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형식화용론과 경험화용론

 

형식화용론이란 무엇인가?

형식화용론은 언어행위에 내재한 가능한 이해도달의 조건을 밝히는 이론이다. 예를 들어 법규범적 화행이 이해가능하기 위한 전제조건 중 하나는, 발화자 이외에 그 법규범 주장의 타당성을 검토할 청자가 있다는 것이다.

 

경험화용론은 일상적 의사소통의 실천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시도하는 학문이다. 그것은 의사소통의 실천이 변하는 과정, 그 실천이 경험적 여건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거나 수행되는 사태 등등을 설명한다.

 

2. 경험화용론이 드러내는 언어적 실천의 복잡성

 

경험화용론은 우리가 시대와 장소의 국지성에 묶인 채로 명명백백한 의미를 갖게 된다고 착각하는 화용의 실천이, 실제로는 그 실천이 이루어지는 배경과 맥락에 따라 매우 역동적으로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수행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익섭, 『사회언어학』, 민음사, 1994에서는 이러한 복잡성을 다른 연구서에서 예로 든 여러 사례를 통해서 보여준다.

 

예를 들어 위 책, 192면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등장한다.

 

(인용시작)

     “What’s you name, boy?” the policeman asked······
     “Dr. Poussaint. I’m a physician······”
     “What’s your first name, boy?······”
     “Alvin.”
이 대화에서 백인 경찰은 미국 영어 호칭의 일반 규칙을 세 번이나 어기고 있다. (Ervin – Tripp 1972 : 233). 첫째 <人種>이란 범주의 갈림목을 자의적으로 신설하여 나이, 지위, 신원 모두를 뭉개 버리고 의젓한 어른에게 <boy>라는 호칭을 쓴 것, 둘째 흑인 의사가 직함과 LN을 대고 신원까지 알려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 경우 경관은 당연히 <Dr. Poussaint>이란 호칭을 쓰는 것이 정상임에도 불구하고 (의사는 존경받는 신분이어서 낯선 사람으로부터 FN으로 호칭되는 일은 미국 영어에서도 없는 일이다) 그런 호칭은 필요 없다는 듯이 FN을 대기를 요구한 것, 셋째 이름을 모르는 사람에게나 쓸 <boy>를 이름이 밝혀진 다음에도 되풀이한 것이 그것이다.
 경관의 뜻은 분명하다. <흑인으로서 어른 대접을 받겠다든가 직업상의 지위를 주장하는 게 말이나 돼, 이 애야.> 흑인 의사는 이 일을 당하고 가슴이 떨리고 자기가 밉기까지 했다고 한다. 호칭 내지 경어법의 선택은 이처럼 話者가 자기 뜻에 맞추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구석이 있다. (인용끝)

 

그런데 boy라는 말 자체는 소년이나 젊은 청년을 가리키는 말로서, 그 자체에는 어떠한 관계 위반의 의미가 붙박혀 있지 않다. 예를 들어 Discrimination against Men and Boys라는 언어를 쓴다면, 거기서는 Boy라고 지칭된 대상에 대한 어떠한 비하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단지 성인과 대별되는 의미에서 아직 미성년의 나이에 있는 남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어가, 경찰이 불심검문을 하는 상황에서 동료 시민에 대하여 쓰인다면, 그리고 또한 상대가 일반적으로 직함으로 통용되는 바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쓰인다면, 그것은 '평등하고 자유로운 관계'를 위반하는 화용으로 의미가 변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boy'라는 말 자체에 어떤 혐의를 둔다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예도 있다.

 

 "Paulston(1975)이 들려 주는 경험담도 흥미롭다. 스웨덴에서는 백화점 점원이 고객에게 언제나 平稱인 <tu>를 쓰고  <ni> 기피한다. 그런데 한 번은 크리스마스 우 문을 연 첫날이었다고 한다. 선물을 교환하고 반환하느라 정신이 없이 법석이는 가운데서 점원이 수없이 <ni>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불만스러운 감정을 소원한 사이에서 쓰는 경칭을 씀으로써 간접적으로 표시한 것인데 어떤 특수 상황이 개인으로 하여금 일반 규칙과 다른 선택을 택하게 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193)좋은 실례라 하겠다."(위의 책, 192-193면)

 

즉 경험화용론은, 어떤 문장이나 단어를 사용하는 발화는, 그 문장이나 단어를 고립된 형태로 다루어 그 의미를 밝히는 의미론의 영역에서 규명될 수 있는 바를 넘어서는, 사회적 의미를 역동적으로 여건에 따라 달리 가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다른 예를 들어보자. 어떤 언어학자가 연구대상으로 삼은 하계 휴양지인 MArtha's Vineyard에서는, 젊은이일수록 외지인의 언어에 대해 비수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언어적 실천이 포착되었다. 

 

"언어 변화의 조짐은 이 고장 사람들이 외지인들로부터 자신들의 고유성을 지키고 그들과 스스로를 구분짓는 어떤 징표를 만들려는 몸짓이 젊은이층으로 내려갈수록 확산되어 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젊은이들로 하여금 외지인들과 스스로를 구분짓고 싶어하는 심리는 왜 일어났을까,
(157) 한때 고리잡이로 좋았을 때도 있었고, 농사나 목장 사업이 괜찮았을 때도 있었으나 1960년 센서스에 의하면 이제는 급기야 매사추세츠 주에서 가장 가난하고 실업률도 가장 높은 곳이 되고 말았다. 자연히 여름철 외지인을 상대로 하는 사업에 의존하는 비율이 높아져 노동력 2,000명이 이일에 종사하는 정도가 되었다. 여기에서 어떤 위기감이 조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상당 부분의 땅이 외지인의 소유가 되었지만 이러다간 마친 인디언들이 당했듯이 이 섬을 다 내주고 빈털터리로 물어나 앉게 되리라는 걱정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곧 외지인들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졌다." (156-157면)

 

이 사례에서도, 외지인의 언어를 수용적으로 활용하는 언어적 습관 그 자체에 무슨 비주체성이 붙박혀 있는 것은 아니다. '얼음보숭이' 대신 '아이스크림'을 쓴다고 해서 사대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변화로 인해 조성된 위기감은, 세대에 따라 다른 수용을 거치게 되고, 이것은 국지적으로 다른 언어적 실천으로 나타나게 된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경험화용론의 틀에서 살펴본 언어적 실천은 같은 시대와 장소에서도 분명한 국지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위 사례에서 외지인의 언어를 덜 수용하는 젊은이들이 그보다 더 수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나이든 세대를 향해, 바로 그러한 언어습관을 견지한다는 이유로 '사대주의자이자, 외지인들의 노예'라고 갑자기 비난한다면, 그것은 국지적인 자신들의 언어적 실천을 보편적인 것으로 잘못 전제한 소치가 될 것이다.

 

이 국지성은 언어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접촉 형식의 다양성에서도 발견된다.

 

"접촉의 형식도 언어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지적되고 있다.(Holmes 1992 : 236-238). 사람과 사람이 직접 얼굴을 맞대고 하는 접촉이 라디오나 TV 들의 매체를 통한 접촉보다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로 알려져 있다. 이는 영국에서 bitter의 (t)를 표준음 [t] 대신 聲聞閉鎖音으로 발음하는 현상의 확산이 런던에서 가까운 지역일수록 더 크게 일어나는 것으로 입증되는데, TV의 영향력이 크다면 런던에서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이라도 이 변화가 더 늦어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매체는 어떤 마음의 자세를 준비하게 하는 구실을 하여 나중에 직접 어떤 사람에게서 새 어형을 접했을 때 그것이 TV에서 자주 듣던 것이면 더 쉽게 그쪽으로 마음의 문은 열게 하는 면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 한 유력한 견해인데, 어떻든 어떤 改新形이 전파되는 것은 매체를 통해서보다 상면하는 사람과 직접적인 접촉에 의해서라는 것이 더 일반화된 견해댜.
 사람들은 한두 사람의 말만 듣고 언어 변화에 가담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주위의 여러 사람들이 다같은 개신형을 쓸 때 비로소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는 우리가 앞에서 파동설 내지 어휘 확산설을 이야기할 때 언어 변화가 단계를 밟으며, 같은 나이 또래에서, 같은 性에서, 샅은 사회 계층 안에서 먼저 번지고 차츰 다른 세계로 그 영역을 넒혀 간다고 했던 것과 일치하는 내용이다."(위의 책, 170-171면)

 

사람들이 어떤 언어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점진적인 과정이며, 단선적이지도 않다. 또한 어떤 계층이나 세대에서는 언어 실천의 당연한 전제로 깔린 것이, 다른 계층이나 세대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TV에서 자주 언어의 표준을 제시한다고 해서 그 표준이 언어 실천의 당연한 전제가 되는 것도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방송에서는 '자장면'이라고 말하고, 방송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은 '짜장면'이라고 발언하는 이중상태가 수십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그리고 인터넷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인터넷상의 언어적 실천에 대한 이해가 표준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인터넷을 거의 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노"라는 말투가 어떤 이상한 이데올로기에 물든 사람들의 혐의를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놀라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매체와의 접촉 유형, 접촉 빈도도 다양하며, 자신의 언어적 생활을 둘러싸고 있는 언어적 실천의 구성적 여건도 다르다. 또한 특정한 언어적 실천에 대한 이해는 그 사회 전체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변동에 따라 달라지며, 이렇게 변동된 여건을 바탕으로 한 이해가 다시 사회 전반으로 널리 퍼지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걸린다. 

 

"중국어에서도 비슥한 현상이 보고 되어 있다(Fasold 1990 : 31-33). 공산 치하가 되면서 <同志>라는 용어가 급격히 신장하게 되었는데, 그 후 세월이 흐르면서 그동안 위축되었던 <이 선생>이나 <老李>류의 전통적인 호칭이 다시 일반화되고 <동지>는 잘 모르는 사람에게 성 없이, 직함도 없이 쓰는 식으로 용도가 한정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잘 아는 사람에게 <이 동지> (아랫사람에게), <동지> (윗사람에게)가 쓰이는 수가 있는데 그때는 특별한 의의가 부여된다고 한다. 즉 아랫사람에게 <이 동지>라고 할 때는 잘못한 일을 견책할 때, 상사에게 <동지>라고 할 때는 그 상사가 뭔가 원칙에 어긋나게 처리하는 일을 바르게 하도록 직언할 때 쓴다는 것이다. 이것은 <동지>라고 하는 용어의 발생 배경상 화자가 그 용어 속에 <인민 전체를 대표하여>라는 뜻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데 어떻든 호칭 선택이 개인의 책략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는 또 하나의 본보기라 하겠다."(위의 책, 195면)

 

위 사례는 '동지'가 거의 모두에게 쓰는 보편적 호칭에서, 그 다음으로는 잘 모르는 사람에게 쓰는 호칭으로서, 마지막으로 잘못한 일을 견책하거나 직언할 때 특별히 강조하는 호칭으로서 바뀌게 된 경우를 보여준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사례는 많이 있다. 종래 높임법으로 단일하게 이해되었던 대명사 호칭은 복잡한 현실전개와 함께 복잡한 사용규칙을 수반하게 되는 수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당신'이다.

 

"대명사 호칭 하나하나의 용법이 까다롭다는 것도 큰 특징으로 꼽을만하다. 한 예로 <당신>은 흔히 是非의 대상이 된다. <워, 당신? 누구한테 당신이라는 거야?>와 같은 언쟁을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된다. <너>보다는 물론 <자네>보다도 더 높여 주는 형식인데 그 <너>나 <자네>에서는 일지 않는 시비가 <당신>에서 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용법이 미묘하기 때문일 것이다. <당신>은 <너>나 <자네>보다 상대방을 높여 주는 등급이라고는 하나 결국은 아랫사람에게 쓰는 등급인데다가 그 경계가 불분명하여 선택해 쓰기가 까다롭기 그지없다. 호응하는 어미도 <당신 직업은 뭐요?>에서처럼 하오체 어미가 되기도 하고 <당신 왜 그래?>처럼 반말체 어미가 되기도 한다. 만일 누가 필자에게 <이거 당신 우산이오?>라는 문장을 쓸 상대를 대라면 글쎄 막막하다. 낯선 사람에게 그렇게 말할 일은 현재의 필자에게는 있을 것 같지 않다. 허물 없는 동료에게 혹 <이거 당신 우산 아니야?>라고 쓸 구 (204)있을까.
 어쩌면 <당신>은 是非用 호칭인지도 모른다. 가령 우리는 자기보다 나이가 적은 택시 운전수쯤에게도 <당신>이란 호칭을 쓰기가 거북하다. <당신 운전 솜씨 좋은데(요)>가 가능하기는 하나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혹시 난폭 운전이라도 하여 <당신 무슨 운전을 이따위로 해?>라고 시비를 걸 때의 <당신>은 매우 적격이다. 부부 사이의 호칭으로만 남고 타인들 사이에서의 호칭으로는 시비용으로 밀려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당신의 우리말 실력은?>이란 책 제목에서는 아무 저항도 느껴지지 않는다. <당신의 고민을 덜어드립니다>라는 신문 광고에서도 마찬가지다. 과연 <당신>의 정체는 무엇일까? 마치 한국어 대명사의 복잡미묘한 용법의 단명을 보이기 위한 標本用과도 같다."(위의 책, 203-204)

 

'당신을 사랑해'나 '당신의 우리말 실력은?'에서 당신을 쓰는 것은 애착이 가거나 중립적인 반면에, '당신 몇살이오?'에서의 당신은 상대방과 일대 전투를 치르겠다는 모종의 결심을 보여준다. 이러한 복잡한 규칙이 애초부터 '당신'이라는 낱말에 붙박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예전에는 자주 썼지만 최근에는 쓰이지 않는 '당신'의 용법도 있다. 제3자를 높이면서 '당신의 의중은 그러하시겠지만' 하면서 지금 대화 참여자에 속하지 않은 시어머니, 지도교수를 칭하는 어법이 그러하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당신'의 뉘앙스를 '당신 도대체 몇살 먹고 이러는 거야'에서 더 많이 가져오게 된다면, 이 용법 역시 사어가 될 것이다.

 

때로 언어적 실천은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문제제기에 의해 바뀌기도 한다. 예를 들어 homo라는 단어는 미국에서 gay라는 단어로 바뀌었는데, homo는 homosexuals의 준말로서 원래 그 자체에 어떤 비하의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 때, 미국의 동성애자들은 두 가지 운동을 동시에 전개했다. 하나는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반대하면서 성적 지향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인정받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인정투쟁이었는데, 어떤 비정상적인 모자란, 결함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바꾸는 것이었다. 후자의 운동 노선에서는, 이러한 인식을 바꿈과 동시에 그러한 지배적 인식 하에서 동성애자를 지칭하는 보편적 지칭어였던 homosexuals을 적극적으로 gay라는 용어로 바꾸고자 했다. 이는 homosexuals나 이의 준말인 homo라는 말 자체가 의미론적으로 어떤 비하의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heterosexual의 준말이 여전히 hetero인 상황에서, 그 개념짝은 homo가 되는 것이 언어구조상으로는 자연스럽다. 다시 말해 오히려 뉘앙스는 사회적 태도에서 단어 자체로 투영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 사회적 태도를 극복해보려는 노력이 새로운 단어를 도입하는 전략과 함께 수반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 과정에서 기존의 단어를 쓰는 사람을 곧바로 gay를 혐오하는 사람이라고 낙인 찍는, 즉 국지적인 언어적 환경을 보편적 언어적 환경으로 곧바로 치환시킨 뒤, 윤리적으로 비난하고 매도하는 방식의 일이 광범위하게 벌어진 적은 없다. 사람들은 새로운 단어를 쓰는 것에 대한 의미를 개별적으로, 또는 부분집단적으로 음미하고 받아들였고, 상당히 긴 기간, 그러니까 약 10년 이상의 기간을 걸쳐서 gay는 homosexuals을 간편하게 부르면서도 중립적인 언어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homo의 줄이지 않은 말인 homosexuals가 퇴출된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 변화가, 미국의 경우를 모방해서 한국에서도 벌어졌다. 즉, '동성연애자'라는 말을 '동성애자'로 바꾸게 된 것이다. 물론 '동성애자'라는 말은 '동성연애자'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난 이후에, 적극적으로 도입된 말이기 때문에, 시초부터 동성연애자와 동성애자가 경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성애자 운동 그룹은 동성연애자가 성적 지향이 아니라 성적 활동을 암시한다는 적극적 해석을 제기하면서, 정상인-동성연애자가 아니라 이성애자-동성애자의 개념쌍을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1970-80년대의 흔한 문헌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성연애자'라는 단어를 쓰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1920년대 학술논문을 살펴볼 때 negro라는 단어가 흑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눈에 띄는 것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 그 당시에는 black man이나, African American이라는 단어 자체가 언어적 실천 속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흑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일거에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흑인에 대한 지칭은 다시 black man/woman에서 빠르게 African American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경험화용론적 측면에서 보면, 언어적 실천은 국지적이면서도 역동적인 여건 하에서 해석된다. 우리가 Betrand Russell의 1910년대 논문에서 negro라는 표현을 발견한다고 해서 그가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이야기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이것은 새로운 언어적 실천의 변화가 일어나기 전뿐만 아니라, 일어나고 있는 과도기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한국에서는 장애인이라는 단어가 통상 사용되다가, 이것을 '장애우'로 바꾸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한참 일었다. 이 움직임의 배후에 있는 아이디어는, 장애인을 공동체에서 배제된 존재로 보지 말고 공동체 내부에서 배려해야 할 존재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움직임은 시작된지 얼마 안되어 다시 무위로 돌아갔다. 이를 무위로 돌린 움직임 뒤에 있는 아이디어는 장애인은 응당한 권리의 향유자로서의 동료시민일 뿐, 특별한 친애관계에서만 요청할 수 있는 혜택을 받는 대상이 아니라는 관념이 있었다. '우'는 벗 우자인데,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민의 관계에 있을 뿐, 특별히 '벗'이 되어야 할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장애인'이 올바른 단어이고 '장애우'는 올바른 단어가 아니라거나, 그 역도 성립하지 않는다. 다만 경험화용론의 측면에서 그 단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대하여 여러 제안이 있었고 그 제안 중 사람들이 보다 그럴법하다고 생각한 제안이 선택되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어느 제안에 찬성하지 않는 일을 장애인 혐오자로 낙인찍는다거나 하는 운동이 광범위하게 있고 나서 언어생활의 변화가 일어난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과정을 볼 때 우리는 언어적 실천의 복잡성에 강한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첫째, 언어적 실천은 시대적, 장소적으로 국지성을 지닐 뿐만 아니라, 전체 언어생활의 네트워크의 지도에서 자신이 자리하고 있는 위치(즉, TV를 많이 보는가, SNS를 많이 하는가, 외국의 사정에 빨리 반응하는가, 주위에 어떤 언어를 써는 사람이 많은가)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둘쨰, 이러한 언어적 실천의 국지성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언어적 실천의 여건이 보편적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셋째, 이러한 언어적 실천 여건의 보편성에 대한 착각은, 특정 단어 자체에 그 사람의 인격을 결부시키는 위험을 배가시킨다. 즉, 사람들이 각자 어떤 단어를 다르게 사용하고 받아들일 가능성을 부인함으로써, 어떤 단어를 쓰는 사람은 어떤 신념을 견지하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넷째, 언어적 실천의 변화는 역동적으로 일어나는 바, 이러한 역동적 변화는 때로는 의도적인 움직임과 주체의 발언에 의해서도 일어난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이 실제로 효과를 낸 경우는 성급한 낙인찍기와 배척이 아니라, 진지한 제안과 그 제안의 설명, 그리고 그 제안에 공감하는 자들의 언어적 실천의 확산에 의해 벌어진 일이다.

다섯째, 만일 어떤 언어적 실천의 함의에 대해서 사람들 사이에 광범위한 논의가 벌어진다면, 그것은 특정 언어적 실천의 표준성에 대해서 아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따라서 지속적 제안과 논의가 필요하다는 증거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무언가가 '정답'이다라고 단정할 수 없고, 다만 자신의 제안을 설명하고 권고하는 실천만을 지속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섯째, 언어적 실천의 변화가 항상 실질적으로 진보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며, 동일한 사태를 그냥 다른 이름으로 부름으로써 사태의 실제 해아이 사라졌다는 착각과 환상을 낳기도 한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언어의 배후에 있는 실제 현실의 개혁이며, 낙인찍기와 배척으로 언어를 검열하는 것이 역사상 유의미한 개혁 자체를 의미하는 경우는 없었다.

 

<끝>

 

 

 

 

 

에 대한 당시의 사회적 태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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