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90년대에 이름을 한창 날리던 인물이 있었다.

 

그의 존함은 PKONG으로, 대한민국의 언론과 학계, 그 외의 모든 곳에 주사파가 암약하고 있다는 매카시적 폭탄 선언을 함으로써, 지배권력세력의 일약 스타로 떠올랐으며, 한창때는 모든 언론이 그의 말을 받아 적을 정도로 대단한 뉴스 제조기였다. 당연히 지배권력에 반대하는 이들에게는 악명 높은 인물이 되었다.

 

PKONG은 암약하는 주사파들이 도처에서 권력을 꿰차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이들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는 거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암약하고 있는 이들이 누구냐고 묻는 이들이야 말로 바로 주사파라고 일갈하였다. 감히 짐의 말을 의심하다니 너야말로 악의 세력에 임하였구나라는 취지의, 토종 궁예의 관심법과 외래 매카시의 몰아치기의 인식론적 종합이 대한민국 땅의 한 인물을 통해 현현하였던 것이다.

 

주사파은 그러나 극히 소수에 불과하였고, PKONG의 주장과는 달리 그렇게 모든 곳에 암약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주사파을 정확하게 정의하자면 다음과 같은 요건을 모두 만족하는 이들일 것이다. 이들은 한국사회의 핵심 문제가 바로 미제국주의에 의한 식민화에 있다고 보며, 한반도 전체가 북한과 유사한 국가가 되는 통일을 달성함으로써 이러한 핵심 모순을 제거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당연히 이들은 북한의 핵개발이나 핵을 빌미로 한 모든 외교전술을 지지하였으며, 북한사회에 대해 한국사회에 널리 퍼진 묘사-생존이 힘든 전체주의 사회-는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오히려, 북한사회는 남한이 지향해야 할 사회상을 보여주며, 역사적 계기가 주어진다면 이러한 사회상을 지향하는 혁명을 수행해야 하며, 북한이 다시 남침을 하게 될 경우에는 이에 부응하여 남한 내에서 작전을 전개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물론 이러한 생각을 가진-이러한 핵심 요건들을 모두 갖춘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러한 부정의하며 황당한 생각을 하는 이들이 전혀 없다고 부인해온 이들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는 않았다. 그들은 일부 존재해왔고, 다만 그 비의를 철저히 입교 의식을 거친 자들에게만 전달했기 때문에 대중에게는 드러나지 않았던 것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교 의식과 순차적인 비의전달이 필요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들이 극소수에 불과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런데 PKONG은 어찌하여 이들이 대한민국에 엄청난 수가, 그것도 사회각계에 두루두루 포진해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을까? PKONG의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명제p: X는 주사파이다.

명제q: X는 남한의 현 정부와 현 질서를 비판한다.

 

pq

 

주사파가 항상 남한의 현 정부와 현 질서를 비판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에 위 명제는 참이다.

 

그런데 여기서 PKONG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낸다.

 

qp

 

 

, 남한의 현 정부와 현 질서를 비판한다면, 그 사람은 주사파이다.

 

오늘날 현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많듯이, 그 당시에도 당대의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논리에 의하니, 세상에 어마어마한 수의 주사파이 있다는 황당한 결론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후건 긍정의 오류를 범한 것이다.

 

 

후건 긍정의 오류란, 참인 명제의 후건을 긍정함으로써 전건의 참을 도출할 수 있다는 망상이다.

 

 

p: 어떤 것이 사람이다.

q: 어떤 것은 죽을 존재이다.

 

pq

 

어떤 것이 사람이라면 그것은 죽을 운명의 존재이다.

당연히 이것은 참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진술을 이끌어낼 수는 없다.

 

qp: 어떤 것이 죽을 운명의 존재라면, 그것은 사람이다.

 

이것이 옳다면 다음과 같은 증명이 성립한다.

 

개는 죽을 운명의 존재다.

죽을 운명의 존재라면, 그것은 사람이다.

따라서 개는 사람이다. <q.e.d.>

 

또는 다음과 같은 증명도 성립한다.

 

삼각형은 도형이다.

사각형은 도형이다.

도형은 사각형이다.

따라서 삼각형은 사각형이다. <q.e.d.>

 

후건 긍정의 오류를 논리학 체계 내에 받아들이면 필연적 거짓인 명제조차도 참이 된다. 따라서 논리체계 내에 모순이 생기게 되고, 모순이 생긴 논리학은 무슨 명제든지 모두 참으로 산출한다.

 

, 후건긍정의 오류를 저지르면서도 자신이 오류를 부인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개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연역적 증명도 거부할 수 없게 된다.

 

후건긍정의 오류와 논리적 등치인 것이 전건부정의 오류다.

 

왜냐하면

 

pq의 대우는 ~q~p인데, 여기서 ~p에서 ~q를 도출하는 경우 후건긍정의 오류를 범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PKONG의 논리 중 일부는 다음과 같은 전건부정의 오류를 범했다.

 

주사파을 법으로 처벌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주사파을 비판하는 사람들이다. pq

주사파을 법으로 처벌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주사파을 비판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p~q

 

그러나 이 논리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논리가 성립한다.

 

사람은 포유류다. pq

사람이 아니라면 포유류가 아니다. ~p~q

그렇다면, 개는 사람이 아니므로, 개는 포유류가 아니다. (q.e.d.)

 

그런데 이런 오류를 범한 것은 비단 PKONG이나, 오늘날 그의 논리학을 계승하고 있는 서슬퍼런 후계자들뿐만은 아니다.

 

당시 학생운동조직에서의 흐름을 하나의 예로 살펴보자.

 

90년대 초반, 모든 학생운동조직은 하나의 연합체 내에 있었다. 심지어 생일이 되면 주사파나 이와 어느 정도 세력적 친근성을 가진 이들이 아닌 이들도 H 진군가를 부르면서 술집 앞에서 생일인 사람의 몸을 마구 짓밟아 대며 생일축하를 하는 것이 통례였다는 점은, 그 당시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그러나 90년대 중반을 거쳐 90년대 후반을 가면서 분열은 강화된다. 몇몇 학생운동조직은 H에 참여하고 있는 일부 세력이 주사파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보았고, 결국 많은 학생정치조직들이 연합체인 H에서 탈퇴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러한 재편성의 와중에, 공권력의 담당자인 검찰은 다음과 같이 논리를 전개했다.

 

주사파는 H에 가입해 있다. pq

따라서 H에 가입해 있다면, 그것은 주사파이다. qp

그리하여 H에 가입하였다는 사실만으로 국가보안법위반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증명도 성립한다.

주사파는 한국 소속이다. pq

따라서 한국 소속이라면, 그것은 주사파이다. qp

그리하여 한국 소속이라는 사실만으로 국가보안법위반이다.

 

물론 여기에는 주사파라고 해서 현행법인 국가보안법 위반에 곧바로 해당한다는 법해석의 오류도 덧붙여졌다. 개인의 내적 신념이 주사파라고 해도, 그것이 실정법에서 규정한 외부적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법은 그 적용대상을 잃는다. 결국, 당시 검찰은 일부 세력이 주사파의 신념을 갖고 있다는 명제에서부터 두 번의 논리적 비약을 범한 것이었다. , 만일 실정법 위반의 전제가 되는 내적 신념을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다면 곧바로 실정법 위반이라는 일단의 비약을 한 다음, 다시금 그러한 사람이 가입된 조직이나 집합에 함께 가입되어 있다면 그러한 사람과 동일하다는 이단의 비약을 한 것이다.

 

당시, H의 세력 중 일부를 이루고 있었던 주사파에 비판적이었던 학생운동세력은 일부는 H자체를 개혁하겠다는 혁신안을 들고 나오고, 일부는 처음부터 분리를 시도하였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세력들은 모두 집단적으로 탈퇴 선언을 하거나, H'처음부터 참여가입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함으로써, H와의 결별을 시도했다.

 

그러나 검찰은 이 모든 사실들은 도외시하고, 학생회 선거가 치뤄져서 단과대학 학생회장이 되는 즉시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대대적인 인신구속에 나섰다. 그리고 나서 구속상태에서 ‘H 탈퇴서를 써내면 석방하고, 써내지 않으면 계속 구속으로 잡아두었다.

 

검찰의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어떤 사람이 H의 대의원이라면, 그 사람은 단과대학 학생회장이거나 총학생회장이다. pq

(H의 대의원 자격이 단과대학학생회장급 이상일 것을 요구하므로 이 명제는 참이었다.)

여기서 검찰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했다.

 

어떤 사람이 단과대학 학생회장이거나 총학생회장이라면, 그 사람은 H의 대의원이다.

qp

 

그래서 H와 함께 하지 않을 것임을 결정한 모든 학생회장들에 대하여도 검찰은 수배하고, 체포하고, 구속하고, 탈퇴서를 내지 않으면 풀어주지 않았다.

 

여기서 또 희한한 검찰의 보충논리가 등장한다. 이로써 검찰은 당시 삼단의 논리비약을 범했다.

 

검찰의 보충논리는 H에서, 모든 단과대학 학생회장 이상의 학생회 간부는 H의 당연직 대의원이 된다고 규약에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H의 당연직 대의원에서 벗어나려면, '검찰에' '탈퇴서'를 제출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검찰의 보충논리에 의하면 괴이한 일이 법의 이름으로 자행된다. 어떤 조직폭력배조직이 '대한민국의 20세 이상 남성은 모두 이 조직의 당연 조직원이 된다'고 그 규약에 규정한다면, 모든 20세 이상 남성은 검찰에 탈퇴서를 내지 않는 한, 조직폭력단의 구성원으로 처벌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된다.

 

어떤 조직에서 당연직 성원 포함규정을 두고 있다고 해서, 그 조직의 일원으로 처벌받지 않기 위해서는 당연직 성원에서 탙퇴한다는 탈퇴서를 국가기관에 내라는 논리는 따라서 무도한 사고이다. 이 사고 흐름에 따르자면, 대한민국 국민이 출생하거나 일정 연령에 이르는 즉시 당연직 성원이 된다는 규정을 둔 검찰이 불법으로 규정한 단체만큼의 수만큼 모든 국민들은 탈퇴서를 경찰이나 검찰에 제출하지 않으면 처벌받는다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구를 검찰이 하는 것은 또한 양심의 자유에 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신념을 가진 세력이 가입해 있는 조직 자체를 실정법 위반으로 보는 것이 위헌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그 조직에 가입하지도 않았는데 국가기관에 탈퇴서를 내라는 것이, 양심에 반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갑자기 국가기관이 어떤 종교를 불법으로 규정한다고 해보자. 그 이유는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 중 일부가 반사회적 행위를 선호하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을 이유로 그 종교단체에의 가입 전체를 처벌하려고 하면서, 모든 국민들에게 그 종교단체에서 탈퇴하라는 탈퇴서를 제출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의 종교의 자유뿐만 아니라, 종교의 자유가 현재 국가기관에 의해 위헌적으로 침해당하고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종교 자유 탄압에 외양적으로 협력하는 모양새를 강제함으로써 그러한 사람들의 양심의 자유도 침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후건긍정의 오류에 의해 적()과 아()를 가르는 오류는 이러한 정교한 논리의 층위를 의도적으로, 때로는 무지에 의해 완전히 무시해버렸다.

 

물론 이러한 삼단의 논리 비약은 법원에서 일관되게 인정되기는 어려웠다. 그리하여 사태의 말미에 가서는, H노선에 반대하면서 H탈퇴서를 검찰에 내지 않은 학생정치조직의 성원도, H의 구성원임이 H규약에 의해 간주되어 실정법 위반으로 처벌되는 일은 막을 내렸다. 사태의 말미에서 단과대학 학생회장과 총학생회장은 수배를 받고 체포되기는 하였지만, 형식적인 조사를 받고 결국 구속기간이 만료되면 석방되고 검찰은 아예 기소조차 하지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러한 논리 오류로 점철된 험악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 때, 주사파는 반대쪽에서 후건긍정의 오류를 범하면서, 자신들만이 오로지 지배세력에 대한 정당한 비판자라고 주장하였다.

 

 

지배세력의 하수인인 검찰을 비롯한 무도한 국가기관들이 주사파를 비판한다. pq

따라서 주사파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검찰을 비롯한 무도한 국가기관, 즉 지배세력이다. qp

 

그리하여 그들은 H에 참여하지 않고 독자 노선을 걷기로 한 학생정치조직들을 모두 결국 국가기관의 방조자들로 싸잡아 비판하였다.

 

이것은 세 가지 오류를 범한다.

 

첫째로 비판처벌의 주장과 같지 않다. 어떤 주체를 비판하는 것은 그 주체를 처벌할 것을 주장하는 것과 같지 않다. 물론 처벌의 주장은 비판의 극단적인 형태이다. 그러나 모든 비판이 처벌의 주장인 것은 아니다. 이것은 개념의 경계를 완전히 무시하고, 자유연상 기법에 의해 개념의 연쇄를 미끄러져 들어간 것이다.

 

둘째로, 애초에 상당한 학생정치조직의 구성원들이 검찰과 경찰에 탈퇴서를 내지 않고 수배생활을 했던 이유가, 바로 그러한 국가에 의한 탄압을 비판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였다는 점을 무시한다.

 

셋째로, 이런 논리는 PKONG의 논리적 오류와 동일한 것, 즉 후건긍정의 오류에 의한 결론을 주장하고 있다.

 

어떤 이는 이 모든 소동을 역사 속의 서글픈 희극의 한 장면으로 치워버릴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과연 90년대에 특유한, 화석처럼 박힌 이야기일까?

 

그것은 인간 사고의 취약점의 전형적인 발현이다. 즉 적과 아를 이분법으로 나누고, 아를 비판하는 모든 것은 적으로, 적이 주장하는 것의 일부와 같은 것을 주장한다고 해서 곧 적이라고 보는 그러한 습속을 무반성적으로 강화함으로써 힘을 획득하거나 명분을 취득하고자 하는 우리 인간 사고가 빠지기 쉬운 함정의 전형적인 발현이다.

 

인간은 침팬지의 사촌이다. 침팬지는 우리 무리와 다른 무리를 구별한다. 그리하여 어떤 이가 우리 무리인지를 패턴을 인식하여 빠르게 판단한다. 또한 침팬지는 같은 무리 내에서도 정치와 투쟁을 한다. 그리하여 연합을 하고, 같은 편을 먹고, 적 편을 몰아내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이때에는 어떤 개체가 어떤 다른 개체와 친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오류는 대단히 빠져들기 쉬운데, 일상생활에서도 사람들은 이런 식의 오류를 자주 저지르기 때문이다.

뉴스기사: 예술적인 재능이 풍부한 천재 중에는 왼손잡이가 많다. pq

댓글: ? 나 왼손잡이인데, 나 예술 천재네! qp

 

뉴스기사: 미인은 잠을 충분히 잔다. (대우명제: 잠을 충분히 자지 않으면 미인이 되기 어렵다.)

댓글: 나는 잠을 충분히 자니까 미인이구나!

 

문제는 이런 식의 적과 아를 패턴 인식으로 나누는 것이, 사회질서에 대한 규범적 논증대화에 함부로 혼입된다는 것이다. 침팬지의 것은 침팬지의 것에, 입헌 민주주의 사회의 것은 입헌 민주주의 사회의 것에 어울림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침팬지와 상당 부분 하드웨어를 공유하고 있는 인간의 약점을 파고들어, 이런 식의 후건긍정과 전건부정의 오류 야바위 놀음은, 노예정신의 밈을 뿌린다.

 

이 밈에 일단 사로잡히면, 정신줄을 놓게 된다. , 어떤 주장의 타당성을 그 주장의 논거들을 검토하면서 판별하지 아니하고, 우리편이 그런 주장을 하는지, 적이 그런 주장을 하는지에 따라 판별한다.

 

우리 사회의 일부 근본주의 종교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동성애자들(즉 동성을 성적 지향으로 삼은 사람), 성적 지향에 따라 차별받지 않을 자유를 주장한다. pq

 

성적 지향에 따라 차별받지 않을 주장하는 자들은 동성애를 성적 지향으로 삼는 자들(또는 성적 지향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는 자들)이다. qp

 

동성애자들의 법적 권리와 헌법적 지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난데없이 동성애 찬성론자냐 하는 이야기가 튀어나오는 것이다. 동성애라는 성적 지향을 자기 개인의 삶에서 자신의 반성적 근거에 비추어 어떻게 취할 것이냐는 윤리적인 판단의 문제이다. 이 문제에 있어 여러가지 의견을 가졌다 하더라도, 법적 권리와 헌법적 지위 주장은 규범주장으로 같은 결론이 타당할 수 있다. 이는 종교를 다양하게 믿더라도 종교의 자유라는 같은 타당한 규범주장에 이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성적 지향에 따라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은, 그냥 헌법이론을 열심히 공부해서 그런 결론을 도출한 헌법전공자일 수도 있고, 변호사일 수도 있고, 자유주의자일 수도 있다. 이것은 죽는 존재가 인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개도 있고, 유글레나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현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은 종북이라느니, 체제 전복세력이라느니 하는 말이 계속해서 나오는 이유도 후건긍정의 오류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완고한 사람들, 체제의 권력을 많이 쥐고 있는 사람들만이 이런 오류를 범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주장을 펼칠 때 준거집단이라고 삼을 만한 무리를 점찍은 사람들은 거의 예외없이 이런 유혹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거대한 후건긍정의 오류에 기반하고 있다.

 

전제명제.

 

X라는 주장은 우리 편 주장이다.

 

Y라는 주장은 적 편 주장이다.

 

 

진영논리의 함의1:

적은 우리 편의 주장을 비판한다. pq

따라서 우리 편의 주장을 비판하는 자는 적임에 틀림 없다. qp

 

진영논리의 함의2:

우리 편은 적의 주장을 비판한다: pq

따라서 적의 주장을 비판하는 자는 우리 편임에 틀림 없다. qp

 

이러한 후건긍정의 오류로 색칠된 선글라스로 본 세계는 다음과 같다.

 

 

우리     적

 

주장 a         -a

 

b         -b

      ....     ...

 

z         -z

 

후건긍정의 오류에 기반한 진영논리에서, 사실명제와 규범명제들을 단단히 묶여진 패키지(a부터 z까지의 패키지 vs -a부터 -z까지의 패키지)로 다루어진다. 그렇게 되면 선택은 어느 패키지를 받아들일 것인가만이 남게 된다.

 

많은 이들은 자신들이 가장 예민하게 느끼는 쟁점에 관하여, 어떤 편이 자신의 확신과 같은 쪽에 서 있으면, 그 편을 자신의 무리로 선택하고자 한다.

 

이런 경향은 요즘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의 발달로 아주 나이가 어린 층에까지 널리 퍼져 있다.

 

예를 들어 비극적인 생을 마감한 어떤 학생은 남성에 대한 차별에 민감했다. 그러한 차별에 무감한 자들은 적이다. 그러면 적을 비판하는 자들이 누구인가? 적을 탄압하는 자들이다. 적을 탄압하는 자들이 누구인가? IS. 그래서 IS에 가입하러 먼 길을 떠났다.

 

이러한 사고는 한 쪽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쪽의 입장이건 어떤 쟁점에 대해서 강렬한 확신을 갖고 있는 이들은 그 확신을 법의 강제에 의해서 억압하거나 적을 철저하게 사회에서 퇴출하려고 하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만일 그러한 유혹을 적정절차(due process)에 의해 제어하려는 이가 있다면, 그 유혹을 물리치기보다는, 오히려 적정절차를 주장하는 사람을 곧바로 적으로 낙인찍고, 주장하지 않은 모든 견해들을 그렇게 낙인찍은 사람에게 귀속시킨다.

 

이러한 전투가 몇몇 쟁점에서 벌어지면, 자동적으로 다른 쟁점들을 묶여버린다. 그래서 오늘날 미국에서는 많은 이들이, 오바마케어는 사회주의자들의 음모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 중 많은 수는 또한 동시에 인간의 활동에 의한 지구온난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남녀나 인종이 평등해야 한다는 규범적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 중 많은 수는, 남녀나 인종 사이에 유전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에 관하여 보고하는 사람들을 차별주의자라고 낙인찍는다.

 

각 쟁점의 결론은 논증대화에 의해서 도출되지 아니하고, 자신이 가장 강고한 확신을 가진 쟁점에 관하여 같은 입장을 취하는 이들이 다른 쟁점에 관하여는 무엇이라고 가장 빈번하게 말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논증대화는 인적 네트워크상에서의 눈치보기로 대체된다. 사람들은 진지한 문헌을 찾아보고 종이책을 읽어나가고, 노트를 하고, 한 번에 끝나지 않고 계속 상호기여를 하며 진행되어가는 오랜 토론과 논쟁을 거침으로써 자신의 잠정적 결론을 수정해나가는 노력을 포기한다. 대신에 자신이 같은 무리로 보고 있는 사람들이 주로 무슨 말을 하는가, 어떤 말을 하면 눈밖에 나는가, 그들은 다른 쟁점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는가, 어떻게 하면 휘발성 있게 찬사를 받을 수 있는가, 즉 어떻게 하면 아첨할 수 있는가에 관하여 고민한다.

 

지식인은 더 이상, 시민들 각자가 독립적으로 검토할 논증이나 이의제기를 제시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이러한 진영의 네트워크에서 우리 편에는 이런 직위에 있는 자도, 이런 학위를 가진 자도 있다고 내세울 수 있는 커다란 탄창으로 소모된다.

 

언론은 헌법 논쟁이 벌어졌을 때에도, 그 논쟁의 양측에 있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논증이 무엇인가를 자세히 소개하기보다는, 단순히 몇몇 헌법학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의 결론은 무엇입니까라고 묻고는, 그 결론의 다수파를 소개한다. 탄창이 많이 들어 차 있다는 것이다.

 

모든 집단적인 행위가 진영논리의 결과는 아니다. 이것 또한 후건긍정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진영논리에 의한 집단적 행위도 있지만, 지적 독립성이라는 윤리적 책임을 지킨 뒤 어떤 쟁점에 의견이 일치하여, 정치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나서는 집단 행동도 많다.

 

문제는 우리가 그 집단적인 행위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우리의 정치적 공적 문화를 풍부하게 하는가, 아니면 핍진적으로 만드는가다.

 

타당하고 건전한 논증의 자리가 점점 좁아드는 협애화된 공론장만을 가진 사회는, 입헌 민주주의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입헌 민주주의의 붕괴는 언제나 그러한 공론장의 협애화를 거친다. 그리고 공론장의 협애화가 상당 정도 진행되었을 때에 입헌 민주주의의 시민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도, 바로 아와 적을 나누고 쟁점들의 패키지를 선택한 뒤 사유를 훑어보기로 대체하는 에토스를 극복하는 길이다.

  <끝>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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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요즘사람
    2018.01.16 10:40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바콩...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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