모순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고 이야기해야만 하는가? 그들의 소득이 쁘띠 브루주아와 같은 정도로 높은 경우에 왜 그렇다고 해야만 하는가? 아마도 유일한 대답은 그 노동자 층이 노동과정에 대한 ‘집합적인 통제’에 객관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밖에 없는데, 그것은 충분히 설득력 있는 답이라 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그 노동자 층은 일에 대한 ‘개별적인 통제’를 늘리는데 더 관심이 있을 수도 있고, 이것이 객관적이지 않다라는 근거도 없기 때문이다.
중소 자본가들의 경우는 어떤가? 대기업과 경쟁하는게 힘들 수도 있지만, 그것 자체가 대자본과 ‘반대되는’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고 보는 근거는 되기 힘들다. 자율성 이론은 이들의 모순적 계급지위를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2) 계급 구분 기준으로서 자율성
쁘띠 브루주아의 브루주아성이 자율성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은, 일종의 매뉴팩쳐 시대의 복고적인 이미지 때문이다. 실제로 쁘띠 브루자는 자신의 노동과정에 대해 커다란 통제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들은 시장의 압력과 신용기관 그리고 기업과의 장기계약 등으로 인해 피고용인과 마찬가지의 구속을 받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기업에 고용된 피고용인들도 상당한 정도의 자율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작업현장에서 생산수단에 대한 일종의 장악력을 갖게 만드는 그들의 지식과 자율성이 그들을 ‘쁘띠 부르주아적’으로 만드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쁘띠브루주아의 특성이 자율성이라는 것은 맞지가 않다. 고도로 자율적인 숙련 기술노동자와 전문적 기술 노동자들은 자산을 갖지 못하면서도 자율성은 높게 가진 노동자 계층의 존재를 증명한다. 이들 계급을 프롤레타리아와 쁘띠 브루주아 계급의 특성을 혼합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산의 조직적 측면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자율성 기준은 계급지위를 구조적으로 확실하게 파악할 수 없게 만든다. 예를 들어 어떤 과학자가 A라는 연구소에서는 거의 책임을 부여받지 못하고 단순적이고 분절된 작업만 하다가 B라는 연구소에서는 팀장의 인덕 덕분에 많은 책임과 복합적 연계속에서 일하게 되었다면 이 사람의 계급적 지위의 성격은 바뀌었다고 보아야 하는가? 물론 아니다. 자율성 기준은 이러한 우연을 계급 성격으로 보는 잘못을 범한다.
마지막으로 자율성 기준은 사실상 실증조사가 힘들며, 조작가능한 변수를 잡기가 불가능하다.
(3) 현실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계급
전통적 맑스주의 계급이론과 마찬가지로, 라이트의 전기기준은 현실 사회주의 사회에서 계급을 구분하지 못하게 하며, 계급간의 착취와 억압, 지배 관계를 파악하지 못하게 한다. 그것에 대한 준거가 아예 없는 것이다.
(4) 착취로부터 지배이론으로 과도한 편향
라이트의 전기 이론에서 모순적 계급 지위 이론은 맑스주의의 핵심 개념인 착취로부터, 베버주의적인 ‘지배’개념으로 지나치게 뛰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첫째로, 객관적인 이해(objective interest)를 분석하기 힘들게 되고 복잡하게 얽혀버린 현실의 지배양태나 우연적인 요소 때문에 끼어맞추기 식이 된다. 예를 들어 부모는 아동을 지배하지만 이것이 부모가 아동의 이해관계와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객관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둘째로, 계급을 지배관계로 환원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구성체 분석에서, 계급의 지위를 다른 모든 집단구별기준과 아무런 차이도 없게 한다. 즉, 성별, 인종, 나이 분석과 질적으로 아무 차이도 갖지 않게 한다. 이러한 다중억압이론은 생산수단이나 생산관계의 고유한 설명력을 잃어버리게 하고 실제로 존재하는 모순을 놓치게 만든다.
라이트는 그러므로, 로머의 착취 일반이론을 기반으로 계급에 관한 일반이론을 만들어 내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 자산은 세 가지가 있다. 생산수단 자산, 기술 자산, 조직 자산. 이 중 각각의 자산이 많은 자는 자산이 적은 자를 착취하며 이 세 요소의 삼차원 공간에서 한 사람의 계급지위가 결정된다. 생산수단이 없다 하여도 기술자산과 조직자산이 매우 많은 자-예를 들어 대기업에 고용된 경영자-는 착취하는 량이 많아지므로 노동자 계급과 상치되는 이해관계를 가진다. 변호사나 의사, 과학자도 기술자산이 많다. 중간관리자는 조직자산이 많은 경우다.
라이트는 생산수단이 없으면서도 기술자산이나 조직자산이 많은 경우에 ‘모순적 계급 지위’를 구축한다고 자신의 이론을 재정의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실증조사를 행하는데, 그는 소득을 비롯한 삶의 질 측면이나 계급의식의 측면에서 착취에 기반한 계급이론이 다른 모든 계급 이론보다 주어진 데이터를 설명하는데 훨씬 우월함을 발견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이 계급이론은 현실 사회주의의 계급을 설명하는데에도 ‘조직 자산에 기반한 착취’라는 개념으로 훨씬 우월하다. 관료제 내에서 우위에 있는 자는 조직 자산이 더 많으므로 하위에 있는 자를 착취하는 자이며, 생산수단이 공적으로 소유되어 있다 하더라도 착취의 사실과 계급의 구분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생산수단 자체만을 보는 전통 맑스 이론은 관료제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과 일반 소련 노동자의 계급적인 관계를 파악할 수 없다)
Classes의 제7장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구조와 계급의식에 대한 실증조사를 담고 있는데, 조사대상은 자본주의 양식의 두 극, 스웨덴과 미국이다. 라이트는 앞에서 설명한 세가지 변수-생산수단, 기술, 조직-자산이 늘어남에 따라 단조적으로 친자본가적 계급의식이 발견됨을 발견하였다. 이 세 자산이 함께 늘어나는 함수에서도 그러하였고, 다른 두 자산은 그대로 두고 한 자산만을 늘렸을 때에도 역시 계급의식이 친자본가적으로 되는 것은 단조적인 함수의 형태를 나타내었다. 한편, 스웨덴과 미국은 소득불평등의 측면에서 아주 많이 다르나, 이러한 단조적 증가의 형태는 동일하게 나타났으며, 모순적 계급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계급의식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다만, 노동자 계급의 계급의식 수준과 계급연합전략의 강건성 정도는 정치적인 전략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미국의 민주당은 공공연히 계급분할 전략을 써왔으며 숙련기술자와 미숙련노동자들을 갈라놓는 노동정책을 지지하였다. 계급동원적인 정치적 수사도 정치의 공간에서 없애 버렸으며, 따라서 조그만 계급지위의 차이에서도 그 의식의 차이는 훨씬 더 크다. 반면에 스웨덴에서는 일찍이 농민당과 사회민주당이 계급연합을 형성하였고 사회민주당과 노조의 활동, 그리고 높은 과세율과 사회보장제도, 적극적 노동시장정책과 연대임금정책은 임노동자들이 모두 어쨌거나 ‘자신은 노동자’라는 의식을 갖도록 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스웨덴에서 사무직 노조와 육체노동직 노조의 차이는 점점 벌어지고 있지만, 어쨌거나 사무직 노동자들은 모두 노동자 계급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노동자의 지위에 관한 중요한 문제에서 육체노동직 노동자들과 같은 배를 타고 있는 듯이 행동한다. 스웨덴에서 이루어졌던 계급타협은 계급의식을 희석시키기보다는 강화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계급타협의 형식 그 자체가 아주 짧은 주기로 자신의 계급 정체성을 확인시켜주었고, 스웨덴 사민당과 LO의 대중교육 대중장악력으로 실질적인 교육 작업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라이트는 결론 부분에 가서 ‘착취에 기반한 계급이론’이 거의 모든 데이터와 관련해서 설명력이 다른 계급이론보다 높으며, 다른 반증이 나올 때까지 이 계급이론을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러한 계급이론의 ‘정치적 함축’을 다룬다. 착취에 기반한 모순적 계급지위는 고숙련 노동자나 변호사 등의 이해관계가 노동자 계급과 객관적으로 일치하지 않음을 보인다. 그러므로 라클라우 무페류의 ‘담론에 기반한 연대블록 형성’이 맘대로 아무데나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첫째로, 그는 민주주의가 사회주의에 갖는 의미를 다루는데, 조직적 자산 착취의 존재는 생산수단의 공유가 착취를 종식시킬 수 있는 충분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한다. 그러므로, 조직적 자산을 평등화해야 하며 이것은 바로 의사결정 과정에서 동등한 영향력을 갖게 하는 민주주의의 온전한 실현을 의미한다. 즉, 민주주의는 단지 국가의 의사결정을 어떻게 하느냐만이 아니라 경제영역에서 착취를 종식시키기 위한 필요조건인 것이다.
둘째로, 착취에 기반한 모순적 계급이론은, 사회주의 혁명운동의 어려움을 분명하게 드러내준다. 이제, 사회주의 혁명은 수사적인 딱지를 ‘노동자’라고 붙임으로서 주체를 과반수가 되게끔 통계조작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말하자면, 혁명에 깔끔하고 유쾌 통쾌 무결한 객관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은 이 인구의 많은 부분을 어떻게 동의하게 하고 조직해 낼 것인가? 사회주의가 되면 효율성이 만빵 높아져서 모순적 계급 위치 있는 사람들도 더 만빵 좋아지니 사회주의 할 객관적 이해가 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사람은 전환의 비용을 생각 안했을 뿐 아니라,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보다 효율이 더 높을지는 설득력있게 확정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생산노동에 들었던 시간이 의사결정참여 노동으로 돌려짐으로써 실제 노는 시간은 더 안늘어날 수도 있다. (특히 참여계획 사회주의에서) 그렇다면 의사결정참여 노동을 하는데에 이 사람들이 객관적인 이해를 갖고 있다고 하기에는 좀 거시기 하다. 다른 대응은, 소비 이외에 다른 활동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고취시키는 것이다. 자본에 의해 당하는 착취의 제거(이것은 특히 착취하는 양보다 착취당하는 양이 더 많은 대부분의 모순적 계급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다), 삶의 질, 진정한 자유의 확장, 폭력의 감소는 사회주의를 향한 계급연대의 기반을 제공해 준다. 그러나 단순히 이러한 알사탕들을 모순적 계급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지’시키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스웨덴과 미국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실제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전략이기 때문이다.
몇가지 예만 들어 보자. 미국과 스웨덴 노동법의 차이는 노조 조직률과 조직 대상에서 광범위한 차위를 가져왔다. 높은 과세율과 누구나 받을 권리가 있는(universal) 잘짜여진 사회보장제도는 기술이나 조직자산 배분에 따른 계급의식 차이를 줄여왔다. 선거제도의 차이는, 독일에서는 녹색당이 성공하고 미국에서는 그렇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시사는 사회를 결정짓는 제도와 그것을 둘러싼 투쟁이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 자체에 커다란 여파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지금 현재 존재하는 제도 부분 중에 계급연합을 어렵게 하는 이해관계를 증폭시키는 곳을 찾아내고, 이해관계의 차이를 줄이는 제도를 통과시킬 수 있다면, 그리하여 물질적인 이해관계의 차이를 제도적 디자인과 조직적인 연계를 통해서 줄일 수 있다면, 사회주의 혁명을 향한 프로젝트는 상정 가능한 의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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