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단순화 기예의 의의

 

삶은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을 효과적이면서도 현명하게 누릴 수 있도록 깔끔하게 재단된 단순함을 지니도록 조정할 때 현명하게 조타할 수 있다.

 

2. 각각의 가치의 효과적 추구를 위한 단순화 기예의 필요성

 

(1) 진리

 

위대한 철학자 중 하나인 데렉 파핏은 취미인 사진촬영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연구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파핏은 철학에서 상당히 중대한 성취를 이루어냈다. 특히 세 권으로 이루어진 그의 <On What Matters>는 규범학에 관하여 매우 깊이 있는 사고를 담고 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 모두 진중한 사고가 담긴 이런 책을 긴 시간 쓰는 행위는 정신이 번잡한 여건에서는 불가능하다.

이 이치는 파핏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들을 이루어내는 사람들은 거의 틀림없이 인생을 단순화했던 사람들이다. 칸트, 뉴튼, 다윈, 디렉, 에어디쉬, 롤즈와 같은 거인들은 모두 자신이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활동에 집중할 수 있도록 단순화된 일상 루틴을 조직하고 그 루틴을 따라 생활했다. 즉 그 사람 전체 인생을 압축해서 얼핏 보면 그들이 이룬 눈부신 성취 때문에 다채로운 것 같더라도, 6월이나 1년의 실질적인 활동이 이루어지는 중기 단위로 잘라 그들의 매일매일의 생활상을 살펴보면, 실제로는 그 하루가 고도로 정규화되어 있고 단순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거의 한결같이 발견하게 된다.

 

(2) 쾌락

 

그런데 위대한 성취를 이루려는 사람에게만 단순화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심지어 철저한 쾌락주의자에게도 삶의 단순화가 필요하다. 이는 스토아적 평정이 모든 가치 향유의 중요한 전제인데, 이 평정을 얻는 가장 쉬운 방법이 단순화이기 대문이다.

쾌락 역시 평정을 전제로 한다. 정신적 괴로움과 육체적 고통에 사로잡힌 사람은 쾌락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그런데 세상은 복잡하며 인간은 본성상 끊임없이 맥락화를 하면서 가장 간단한 것조차도 복잡한 맥락에 위치시켜 해석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과 우리 자신이, 우리의 마음을 동요케 하는 자극을 끊임없이 쏟아 부을 태세가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세상만사가 굴러가는 것과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리고 미래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끝없이 노심초사하는 사람은 고등어구이 백반 한끼라도 마음껏 음미할 수 없다. 고등어구이 집에서 시사토론을 하는 뉴스를 TV로 크게 틀어놓았다면 이미 고등어구이 맛을 반은 버린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포털 뉴스를 보면서 고등어구이를 먹는 것은 스스로 고등어를 하급 고등어로 만드는 셈이다. 같이 고등어구이를 먹으러 간 사람과 논쟁을 하면서 고등어구이를 먹으면 고등어 살점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턱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것이다. 고등어구이를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단순한 식사 행위가 필요하다. 맛없는 음식이라면 모르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에 필요한 생각은 '음, 맛있어'와 '다음 반찬 뭐 집어먹을까'뿐이다. 책을 읽는 쾌락도 최소한 30분은 책 내용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여건과 마음의 평정이 필요하다. 책을 30분 이상 읽고 몰입할 수 있어야 뇌가 책 읽기에 적합한 모드로 들어가고, 그제서야 책의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일반적 정리

 

그 가치가 무엇이건, 어떤 가치의 효과적 추구나 향유를 위해 단순화의 기예가 필요하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증명할 수 있다.

 

(A)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의 효과적 추구나 향유는 그에 맞는 문법을 따라야 하므로 이 문법에 따른 수행에 걸맞는 정력과 시간의 투여, 그리고 정신의 집중을 필요로 한다.

(B) 그렇다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의 효과적인 추구와 향유는,  정력과 시간을 분산시키고 정신 집중을 흩뜨리는 요소의 배제를 필요로 한다.

(C) 만일 정력과 시간을 분산시키고 정신 집중을 흩뜨리는 요소가, 단지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한 습관이나 다소 자동적 반응 때문에, 또는 하나하나 별개로 보면 자신이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 모두를 할 수 없는 일들을 충동적으로 떠올리며 다 하려는 마음에 번잡해지느라, 아니면 자신의 행위로 가치를 달리할 수 없는 것들에 관여하느라 생긴다면, 이것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기껏해야 가치롭지 않은 것들에 의해 희생하는 것이므로 비합리적이다.

(D) 그런데 비합리적임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방해 요소에 시달리는 현상이 흔한 것은, 이 현상을 극복해내는 것이 결심만으로는 되지 않고, 이 방해 요소들이 들어오지 않고 들어오더라도 이를 무시하도록 삶을 구성하는 어떠한 종류의 기예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F) 결론적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의 효과적 추구는, 단순화의 기예를 필요로 한다. 

 

 

3. 인생의 현명한 조타를 위한 단순화의 기예의 필요성

 

(1) 인생 조타술의 내용: 단일 가치 추구 기예 이상의 것

 

이때까지는 어떤 하나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단순화의 기예가 필요하다는 논의를 하였다. 여기서는 더 나아가 단순함의 추구는 앎이나 쾌락 같은 하나의 가치 향유를 집중해서 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에 그치지 않고, 다원적인 가치를 지혜롭게 누리도록 인생 전체를 적정하게 조타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점을 논하고자 한다.

인생 조타술은 하나의 가치를 효과적으로 추구하는 기예 이상의 것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이는 속물적 세계에서 도구적 가치가 어떤 주체의 선호체계 속에서 내재적 가치로 변모할 수 있는 세계에서 특히 유의해야 할 사항이다. 속물적 세계에서 사람들이 서로 주고 받으며 의식의 초점을 집중시키는 표지는 위계에 관한 표지가 되기 쉽다. 그래서 그런 표지를 이루는 도구적 가치를 자신의 선호체계 내에서 내재적 가치인양 자리매김하기 쉽다. 예를 들어 돈은 도구적 가치이지만, 화폐 페티시에 걸린 사람은 돈의 축적 자체가 목적인양 생각하고 느끼는 태도를 갖게 된다. 그래서 이미 누구의 자의적인 의지에도 복속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부를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를 추가로 더 획득하는 것에 큰 우선순위를 부여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시기별로 어떤 도구적 가치를 두드러지게 강조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둘러쌓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들의 경향성이나 아니면 직업적 특성 때문인 것이지 그 자체가 정말로 내재적 가치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무술을 배우는 도장에만 몇 달 나가봐도 거기서는 무술 실력을 빨리 올리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일인양 생각하는 담화에 휩싸인다. 그러나 사실 무술 실력을 올리는 것은 건강과 정신 수양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통로 가운데 하나이며, 그 통로들 중 어느 것을 취할 것인가는 선택적이다. 무술 도장에는 수강료를 내지 않고 나가지 않으면 곧바로 무술중심 담화에서 벗어나지만, 다른 경우는 그렇지 않다. 어떤 사람들이 도구적 가치의 획득에 상대적으로 성공적이었다고 하여도 그 사실이 그 사람들을 에픽테토스보다 인생조타술에 관하여 많이 알고 있는 이들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직역에 진입하기 위한 자격시험준비능력이라는 도구적인 가치를 효과적으로 추구하는 기예를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필연적으로 인생 조타술까지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어떤 시험에 수석을 하였다거나 소년 급제를 하였다거나 하는 사람들의 인생 전체를 보면 인생조타술의 귀감으로 삼을 만한 사람은 오히려 드문 편이다. 오히려 그런 사람은 출세를 위해 인생을 바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1인칭 관점에서는 배경적 가치, 그리고 2인칭 복수의 관계에서는 정당한 규범을 어기는 일을 하여 영어의 몸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언제나 흘려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이 어떤 성질의 가치를 갖는가, 어떤 활동의 문법이 무엇인가에 관하여 유용한 정보를 담고 있는 경우는 많다. 예를 들어 적합한 무술 훈련 방법에 관한 관장의 이야기는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을 것이며, 무술하는 사람의 마음 자세에 관해서도 들어야 할 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도구적 가치가 얼마나 중요하며 그것을 자기 삶에 어떤 위치를 차지하게 할 것인가에 관하여는, 그 도구적 가치를 전달하거나 도모하는 사회적 역할을 맡는 이들의 의견이 특별히 도드라지는 특권을 갖는 것은 아니다.

 

(2) 인간이 살아가는 가치 세계의 특징

 

이와 같이 인생 조타술이 단일 가치 추구 기예 이상의 것을 포함하는 이유는, 인간이 가치를 경험하는 세계의 특징 때문이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인생은 정말 내재적인 가치 하나조차도 원하는 만큼 양껏 모두 담을 수 없다. 인간의 능력과 자원과 수명 모두 유한하다. 먹는 즐거움을 한껏 누리려고 해도, 돈이 없어서 최고로 맛있는 것을 마음 내키는 대로 먹을 수 없다. 돈이 있거나 자신의 예산 범위 내에서 적절한 가격의 음식을 살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배가 부르면 미각의 쾌락은 사라지기 때문에, 일정 이상의 맛있는 것을 마음내키는 대로 먹을 수 없다. 진리도 마찬가지다. 진리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의미 있는 기여를 할 만큼 한 분야를 제대로 탐구하기에도 일생은 짧다.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는 말은, 40대가 될 때까지는 그 절절함을 느끼기를 미룰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일반 인생의 절반을 넘게 살고 나면 그야말로 자신이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는 분야를 중심으로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어설프게 있다가 가는 수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둘째로, 인생의 가치 추구는 거의 항상 연동된 비가치를 발생시킨다. 맛있다고 많이 먹으면 체중이 불어나서 생활하기 몹시 불편하다. 고급스럽게 맛있는 것을 자주 즐겨 먹을 돈을 벌기 위해 추가로 노동하는 것은 고되다. 연애를 하거나 결혼을 하게 되면 예전에는 없던 인간관계상의 스트레스를 새로이 도입하게 된다. 투자를 새로 받아 사업을 확장하면 결정하고 실행해야 할 것들이 더 많고 자본의 규모 증가에 따라 위험도 증가한다.

진리 추구의 경우에는 비가치 발생과 그렇게 강하게 연동되어 있지는 않긴 하여도 그렇다고 예외는 되지 못한다. 진리를 추구할 때의 노고는 많은 부분 비가치로 구성되어 있다. 만일 실제로 상당한 노고를 투여하였지만 진리에 기여하지 못한다면 그 비가치를 발생시키는 수고들 중 많은 부분은 그야말로 헛수고가 된다. 많은 이들이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수월하게 구성해냈다고 잘못 알고 있지만, 아인슈타인의 노트는 계속되는 이론구성의 시도와 좌절로 점철되어 있다. 아인슈타인이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때 아이슈타인이 얼마나 마음 고생을 했는지 나와 있다. 버트런드 러셀도 철학의 심층적 문제를 고민하는 노고와 자신이 이렇게 노고를 들였는데도 해답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에서 생기는 스트레스가 너무 컸기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의 능력을 알게 되었을 때 그토록 기뻐했던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자신 대신 철학의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생각에 흥분하여 당시의 애인에게 그 감동과 희망을 담은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비트겐슈타인이 러셀이 바란 형태대로 분석의 기획을 이어받지 않았으며 자신의 기획은 결국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는 점이 판명된 뒤에도 러셀은 철학의 의 근본 문제를 연구하는 생활로 돌아가지 않았다. 러셀 본인이 인생의 후반부를 철학사나 사회적 쟁점에 관한 에세이를 쓰면서 보낸 이유를, 그의 자서전에서는 예전에 수학이 논리학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너무 고뇌를 하다가 머릿속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진 것 같아서 이제는 그런 정교한 사고를 집요하게 끌고 나가기가 고통스럽다고 밝혔다. 

진리 추구에 연동되기 쉬운 비가치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세상이 참인 명제들을 전제로 운영되지 않음을 예리하게 인식하게 됨으로써 오는 괴로움이다. 흐리멍덩한 상태에 있었더라면 어떤 무리에 자신의 사유를 의탁하여, 그 무리가 득세하면 세상이 올바르게 진행하는 것이라는 착각에 자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 탐구의 영역에 아주 깊숙하게 발을 들이고 나면, 무리지어 생각하는 습성을 지닌 이들이 올바른 명제들을 올바른 방식으로 획득하는 경우란 오히려 드물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그 무리 어느 하나에 의탁하여 함부로 말을 하며 모든 책임을 다른 무리에 전가하는 정신적으로 편안한 상태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 이것 자체는 악덕이 아니지만 보통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사람들에 대하여 분개해하는 태도를 가지기가 쉽다. 즉 자신이 참이라고 판단하게 된 것과 같은 견해를 다른 사람들이 갖지 않는 것에 분개해하는 태도를 가지기 쉬운 것이다.

게다가 많이 알면 알수록 진실로 훌륭하다고 느끼게 되는 사람들의 집합의 규모가 대단히 작다는 것을 알게 되므로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새로 만난 이에 대해서 호기심을 발휘하여 능동적으로 많이 알고자 하는 자세가 사라진다. 왜냐하면 괜히 호기심을 발휘해서 많이 알게 되었다가는 그 사람을 불필요하게 싫어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단 누군가를 알게 되면 그 구체적인 사람을 잠정적으로 좋아하는 마음에서 시작하는 태도가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지식은 적어도 하나의 미덕을 파괴하는 데 그것이 바로 인간관계에서 순진함 또는 천진함의 미덕이다. 심층적인 탐구 초입에 들어간 사람들이 이런 비가치에 의해 과장될 정도로 정신이 많이 휘둘리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 결과 아예 탐구의 의의를 부인하고 탐구하는 삶을 그만둔 뒤, 불평하는 습성만이 남아서 오히려 자신이 예전에는 거짓으로 생각했지만 이제는 참으로 새로 알게 된 몇 개의 명제를 받아들이는 무리에 소속되는 결말, 더 나아가 타인을 목적으로 동시에 대우하라는 규범을 위반하는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다. 이에 분개의 감정이 더해지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정신을 자기의 정신과 일치시키려는 정신의 독재를 감행하고자 하는 충동에 완전히 빠지게 된다. 이런 사람은 애초에 탐구에 조금이라도 진입하기 전의 상태보다도 더욱 진리와 멀어졌음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런 현상 역시 가치와 비가치의 상호연관성을 주의깊게 포착하고 이에 대응하는 현명한 조타술이 없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어떤 유형의 비가치가 연동되어 발생하리라는 것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 당황해서 휘둘려버리는 것이다. 

 

셋째, 내재적 가치들은 다원적이어서, 한 가치를 추구할 기회의 활용은 다른 가치를 추구할 기회의 그만큼의 상실을 의미한다. 즉 모든 가치추구는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을 갖는다. 자신이 읽고 싶은 분석철학 책을 진득하게 읽기 위해, 새로운 모임에 놀러오라는 친구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을 살펴보자. 방해받지 않고 연구를 하여 진리를 그만큼 깊이 있게 알아볼 기회는 활용했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 즐거워하고 새로운 경험을 할 기회는 그만큼 포기하게 되었다. 하나의 구체적인 사건으로 보자면 그리 큰 차이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같은 패턴의 생활을 하는 시간이 쌓이면 쌓일수록 가지 않은 길에 상실된 것은 커지게 된다.

 

넷째, 내재적 가치들은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서로 상충한다. 이러한 상충은 기회비용의 논지를 넘어서는 더 심층적인 상충을 말한다. 기회비용은 단지 개별적인 시간과 정력과 자원의 투여하고만 관계된다. 그러나 이 더 깊은 상충은, 어떤 종류의 가치들의 세계에 깊이 들어가는 삶의 스타일은, 다른 종류의 가치들을 누리는 것과 양립불가능한 삶의 스타일이 된다는 점이 있다. 이를테면 인간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스타일의 삶을 사는 사람은, 사람들과 두루 널리 알고 지내면서 즐거워하는 인간관계의 순진한 즐거움을 잃어버린다. 인간관계에서 순진함은 하나의 미덕이며 그런 미덕이 있어야 누릴 수 있는 인간관계의 즐거움이 있다. 성찰적인 인간학의 탐구는 이런 즐거움과 상충한다.

 

다섯째, 어떤 활동으로 누리게 되는 가치가 그 활동에 연동하여 발생하는 비가치보다 쟉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에 고착하여 비가치에는 대응하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  적당하게 이따금씩 미식을 즐기는 것은 가치가 비가치보다 크다. 그러나 늘 과식하는 것은 후자가 전자보다 크다.

사람들이 현명하지 못하게 비가치를 야기하는 방식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인지적인 것이다. 인지적 종류는 다시 두 하위 유형으로 나뉜다. 이 중 하나는 소크라테스가 지적한 것으로 거짓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경우다. 다른 하나는 예전에 가졌던 믿음의 관성으로 인해 그 믿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전자의 예는 속물적 세계관의 명제들이 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비가치를 낳으면서 자신이 인생을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다. 반면에 후자의 예는 이를테면 <삶은 왜 의미 있는가>를 읽고 속물적 세계관의 명제들이 거짓임을 알게 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영혼의 관성으로 인하여 그런 속물적 세계관의 명제들이 참이라고 하는 사고로 끝없이 돌아가는 자신을 발견하는 경우다. 특히 주위에 속물적 발화를 하는 사람이 많다면 자기도 모르게 그런 신념으로 돌아가 반응이 촉발되기 마련이다. 이 첫 번째 원인에 의한 비가치 야기는 순수 비가치 야기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특정 인종을 자신의 거주지에서 몰아내는 것이 옳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런 가치도 낳지 않으면서 오로지 비가치만 낳을 것이다. 또한 옳지 못한 신념을 위해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도 오로지 비가치만을 낳을 것이다.

현명하지 못한 삶은 가치와 가치가 아닌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또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 가치들이 자기 삶에 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치들은 상충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가치들이 자기 삶에 원하는 만큼 담길 자격을 갖고 태어났는데 죄책을 물을 누군가 때문에 담기지 못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인생에 예정된 비가치가 막상 닥치면 놀라 어쩔 줄 몰라한다. 그래서 원하는 만큼 가치를 담을 수 없어 늘 결핍된 감정을 느끼며, 정신이 번잡한 가운데 커다란 불만족이 터져나온다.

 

비가치를 초래하는 다른 하나의 원인은 의지 자체에 관한 것이다. 즉 의지박약이라고 불리는 현상이다. 의지박약은 해리 프랭크푸르트가 말한, 고차적 자아가 저차적 자아를 만족할 만큼 통제하고 규율하지 못하는 현상이다. 이미 자신은 건강한 섭생을 하는 것이 자신에게 좋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단 음식을 보면 참지 못하고 먹는 것이다. 그런데 의지박약은 거짓 신념의 경우와는 달리 언제나 비가치 야기와 가치 야기가 함께 연동되어 있다. 왜냐하면 건강한 섭생을 하여 건강한 몸을 갖는 것도 하나의 가치여서, 그것을 또 지연하게 되는 것은 비가치 중의 하나이긴 하지만, 단 음식을 먹는 것 또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단 음식을 먹으면 쾌락이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단 음식이 절대적으로 좋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킬링타임용 영화를 보면서 휴식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킬링타임용 영화를 보면 그 동안에는 세상의 시름을 잃게 되고 새로운 서사 안에 들어가 신선한 경험을 하면서 휴식을 하게 된다. 그래서 가치가 있다. 다만 예를 들어 원고 마감이 오늘 오후 6시인 사람이 원고도 쓰지 않고 오후 2시에 킬링타임용 영화를 본다면 그것이 야기하는 비가치가 더 클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주지주의적인 해석으로는 의지박약을 해명하지 못한다. '충분히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고 앎의 정도를 구분하는 언어적 수사만 덧붙일 수 있을 뿐이다. 비가치 야기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의지박약은 항상 어떤 가치에 반응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잘못된 믿음의 경우와는 다르다. 즉 이 경우에도 단순히 앎을 획득하는 것만이 해결책으로 족한 것이 아니라, 곧바로 반응하기 쉬운 가치(편안함, 단 음식의 쾌락 등등)을 무시하고 좀 더 장기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어떤 조타술이 별도로 요구되는 것이다.

가치의 세계가 다원적일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이 서로 상충하거나 비가치와 연동되는 부조리한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현명한 조타술은 단순화의 기예를 포함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기예가 없이는 이 다원적이고 복잡하고 상충하며 연동되는 가치들의 세계를 어떻게 조타해나갈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그때그때의 충동에 이끌려다니기 쉽기 때문이다.

 

 

4. 인생 조타술의 원칙들

 

(1) 제1원칙: 평정의 문턱 확보 원칙

 

인생 조타술의 제1원칙은 '능동적 행위에 있어서는 평정의 문턱을 확보하는 것보다 우선되는 것은 없다'이다. 평정이란 어떤 가치를 경험하거나 추구할 때 그 활동의 문법을 차근차근 따라 행위를 전개해나갈 능력을 갖춘 마음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평정은 정도의 개념이긴 하지만, 문턱을 갖고 있다. 문턱 이상이 갖추어지면 그 가치 추구가 가능하다. 활동별로 문턱은 다르다. 예를 들어 조깅을 할 때는 평정이 그리 많이 필요없다. 녹색당 출신의 독일 외무부장관 요슈카 피셔(Joseph Martin Fischer)의 <나는 달린다>에는 내각에서 회의를 하던 도중 반대편 정치가의 이야기에 너무도 화가 나서 자기도 모르게 계속 달리는 바람에 자기도 모르는 바람에 스스로 암묵적으로 설정했던 한계 거리를 깨버렸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화를 내고 있어도 달리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반면에 화를 내면서 창조적인 논문의 얼개를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두려움을 가진 상태에서 스테이플러로 종이를 반복해서 묶는 것은 평소와 거의 비슷한 효율로도 가능하지만, 두려움을 가진 상태에서 데이트를 평소와 비슷한 즐거움을 느끼면서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능동적 행위란 믿음에 의지를 더하여 자신의 몸과 정신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행위가 아닌 것은 가치의 지평에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지만 행위는 가치의 지평에서 전개된다. 예를 들어 조각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거나 하는 일은 모두 행위로, 가치의 지평에서 전개된다. 조각은 잘 할 수도 잘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책을 잘 이해하고 정리하고 거기서 새로운 사고를 촉발하여 나아갈 수 있다. 강의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애초에 그런 조각을 하는 것, 그런 책을 읽는 것, 그런 강의를 듣기로 한 것에는 그런 활동을 하는 것이 가치 있다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고, 이 믿음을 기초로 의지를 발휘하여 그 행위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능동적 행위에 대해서는 1인칭 관점의 반성적 평가가 믿음 체계 및 그 믿음 체계에 기초한 수행 방식 모두에 대하여 적합하다.

반면에 아예 행위가 아닌 것, 토네이도에 휩쓸리거나 지하철 탑승문에서 밀쳐지거나 하는 것은 가치의 지평에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일들은 자기 자신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므로 반성적 평가가 적합하지 않다.

즉발적 반응은 그 중간에 있다. 무엇을 보고 탄식을 하거나 역겨움을 느껴 고개를 돌리거나 아니면 슬픔에 눈물을 흘리는 것은 1인칭 관점의 반성적 평가가 반쯤 적합하다. 예를 들어 어떤 것에 역겨움을 느끼는 것이 잘못된 신념을 전제로 한 것일 수 있다. 그래서 즉발적 반응도 적합한 것과 적합하지 않은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움과 다급함을 느끼지 않는 것은 부적합한 반응이다. 그러나 이러한 즉발적 반응 자체에는 그 믿음에 기초한 수행의 문법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슬픔이나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에는 거기에 맞춰 행위가 전개되면 성공적이라고 할 문법이라는 것이 없다.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한다. 이때 우리의 즉발적 반응은 '아! 저러면 안 돼!'라는 안타까움과 다급함이다. 그리고 우리는 행위를 한다. 그 때 우리는 아이를 다치지 않게 들어올려 우물 곁에서 떨어뜨려 놓는 수행을 하기에 충분한 정도의 평정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물론 그 평정은 제주도에서 바다를 보면서 커피를 마실 때의 평정과는 다른 수준의 것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허둥대다가 오히려 아이를 빠지게 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준의 문턱 이상은 확보되어야 한다. 시험에 직면하면 다소 긴장은 하겠지만, 긴장이 지나쳐서 시험 문항을 읽지도 못할 정도가 된다면 그 사람은 잘못 대응한 것이다. 이런 경우들에 그런 잘못들을 저지른 사람을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이미 성년의 나이를 지났다면 그 사람이 무언가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을 익히지 못했다고 평가할 것이다. 그러므로 즉발적 반응을 넘어서 가치 있는 능동적 행위로 나갈 때는 그 활동을 가치의 문법에 따라 수행하기에 충분한 평정의 문턱 확보가 최우선 순위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사람들은 자신의 역할에 따라 어떤 특정한 도구적 가치의 성취를 최우선시하는 발화를 하기 때문에 평정을 해치는 발화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이 그런 위치에 있기 때문이고, 정말로 최우선순위에 관하여 참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경우에도, 그 어떤 자동발화를 듣더라도, 능동적 행위에 있어서는 평정의 문턱 확보가 최우선순위임을 잊지 않고, 이를 중심으로 삶을 조직해야 할 것이다.

제1원칙은 이하의 원칙의 궁극적 전제를 이루는 원칙이다.

 

(2) 제2원칙: 불필요한 사고의 차단 원칙

 

인생 조타술의 제2원칙은 '불필요한 사고는 차단한다'이다. 이 제2원칙은 소극적 원칙이다.

불필요한 사고는 두 가지 원천에서 촉발된다. 하나는 외부의 원천이다. 다른 하나는 내부의 원천이다.

외부의 원천은 우리가 읽고 보고 듣는 모든 것이다. 포털 사이트의 뉴스, 소셜 미디어의 수많은 글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하는 말들이다. 이런 것들 중에서 나의 가치 있는 능동적 대응의 근거가 되는 것들은 필요한 정보다. 예를 들어 어떤 행위가 새로이 금지된다면, 처벌되지 않기 위해서 그 금지되는 행위에 관한 정보를 아는 것은 필요하다. 또한 어떤 통계자료가 내가 쓰고 있는 글에 자료로 써야 하는 것이라면 그 정보는 필요하다. 어떤 부당한 사태가 발발하고 그 사태의 재발을 막는 데 내가 기여하는 행위를 할 마음을 먹고 있었다면 그 사태에 관하여 자세히 조사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나의 가치 있는 대응과 무관한 것들은 불필요한 정보다. 나의 가치 있는 대응과 무관한 정보들은 우리의 사고 공간만을 잡아먹으며, 시간과 정력을 분산시키고 집중을 흩뜨린다.  

내부의 원천은 우리의 내심에서 솟아나는 모든 것이다. 장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 자기 자신의 과거 일에 대한 수치와 후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과 미움과 질시와 경멸, 악의, 속물적 세계관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자각, 자신의 능력에 대한 회의 등등이 그것이다.  심리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와 같은 둥둥 떠다니는 잡생각들이, 사람들이 어떤 것에 집중하지 않을 때 하는 생각의 대부분을 이룬다고 한다. 그러니까 평정에 기여하는 생각은 거의 없고 평정을 흩뜨리는 생각을 보통 많이 하는 것이다.

 

불필요한 사고의 차단은 세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중 제1차단 전략과 제2차단 전략은 외부의 원천에서 촉발되는 사고에, 제2차단과 제3차단은 내부의 원천에서 촉발되는 사고에 적용한다.

제1차단은 실제로 물리적으로 차단하는 것이다. 차단의 기준이 되는 물음은 "그 정보가 내가 할 생각이 있는 가치 있는 능동적 대응에 차이를 가져오는가?"이다. 만일 여기에 "아니오"라는 답변이 나온다면 그 사고는 나의 가치 지평에서 무의미하고, 따라서 그런 사고를 촉발하는 정보는 차단하는 것이 오히려 좋다. 특히 나쁘고 어리석은 일로 가득찬 뉴스에 관해서 보자면, 뉴스의 보편자, 즉 어떤 대처해야할 문제의 유형과 구조를 아는 것을 넘어서 문제해결에 추가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 뉴스의 개별자들을 시시콜콜이 아는 것은 어리석다.

제2차단은 정보를 내가 기꺼이 할 생각이 있는 가치 있는 능동적 대응과의 상응성을 생각해보고 신경을 끄는 것이다. 물리적 차단은 완벽할 수 없다. 우리는 여기저기서 정보를 듣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차단의 방벽을 뚫는 정보들 가운데서 어떤 정보는 보았지만 신경을 끄는 것이다. 기준이 되는 물음은 똑같다. 예를 들어 어떤 잘못된 사태에 관한 기사를 보았다면, 거기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고, 자신이 할 생각이 있는 가치 있는 능동적 대응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신경을 끄는 것이다. 지금 시기에는 할 생각이 없지만 장차 할 수도 있는 대응에 관련된 것이면 간단하게 정보를 정리한 다음 신경을 끈다. 신경을 끈다는 것은 그것이 나의 실천에 아무런 차이를 가져오지 아니할 것임을 명확히 하고 내가 하기로 마음먹어 지금 하고 있는 나의 실천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다. 만일 어리석은 사람들의 어리석은 행태가 나의 사고 공간을 차지할 자격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사태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와 관련한 자료로서만 그럴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사람들이 어리석은 행위를 많이 할수록 나는 가치 있는 것에 방해를 받음이 옳다는 법칙이 타당한 것인데, 이런 법칙이 타당할 리가 없다. 그런 법칙이 타당한 법칙이라면, 나는 자유인이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들의 종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제3차단은 제3원칙에서 설명할 능동적 행위의 문제 설정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 소극적 원칙을 의식적으로 적용하게 되면 예전에 관성처럼 삶을 복잡하게 만들었던 많은 것들을 털어낼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교유의 본지에 맞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을, 사회적 관행 때문에 밀려서 어어어 하다가 반성 없이 수행하는 것은 좋지 않다. 즐거움이나 학식, 인생의 어려운 일에 대한 대처와 같은 가치를 함께 향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서로를 진심으로 존중하는 교유를 할 수 없는 사람은 특별한 정당화 사유가 있을 때 만나는 것이 원칙이다. 여기서 특별한 정당화 사유란 업무상의 필요나 관혼상제 등 인생의 결절점에서 예를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친밀한 교유를 하는 사람은 서로의 복리에 대하여 진심으로 관심을 갖는다. 이는 그 사람에게 좋은 일이 발생하기를 바라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이 아니고 특별히 바로 그 사람에게 좋은 일이 발생하기를 편애적으로 바라는 것까지 더해지는 것이 그 교유의 본질적 부분이다. 많은 이들이 서로의 복리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는 사람이 아닌, 심지어 시기나 악의를 보이기도 하는 사람들과도 무차별적으로 만나곤 한다. 심지어 많은 이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지 않다. 어떤 강제된 필요성도 없음에도 굳이 그런 만남을 반복한 뒤에 그 사람들에 대해서 반복해서 불평을 하곤 한다. 이는 자신이 자유인이 아니라, 불평하는 대상의 종복임을 이중으로 보여준다. 왜냐하면 자신의 복리에 진지한 관심을 갖지 않는 이에게 자신의 시간과 정력을 내어주고는, 거기에 더해 그 사람에 대해 불평하며 괴로워하는 시간까지, 그리고 자신의 불평을 들어주는 자신이 좋아하는, 즉 자신이 그 복리를 염려해야 하는 사람의 시간과 정력까지 내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의 시간과 정력의 주인이 그 사람이 된 것이지 자기가 된 것이 아니다.

일대일로 만나는 모임뿐만 아니라 다수가 만나는 모임도 위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 좋다. 즐거움을 위해서나 진리를 향유하기 위해서나 관혼상제와 같이 인생의 어떤 결절점에 함께 축하하거나 슬퍼하기 위하여 가는 경우에는 그 예를 다하는 것이 다수 모임의 본지이다. 그리고 그 본지를 넘어서는 행위를 할 필요가 없다. 이를테면 예를 다하러 간 곳에서는 예를 다했으면 그 모임에 가서 할 일은 다 한 것이다. 그 주된 본지를 잊고는, 그저 얼굴이 익숙한 사람이 있으니 술에 거나하게 취해서 이런저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것은 불필요한 복잡성을 자기 삶에 더하는 것이다.

필자는 며칠 전에 뼈해장국 집에서 간단하게 뼈해장국을 먹고 있는데 옆테이블에 소주를 마시면서 정치 이야기를 하는 40대 중반의 무리를 보게 되었다. 대학이나 고등학교 동기로 보이는 이들은 이미 다른 곳에서 술을 마셔 거나하게 술이 취해 있었다. 그리고 음식을 먹는 것이 본지인 뼈해장국집에서 거대한 데시벨로, 지금의 정치를 욕한다는 바로 그 점에서는 마음을 함께 하면서도 누구를 욕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갖가지의 상충하는 강고한 의견을 가지고 있어 한치의 양보도 없는 피튀기는 우기기가 전개되었다. 필자가 옆에서 뼈해장국을 먹는 동안에 사태는 점점 고조되어, 점차 언성이 높아지다 마침내 한 사람이 친구에게 빡큐를 날리고 빡큐를 받은 친구가 그 빡큐 손가락을 잡아채고 급기야 원래 빡큐를 날렸던 사람이 멱살까지 잡고 옆의 두 친구가 말려 겨우 난동이 진정되었다. 불혹의 나이를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사람들이 모여있어 자기 말을 늘어놓을 수 있다는 물리적 기회에 촉발되어 어리석은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소주에 취한 혀로 세상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데 열을 올린다는 것은 단순화의 기예라고는 하나도 익히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사람들을 보고 그다지 특별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요즘은 이런 오프라인 모임에서 정신의 침튀기기를 주고 받는 대신, 소셜 미디어상에서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뼈다귀 해장국 집에서 일어나는 위와 같은 일은 하루가 멀다 하고 소셜 미디어에서 벌어진다. 그리고 그것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이는 억견의 쟁투를 억지로 보고 있는 셈이다. 소셜 미디어는 오로지 존경할 만한 친구들의 근황을 알고, 좋은 책과 글을 소개하고 소개 받고, 좋은 강의나 세미나의 기회 같은 것을 아는 등 자기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에 기여하는 수단으로만 필요할 뿐이지, 당파적 쟁투나 시시콜콜한 유명인의 사정이나 비대한 자아의 장광설과 같은 불필요한 정보를 머릿속에 끝없이 집어넣는 충동적 읽기를 하는 것은 단순화의 기예로서 스토아적 차단의 방벽을 넘지 못한다. 어떤 연예인이나 소셜 미디어의 유명인이 무슨 실언을 했다거나 그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한다거나 또 누가 말싸움을 했다거나 하는 비슷비슷한 사건의 세부사항을 끝도 없이 날라대며 몰입하는 사람은 삶의 중심이 흐트러진 것이다. 진중하게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글은 읽지 않으면서 마치 집단적 정신적 틱에라도 걸린 듯한 사고자판기가 된 듯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심을 곤두세우며 끝없이 훑느라 정신이 산란해진 사람도 삶의 중심을 잃은 것이다. 스스로의 독립적 사고 대신 뉴스 밑에 달린 댓글로 대세가 무엇인지 가늠하고 그 가늠의 더듬이를 통해 자신의 견해를 시나브로 정립하는 것도 중심이라고는 잡혀 있지 않은 것이다.

특히 집중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은 아예 소셜 미디어를 하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이다. 한다면, 자신의 근황을 천진하고 유머스럽게 올리는 존경할 만한 친구와, 좋은 책과 글을 소개하는 사람만 팔로우하고, 자신에게 소중한 지식과 정보가 올라오는 블로그만을 구독하면, 그 이상 불필요한 정보를 물리적으로 쉽게 차단할 수 있다. 

뉴스의 경우에도 시민으로서 표를 행사하기에 충분한 정보를 알기 위해 아는 것을 제외하면 자신이 맡은 정치적 책임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를 정한 그 분업활동에 적합한 자료를 적합한 만큼 적합한 분야의 것을 취합하면 된다. 오늘날 많은 뉴스들은 실제 그 보도의 중요성보다는 인간의 뇌를 쓸데없이 자극하여 클릭을 유도하는 것이므로 그런 유형들이 어떤 유형인가 잘 생각해보고는 그들의 클릭 유도에 넘어가는 만큼 그들의 종복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친우와의 교유를 제외한다면, 특별한 다른 사정이 없는 한 사람들과는 예를 다하여 만나며 날씨 이야기와 업무 또는 공부 이야기, 인격의 내밀한 부분과 관계되지 아니하는 간단한 안부와 근황, 그리고 누구의 복리에나 도움이 될 수 있는 유용한 생활상의 정보(어느 영화가 재밌다든가, 어떤 전자 기기를 어디 가면 싸게 살 수 있다거나, 대장내시경 검사를 하려면 그 며칠 전부터 깨나 김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 어떤 사람의 경우엔 뾰루지 초기에 리도맥스와 같은 연고가 잘 들을 수도 있다는 등등)를 소통하는 것으로 이야기의 주제를 제한하는 것이 타당하다.

 

내부에서 솟아나는 사고는 제1차단으로는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제1차단을 꾸준히 실행하면 내부의 원천도 그 규모가 작아진다. 왜냐하면 결국 외부의 원천에서 온 자동발화들이 마치 나의 내부에서 솟아난 것처럼 위장하여 솟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부의 원천에서 촉발되는 사고 역시 제2차단으로 많은 부분 차단될 수 있다. 즉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내 능동적 행위 대응에 차이를 가져올 생각인가? 그렇지 않다면 나와는 무관한 사고이다. 그것은 아마도 세계의 필연적 부조리에 관한 사항일 것이다. "

 

(3) 제3원칙: 스토아적 관문을 통한 질문 전환 원칙

 

제3원칙은 소극적이면서도 적극적 원칙이다.

 

제3원칙은 "어떠한 사유도, 결국에는 스토아적 관문을 거쳐 능동적인 질문으로 전환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스토아적 관문은, 모든 문제 상황을 가치의 지평에서 1인칭의 능동적 행위에 관한 문제로 재설정하는 바꾸는 장치다.

 

스토아적 관문은 1인칭 관점에서 능동적 행위로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분하고, 전자의 것만을 자신의 행위를 초청하는 문제로 받아들인다. 후자는 오로지 전자의 지침을 만들어내는 자료로 사용할 뿐이다. 예를 들어 이 사회의 운영이 어리석고 부정의하게 좌우된다면 스토아적 현자는 거기에 분개해하는 데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현재의 시스템이 어리석음과 부정의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전제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여기에는 모든 사람들이 현명함과 정의로움을 인적 속성으로 갖출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작동가능한 민주주의 제도를 고안하고 구현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 포함된다)의 질문으로 전환될 뿐이다. 물론 그 문제를 풀려면 부정의와 어리석음의 성질에 관하여 많은 것을 조사해야 할 것이고, 그런 한에서 그런 것들에 관해 사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반면에 그런 활동의 맥락에서 그런 자료로 사용되지 않는 사유는 불필요한 것으로, 이성에 들어맞지 않는 것으로, 스토아적 관문에서 걸러내진다.

 

스토아적 현자는 이를 모든 상황에 적용한다. 예를 들어 불치의 병에 걸렸다고 하였을 때에도, 스토아적 현자의 질문은 '그렇다면 남은 기간에 나는 어떤 가치를 추구하거나 향유할 것인가?'로 전환된다. 그런데 이것이 극단적으로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두 죽음에 이르는 노화라는 불치의 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지 남은 기간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느 순간에 스토아적 관문을 적용하게 되는 불합리한 지점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스토아적 현자는 이 세계가 부조리하다는 뻔한 사실을 언제까지고 넋두리하며 자기 자신의 정신과 주위 사람의 정신을 번잡하게 하지 않는다. 부조리한 세계를 유정적 존재가 장래를 향하여 겪지 않게 하는 가장 궁극적이고 확실한 방법은 반출생주의를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부조리한 세계에 태어난 사람이 부조리를 회피할 방도는 없다. 이를테면 연속적 자아를 의식하는 자의식적 존재의 죽음은 비극적 부조리인데, 이 부조리는 피할 수 없다. 다만 어떤 부조리들의 파문의 규모를 줄이는 데는 무언가 기여할 것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현명하게 사는 방법은 스토아적 관문을 거쳐 살아남아 재설정된 문제를, 그 문제 풀이의 문법에 따라 풀어가는 것이다.

 

스토아적 관문에서 탈락한 사고는 버린다는 점에서 소극적이고, 스토아적 관문을 통과하여 재설정된 문제에 능동적으로 임한다는 점에서 이 원칙은 적극적이다.

 

이러한 사고를 통해서 불필요한 공포와 불안, 두려움, 조급함, 당황스러움을 상당히 잘라낼 수 있다. 이러한 감정들은 무엇인가 능동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 상황이라는 신호일 수도 있지만, 보통은 그런 신호 역할을 하는 것을 넘어선 과장된 것이다. 그 과장된 부분은 잘라내고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할 부분에만 집중하는 것으로 평정의 문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능동적인 단순화 기예를 적용한 삶은 따라서 스토아적 관문을 통과한 자신의 능동적인 문제 설정이 있어야 한다.

 

(4) 제4원칙: 활동의 문법에 대한 고민의 시간과 문법 따르기의 분리

 

제4원칙부터는 오로지 적극적 원칙이다. 사람들은 단순화의 기예를 주로 외부대상과의 관계에서만 생각하기에 소극적 원칙으로만 구성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한다. 그러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지침을 지키기 쉽지 않듯이 소극적으로만 구성된 기예만으로는 실제에서는 힘을 쓰지 못한다. 소극적 원칙은 오히려 적극적 원칙에 초점을 맞추기 위한 예비작업이다.

 

제4원칙은 '자신이 단순화하여 남긴 가치 활동들은, 그 적절한 수행의 문법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따로 가지고, 나머지 시간에는 그 문법을 마음 편히 따른다'는 원칙이다.

 

예를 들어 시험합격이라는 도구적 가치를 위해 시험준비를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시험공부를 할까를 매일 20분 정도는 따로 시간을 내어 고민해보는 것이 좋다. 논문을 쓰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선학자의 연구를 효과적으로 정리하고, 글을 효과적으로 쓸지 매일 20분 정도는 따로 시간을 내어 고민해보는 것이 좋다. 따로 시간을 내어 고민한다 함은, 노트를 쓰면서 고민한다는 것이다. 물론 생각이 샤워 중에 떠오를 때도 있겠지만, 그 아이디어를 좀 더 체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형태로 구체화하려면 그 아이디어를 급히 메모하되, 나중에 결국 노트에 필기를 하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좋다.

 

수행행위의 문법을 고민하는 좋은 전략 중 하나는, 그것을 일련의 절차들로 분해하여, 그 절차의 순서나 절차의 내용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글을 쓰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글쓰기의 절차를 충분히 분해하여 순서대로 조직하지 못하였그나, 그 절차 중 어느 하나를 개선이 많이 필요한 방식으로 정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문법들은 글로, 도해로, 명시화되는 것이 좋다. 그래야 자신이 그 수행행위 중 어느 단계에 와 있는가를 점검할 수 있고, 자신의 기질과 여건에 새로 생각해낸 전략이 들어맞는지 의식적으로 시험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전략은 아이디어 상태로는 좋아 보였을지라도 막상 해보면 지나치게 효율이 낮거나 정신이 번잡하여 쓸만한 것이 못될 수도 있다. 어떤 전략은 개선을 좀 더 거치면 쓸만한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시행착오를 통해 자신에게 맞는 것을 찾아보고 점검하는 시간을 따로 가지는 것이 좋다.

 

이렇게 따로 고민의 시간을 정해두고 문법을 개선시켜 나가되, 고민의 시간으로 정해지지 않은 시간에는 아예 고민을 하지 않는다. 고민이 떠오르면 아이디어 형태로 메모만 해놓고, 따로 정한 고민의 시간에 한다. 이 시간은 대체로 저녁 때가 적당하지만, 당장 고민을 20분간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좋다.

시험준비를 하는 이들이 많은 도서관에 가보면, 두꺼운 수험서를 연신 뒤로 들춰보면서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수험 전략에 대해서 고민하는 시간을 따로 가지지 않고 수행의 시간과 현재의 문법에 대해 불만족하는 시간을 혼융해서 잡탕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프로야구투수가 경기를 하는 와중에 완전히 새로운 투구법을 생각하고 시험한다면 이보다 어리석은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 일은 훈련 시간에 따로 하는 것이 맞다. 야구가 야구의 문법에 따른 수행이듯이, 다른 활동도 모두 마찬가지다. 그런데 사람들이 흔히 일상생활에서 이를 혼융하는 까닭은 문법을 명시적으로 파악하고 전략을 짜는 시간을 따로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법을 파악하고 전략을 짜는 시간과 그 문법에 따라 수행하는 시간은 분리하는 것을 하나의 원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5) 제5원칙: 활동의 창조적 부분에 시공간 할애하기

 

제5원칙은 '수행행위의 창조적 부분의 체계적 얼개를 짤 때 명시적으로 특별한 시공간을 따로 할애한다'는 것이다.

 

능동적으로 삶을 조타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기획을 중심에 놓아야 한다. 그리고 보통 남이 요구하거나 남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기획이 아니라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기획에는 창조적 부분이 많이 요구된다. 

 

그런데 창조적 부분은 시간을 따로 할애해서 집중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구체적 형태로 구현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긴 글을 쓰려고 하는 사람이 목차를 잡고, 그 목차 내에 들어갈 핵심 논증을 명제 형태로 정리하지 않으면 긴 글을 쓸 수 없다. 그런데 긴 글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목차의 초벌 형태도 아직 나오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러면서 글을 곧장 쓰려고 하면서 안 써진다고 고뇌한다. 

 

핵심 단서나 아이디어는 샤워를 하거나 청소를 하다가 떠오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발상만 가지고는 기획은 진행되지 않는다. 발상을 체계적으로 구체화할 때도 창조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은 오로지 여기에 바쳐진 시간을 따로 매일 조금씩 할애할 때 가능하다.

 

실제로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다. 하루에 평균 30분 정도면 충분한 것 같다.

 

예를 들어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1) 아이디어를 명제나 공식 형태로 분명하게 표현하기(2) 목차를 잡기 (2) 핵심 논증을 개괄적으로 써보기에는 하루 30분이면 충분하다.

 

창조적 능력을 투여해야 건축되는 얼개가 완성되고 나면, 논증을 정교화하고 자료 인용하고 살을 붙이고 문장을 다듬는 다소 창조적인 부분과 루틴화된 수행의 문법을 따르는 부분이 혼융된 부분을 자연스럽게 뒤따르게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비창조적인 일을 하는 시공간에서 그런 비창조적인 일과 혼융된 채로 창조적인 일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창조적인 일이 계속 미뤄지게 된다. 왜냐하면 대체로 창조적인 일은 마감을 스스로 설정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마감이 멀리 있고 비창조적인 일은 마감이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창조적인 일을 계속 미루고 있음을 자각한다면, 다소 작위적인 의례를 거치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자신이 사무실이나 연구실에서 보통 일한다면, 창조적인 부분은 카페에 가서 딱 30분만 집중해서 하고 오는 것이다. 노트와 필기구만 가지고 가거나, 봐야 할 단 하나의 자료만 가지고 가서 생각의 얼개를 만들어내고 오는 것이다. 30분으로 짧게 정하고 그때 집중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 이로 인해 커피값이 하루에 4천원이 들더라도 아깝지 않다. 카페보다 도서관이 좋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노트와 필기구만 들고 전철을 탈 수도 있겠다. 다만 생각을 개시하기로 한 장소가 평상시 생활공간과 다른 곳이되, 멀리 있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20분 이상 버스를 타고 가야 도착할 수 있는 장소에서 생각하는 것은 좋지 않다. 

 

(6) 제6원칙: 정규성의 원칙

 

제6원칙은 '우발적인 사건과 기회의 여유를 미리 둔 부분을 제외하고는, 우발적 사건의 간섭이나 선택을 위한 망설임의 여지를 가능한 줄인 정규성을 갖춘 생활 패턴을 확립한다'는 것이다.

 

정규성과 반대되는 성질이 우발성이다. 정규성(regularity)는 단순성의 한 요소이다. 이는 우발적인 사건으로 가득찬 삶이 얼마나 복잡할지 생각해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런 삶은 주된 기획의 추구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 일본어 공부를 하기로 했고 오늘 계획을 어기면 이번주 계획 보충하기가 어려운 스케줄인데도 불구하고 어느 선배가 술을 먹자고 한다는 이유로 그냥 거기에 쪼르르 따라가는 식이라면 일본어 공부는 난망할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넓고 선배는 많기 때문이다. 

 

우발적 사건 뿐만 아니라 망설임을 주는 선택 기회도 정규성에 간섭한다. 예를 들어 옷장에 계절별 옷이 매우 많고, '그때그때 분위기에 맞는 제일 좋은 옷을 입고 나가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매일 아침마다 우발적 기회를 맞게 된다. 반면에 검은색 터틀넥 스웨터만 세 벌 있는 사람은 아침에 전혀 우발적 기회를 갖지 않을 것이다. 점심 메뉴를 회사 밖에서 늘 맛있는 걸 먹기로 하고 같이 가는 회사 동료들과 한참을 고민하는 사람은 점심 시간마다 우발적 기회를 맞는다. 반면에 점심은 맛이 그리 없어도 상대적으로 건강한 식단에다 식비도 절약할 수 있는 회사 급식 식당에서 먹기로 아예 고정해둔 사람은, 전혀 고민할 것이 없다. 학생이라면 학생회관이 통계적으로 가성비가 높은 음식이 가장 잘 나온다면, 그냥 학관만 줄창 가는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이 우발적 선택을 대신해준다면 그것을 따라 다른 식당에 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러 자신이 매일 우발적 선택 기회를 맞이하는 상황을 많이 열어둘 필요는 없다. 매일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보는 사람이라면, 오늘은 어떤 영화를 볼지 고르느라 매일 20분 이상을 허비할 것이다. 그리고 이미 많은 영화를 봤기 때문에 새로 고른 영화가 재미가 없을 확률이 높다.

 

우발적 사건은 우리의 기획 진행에 간섭하여 방향을 바꾸어 놓는다. 망설임을 주는 선택 기회 역시 정신을 번잡하게 만들고, 본래의 기획 추진의 힘을 흩뜨려 놓는다.

 

그래서 첫째로, 우발적 사건이 일어날 여지를 감안하여 시공간 머물기의 정규적 계획을 짜되, 우발적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 경우에는 계획적 휴식 시간으로 쓴다. 예를 들어 퇴근하고 도서관에서 일하고 공부하기로 결정한 사람은 자신이 주로 가는 도서관이 정해져 있는 것이 맞다. 그리고 도서관에 가서 할 일도 중기 계획을 중심으로 그 전날 대부분 정해져 있는 것이 좋다. 우발적 사건이 일어날 여지는 시간 단위로 일부러 여유를 잡아 놓는다. 그래서 아주 특별한 사건이 아닌 한 우발성의 포함도 계획적 범위 안에서 할 수 있다. 사건 내용 자체는 계획할 수 없지만 그것이 나의 정규성에 미치는 범위는 계획을 하는 것이 옳다. 이런 방식으로 우발적 사건이 가져오는 삶의 새로운 기회에도 열려 있으면서도, 그런 우발적 사건에 줏대없이 휘둘리지 않는 생활양식을 실현할 수 있다. 우발적 시간을 다 쓴다면 마감이 멀리 있는 일이라도 할 일은 할 일이기 때문에 누가 우발적 제의를 하더라도 할 일이 있어서 못한다는 것은 참인 문장을 진술하는 것이다. 

 

둘째로, 우발적 선택 기회는, 물건을 줄임으로써, 그리고 if '상황' then '행동'의 단순한 준칙을 정함으로써 줄여나간다.

우선 자신이 그다지 가치를 두지 않는 물건 수를 줄임으로써 간접적으로 정규성을 획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패션에 큰 가치를 두지 않는 사람은 옷도 평소 바꾸어 입는 옷은 가을과 봄/ 여름/ 겨울 별로 세 벌 이하로 유지하고, 순서대로 갈아입을 수 있겠다. 그리고 특별한 이벤트에 입는 옷을 따로 마련해둘 수 있겠다. 그래서 이렇게 정규성의 스케줄 하에 들어가지 않는 옷을 아예 재활용함에 넣어버리는 것이다. 신발에 가치를 두지 않는 사람은 운동화 1벌과 구두 1벌이면 족하겠다. 그 외에도 물건은 생활을 정말로 개선시킬 물건만 사고, 하나의 물건을 들이면 하나의 물건을 버리는 것을 원칙으로 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우발적 선택 기회를 줄여나갈 수 있다. 왜냐하면 물질성을 가지는 이런 사물들은 눈에 보일 때마다 우발적 선택 기회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생활을 하면서 어떤 유형의 선택 기회에서는 어떻게 하겠다고 미리 좋은 준칙을 정함으로써 우발적 사건 간섭과 선택 기회를 줄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의 평소 시간당 노동가치보다 현격히 높은 대가도 아니며 그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발전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이미 통상적 노동시간을 채우고 남은 시간에는 자기자신을 발전시키고 있는 데 과외의 일을 더 늘려서 맡지 않는다는 식의 준칙을 삶의 모든 분야에 조금씩 설정하고 시험해보고 안착시키는 것이다. 예를 하나 더 들자면 필자는 지하철에서 서서 갈 때는 책을 읽고, 지하철에서 앉아서 갈 때는 노트북으로 번역을 한다는 준칙을 정해두고 있기 때문에, 지하철을 타고 나서 가는 동안 마음이 헤멜 일이 없다.

 

(7) 제7원칙: 마음 다스리는 루틴의 설정

 

제7원칙은 정규성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부정적인 우발적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 파급효과를 최단기간으로 만드는 원칙이다.

 

그 원칙은 "우발적 감정이 가치 추구 활동의 문법에 몰두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 그 감정을 다스리는 if - then 루틴을 정해서 그 루틴을 실행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화가 날 때는 근력운동을 폭발적으로 한다는 준칙을 세워두고, 화가 나면 화가 상당히 가라앉을 때까지 즉석에서 근력운동을 함으로써 몸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이 좋다. 대표적으로 벤치를 짚고 하는 팔굽혀펴기가 있을 것이다.

 

또 마음이 번잡할 때는  정해둔 코스를 산책으로 돈다거나, 일기를 써서 머리를 정리한다도 좋다. 늘 하던 번역을 이어서 일단 15-20분 정도 하는 준칙을 세워두고 실행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필자가 쓰는 방법이다. 번역에 상응하는 활동으로는 논리학, 외국어, 수학 공부를 필사를 하면서 하는 것이 있다. 이런 활동을 하면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본래의 기획을 하기에 적합한 마음 상태가 된다. 이러한 비창조적이면서도 해두면 낮은 평정 문턱으로도 할 수 있는 과제들을 늘 고정시켜 놓고 있으면 많은 시간을 아끼면서 동시에 정신도 평화롭게 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마음의 ㅍ여정이 필요할 때 책 <왕보다 자유로운 삶>을 사서 거기에 실린 엥케리디온 부분을 필사하거나 반복해서 읽는 것을 하나의 루틴으로 삼을 수도 있겠다.

 

이러한 준칙들은 의식주의 가장 기본적인 일상생활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필자는 잠이 온다 싶을 때는 이미 1번 이상 들어 내용을 알고 있으며 좋아하는 필로소피 바이츠의 철학자 인터뷰 파일을 작은 볼륨으로 틀고 30분 예약중지를 눌러 둔다. 그러면 정신이 편안해지면서 빨리 잠들 수 있다. 이 루틴은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통해 필자에게 딱 맞는 것으로 찾아낸 것이다. 이것처럼 최적 루틴들을 많이 찾아내는 것이 좋다.

다른 준칙으로는 집에 들어오면 바로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지 말고, 세수만 한 상태에서 신나는 음악을 틀고 20분 가량 청소를 먼저 하는 준칙도 있다. 그러면 청소 자체도 운동이 된다. 다음날 할 일 중 가장 중요한 것 1-2개, 그리고 하면 좋은 것 몇개를 저녁에 미리 생각해보고 적어놓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은 루틴 중 하나다. 그러면 일어나서 하루의 중심이 딱 잡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준칙의 예로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 신나는 노래를 연달아 틀어서, 또는 이미 반복해서 들은 15-20분짜리 철학 강의를 틀어놓고 다 끝날 때까지 나갈 준비를 마치는 것을 들 수 있겠다.

다만 이런 루틴을 만들어낼 때는 그 자체가 가치의 문법에 맞고, 또 자신의 기질과 여건에도 맞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만들어낼 때 고민도 해야 하거니와, 또 시행착오를 통해 자신에게 맞는지도 실험해보는 것이 좋다.

<끝>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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