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산성과 창조성은 양립할 수 없는가

 

양립할 수 없다는 연구를 소개한 기사다.

http://nownews.seoul.co.kr/news/newsView.php?id=20160630601021

 

그 이유는 생산성은 계획을 빨리 구상하고 계획대로 꾸준히 착착 진행해야 되기 때문에 시간을 딴 짓에 못 쓰기 때문이라고 한다. 창조성은 계획대로 파파팍 진행되는 시간과 공간 이외의 것을 요구한다.

 

이 기사에서 '생산성'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현재의 사회적 역할에 따라 이미 규정된 생산물을 단위 시간 내에 산출하는 효율성을 의미한다. 즉, 사회적 역할과 상관 없는 것을 생산하는 것은 생산성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봐야 이 기사에서 소개한 연구가 말이 된다. 예를 들어 물리학자가 바이올린을 매일 1시간씩 연주하는 데 시간을 쓴다면, 그 물리학자의 사회적 역할에 맞는 생산은 그 1시간 동안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기업의 광고를 담당하고 있는 직원이 매일 1시간씩 요가를 하거나, 변호사가 존 로크와 존 스튜어트 밀의 책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 과정에서 바이올린 연주도 생산하고 요가로 건강한 몸과 마음도 생산하고 로크와 밀의 책을 읽고 정리한 글도 생산할 수 있지만,  이것은 '생산'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이 기사의 전제가 되는 것 같다.

 

이렇게 전제를 깔고 보았을 때, 이 기사에 소개된 연구는 우리의 공통된 경험을 잘 표현하는 것 같다.

 

2. 실제 사례들

 

탐구에서 지나치게 많은 최종결과물을 생산하는 사람은 2류에 그치는 것 같다. 리처드 포스너, 마사 누스바움, 캐스 선스타인과 같은 사람들은 정말 쟁쟁한 학자들이고 인용지수도 아주 높다. 그러나 이들의 글을 읽어보면 좋긴 하지만, 사고의 진행이 어딘가에서 멈춘 것을 알 수 있다. 좀 깊이 생각해들어가지 않고 아이디어 떠오른 것을 어떻게든 버무려서 그럴법한 글로 만들어낸 것 같다.

 

심지어 선스타인은 '판사는 사안의 원리를 그렇게 깊이 있게 탐구해 들어가서는 안 된다'라는 이론까지 만들어냈는데, 참으로 자신의 탐구습관을 반영한 이론이라 하겠다. 선스타인은 물론 그 이론도 번뜩이는 아이디어에 착안해서 바로 논문을 써버림으로써 공표하였을 것이다. 그의 이론적 착안은 다음과 같다. 즉, 우리의 법제도는 동상이몽을 허용하는 개방적 개념들에 의해 안착되어 있는데, 이 개방적 개념들의 일정한 해석과 적용이 일정한 유형의 사안에서 효과를 발휘하면서 받아들여지고 있다면 거기에 안주하는 것이 법적 안정성과 정치적 정당성에 좋다는 것이다. 이 개념들과 그 개념들이 표현하는 규범을 지나치게 밀고 들어가면 오히려 안정성과 합의에서 멀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뭐 이런 아이디어를 생각해볼 수는 있겠다. 그런데 1류 학자는 와, 이거 아이디어 좋은데, 이러면서 바로 논문으로 내지 않는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고, '탐구를 이 이론적 수준에서 멈추어야 한다'라는 기준이 구체적인 사안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구체적 사안에서 미리 '이 수준까지만 생각하고 그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는 합리적이고 합당한 논증의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사고하라'라는 명령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알 수 있다. 논증대화는 타당한 이의가 제기되는 한 계속해서 더 깊은 배경이 되는 명제로 들어가는 것이며, 사안을 딱 보고 나서 미리 어디까지만 파고들어야지 하고 정해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말로 타당한 판결이론이 되려면, 타당한 판결이론에 따라 변론을 구성하는 변호사는 다음과 같이 변론준비서면을 써도 될 것이다. "이 문제는 더 깊이 들어가면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탐구는 이 이론적 수준에서 멈추기로 그냥 정했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더 논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썼다가는 바로 상대방 변호사에게 반론을 당할 것이다. 그러면 그 반론에 대해서 가만히 있으면 의뢰인에게 체면도 안서고 직업윤리에도 어긋난다. 그러므로 재반론을 할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주장할 수 있는 데 까지는 다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선스타인이 실제 소송에서 자기 이론에 기반해서 법률가들이 주장을 펼치는 것을 상상해보았더라면 자기 이론이 허점이 무엇인지를 알았을 것이다. 그것은 문제해결을 허투루 하겠다는 결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청난 양의 논문을 생산해내느라고 그렇게 하지 못했다.

 

3. 사회적 역할에 좁게 고정하지 않은 생산성과, 창조성은 양립가능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성당의 벽화를 담당하게 되었을 때, 그의 생산성은 그가 돈을 받고 해야 하는 일인 성당 벽화 완성의 진척에 의해서 평가된다. 그 동안 그가 비행기 아이디어를 구상하거나, 다른 그림을 그리거나, 신기한 기계를 만들어내거나 한 것은 생산성에 들어가지 않게 된다. 일이 진척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우리가 생산이라는 것을 지금 현재 돈을 받고 의무지워진 일에만 한정하지 않고 널리 가치의 증진에 이로운 활동으로 규정한다면, 생산성과 창조성의 상충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게 된다.

 

예를 들면 소설 쓰는 작가는 매일 소설을 10페이지 쓰는 대신, 소설은 2페이지를 쓰면서 음악 연주를 하거나, 동물보호운동에 참여하거나, 사회적인 이슈에 대하여 글을 쓰거나, 번역을 하거나 하는 일을 추가하여 할 수 있다. 이런 일들이 자신의 규정된 역할에 따라 돈이 나오는 일들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가치를 증진하는 일임은 분명하다.

 

학자의 경우에도 자신의 전공이라서 논문실적에 올라갈 논문을 바로 뽑아낼 수 있는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인접 학문의 책을 읽고 정리하는 것도 생산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생산을 꾸준히 하다보면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창조적인 생산을 할 수가 있는 기반을 쌓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과업을, 돈을 받거나 자신의 현재의 사회적 역할로 규정된 것으로만 제한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과업은 그보다 훨씬 폭넓은 것이다. 좁은 역할에서 주어진 일을 진행하는 시간은 과도하게 잡지 말고 평타를 칠 정도만 꾸준히 하고, 그 외의 시간은 훨씬 폭넓은 경험을 하면서 그 경험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말고 그 자체의 생산을 시도하는 것이다.

 

4. 우리의 역할을 넓게 보았을 때 노동의 리듬이 열린다.

 

우리가 좁은 범위의 과업만을 염두에 둘 때에는, 일이 중간에 막히거나 하기 싫게 되면 생산은 멈추게 된다. 그래서 그 때 놀게 되는데, 놀면서 원래는 창조성이 증가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전자기기로 네트워크 연결이 워낙 잘되어 있어서 제대로 놀지 못한다. 즉, 쓸데없는 정보를 머리에 투과시키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많다. 그렇게 해서는 아무리 일을 미루고 느리게 느리게 해봤자 창조성이 증가하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우리의 과업이라는 것이 돈을 받고 하거나 누군가와 약속을 했기 때문에 일정 내에 꼭 해야만 하는 그러한 의무들로만 구성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명심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면 과업이 매우 다채롭고 다양해진다. 이 과업을 하다가 막혔을 때에는 저 과업을 하면서 놀게 된다. 여기서 논다는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관조의 즐거움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놀면서 쌓은 것들은 결국 다시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때의 창조성을 증가시킨다. 이것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면 그 사람은 참 여러가지 과업을 수행한 셈이 된다. 그래서 사회적 역할에 한정하지 않고 보면 생산성도 높고 창조성도 높은 셈이 된다.

 

그때그때 리듬이 잘 맞아떨어지는 일들은 정해져 있다. 조금 피곤해진 상태에서는 루틴한 노동을 하는 것이 잘 맞다. 시간이 얼마 없을 때에는 오히려 창조적인 노동을 하거나 끝마무리를 하는 것이 잘 맞다. 시간이 많이 주어질 때에는 이 과업, 저 과업을 리드미컬하게 연결시키면서 하는 것이 맞다.

 

5. 과업(Task)과 일(Job)의 비동일성, 심신에 활력이 되는 활동과 시간 때우기의 비동일성

 

따라서 염두에 둘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과업과 일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일은 과업의 부분집합이다. 우리가 진지하게 몰입할 과업은 사회적으로 현재 자신의 직업으로 인정되는 역할에 속한 일에 한정되지 않는다. 즉 과업은 여러가지가 있으며 이들을 적어도 몰입의 관점에서는 동등하게 볼 때 생활의 리듬이 잡힌다.

 

다른 하나는 심신에 활력이 되는 활동과 시간 떄우기가 동일하지 않다는 점을 유념하는 것이다. 시간 때우기(time-killing)은 심신에 활력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심신에 활력이 되는 활동에는 시간 때우기보다 훨씬 많은 것이 있다. 그러므로 둘은 교집합을 가지는 서로 다른 집합이다. 시간 때우기를 하면 자동적으로 심신에 활력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활을 주의깊게 관찰해보고 오히려 심신에 힘이 빠지는 시간 때우기 활동이 있다면 그 시간을 심신에 활력이 되는 과업으로 대체하는 일이 필요하다.

 

늘 몰두할 것이 여러 종류가 있어서 리듬감 있게 그때그때 하고 싶은 것을 삶은, 몰두할 것은 직업적 역할로 마감이 급하게 정해진 과업밖에 없고 나머지는 시간 때우기로 채워넣는 삶보다 훨씬 살 만하다.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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