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TON, EVTHYDEMOS, 에우튀데모스, 김주일 옮김, 이제이북스, 2008, 41-42면에서는 클레이아니스에게 두 명의 외지인 소피스트가 혼란을 주는 문답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처음에 소피스트는 '아는 자가 배우는가, 모르는 자가 배우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클레이아니스는 '모르는 자가 배운다'고 답한다. 그러자 소피스트는 다음과 같은 문답을 진행한다.

 

(인용 시작)

“어때? 자네는 글자들을 알지 않나?”

“예.” 그가 말했네.

“전부 다 알지?” 그가 동의했네.

 

“그러면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음송할 때면, 그는 언제나 글자들을 음송하지 않는가?”

그가 동의했네.

 

“자네가 전부 안다면, 그는 자네가 아는 것들 중의 어떤 것을 음송하지 않겠는가?” 그것도 그가 동의했네.

 

“어때? 누군가가 음송하는 것들을 배우는 사람은 자네가 아니고 글자들을 모르는 사람들인가?” 그분이 말했네.

“아닙니다. 제가 배웁니다.” 그가 말했네.

 

그러면 자네가(42)모든 글자를 알고 있는 한 자네는 자네가 아는 것들은 배우는군.” 그분이 말했네. 그가 동의했네.

 

“그러고 보니 자네는 대답을 잘 한 것이 못되는군.” 그분이 말했네.

(인용 끝)

 

이런 문답 끝에 클레이니아스는 '아는 자가 배운다'라는 답이 맞는 것 같다고 이제는 말한다. 그러자 소피스트는 또 이를 논박하는 문답을 시작한다.

 

(인용 시작)

그분이 말했네. “안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앎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겠지?” 그가 동의했네.

 

“그러면 알지 못한다는 것은 아직 앎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겠고?” 그분에게 그가 동의했네.

 

“그러면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인가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인가?”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속한다고 자네가 동의 한 셈이 아닌가?” 그가 끄덕였네.

 

“그러면 배우는 사람들은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속하고,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속하지 않겠지?” 그가 인정했네.

 

클레이니아스, 그러니 아는 사람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배우는 것일세.” 그분이 말했네.

(인용 끝)

 

그러니까 클레이니아스는 어쩔 줄 몰라했다. '모르는 자가 배운다'고 해도 논박당하고, '아는 자가 배운다'고 해도 논박당한 것이다. 이런 당황스러운 사태를 보자 소크라테스가 개입했다.

 

 

(위 책, 43면부터 인용 시작)

"사실 프로디코스가 말하듯이 처음에는 이름들의 올바름에 대하여 배워야 하기 때문일세. 외지인 두 분이 자네에게 밝혀 보여주는 것도 이와 다른 것이 아닐세. 누군가가 처음에는 어떤 대상(것)에 대하여 아무런 앎도 갖고 있지 않다가 나중에 그것에 대한 앎을 받아들일 때, 사람들은 그 상황에도 ‘배우다’는 이름을 붙여 부르지만, 이미 앎을 작고 나서 동일한 대상(것)을(그것은 행위일 수도 있고 말일 수도 있네) 이 앎을 가지고 헤아릴 때에도 같은 이름을 붙여 부른다는 것을(그 경우에 사람들이 ‘배우다’라고 부를 때보다는 오히려 ‘이해하다’라고 부를 때가 더 많긴 하지만, 때로는 ‘배우다’라고도 부르지). 자네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두분이 밝혀 보여 주고 있는 것이지. 그런데 자네는 이분들이 밝혀 보여 주고 있듯이 반대되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즉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같은 이름이 주어져 있다는 점을 간과했네."

(인용 끝)

 

결국 소피스트들은 '배우다'라는 말이 두 경우 모두에 쓰인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가린 채, 하나의 용법에서 다른 용법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속임수를 부린 것이다.

 

이러한 속임수는 오래되었지만 그만큼 고질적이다. 

 

문제는 사람을 놀리려고 마음 먹은 자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 주장을 펼치는 자가 자기자신에게 속을 때 더 크다. 이 때, 주장을 펼치는 자는 다른 이를 속이면서 자기도 속이기 때문에 문제를 알아채기도 힘들다. 그것은 애매어들을 이용해서 계속해서 표상들의 연접을 따라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 뿐이지 논증이 아니다. 그래놓고도 뭔가 통찰력 있는 논증을 했다고 착각하는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정당성 있는 의사결정 체제의 제도 복합체라는 의미에서, 은연중에 '다수 대표자의 의사에 따르는 것'으로 미끄러든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상충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은 무언가 대단히 가치 있는 것에 헌신하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그것은 엉터리다. 왜냐하면 자신이 헌신하고 있는 것은 '다수 대표자의 의사 구현' 그 자체일 뿐이기 때무이다. 그러나 체제 내에서 의회의 시스템에 따른 결정을 일단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러놓았기 때문에, 자신은 '정당성 있는 의사결정 체제의 제도 복합체'를 옹호하고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회의 결정이 만일 표현의 자유와 같은 기본적인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구성원의 기본적 자격을 부인하고 구성원의 기본적 관계를 왜곡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민주적인 것일 수가 없다. 여기서 우리가 시종일관 관심을 갖는 것은 '정당성 있는 의사결정 체제의 제도 복합체로서' 흠결이 있는가 아닌가가 된다. 그런데 이 문제를 다루면서 곧바로 체제 내의 현실적 의사결정기구를 민주주의 그 자체로 등치시키게 되면, 민주주의가 기본적 자유와 상충한다는 엉터리 같은 결론으로 이르게 되는 것이다.

 

다수 대표자의 의사 구현이 그 자체로 정당성 없는 합법성만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난하였던 카를 슈미트 역시 애매어의 오류에 빠졌다. 슈미트는 정상 상태는 주권자를 포착하기에 적절한 여건이 아니라고 보았다. 카를 슈미트에 따르면 모든 정치적 통일체의 존재 의의는 적을 배제하고 우리를 확립함으로써 비상 상태를 극복하고 정상 상태를 복구하는 것에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정치적 통일체의 주권은 비상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힘은 무엇이 비상상태인가를 규정할 수 있는 힘도 의미한다. 왜냐하면 비상상태가 어느 때인가를 규정할 힘이 없다면, 비상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애초에 발동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힘은 비상상태라는 예외적인 상황에서 질서를 새로이 창조할 힘이기 때문에, 정상상태의 규범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러한 힘은 정상 상태에 종속된 법률 체계에서 창설된 의회의 기계적인 다수결에 의해서는 확인될 수 없고 오히려 그러한 의회는 그 힘과 절연되어 있기도 하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인데, 대표자가 자유위임에 의해 자기 마음대로 법률을 결정할 수 있는 한, 치자와 피치자는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치자와 피치자가 동일한 순간을 찾아야, 그 비상상태라는 예외적 상황에 누가 아무런 구속을 받지 않고 주권자로서 행위하는가를 포착할 수 있다. 치자와 피치자가 동일한 순간은 카리스마적인 권위자, 즉 비상대권을 가진 대통령과 같은 직위에 있는 인물이 열렬한 국민의 환호와 압도적인 승인 속에, 혼란을 수습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때 오게 된다. 즉, 민주주의는 시원적인 창설적 힘을 가지는 헌법적 독재에서 달성된다.

 

이러한 역설적 주장의 흐름은 겉으로 보기에는 통찰력이 넘치고, 신선하고, 탁월한 것 같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곧 비상대권을 가진 권위주의적 통치자의 독재에 의해 달성된다는 이 기이한 논리는 애매어의 오류를 이용한 사고 연접의 천박한 고리를 타고 미끄러진 것에 불과하다.

 

첫째로, 카를 슈미트는 비상 상황에서 시원적인 힘을 가진 누군가가 '주권자'라고 하고 그 '누군가'를 찾는 작업에 골몰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애초에 보댕과 같이 신학적 권위와 유사한 절대군주의 권위를 확립하려고 했던 오래된 정치신학적 '주권' 사고에 물들어 있다. 즉 거기서 말하는 주권이라는 것은 예외적인 상황을 포함해서 모든 상황에서 시원적인 질서를 창설할 수 있는 '의지'의 인격적 원천을 의미하는 것 이다. 그러나 의지의 발현은 사실적으로 노골적인 힘의 발현은 표현할 수 있어도, 그 자체만으로는 어떠한 경우에도 '규범'을 구성할 수는 없다. '규범'은 오로지 그것을 상호주관적으로 승인할 화용론적 관계에 있는, 자유롭고 평등한 위치의 의사소통주체의 논증대화를 거친, 최소한 거부권을 어느 누구도 행사하지 아니한 복수의 승인에 의해서만 구성될 수 있다. 따라서 주권은 국민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평등한 개별 국민들의 의사소통적 권력 형성의 과정 자체에 있는 것이다. 그러한 화용론적 관계가 유지되지 않고 그러한 의사소통 권력 형성 과정에 신의성실하게 참여하고 있지 아니하는 주체는, 설사 그것이 절대 다수의 인민의 열렬한 환호와 지지를 받는다 할지라도 주권을 갖지 아니한다. 주권은 손오공이 지구인들아 힘을 다오 하여 조금씩 모아서 거대하게 만드는 원기옥이 아니다. 실정성만이 투영된 관찰자적 의미에서의 주권-그런 주권은 징기츠칸도, 마오쩌둥도, 히틀러도 가졌다-가 아닌, 민주주적 주권이란 규범적 복종의무를 발생시키는 통치의 정당성과 떼어낼 수 없다. 그리고 통치의 정당성이란 그 권력의 행사가 항상 의사소통적 권력 형성의 수문의 검사를 받게 되는 체계 안에 있을 때에만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카를 슈미트가 열렬하게 역설한 비상대권을 마음 내키는 대로 행사할 수 있는 헌법적 독재자야말로, 민주주의적인 주권에서 가장 거리가 먼 인물이다. 즉, 카를 슈미트는 통치의 정당성을 확립할 자격이 있는 관계에서 승인되는 규범의 발령체제로서의 주권을, 단순한 시원적 힘을 발현하려는 인격적 의지와 등치시킴으로써 애매어의 오류를 활용한 것이다.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어떤 물리적 힘에서 압도적인 이의 인격적 의지와 동일시하는 사고는, 생활세계가 분화되지 아니한, 즉 계몽과는 거리가 먼 사회의 전형적인 특성이다. 그것은 부족의 토템신앙이 섬기는 신에게서 마술적으로 힘을 얻은 부족장의 의지, 천자에게서 승인을 받은 황제의 의지, 유일신에게서 그리고 그 유일신의 현세의 대리자에게 승인을 얻은 군주의 의지는 너무나 익숙한 개념이다. 그리고 그 개념을, 그대로 가져와, 국민 개개인이 바로 그런 '시원적 의지'를 사람 수 만큼 나누어 가졌고, 이 의지를 모아 한 사람에게 주면 된다는 식의 사고는, 카를 슈미트 자신이 자랑스럽게 둘러쓰려고 했던 외피처럼, '정치 신학'의 일종에 불과하다.

 

둘째로, 카를 슈미트는 민주주의를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을 의미한다고 보고, 이 '동일성'의 애매성에 다시 한 번 기댄다. 현실적으로 복합적인 위계와 통치기능의 분화가 이루어진 사회에서, 즉 모두가 직접적으로 자신의 일을 전반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문명 사회에서, 치자와 피치자는 문자 그대로 '같은 이'일수는 없다. 그것은 실은 아무것도 이야기해주지 않는 은유에 불과하다. 사람은 경계를 가진 존재이며, 타인의 이익과 나의 이익 사이에는 구분이 있으며, 타인의 지위와 나의 지위 사이에도 구분이 있다. 타인과 나는 서로의 이익이 중첩되거나 같은 방향을 취할 수는 있지만, 둘의 이익이 구분불가능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실정적인 통치 권력을 갖고 있는 자는, 그 통치권력이 설정한 규범의 수범자와 동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애초에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불가능한 기준을 설정하고서 불가능한 것을 찾아나서는 여정을 개시한 셈이다. 그런 여정은 전망이 없다. 전망이 있어 보이는 착각은, 어느 순간 은유를 진짜처럼 받아들이기로 결단하면서 개념들 사이를 애매어의 오류를 활용해 미끄러져 들어가기 때문에 생긴다. 그런 애매어의 오류를 피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제도적 권한을 가진 자가 그러한 권한을 가지지 못한 자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만을 검토할 수 있을 뿐임이 명백하진다. 즉, 누군가 다른 사람은 갖지 못한 실정적 권한을 행사할 때, 그 권한 행사가 자유롭고 평등한 모든 구성원들의 이익을 보편적으로 보장하는 형식으로 행사되느냐, 아니면 일부의 구성원들의 지위를 묵살하는 형식으로 행사되느냐만을 검토할 수 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은 같지 못한 입법의 권한, 재판의 권한, 체포의 권한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그러한 권한이 오로지 그 공동체읙 구성원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를 유지, 방어, 강화하는 구체화를 하는 내용을 갖고 있는지, 아니면 오히려 그러한 관계를 악화하는 자의적인 지배의 내용을 갖고 있는지 검토할 수 있을 뿐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그것은 정당성 있는 통치 기구의 일부라 볼 수 있고 후자의 경우라면 그것은 정당성 없는 지배의 기구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성'이라는 개념을 이리저리 적당하게 조작하여 어떤 사태와 더 친화적인 것으로 본다 하더라도 거기서는 아무런 실질적인 결론도 도출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를 슈미트는 압도적 다수의 열렬한 '예'라는 승인을 그대로 구현하는 비상대권을 지닌 자가 주권의 적합한 담지자라고 보았다. 이러한 사고에는 국민투표로 표현되는 압도적 다수의 환호가 '동일성'의 증명이라고 본 그의 명료하게 표현되지 않은 전제가 있다. 그러나 국민투표로 어떤 인격에 대하여 '예'라고 압도적 승인을 했다는 것이, 그 인격과 국민과의 동일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히틀러가 죽는다고 해서 히틀러에 투표한 사람이 죽는 것은 아니다. 둘은 여전히 다른 존재이다. 카를 슈미트는 자유주의적 의회주의를 비판할 때는 다수결에서는 아무런 정당성도 창출되지 않는다고 해놓고는, 국민투표에 의거한 대통령의 비상대권을 지지할 때는 압도적 다수의 '예'라는 투표가 '동일성'을 증명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지적한 야바위 놀음과 비슷한 것이다.

 

맑스에 있어서는, 민주주의는 계급해방이라는 목적을 위해 효과적인 모든 수단과 등치된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그 자체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한 구체화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부인하는 자는 민주주의를 부인하는 자, 적어도 부르주아 국가기구에 휘둘리는 민주주의의 그럴듯한 외피만 둘러싼 현 상태를 옹호하고자 하는 자에 불과하다. '민주주의'와 같은 개념을, 자신의 독특한 역사철학에 따른 역사의 전개 과정, 목적 상태와 결합하여 독특하게 해석하고는, 그 독특한 해석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민주주의를 부인하는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의(definition)는 아무것도 논증해주지 아니하며, 자신이 민주주의라는 복합적인 해석적 이상(complex interpretive ideal)에 대하여 독특한 해석을 취했을 때, 그 해석이 정당한 것임을 논증할 책임은 그 역설적이고 독특한 주장을 펼치는 자에 있다.

 

우리가 '평등', '정의', '민주주의', '자유'와 같은 언어로 지칭하는 개념들은 모두 해석적 개념들(interpretive concept)이다. 해석적 개념들을 엄밀한 해석적 논증 노력 없이, 애매어의 오류를 따라 연접 사고의 고리를 따라서 하나의 정책 패키지로 규정해버린다. 그리하여 평등은 자유의 억압이 되며 정의는 완전성의 추구가 되고 자유는 기본권의 박탈이 되고 민주주의는 독재가 된다. 이러한 기이한 사고 연접의 고리를 따라가서 거기에 푹 젖어든 사람들은 그 사고 연접의 고리를 따라가지 않는 사람들을 곧바로 그 개념들을 꺼내들어 비난한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의 논의 고리를 따르는 이들 중 일부는 이를테면 A를 주장하면서 A가 평등주의 그 자체라고 한다. 그러므로 A를 반대하는 자 또는 A를 비판하는 자는 그야말로 노골적이고 비열한 차별주의자다. 그러므로 자신이 차별주의자라고 자인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A를 지지해야 한다. 이는 A가 주장하는 모든 구체적인 정책 패키지와 규범적 주장들을 승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차별주의자라고 자인하지 않고서 A라는 이념의 모든 정책 패키지와 주장들 논리들을 부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식이다.

 

이들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해석적 개념들과 자신들을 등치시키고는, 그 비판을 물러낸다. 그리고는 그 이념의 구체적 내용에 대한 반대가 제기되면, 당신은 이미 이 이념을 따른다고 동의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이 이념의 구체적인 내용을 모두 따르지 않으면 자기 모순이라고 몰아댄다.

 

이러한 일들이 인류의 역사에는 수도 없이 벌어졌다. 당신이 교인이라면 이러저러해야 한다. 당신이 진정한 민주주의라면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배제의 수사 뒤에 이은 결정의 패키지들을 폭격했던 것이다. 이러한 애매어의 오류를 이용한 담화의 연접 전략은, 논증을 실종되게 만든다. 그러한 책략은 매우 효과적이기 때문에 인류 역사가 시작한 이래로 꾸준히 활용되어 왔다.

 

우리는 일단 알게 되면 그럴듯하고, 신선하고, 통찰력을 주며, 확고하고 단호하지만, 일단 깨닫기 전에는 모르는 심오한 사고를 알게 되었다고 해보자. 그것들이 해석적 개념들의 확정에 필요한 논증적 추론을 엄밀하게 포함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아마도 애매어의 오류를 포함한 책략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한 책략에 스스로 빠져들었다고 해서, 자신이 무슨 지성의 전사라도 되는 양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이 커다란 착각 속에서 카를 슈미트는 나치의 득세와 바이마르 의회주의의 몰락에 기꺼이 기여했으며, 또한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을 통해 지식인의 숙청과 수많은 권리박탈이 일어났으며, 한국과 싱가포르에서는 '--적'이라는 부가어를 붙여서, 보편적인 화용론적 조건을 무시하는 통치체제의 정당성이 창설될 수 있다는 식의 핑계가 통용되었다.

 

지성의 경계를 선다는 것은 그러한 모든 책략의 역사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이 우리가 사는 곳에서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일을 포함한다.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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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2.24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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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앞으로 논증문을 읽을 때 해석적 개념들을 주의깊게 살펴 봐야겠습니다. 유용한 생각도구를 얻어갑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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