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들과 함께 즐겨 쓰는 은어(隱語) 중에 "칸트적"/"비칸트적"이라는 말이 있다.

 

이 단어의 사용에는 언제나 다소 코믹한 뉘앙스가 포함된다.

 

그래도 그 기준을 학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 기준은 Immanuel Kant,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백종현 옮김,『윤리형이상학』, 아카넷, 2005, 151면에 나온다.

 

거기서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행위가 또는 그 행위의 준칙에 따른 각자의 의사의 자유가 보편적 법칙에 따라 어느 누구의 자유와도 공존할 수 있는 각 행위는 법적이다/권리가 있다/정당하다/옳다.
 그러므로 나의 행위가, 또는 일반적으로 나의 상태가 보편적인 법칙에 따라 어느 누구의 자유와도 공존할 수 있을 때,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을 방해하는 자는 나에게 불법/부당함을 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해(저항)는 보편적 법칙들에 따라 자유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위 구절에서 비롯한, 은어로서 칸트주의자란, 우리의 행위 지침이 자유를 행사하는 인격적 주체들 사이의 정당한 관계를 위배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데 우선성을 두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반면에 비칸트주의자에게는 우선성이 다른 곳에 가 있다.

 

쾌락주의적 비칸트주의자는 자신의 쾌락을 우선하는 고려사항으로 삼는다.

 

비쾌락주의적 비칸트주의자는 자신이 신봉하는 종교, 가치관, 정치이념을 최선으로 추구하는 것이 우선적인 사명으로 삼는다.

 

쾌락주의적 비칸트주의자는, 우리 사회 특유의 준엄한 분위기 때문에, 적절하고도 정당하게 비판을 받는다.

 

누군가가 '나는 나의 쾌락을 위해 너의 권리를 침해하겠다'라고 이야기하는 경우에, 그 사람은 존중받지 못한다.

 

그러나 비쾌락주의적 비칸트주의자는 언제나 그들의 가치지향을 공유하는 서클 내에서는 상당한 존중을 받기 때문에, 자신이 자주 접촉하는 사람들의 종류를 조절함으로써 적절하고도 정당한 비판을 손쉽게 피해간다.

 

특히나 비쾌락주의적 비칸트주의자들, 즉 자신들의 가치지향을 관철시키는데 초미의 관심사가 가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권리'를 그들의 '목적'에 맞게 주형한다. 에를 들어 자신들의 가치지향 관철에 저해가 되는 표현은 진정한 표현의 자유에 속하지 않는다고 정의(define)해버리는 것이다. 목적을 위한 권리의 자의적 주형은 비칸트주의자의 표지지만, 권리 분석의 기본 소양이 널리 퍼지지 않은 사회에서는, 이러한 특징은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권리라는 것을, 어떤 이익이나 가치를 관철하기 위한 도구적인 무기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바로 비칸트주의자의 권리 이념상에 함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칸트주의자는 자신과 가치지향을 달리하는 사람이, 하나의 실천이성을 가진 목적적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자신의 가치지향을 수용해야 할 그릇이라고 본다. 만일 그 그릇이 주제에 맞지 않게 그 가치지향을 수용하지 않으면 당연히 그 그릇은 찌그러져야 하고 주물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칸트적/ 비칸트적이라는 은어 사용은 실제로 칸트가 구체적인 사안들에 대해서 했던 말과는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칸트는 설사 제3자를 해하려고 하는 사람이 제3자가 어디 있냐고 물었을 때,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답했다. 또한 칸트는 국가가 멸망하더라도 감옥에 갇혀 있던 사형수들은 모조리 사형을 시켜야 정의가 실현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칸트는 어떠한 경우에도 자살은 권리에 속하지 아니한다고 보았다.

 

칸트가 이런 결론을 내리면서 근거로 제시한 논증은, 그 자신의 '자유'에 대한 초점을 잃어버리고 엉터리 형식주의에 빠진 성격의 것이다.

 

우리는 그러므로 칸트의 구체적 사안에 대한 언급들을 금과옥조로 삼아 매달릴 필요는 없다.

 

걸출한 사상가가, 자신의 사상이 훨씬 더 정교하게 발전되었을 때 함의하는 바를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는 흔하다.

 

예를 들어 존 로크는, '세대가 바뀔 때마다 정부는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나, '사람들이 재산권을 가질 때는 다른 사람이 가질 것을 충분히 남겨두어야 한다'는 그의 단서가 어떤 함의를 가지는지 논리적으로 끝까지 철저하게 밀고 가지 않았다.

 

사상가의 어깨 위에 선다는 것은, 그 사상가의 타당한 논증들을 활용하여 철저하게 정교한 논증을 이어가는 것이지, 그 사상가가 사는 게 바빠서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뱉었던 말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다.

 

칸트주의의 필요성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미분화되지 않았던 단순한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윤리적으로 자신의 중심을 확고히 세울 필요가 없었다. 추장의 말은 자연의 말이며, 그 말을 듣지 않았을 때는 저주를 받고 꽤꼬닥 한다.

 

반면에 사회가 여러다른 체계로 분화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곳곳에서 제기되는 다종다양한 체계의 논리에 질식할 정도로 정신을 잃게 된다.

 

특히 오늘날 사회는 인간 불신에 빠지기 쉬운 사회다.

 

어디에서나 권력 남용과 가치지향의 관철을 위한 상호 공격이 만연해 있다.

 

오늘의 동지는 내일의 적이 되며, 오늘 합법적이라고 믿었던 지시가 내일은 불법적인 것으로 드러날지 모른다. 조직과 분화된 공동체들은 자기들의 논리를 내세우며, 그 논리를 따르지 않는 자를 이탈자와 배신자로 몬다.

 

이런 시대상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실존적으로 직면한다.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무엇을 기준으로 행위하여야 하는가?

 

이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그 사람은 칸트주의자다.

 

또한 우리는 타인의 자유를 교호적으로 존중하는 보편적 자유의 법칙을 우선적 기준으로 삼아 행위하여야 한다.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이 칸트주의자인 것을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

 

첫 번째는 인지적 방법이 있다.

 

누군가 보편적 자유의 법칙을 제대로 이해하였는가를 여러 구체적인 사례를 물음으로써 확인할 수 있다. 이 사례에서는 대충 그럴법하게 답했지만 저 사례에서는 전혀 엉뚱하게 답한다면 그 사람은 칸트주의자가 아니다. 그 사람은 동료 시민이기는 하지만, 잠정적 교류 대상이다.

 

반면에 이 사례에서의 답변과 저 사례에서의 답변이  "나의 행위가, 또는 일반적으로 나의 상태가 보편적인 법칙에 따라 어느 누구의 자유와도 공존할 수 있을" 그러한 원칙에 기초한다면, 그 사람은 칸트주의자다.

 

두 번째는 감성적 방법이 있다.

 

대단히 인기 없는 인물이 보편적 권리를 침해당했을 때 그 사람의 반응이 그 점을 감지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태도를 보이는가, 아니면 조롱과 경멸과 멸시로 덮고 넘어가는가.

 

이것은 의도적으로 가해진 해악 뿐만 아니라, 우연에 의해 발생한 재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친하게 보지 않는 이웃 나라의 시민들이 자연재해를 수없이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긴양 축하 댓글을 다는 자들은 비칸트주의자들이다.

 

예전에 정절을 도덕주의적으로 강조하던 개신교 목사가, 신도와 불륜을 저지르다가 그 신도의 남편이 들어와 에어콘 실외기에 매달려 있다가 힘이 빠져 추락사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보고 포복절도를 하며 아주 응당한 일이 벌어졌다고 소리치는 사람은 이러한 감성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다.

 

이 사람이 응당한 자리에 놓는 이가 내일은 내가 될지 어떻게 알 것인가.

 

칸트주의자 감지 능력은 자연적으로 타고 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배움과 자기 훈련이 필요한 일이다.

 

그러한 세월을 겪었을 때, 나이가 어느 정도 숙성된 칸트주의자는 칸트주의자를 알아본다.

 

그 시기가 올 때까지 인생의 시행착오는 어느 정도 거치기 마련이다.

<끝>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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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강의
    2016.12.18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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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리학의 기본원리 재업로드 부탁드려요! ㅠㅠ 들을 길이 없네요
  2. 2016.12.20 10:3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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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합니다, 오늘 중으로 복구하도록 하겠습니다!
  3. 2016.12.21 23:2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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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구 완료하였습니다.
  4. 그리움
    2017.01.03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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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 잘 듣고 있습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3장, 4장 강의 녹취 파일의 마지막 파트가 없다는 점입니다. 물론 혼자 읽어나갈 수도 있고, 강의교안도 있기에 치명적인 문제는 아닙니다만, 녹취파일을 누락하신건지, 소실되서 올리지 않으신건지 궁금하네요 ㅠㅠ (5장의 강의녹취는 (3) (4) 강의가 뒤바뀌어있네요!)
    • 2017.01.17 18:2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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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을 늦게 확인했습니다. 5장 강의 순서를 바로잡아 두었습니다. 3장 4장 강이 지금은 뒷 부분 있는 것 같은데, 다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5. 그리움
    2017.01.03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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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강의 게시물에 댓글달기 기능이 금지되어 있어서 여기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위와는 별도로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4장 5절에서 공리주의자의 논리(에 대한 서술이) 빈약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여서, 폴테일러가 의도적으로 주장을 축소시킨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해서요.

    정의와 유용성 간의 충돌은 어떤 '추상적인' 케이스를 가정한 것이고, 공리주의자들은 이를 해명해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럴 일이 없다. 는 각각의 논점을 갖고서 대립적인 서술이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이해되는데요. 그렇다면 '실제'에 대한 공리주의자들의 입장은 어떠한가를 상세하게 밝혀줘야 할 것인데, 가장 필요한 그 얘기는 짤막하게 하고 그와 비슷한 혹은 보다 더 큰 비중으로, 공리주의의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결단이라는, 진행되는 논점과는 무관한 공리주의의 특성을 서술하고 있거든요. 그래놓고 끝에 가서는 '이게 성공적인 반론인가는 독자들이 생각해보라'고 하면 당연히, 공리주의의 논거에 대한 빈약한 서술을 읽은 독자가 어느 입장을 옹호할 지는 너무 자명한 것 아닙니까? ㅠㅠ 책을 읽는 흐름이 끊기는 지점도 여기였습니다. 제가 오독한 것인가요.
    • 성우맨
      2017.01.05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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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먼저 이론적인 가능성에 대한 추상적인 사색을 떠나 우리 주변의 실제세계를 대하게 될 때 정의와 유용성 간의 어떠한 충돌도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공리주의자들은 위의 사례들이 외견상 그럴 듯하게 보이는 것은 그 사례들이 역사와 사회의 현실적인 전개과정에서부터 추상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과정이 충분히 고려되면 부정의가 필연적으로 큰 비유용성을 산출할 것이 분명해진다고 주장한다.” <윤리학의 기본원리>, 서광사, 1985, 110쪽

      위의 인용문의 앞부분에 나오는 사례, <한 개인을 불행하게 만들어서 집단의 행복을 더 크게 증진시킬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와 같은 “정의와 유용성 간에 충돌”이 일어나는 문제에 대하여 공리주의자들이 그것은 “이론적인 가능성에 대한 추상적인 사색”일 뿐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구체적인 사람들로 이루어진 실제 사회의 복잡한 전개 과정에 대하여 제대로 고려한 유용성의 원칙은 유용성과 정의가 충돌하게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보다 큰 유용성을 산출하기 위해서” 복잡한 사회에는 규칙이 존재해야 하며 그 규칙은 안정성이 있어야 하며 안정성이 있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며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 규칙이 공정해야 하기 때문에 유용성의 원칙은 결국 공정한 규칙을 도입하기를 요구할 것이며 이러한 공정한 규칙으로 규율되는 사회에서는 유용성과 정의가 충돌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지만 사회 전체의 효용은 증진시키는 규칙이 사회에 도입되면 어떡할 거냐?”는 질문에 대하여, “사람들은 공정한 규칙이어야 자발적으로 따르고 자발적으로 따르는 규칙에 의해 규율되는 사회가 안정적이고 안정적인 사회가 불안정한 사회보다 더 효용이 많이 산출되므로 공정한 규칙이 효용 최대화 원칙에 의해서도 도입될 수 있다!”라는 반박을 펼치는 맥락에서 ‘자발성’이라는 실제 구체적인 사람이 갖는 심리적 특성이 언급이 된 것이기 때문에 자발성은 해당 논점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6. 그리움
    2017.01.03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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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꾸 질문을 하게 되네요..ㅠㅠ

    4강 5절의 강의교안 '변명에 대한 비판' i) 에서 공리주의의 변명이 도덕적 쟁점을 해결하는 일에서 회피하게 된다 는 말은, 그 변명이 여전히 (i) '추상적인 케이스'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여전히 해결하지 않고 있다 는 비판인가요? 또한 그것이 비판으로서 성립가능한 이유는 '추상적인 케이스'가 말처럼 '추상적'인, 전혀 실현 불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현실의 문제상황을 회피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면 될까요?
    • 성우맨
      2017.01.05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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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용성과 정의가 충돌하게 된다는 비판에 대하여 공리주의자들은 더 많은 유용성을 산출하기 위해서는 사회는 조화로워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회는 정의의 원리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이 변명에 대하여, 강의교안에서는, “변명에 대한 비판: i) 정의의 원리를 무시한다고 비판받지 않으려고 이런 변명을 하게 되면, 결국 유용성 원리는 도덕적 쟁점을 해결하는 일의 전면에서 빠지게 되고 전혀 독립적인 원리인 정의의 원리가 전면에 나서게 되고, 유용성 원리는 정의의 원리를 보조하는 덧붙이는 말에 지나지 않게 된다.”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여기서 도덕적인 문제를 회피한다는 지적은, 도덕적인 문제에 대하여 <공리주의> 체계만으로 정합적으로 해결을 하지 못하고 외부의 독립적인 규범적 원리를 갖고 오고 있다는 비판인 것입니다. 이는 <공리주의>는 “목적론적 윤리체계”로서 옮음이 좋음에 의존한다는 신념 체계인데, 여기에서 공리주의자들은 유용성과 정의가 충돌되지 않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좋음과 무관한 독립적인 ‘옳음’이 먼저 있어서 이것에 의해 공정성이 판정된 규칙이 도입이 되어서 사회가 규율되어야 한다고 하고 있기 때문에 <‘옳음’이라는 것은 결국 모두 ‘좋음’에 의존하는 것이다!>라는 공리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를 무너뜨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 그리움
      2017.01.06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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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감사합니다. 이렇게 손을 뻗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ㅠㅠ 몇년을 공부하셔야 이런 내공이 쌓일까요. 저도 집이 포항인 대학생입니다.. ㅎㅎ

      실례지만 5장에 대해서도 좀 여쭤보려고 합니다. 칸트가 '도덕규칙이 경험적인 고찰이 전혀 없이 선천적으로 확립될 수 있는가'를 확인하려고 한다고 하는데, 경험적인 고찰이 없다는 것의 의미를 확실히 하고 싶습니다.

      (1) 5장 2절, 칸트의 선의지에 대한 세 가지 명제를 설명한 다음의 문단(죄송합니다. 제가 가진 책과 판본이 달라서 페이지수가 차이가 나는 까닭에 이렇게 복잡하게 짚을 수밖에 없네요. ㅠㅠ)에 의하면, "칸트는 우리의 의무가 '실제로' 무엇인지 말한 적이 없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또한 여기서 5페이지 정도 넘어가면 '목적의 왕국'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이것은 (강의 녹취에 의하면) '현존하는 도덕규칙이 따를 만한 것인지, 아닌지를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칸트의 문헌을 통틀어서, 그는 항상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는 규칙은 내가 (순수하게 이성적으로 추론하여 확립한) 기준에 위배된다'는 식의, 소거법적인 주장만 하고 있는가요?
      경험적인 고찰이 없어서 일관성 있다는 장점을 지닌 '규칙을 판별하는 기준'을 만들어내긴 하였지만, 절대로 '무엇이 실제 규칙인지(무엇이 규칙이 되어야 하는지와는 다른 의미)'는 말하지 않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은지 궁금합니다. 경험적인 고찰을 하지 않는 건 좋은데, 덩달아 구체적인 규칙도 만들어서 내놓지 않는...?

      (2) 5장 2절, 목적의 왕국 이전에 있는 페이지들에서 칸트는 정언명령의 세 가지 조건(형식)을 제시하는데요, 1) 보편적이고 보편적이지 않은 것 2) 수단이 아니고 목적으로 대하는 것 3) 의지와 강압을 판별하는 것은 모두 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닌가요? 이것이 엄밀한 의미에서 '경험적인 고찰을 배제한 것이라 할 수 있는지'.
      또한 위의 접근방식이 너무 깐깐하다고 생각되어, 일단 선천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여준다면, 개별 행위자의 본래적 가치를 sigma(총합)하는 공리주의도 그렇다면 '구체적인 도덕규칙을 창출하는 근본 원리에' 선천적인 수학적 진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경험적인 고찰이 없다고 할 수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 성우맨
      2017.01.07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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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갑습니다~! 메일이 한 통도 안 와서 조금 슬퍼지려는 참이었는데 너무 신기하고 반갑습니다~ 방학이시겠네요 ㅎㅎ 저는 이제 막 공부를 시작을 해보려고 하는 중인데요. 아무래도 같이 하면 좀 더 재밌지 않을까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

      아.. 질문 주신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서 제가 답을 드릴 수 없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다른 분들께 답을 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그리움
      2017.01.08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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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장 1절 본래적 가치의 개념에서 (i)을 분석하는 마지막 문단에 "왜냐하면 그가 그 자체로서 바라는 어떤 것이 바람직하지 못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는 테일러의 서술에 대해서, 강의 녹취록에는 "(i)의 정의를 반박할 때 이런 식으로 가치진술과 사실진술을 섞어서 반박해서는 안 된다(09:40)"고 하시면서 문제적 표현이라고 지적하셨고, 상기한 테일러의 서술보다는, "바람직한 것을 실제로 바라지 않을 수도 있고, 자체로서 바라는 것이 목적적으로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11:10)"라고 하셨는데요.

      (1) "바라는 어떤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와 (2) "자체로서 바라는 것이 목적적으로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문장에 왜 차별을 두시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1)과 (2)는 동치인 문장이 아닌가요? 가령 (2)의 사례로서 전 여자친구의 구두를 수집하는 데 집착을 하는 예시를 들고 계시는데, 이것은 (1)의 사례도 충분히 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해서요. 그리고 (2)를 설명하는 와중에도 결국에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바라고 있을 수도 있다(13:44)"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1)의 문제점을 왜 지적하신 건지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아서 질문을 드립니다.
    • 2017.01.08 23:3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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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트는 도덕판단을 선험적 판단 형식에 자리하게 하고자 하는 기획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기획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질문하신 '그리움'님의 의문이 생긴 것입니다.

      칸트가 도덕판단을 선험적 형식에 속하려고 했던 이유는 그러나 알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칸트가 주로 겨냥한 것은 흄의 도덕철학입니다. 흄은 우리의 '자비심'을 매개로 해서 도덕적 법칙이 성립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칸트는 우리가 현실에서 특정한 시점에 얼마만큼의 자비심을 갖고 있는가에 따라, 도덕법칙이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하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는 오로지 도덕법칙을 준수하려고 하는 순수한 선의지 위에 정초하고자 했습니다.

      둘째로 칸트의 기획은, 우연한 경험적 사실이 도덕규칙 자체를 바꾸는 경우를 배제하고자 했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몰래 훔쳐보는 것이 옳은가의 질문이, 그렇게 몰래 훔쳐보는 짓이 들킬 가능성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칸트의 실수는, 이러한 불합리한 경우를 배제하기 위해서는, 도덕법칙의 추론이 순수히 선험적인 판단이어야 한다는 전제를 도입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불합리한 경우는 그러한 무리한 기획을 하지 않고서도, 배제가능합니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인격체들이 그들 사이의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를 훼손하지 않으면, 그 상황에서 어떤 법칙을 일반적 행동의 조정원리로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관계 준수'에 초점을 두는 계약론적 질문으로 배제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롤즈를 비롯한 현대의 자유주의 계약론자들은, 칸트의 '선험적 판단 형식'에 도덕법칙을 넣고자 하는 기획을 일반적으로 따르지 않습니다.

      질문하신 분의 의문처럼 그 의미가 무엇인지 불분명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롤즈는 흄에게서 i) 적절한 부족 상태 ii) 제한된 자비심과 제어가능한 이기심 iii) 포괄적 가치들의 상충 iv) 이해관심의 상충이라는 객관적, 주관적인 정의의 여건을 빌려 옵니다.

      이러한 정의의 여건 위에서도 구체적인 정의의 원칙을 도출할 때에는, 그것이 덜 근본적인 파생적인 원칙일수록, 더 많은 경험적 자료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그래서 롤즈는 정의의 원칙 수립, 제헌 단계, 입법 단계로 갈수록 무지의 베일의 두께를 얇게 하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칸트의 기획은 그러한 것이었지만, 실제 칸트가 목적으로 삼았던 바는, 그 달성할 수 없는 기획을 필수로 포함하지 않는 방식으로도 해결될 수 있다고 정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 2017.01.08 23:4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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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장 1절에 관한 질문에 대하여:
      여기서는 근본적인 가치론이 문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치론이 도덕추론에서 극히 중요하게 되는 도덕이론은 목적론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목적론에서는 근본적인 가치론을 전개할 때, 그 목적론적 도덕이론의 구체적인 규준을 순환논리적으로 들이대지 않는 것이 논의의 순서상 중요합니다.

      그래서 본래적 가치와 수단적 가치를 구분하는 기준에, 그 가치론을 바탕으로 해서야 비로소 나올 수 있는 도덕적 기준을 넣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그 부분을 살펴보면, 그 부분 강의의 맥락은 오로지 '욕구 주체의' 주관적 기준만으로 '본래적/수단적' 가치를 구분하는 것은 실제 쓸만한 보편적인 기준을 생성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곳입니다.

      즉, 경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본래적 가치는 전혀 바라지 않으면서 수단적인 가치만을 바라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1)

      이것은 그들이 바라는 것이 윤리적 기준에 어긋난다는 말 (2)과는 다릅니다.

      (1)은 근본적인 가치론의 지평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2)는 어떤 행위를 권고하고 지도하는 윤리학적 규준의 지평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윤리학적 규준을 가치론에서 끌어내려면, 가치론의 중요한 구분(본래적 가치/수단적 가치)를 할 때 윤리학적 규준을 먼저 삽입시켜서 순환논리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부분 언급의 논지입니다.

      (2)를 설명하면서 오도할 수 있는 표현이 강의에 나오게 된 것은, 말이 헛갈려서 그렇습니다.
  7. 그리움
    2017.01.04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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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의제국과 자유론 강의 mp3파일 복구부탁드려요! 법의제국 같은 경우 링크는 있는데 404error가 뜨네요!)
  8. 관리자
    2017.01.06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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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의 제국 강의 오늘 중에 복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9. 2017.01.07 00:3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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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의 제국 강의 복구되었습니다.
    • 그리움
      2017.01.09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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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복구 및 답변 달아주신 것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혹시 '자유주의적 평등'도 복구 가능할까요? 저술 연대상 법의제국보다 먼저 봐야 할것 같아서요!
  10. 2017.01.09 04: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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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합니다. 자유주의적 평등도 복구하였습니다. 앞으로도 복구 우선해서 할 것 알려 주시면 최대한 빨리 조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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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민주주의와 사회윤리학 담론 형성을 위해 노력하는 '시민교육센터-배움의 연대망’ 홈페이지 입니다. 이곳에서는 열린 강의 형태의 시민교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트위터 아이디: civiledulee, 이메일: civiledulee@gmail.com (이한)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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