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데이비드 베너타의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를 겉핥기식으로 읽거나 아예 읽지 않고는, 반출생주의 논증이 소극적 공리주의(negative utilitarianism)에 기대고 있다고 오해한다. 실제로 구글 검색이나 유투브 검색을 하면 영미의 많은 일반인들이 이 책에 대하여 소극적 공리주의를 채택하면 반출생주의가 도출된다는 내용이라는 리뷰를 올려 놓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결론을 지지하면서도 자기 수준에 맞춰 근거를 곡해해서 없는 내용을 지어낸 것이다. 베너타는 공리주의자를 표방하지 아니하며, 당연히 소극적 공리주의자도 아니다. 이 책의 색인 어디에도 소극적 공리주의negative utilitarianism는 등장하지 않는다.

 

고전적 공리주의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론이다. 소극적 공리주의는 이 목표를 “모든 이들의 최소 괴로움(the least amout of avoidable suffering for all)”로 대체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론이다. (이 정식에 대한 언급은 Karl Popper,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2nd. edn. revised (1962), vol. i, chap. 5, n. 6 (2)에 나온다.) 소극적 공리주의의 매력은 주로 쾌락과 고통이 각각 인간 복지에 미치는 영향이, 비대칭적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온다. 고통은 정신을 지배하는 성질이 강하다. 잠을 잘못 자서 어깨와 목 부위가 결리고 아프다는 고통은 그것이 나을 때까지 온종일 정신을 지배할 수 있다. 이로써 사소한 일상의 쾌락은 거의 이 일상의 고통에 덮여 버린다. 반면에 일상의 쾌락이 일상의 고통을 덮는 경우는 훨씬 드물다. 쾌락이 고통을 덮으려면 그 쾌락이 정신을 몰두하게 할 정도로 상당히 강렬한 것이어야 하며 그 효과 또한 일시적인 것에 그칠 뿐이다. 게다가 평소에는 상당한 즐거움을 주던 활동이라도 괴로움이 있을 때에는 더 이상 아예 쾌락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더 나아가 사람들은 같은 단위라면 고통을 겪고 쾌락을 얻기보다는 쾌락을 포기하고 고통을 회피하길 바란다. 최고의 쾌락은 최악의 고통을 결코 상쇄하지도, 보상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사소한 비용으로 줄 수 있는 큰 쾌락을 줄 의무는 없지만, 사소한 비용으로 구제할 수 있는 큰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의무는 있다고 일반적으로 생각된다. 이 비대칭성에 착안하면 처음 보기에는 소극적 공리주의는 매력적인 이념인 것 같다. 그 매력은 추상적으로 표현했을 때에는 큰 울림을 주는 지침에서 드러난다. 쾌락의 증진은 고통의 감소보다 인간 복지를 위해 축차적으로 후순위이다. 그러므로 '개인과 정부의 우선적 목적은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지 쾌락을 증진하는 것이 아니며, 고통의 제거라는 의무를 개인이 모두 다 달성하고 나서야 비로소 쾌락의 증진을 이야기할 여지가 생긴다.'

 

그러나 소극적 공리주의에는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반대 논거들이 있다.

 

첫째로, 소극적 공리주의는 사실 어떤 유형의 사안에서 고전적 공리주의를 적용하면 원래 나오는 결론을, 다른 유형에까지 잘못 확장한 이론이라는 지적이 통렬하다. 고전적 공리주의는 효용 최대화를 추구한다. 만일 어떤 경우에 정말로 고통이 쾌락을 덮고, 쾌락으로 결코 상쇄되거나 보상되지 못한다면, 그 때 고통과 쾌락은 효용 단위가 결코 같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즉, 애초에 고통은 효용 ?100단위이고 쾌락은 효용 +1단위인 것이다. 따라서 둘을 제대로 측정만 한다면 효용 -100단위를 0으로 올려 놓는 일은, 0에서 +1로 올려 놓는 일보다 일반적 공리주의에서 당연히 중요할 수밖에 없다. 비대칭성은 효용측정을 제대로 하지 못한 착오를 범한 결과로 생기는 환상에 불과하다. 효용측정을 제대로 하기만 한다면 비대칭성은 효용 측정 결과에 그대로 반영되므로, 고전적 공리주의를 여전히 유지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와 달리 소극적 공리주의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그 어떤 쾌락의 추가를 위해서도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는 것은 불필요하다.

 

둘째로, 그런 축차적 우선순위는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실제 사람들의 효용판단 및 효용선택과도 맞지도 않다. 이는 많은 유형의 사안에서, 사람들은 작은 고통은 큰 쾌락을 위해 감수하려고 한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악기를 처음 배울 때의 괴로움을, 악기를 능숙하게 연주할 수 있게 되었을 때의 즐거움을 위해 감수한다. 해외여행의 즐거움을 위해 고통스러운 장거리 비행을 감수한다. 날렵하게 활동하는 즐거움을 위해 운동을 하는 괴로움을 감수한다. 상당히 많은 경우 수술 이후의 보다 온전한 신체로 누리는 쾌락을 위해서 수술 과정과 재활 기간의 고통을 견뎌낸다. 특히 확률의 문제로 들어가면 이런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사람들은 자동차 사고의 위험을 감수하고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 자동차 사고의 위험은 기대효용의 마이너스 부분을 구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이너스 부분을, 자동차를 타고 다님으로써 생기는 유익함을 위해 감수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어떤 활동의 고통을 그 활동의 쾌락이 보상하지 못할 때에는, 또는 고통의 위험을 기대쾌락이 보상하지 못할 때는 그 활동을 하지 않는다. 자기자신의 복리하고만 주로 관련된 이 모든 선택과 판단 사안들에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은 폰 노이먼-몰게스턴 효용함수에 의해 도출된 기대효용(expected utility)을 최대화한다는 지침에 대한 대략적인 추종이다. 소극적 공리주의를 따르는 실제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얼핏 보기에 매력적인 소극적 공리주의는 실제 우리 삶의 수행적 실천에서 아무런 매력도 가지고 있지 않음이 드러난다.

 

셋째로, 소극적 공리주의도 공리주의의 한 판본이기 때문에, 여전히 공리주의의 문제점 상당부분을 그대로 보유한다. 공리주의는 효용이라는 단일한 궁극적 가치로 모든 것을 환원한 다음, 그 효용합산의 결과에 따라 옳은 것을 결정한다. 그러나 옳음이 효용 계산 이후에야 오는 것이라는 이념은, 존엄을 가진 존재들의 지위와 관계에 어긋난다. 그 지위와 관계에서 사람들이 서로에 대하여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석명책임을 지며, 사람들은 효용계산과 무관하게 자신의 권리 침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다. 그러나 소극적 공리주의는 이 자격을 아예 고려에 넣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다섯 사람이 장기 부전으로 고통스럽게 죽는 큰 비효용을 피하기 위해, 무작위로 건강한 한 사람을 선발하여 몰래 마취하여 납치한 후(그래서 그 사람은 아무 고통도 느끼지 않으며 죽음의 공포도 느끼지 않는다) 몸을 해부하여 그 사람의 장기를 떼어내어 다섯 사람에게 장기이식 수술을 하는 제도를 생각해보자. 즉 해리스의 '생존 로또'(Survival Lottery)를 운영하는 것이다.( John Harris, “The Survival Lottery”, Philosophy, Vol. 50, Issue 191, 1975. Jan, pp. 81-87.) 해리스는 동명의 논문에서 결과주의 이론 내에서는 이 제도를 거부할 수 없음을 보여준 바 있다. 주디스 자르비스 톰슨은 이에 더 나아가, 행위의 속성까지 포함시키는 비결과주의적인 판본의 공리주의도 개인이 경계를 가진 독립된 별개의 구분된 존재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가치 추구의 제약이 되는 청구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 바 있다.

 

"왜냐하면, 당신이 행위가 가치를 가진다고 보고, 비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를 선택했다고 해보자. 당신이 장기이식(자연적 원인) 사안을, 내가 앞 절에서 드러내 보인 방식으로 다룰 수 있다고는 논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은 장기이식(5명의 악당 원인) 사안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 (138) 외과의사가 젊은 남자를 조각조각 자르고 그의 장기를 떼어내는 것은 (당신의 견해에서는) 어마어마한 부정적 가치를 지닌 행위이다. 그러나 만일 이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다섯 악당 각각이 누군가를 죽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만일 외과의사가 행위로 나아간다면, 어마어마한 부정적 가치를 갖는 하나의 행위가 있게 된다. 만일 외과의사가 행위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적어도 그만큼 큰 부정적 가치를 갖는 다섯 개의 행위가 있게 된다. (나는 “적어도 그만큼 큰 부정적 가치”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외과의사가 다섯 환자의 삶을 구하기 위해 행위로 나아간다면 외과의사의 의도는 좋은 의도인 반면에, 악당의 의도는, 그 내용이 정확히 무엇이든 간에, 악의적인 의도라고 우리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비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는, 외과의사가 장기이식(5명 악당 원인)에서는 행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결론을 산출하는 것으로 보인다."(Judith Jarvis Thomson, The Realm of Rights,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0, pp.37-38).

 

그래서 모든 판본의 공리주의는 그 제도를 지지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다섯 사람이 계속 살게 되는 효용이 한 사람이 계속 살게 되는 효용보다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극적 공리주의 역시 그 제도를 지지하게 된다. 왜냐하면 소극적 공리주의는 비효용(disutility)의 최소화를 추구하며, 다섯 사람이 죽는 비효용보다 한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비효용이 더 적기 때문이다.

 

넷째로, 소극적 공리주의는 존재의 말살에 관하여 공리주의보다 더 터무니없는 결론을 지지하게 된다. R. N. 스마트가 이 점을 신랄하게 지적한 바 있다. (R. N. Smart, “Negative Utilitarianism”, Mind, Vol. 67, No. 268, 1958, pp. 542-543.) 즉각 인류 전체를 고통 없이 멸종시킬 수 없는 무기를 통제하고 있는 통치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그 통치자가 그 무기를 사용하여 인류를 한꺼번에 죽이는 일은 허용될 뿐만 아니라 꼭 해야 하는 최고의 의무가 된다. 그 통치자가 사용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반역을 포함해 무슨 일을 벌여서라도 그 무기를 탈취하여 사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무기를 사용하는 경우 고통은 0으로 최소화되는 반면, 그 무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모든 사람들의 삶의 고통이 합산된 어마어마한 양이 미래에 계속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벤저스 시리즈에 등장하는 타노스의 인피니티 스톤을 가지고 있는 이가 있다면, 그는 우주의 인구 절반을 소멸시킬 것이 아니라, 우주의 인구 전부를 소멸시켜야 한다. 벤덤식의 고전적 공리주의는, 이런 무기를 선별적으로 사용할 것을 주장하게 될 것이다. 즉 어떤 사람의 남은 삶이 쾌락보다 고통을 더 많이 담고 있는 경우, 즉 순 쾌락이 마이너스인 경우에는, 그 삶의 주인인 그 사람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 사람을 고통없이 소멸시키는 것이 통치자의 의무이다. 현대 후생경제학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이론인 선호 공리주의는, 남아 있는 삶의 순 쾌락이 플러스인지 마이너스인지와 상관없이 그 주체의 때이른 죽음을 맞지 않고자 하는 선호가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선호바더 더 강하다면 그 선호를 좌절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소극적 공리주의의 난점은 비단 이런 가상적인 상황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고통 없이 사람을 소멸시키는 약은 이 세상에 현실로 존재한다. 소극적 공리주의를 채택하게 되면 스마트가 지적했듯이, 고통 없이 죽게 만드는 약을 잠자는 사이에 투여하여 사람을 죽이는 개개의 행위 자체가 모두 의무가 된다. 이런 방식으로 죽임을 당하지 않고자 하는 사람들의 선호는 소극적 공리주의의 관점에서는 비합리적이다. 왜냐하면 소극적 공리주의의 관점에서는 죽임을 당한 사람을 위해 최선임이 틀림없는 사태가 그 사람에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즉 괴로움의 최소화라는 최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 주위 사람의 슬픔과 괴로움을 고려에 넣는다 하더라도 이 문제를 소극적 공리주의 내에서 교정할 방도는 없다. 애초에 그 사람과 가까운 사람들 또한 고통 없이 한꺼번에 죽인다면 그런 슬픔과 괴로움을 발생시키지 않을 것이니, 더 많이 소멸시키면 소멸시킬수록 한층 더 좋은 일이 되기 때문이다. 고전적 형태인 적극적 공리주의는 이런 결론을 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죽임을 당한 사람이 누렸을 순효용이 사라진 만큼, 총효용이 감소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칼 포퍼가 소극적 공리주의 정식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그가 실제로 소극적 공리주의를 주창했다고 진지하게 보는 사람은 학계에 없다. 오히려 포퍼가 충분히 분석적으로 자신의 말을 음미하지 못한 채, 특정한 조건을 충족하는 한정적 사안에서 두드러지는 정부의 우선적 임무에 관하여 말한 것이라는 이해가 대체적이다. 왜냐하면 포퍼는 이것을 모든 행위자를 구속하는 하나의 전면적인 도덕 이론으로 제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포퍼는 사회가 덜어줄 수 있는 커다란 고통 구제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원리를 열린 사회의 원리(관용의 원리와 전제정 반대)와 함께, 사람들의 권리를 존중하는 한에서 정치적 권위 행사의 방향을 지도하는 지침 중 하나로 보았다. 그리고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 구제해줄 수 있는 극악한 고통에 빠진 구성원을 구하는 것이 (예술의 번영이나 체육경기를 통한 국위선양 등에 비해) 국가의 가장 우선되는 과제 중 하나라는 점은 합당한 사람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진술이다. 물론 이 취지를 소극적 공리주의의 언어로 표현한 것은 포퍼의 실수다. 이러한 우선순위는, 소극적 공리주의가 옳기 때문이 아니기 때문에 확립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까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에서 이탈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요청되기 때문이다. 공동의 부담을 통해 충분히 구제해줄 수 있는 커다란 고통으로부터 구성원을 구제하지 않는 것은, 그 구성원을 협동적 과업에서 한 역할을 하는 존엄을 가진 동등하게 자유로운 존재로 충분히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즉 목적론인 공리주의의 한 판본을 취하지 않아도 한정된 사안에서 커다란 고통의 제거나 감소에 우선순위를 두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사실, 스캔론주의적 계약주의(Scanlonian Contractualism)에 의한 이론적 해명은 오히려 공리주의에는 수반되는 커다란 난점 없이 이런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순 효용의 최대화가 고통 제거의 우선시에 대한 궁극적인 이론적 근거(rationale)가 된다고 보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사안에서 난점에 빠진다. 어떤 사람이 기아에 시달린다. 그 사람을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한, 그 사람을 기아에서 구제해주어야 할 부담을 질 의무가 있다는 점에 그 사람은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그 기아에 시달리는 사람이, 자신의 남은 삶에서 기아로부터 자신을 구제해줄 그 돈으로 자신이 너무나 염원하는 성지 순례를 하는 데 지원해달라고 강하게 탄원한다고 해보자. 그리고 그 사람의 강렬한 종교적 신념 때문에 성지 순례 여행을 하지 않음에서 오는 좌절과 괴로움이 그 사람이 곧바로 자살함으로써 끝낼 수 있는 기아의 괴로움보다 작다고 해보자. 공리주의의 경우에는 효용 수혜자(utility recipient)의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정신 상태(negative or positive mental state) 또는 선호(preference)의 충족이나 좌절(satisfaction or frustration) 여부에 의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고전적인 쾌락주의적 공리주의 입장을 취하건, 현대의 판본인 선호 공리주의 입장을 취하건, 이 사람이 성지 순례 요구가 좌절됨으로써 한층 더 큰 괴로움을 겪는다고 한다면, 이 사람을 기아에서 구제해줄 의무보다 한층 더 강력한 의무를 공동체가 진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러나 기아에서 구제될 권리는 우리 헌법에서 사회권에 포함되는 내용이지만, 같은 처지에 빠진 사람의 성지 순례를 지원받을 권리주장의 인정은 사회권에 포함되는 내용이 아니다. 성지 순례를 비롯해서 그 좌절이 커다란 괴로움을 가져오는 값비싼 기호들(expensive taste)들을 충족하는 권리주장은, 단지 실정헌법의 문제가 아니라 헌법의 내용의 타당성의 근저에 놓인 정치적 도덕(political morality)에 대한 최선의 해명에서도 인정하지 않는 권리이다. 공리주의에서는 이 사람이 더욱 더 강하게 원하고 충족되지 않으면 훨씬 더 괴로워할 요구를 들어주지는 않는 것이 허용되면서도, 그보다 덜 강한 주관적 욕구의 충족에 대해서는 공동체가 의무를 지는 것은 적어도 자연스럽게는 해명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당사자의 주관적 마음상태나 선호에 기초하여 권리의 우선순위를 매기는 체계가 발생시키는 역설은 Leo Katz, Why the Law is so Perverse. 이주만 옮김, <법은 왜 부조리한가>, 와이즈베리, 2012, 94-95면에서도 중심 주제가 되고 있다. 여기서 레오 카츠는 응급순위순환이란 문제를 제기한다. 앨과 클로이는 부부다. 두 사람은 사고를 당했다. 앨은 두 다리를 다쳤고 클로이는 한 손가락을 다쳤다. 그런데 클로이는 피아니스트다. 그리고 이 부부가 병원으로 실려온 같은 시각, 이들과 관계 없는 환자인 베아도 사고로 실려온다. 베아는 한 다리를 다쳤다. 각자는 자신이 다친 부분을 치료하면 신체 완전성을 회복하지만, 사고가 일어난 근처의 유일한 병원인 이 곳의 의료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오직 한 명만 제때 수술을 할 수 있다. 앨의 두 다리를 고치는 것이 가장 급선무이므로 앨이 응급순위에서 우선권이 있다. 그런데 이때 앨이 말한다. "나의 우선권을 클로이에게 양보합니다. 클로이도 이를 양보받기를 바랍니다. 제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아내가 이후 피아니스트로 커리어가 망가지는 것으로 생기는 고통, 그리고 우리 가계를 책임 지고 있는 아내 클로이가 자신의 일을 하지 못했을 때 생기는 경제적 소득 감소가, 제가 두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될 때 생기는 괴로움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쩄거나 저는 클로이가 저의 우선순위를 양보받아 치료 받는 데 최고로 강력한 선호를 갖습니다." 그러나 이때 베아가, 말한다. "한 다리를 다친 내가 두 다리를 다친 앨보다 응급순위가 후순위라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한 손가락을 다친 클로이보다 후순위는 아니다. 그러므로 클로이부터 먼저 치료한다면 당신은 나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다." 실제로 베아가 옳으며, 앨은 설사 자신의 치료에 관해서는 우선권을 가지더라도 이 우선권을 클로이에게 양보하는 식으로 행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소극적 공리주의와 일반적인 판본 공리주의 모두 해명을 하지 못한다.

 

이에 대하여 토머스 스캔론은 "선호와 긴절성Preference and Urgency"(in T.M. Scanlon, The Difficulty of Tolerance: Essays in Political Philosoph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ch. 4)에서 중요한 것은 객관적 긴절성(緊切性; urgency)이지 주관적 선호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나의 주장은, 그렇다면 우리가 어느 쪽이 우세해야(prevail) 하는지를 결정하려는 도덕 판단을 지지하려는 목적에서 이 두 상충하는 이해관심을 비교하려고 할 때, 우리가 하는 일은 해당 사람들이 그 이해관심들에 대해 얼마나 강하게 느끼느냐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그들이 기꺼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일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무엇을 희생하려고 하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그러한 강도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이 혜택들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이유들에 대한 탐구라는 것이다."

 

객관적 긴절성은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서 평화롭게 공존하고 공정하게 협동하기 위해 중요한 인간의 두 능력 발휘에의 필수성과 밀접성에 의해 판단된다. 이 인간의 두 능력은 존 롤즈가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밝힌 선관 형성 및 추구의 능력과 정의감의 능력이다. 굶주려 죽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항상적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은 입헌 민주 사회 구성원에게 열려 있어야 하는 전형적 행위 경로들을 전부 또는 대부분 닫아버린다. 그리고 이렇게 닫힌 행위 경로들은 구제가 필요한 그 사람의, 선관 형성 및 추구의 능력과 정의감의 능력 발휘에 필수적인 인격적 통합성과 신체 완전성에 핵심적 경로들이다. 반면에 그러한 행위 경로를 열기 위해 제한되는 행위 경로들은 그와 같은 질서정연한 사회에 필수적인 핵심적 경로들이 아니다. 예를 들어 추가적인 과세로 인해 돈이라는 전목적적 수단의 일부가 줄어드는 것은 그와 같은 필수성과 밀접성을 훼손하지 않는다.

 

레오 카츠가 수수께끼와 같은 역설(puzzling paradox)라고 본 응급순위순환 사태도 이러한 해명에 의해 깔끔하게 해결된다. (카츠는 이 역설이 다양한 사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패턴을 관철하고는 원래 그런 것이라는 선언만 제시했을 뿐, 이 역설을 해명하지는 못하였다.) 앨이 우선권이란, 앨의 주관적인 선호의 강도나 앨이 이후 전개될 사태로 인해 겪을 긍정적 부정적 정신상태에 결부된 것이 아니다. 앨의 우선권은 앨이 처한 의료상황의 객관적 긴절성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두 다리를 잃는 것은 한 다리를 잃는 것보다 입헌 민주주의 사회 구성원의 두 능력 발휘에 필수적인 행위 경로를 더 많이 닫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다리를 잃는 것은 한 손가락을 잃는 것보다 그 두 능력 발휘에 필수적 행위 경로를 더 많이 닫는다. 따라서 객관적 긴절성의 순서는 앨, 베아, 클로이의 순서이며, 이 세 사람은 각자 자신의 객관적 긴절성에 의해 부여된 우선순위를 스스로의 의사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포기하지 않을 권리를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앨은 자신의 주관적 선호의 강도를 내세워서 클로이에게 자신의 우선순위를 양보할 수 없는데, 이것은 객관적 긴절성에 비례하여 평등하게 배려하는 대우를 받을 베아의 권리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또한 주디스 자르비스 톰슨 <권리의 영역Realm of Rights>에서 들었던 한 청년의 몸을 해부하여 다섯 사람을 구하는 외과의사 사안도 해명할 수 있다. 몸이 해부되어 소멸되는 청년은 자신의 인격적 통합성과 신체적 완전성을, 인간의 두 능력 발휘에 필수적인 부분까지 훼손당하는 것을 감수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요구가 설사 더 많은 인명을 살린다는 이유에서 제시된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은 이에 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존 해리스가 든 가상적 제도인 생존 로또 사안도 마찬가지다. 그 생존 로또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해부될 사람으로 뽑힌 사람이, 정의감의 능력과 선관 능력에 필수적인 신체 완전성과 인격 통합성의 소멸을 감수해야 한다는 규범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그런 필요의 대상이 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 해악이 가해져도 되는 존재라는 상위 규범을 도입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위 규범은 모든 개인 각자가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라는 규범적 논증대화의 근본적 전제 조건을 위배한다. 근본적 전제 조건을 위배하는 규범적 발언은 수행적 모순을 범한다. 즉, 그것은 그렇게 뽑힌 사람의, 제안된 규범에 대해서 '아니요'라고 말할 권리를 박탈하면서도 동시에 그 사람의 규범에 대한 승인을 얻고자 하는 발화를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게 된다. 그런데 수행적 모순을 범한 발화를 유효한 것으로 인정할 경우에, 규범적 논증대화 자체가 붕괴된다. 왜냐하면 누구나 수행적 모순을 범하여 규범을 제창하면서도 그것이 타인도 타당하게 승인할 수밖에 없는 옳은 규범이라고 간단히 선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토머스 스캔론이 든 성지순례와 기아구제의 사례를 생각해보자. 기아에서 구제되는 것은 입헌 민주주의 사회의 전형적 구성원으로 살아가려면 필수적으로 열려 있어야 하는 행위 경로를 열게 하는 효과를 낳게 한다. 이 행위 경로가 닫힐 때 그 사람은 궁극적으로 소멸, 즉 규범을 승인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유지되어야 하는 두 능력을 잃게 된다. 반면에 해외로 나가야 하는 성지순례를 갈 돈이 없는 것은 입헌 민주주의 사회에서 평화롭게 공존하고 공정하게 협동하는 전형적 구성원의 행위 경로가 닫힌 것이 아니다. 즉 그 행위 경로의 닫혀 있음은 롤즈가 말한 질서정연한 사회의 시민의 기본적 두 능력이 수용할 수 없도록 인격적 통합성과 신체적 완전성을 훼손시키는 결과를 낳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두 권리주장은 선호나 욕구의 강도에서는 동등하거나 성지순례 쪽이 더 강하다 할지라도, 그 긴절성에서는 현격한 차이가(그래서 기아구제는 객관적 긴절성이 큰데 반해 성지순례는 그렇지 않은 차이가) 나오는 것이다.  

 

반면에 어떤 유일무이한 희귀한 면역체를 가진 청년이, 지금 대규모로 유행하고 있는 세균에 대한 치료제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피를 채혈하는 것을 거부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국가가 처음에는 청년의 동의를 얻고, 또한 적정한 규모의 최대한의 보상을 제시하고자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청년은 동의하지 않는다. 이러한 예외적인 경우에 국가가 청년을 채혈하는 데 필요한 시간 동안 억류하여 그 피를 채혈하는 것은 입헌 민주주의 사회에서 향후 발휘해야 하는 그 청년의 두 능력을 훼손하지 않는다. 물론 통상의 경우에는 청년이 가졌던 자기 신체에 대한 간섭을 배척하는 효력을 갖는 소극적 방해배제청구권이 잠시 제한되는 데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명이 걸려 있다는 점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목적론적 추론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청구권 제한의 한계를 분명히도 통합성을 해할 수 없는 지점으로 설정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주디스 자르비스 톰슨의 말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 전체에 걸친 선이 아무런 총합을 갖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청구권이 관련되는 경우에는, 사람들 전체에 걸친 선의 총합은 문제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한층 더 간략한 형태로 말하자면, 청구권이 관련된 한에서는,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where claims are concerned, the numbers do not count)(주석 5-나는 여기서 이념은, 청구권이 관련되는 경우에는 수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여기서 제시된 이념은 도덕에서 수가 중요하지 않다는 이념이 아니다. 그저 분배의 문제만이 관련되는 경우에는, 수는 거의 틀림없이 중요하다.(the numbers arguably do count) John Taurek, “Should the Numbers Count?”, Philosophy and Public Affairs, 6 (Summer 1977)을 보라. 수는 중요하지 않다는 논증이자 Taurek의 논증에 대한 비판으로는 Derek Parfit, “Innumerate Ethics”, Philosophy and Public Affairs, 7 (Summer 1978)을 보라. 이것을 높은 문턱 논제라고 칭하도록 하자.(High-Threshold Thesis)(Judith Jarvis Thomson, The Realm of Rights,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0, p. 167)"

 

이처럼 스캔론의 계약주의 이론은, 매우 작은 부담을 각 개인에게 지워 공적인 구조 체계를 조성하여 긴절한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는 것을 허용하는 공적 원리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이 합당하게 거부할 원리임을 보여줄 수 있고, 그것도 역설의 난점을 발생시키지 않고도 그럴 수 있다. 반면에 소극적 공리주의가 처음 겉보기에 매력적이었던 까닭은 몇몇 사안에서는, 공리주의의 원래 판본(orginal version of utilitarianism)보다 그런 객관적 긴절성에 부합하는 판단을 더 낳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많은 사안들을 다루게 되면, 소극적 공리주의 역시 객관적 긴절성에 제대로 기초를 두지 않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따라서 베너타가 이와 같이 처음 보기에는 반짝반짝 빛나지만 결국 깊은 분석을 거치면 만신창이가 되어 너덜너덜 뭉개질 수밖에 없는 이론에 기초하여 자신의 논의를 전개했다고 보는 것은 터무니없는 오독이다. 베너타의 결론은 일반적 이념으로 소극적 공리주의 원리를 채택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의 논의는, 존재하게 되는 선택지와 존재한 적이 없는 선택지를 비교하는 일이 매우 특수한 경우라는 사실에 터잡고 있다. 그리고 그 특수한 경우에 관하여 우리의 도덕적 실천에 관한 원리들은 모두 기본적 비대칭성을 지지한다. 기본적 비대칭성이란, 어떤 새로운 존재가 세계로 오지 아니하여 그런 존재가 세계에 왔더라면 향유했을 선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박탈이 아니므로 나쁘지 않은 것인 반면에, 존재했기 때문에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악으로 괴로워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나쁘다는 것이다.

 

기본적 비대칭성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비대칭성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전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첫째로, 우리는, 비참한 삶을 살게 될 사람들을 존재케 하는 것을 피할 의무는 있는 반면에, 행복한 삶을 살게 될 사람들을 존재하게 할 의무는 갖고 있지 않다. 둘째로, 그 아이가 존재하게 됨으로써 이득을 보게 될 것이라는 이유를 아이를 갖는 이유로 대는 것은 이상하지만, 그 아이가 고통을 겪을 것이라는 이유를 아이를 갖지 않는 이유로 대는 것은 이상하지가 않다. 셋째로, 고통을 겪는 아이를 존재케 한 경우에, 그 아이를 존재케 한 것을 후회하는 것은 이치에 닿는다. 그리고 그 후회를 그 아이를 위해 하는 것이 이치에 닿는다. 반면에, 행복한 아이를 존재케 하지 않았을 때, 그 아이를 위해 그런 아이를 존재하지 않은 것을 후회할 수는 없다. 넷째 우리와 먼 곳에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타당하게 슬퍼한다. 반면에 먼 곳의 무인도에 살았을지도 모르는 부재하는 행복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다.

물론 다른 학자들은 이 네 가지 비대칭성이, 기본적 비대칭성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도 해명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해명에 쓰인 이론들은 논쟁의 여지가 많거나(예를 들어 적극적 의무란 없다는 이론), 행복한 아이들을 낳을 수 있는 한 계속해서 낳아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결론을 내거나, 아니면 네 가지 비대칭성 중 일부만을 해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네 가지 비대칭성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도덕의 세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기본적 비대칭성은 정말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원리일 것이다. 이러한 논의 어디에도 소극적 공리주의라는 독특한 독트린은 사용된 바 없다. <끝>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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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등대
    2019.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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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잘 읽었습니다.

    책이 좀 어려운것 같습니다

    저자의 논증에 익숙치 않네요.

    몇번 다시 읽어봐야 겠습니다.
    • ㅇㅇ
      2019.07.07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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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지하게 논증 형식을 갖춘 것일 뿐 어렵지는 않지 않나요? 당사자 동의를 얻을 수 없는 상황에서 미필적 고의로 당사자의 고통 리스크를 당사자 대신 멋대로 감수하고 합리화하는 것은 윤리적이지 않다는 것이죠. 단지 이미 태어난 자들의 복리를 위해 합리화하고 있을 뿐.
    • 2019.07.07 22:5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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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렵고 쉬운 것은 논증이 담긴 글에 본질적으로 내재한 속성이 아니라, 그 글과 대면하는 행위자에 상대적인 속성입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 논문은 오늘날 물리학자에게는 쉽겠지만, 저 같은 문외한에게는 어려울 것입니다.

      2. oo님이 말씀하신 내용은 논증의 여러 단계 중 하나를 뒷받침하는 논거 중 하나를 표현한 것이지만, 논증의 전체를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삶에서 누리게 될 선이 삶에서 직면하게 될 악보다 더 크다면 그러한 감수가 합리적이다라는 반론에 대한 처리야말로 책 내용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합적 논증을 개진하는 책의 내용을 단 하나의 문장으로 쉽게 요약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그렇게 쉽게 요약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논증의 일부분들을 생략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독자에 따라서 책이 달리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서로 이야기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2. ㅇㅇ
    2019.07.07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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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리주의적으로 결과주의적으로 해석한다면 인류가 몇백억을 감당할 역량을 갖추기 전에 강제로 더 낳게 만들어서 핵전쟁을 유도하고 멸종을 앞당기는 게 나을 수도 있겠지요..
    • 2019.07.07 23: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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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리주의를 채택하면서 동시에 인류 절대다수의 삶의 효용합계가 마이너스(-)라는 명제까지 채택할 때에는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통상의 공리주의자는 삶의 효용합계는 플러스(+)라고 볼 것이며, 그런 가정의 합리적 근거를 논구하기도 어렵지만(그리하여 베너타는 그런 전반적 합계에 대한 아무런 논급도 하지 않았지만) 삶을 지속할 가치에 대한 통상의 판단을 염두에 둔다면, 그러한 통상의 공리주의적 가정이 비합리적이라고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물론 삶을 지속할 가치를 긍정하면서도 그러한 가정에 반대하여 논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칸트는 통상의 공리주의자와 달리 즐거움과 괴로움으로만 살펴본 삶의 효용합계는 마이너스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즉 행복의 면에서 삶의 괴로움은 즐거움을 능가한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칸트는 행복 이외의 가치가 삶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또는, 삶의 효용합계는 0보다 작지만, 또한 죽음의 비가치가 그 발생시기에 따라 절대값이 커진다고 본다면, 삶을 지속할 가치에 대한 판단과 양립가능하게 삶의 효용합계가 마이너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가치와 비가치의 순 결과에 대해 어느 쪽 입장도 완전히 합리성의 관점에서 자신의 우위를 주장할 수는 없는데, 이는 삶의 가치와 비가치가 통약불가능성을 갖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의 척도 위에 눈금을 매겨 줄지워 세우고 합계할 수 없는 성질을 갖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통약불가능성을 감안한다면, 어떤 철학적 논증의 충격(impact)은 그것이 위와 같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쟁점에 관하여 어느 쪽 입장을 택하더라도, 여전히 그 결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형태를 취할 때 가장 커질 것입니다. 데이비드 베너타의 논증은 이 문제에 관해 어느 입장을 취하더라도 적용되도록 세심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 궁금점
      2020.03.06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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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론대로면 자살이나 학살을 해야지 안 그러면 입만 산 궤변가다 이런 공격이 가능한 건 알고, 실천자는 조용히 자진 도태되거나 사회에 의해 제거되기 딱 좋은 생각인 건 알겠는데요(그래서 유명한 NU를 찾을 수가 없는 거겠죠.). 어차피 다른 이론도 실천상 어려움이나 괴리가 생겨 위선이라고 욕 먹는 경우는 많지 않나요?

      자살하거나 당장 테러를 저지르지 않은 소극적 공리주의자는 결과적으로 다 죽이지도 못할 학살이 반발만 사거나 오히려 장기적으로 인구 성장에 도움이 되는 등 역효과가 날 수 있으니 메신저의 승계를 통해 기회를 남긴다 뭐 이런 식으로 합리화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저는 윤리관에 의한 일방적 학살 같은 건 너무 리스크가 크다고 봐서 초지능이든 뭐든 등장할 때까지 보류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을 미루는 사람이긴 한데요, NU는 유독 더 본능적 거부감 때문에 인기가 없고 아예 논외로 치부하려는 경향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해요. 만약 인피니티 건틀릿이 있다면 차라리 지금 손절하고 끝낼 NU가, 익절 또는 끝없는 성장을 위해 불행하게 살다 세상을 저주하며 죽을 사람들을 수도 없이 생산하고 희생시킬 다른 공리주의 판본들보다는 나은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는 거죠.
    • 2020.03.06 16:5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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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론적으로는 단 한 가지의 어마어마한 것을 주장하고 실천은 하나도 하지 않게 되는 극도의 수행적 모순은 다른 이론에서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정하신 대로 적으신 내용은 모두 궤변과 근거 없는 합리화에 해당합니다.
      본인이 결론을 정해놓고 그 결론을 지키기 위해 대량학살의 결론이든 이론의 수행적 모순이든 무엇이든 삼키겠다고 작정했다면 더 이상 다른 사람과의 논증대화는 불가능합니다. 그러한 생각은 하나의 도덕적 입론이 아니라 단지 세상에 대한 원망의 마음을 타인에 대한 죽음에 대한 욕구로 투사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3. 공리주의자
    2020.01.19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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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omortalism적으로 괜찮구만. 괴로움 두려움 같은 거 못 느끼게 몰래 전부 동시에 인류 안락사하는 게 가능하다면 그게 좋은 것 같소.
    • 2020.01.23 13:4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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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인칭 관점에서 그것이 좋은 사태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해볼 수는 있겠지만, 자기 자신의 관점에서 좋은 사태라고 여겨진다는 점이 타인의 권리에 변동을 가져올 충분한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Stephen Darwall의 저작들을 참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궁금점
      2020.03.04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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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리는 보통 의무론적인 것이죠? 그냥 공리주의는 의무론에 반하니까 안 된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되나요?
      본문 얘기를 종합해보면 기존 공리주의와 크게 다를 게 없으면서 world destruction argument도 적용되니까 더 문제라는 거 같은데요, 저게 극단적으로 보이고 "매력"이 덜 하더라도, 다른 공리주의의 repugnant conclusion보다 꼭 더 나쁜 건 아니지 않나요?

    • 2020.03.06 02:2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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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일반적으로는 직관적으로 다른 공리주의보다 훨씬 더 받아들일 수 없는 결론일 것입니다. 이와는 다른 직관을 가진 사람도 있겠으나, 그 수는 아마도 트롤리 문제 중 뚱뚱한 사람을 밀어 그 사람이 치어 트롤리를 멈추게 하여 원래 진행 방향에 있었던 선로 위의 다섯 사람을 구하겠다고 하는 사람보다도 훨씬 적을 것입니다.

      2.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 더욱 극소수의 직관에만 부합한다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실천적으로 정합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원래의 소극적 공리주의 주창자들은 위 본문에서 지적한 함의를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위 본문에서 지적한 함의를 이미 검토했고, 기꺼이 그 함의를 받아들이는 소극적 공리주의적 도덕적 행위자가 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이 소극적 공리주의적 도덕적 행위자는 우선 사리에 관한 명제로서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1) 죽을 때 겪는 고통이 내가 수명대로 살아가면서 겪을 고통보다 더 작은 한, 지금 당장 내가 죽는 것이 나에게 사리적이다.

      그런데 전단의 조건은 거의 항상 성립합니다. 왜냐하면 특별한 설비 없이 취할 수 있는 자살방법을 택해서 상당한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수명대로 살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의 사망 원인인 교통사고, 암, 심장병, 치매 등등에 걸리게 되었을 때의 고통에 비해 극히 적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자살하지 않는 사람은 사리의 측면에서 수행적 모순을 범하게 됩니다.

      만일 이 사람이 자기 이익을 희생하면서까지 살아가야 하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면 그 합리적 이유는 오로지 힘 닿는 데까지(자신이 체포되기 직전 자살하기 전까지) 최소한의 고통으로 유정적 존재들을 가능한 한 최대한 많이 연쇄 살해 또는 대량 학살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 각각에 관하여 명제 (1)과 같은 사리의 법칙이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소극적 공리주의적 도덕적 행위자는 다음 명제 (2)도 받아들이게 됩니다.

      (2) 고통의 최소화는 살아 있는 유정적 존재들의 (최소한의 고통 경로를 통한) 죽음의 최대화에 의해 달성된다.

      즉 (2)에 의거해서 도출되는 연쇄 살해 내지 대량 학살을 하지 않고서 계속 살아가는 것은 사리에도 어긋나고 공리에도 어긋나게 됩니다.

      공리주의에서 옳은 행위는 효용의 최대화에 자신이 최대한 기여하는 한 가지 경로밖에 없듯이, 소극적 공리주의에서 옳은 행위는 고통의 최소화에 자신이 최대한 기여하는 한 가지 경로밖에 없습니다. 그 경로를 전혀 취하지 않으면서 소극적 공리주의를 주창하는 것은 수행적 모순입니다.

      3. 결론적으로 소극적 공리주의는 직관적으로 더 극히 받아들이기 힘든 결론을 도출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소극적 공리주의를 주창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행적 모순을 범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틀림없이 수행적 모순에 곧장 이르게 되는 학설이 참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소극적 공리주의는 공리주의보다 더욱 더 강하게 논박된다고 하겠습니다.



  4. 궁금점
    2020.03.04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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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 세대와 세대 간 정의 문제에도 계약주의가 성립 가능한가요? 태어나지도 않은 존재와 계약주의가 성립할 수 있는지 궁금하네요.
    • 2020.03.06 02:2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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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약주의에는, 계약이 실제로 과거에 이루어졌다는 역사나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미래 사실에 의해서 어떤 특정 규범을 정당화하는 이론이 아닙니다. 계약주의는 오히려 각자가 진지한 규범 준수자로서 지위를 가지고서 규범의 내용을 정한다면 어떤 내용이 될 것인가가 도덕 내지는 정치적 도덕의 본성이라는 이론입니다. 따라서 미래 세대와 세대 간 정의 문제에도 계약주의는 일정한 함의를 가집니다. 이에 대해서는 올해 출간될 스캔론의 <관용의 어려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Stephen Darwall의 Second person standpoint라는 책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2020.03.06 18:4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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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교육센터 댓글란은 본인의 선호(preference)나 명제태도를 쓰는 곳이 아니며, 진지한 질문과 논의가 아니라면 댓글을 달지 않기 바랍니다.
  5. 2020.03.07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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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뭔가 불쾌한 부분이 있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저도 모르게 '시민'을 가볍게 생각하고 분위기 파악을 못했나 봅니다.

    사실 시민교육센터를 쭉 둘러보고 베너타의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에 동조적이라는 인상과 스캔론의 계약주의에 동조적인 인상(스캔론이나 다른 계약주의자들은 베너타에 동조하지 않지만 NIP를 해결했다고 생각하죠.)이 뭔가 미묘하게 상충되는 것으로 보여서, 거기에 NU<CU에 대한 흥미까지 겹쳐(베너타에 동조적인 의무론자가 CU보다 NU에 대해 더 적대적인 인상이라는 것도 모순은 아닌데 개인적으로는 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원래 질문을 까먹고 삼천포로 빠진 것 같네요.

    제가 NU라고 오해하시고 공격하신 것 같은데 저는 NU도 아니고 베너타에 동조적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하신 원망 같은 게 비출산을 요란하게 주장하는 사람들 태반에 대한 제 생각과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베너타가 NU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만 한물 간 NU의 '비대칭성'을 도입부에 쓰니 NU라는 오해도 저명한 인사들에게 받는 것일 테고, 그렇게 베너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처럼(계약주의 사족도 나름대로 그 일환이었습니다.) NU 입장에서도 나름대로 생각해본 거였습니다. 여기서 글을 못 쓰고 잡생각만 많은 제가 연거푸 실수한 것 같은데, 이미 분위기상 엎질러진 물인 것 같으니 모자란 불청객은 영영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6. ㅇㅇ
    2020.08.12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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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보고 갑니다. 소극적 공리주의는 얼핏 보면 상식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파헤치면 사실은 영 아니군요.
    결과를 따져 손절을 주장할 바에야 차라리 익절을 주장하는 게 이치에 맞는다...... 이런 식으로 이해했습니다.
  7. 2021.05.08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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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개인적으로 반출생주의를 반대하는 입장에 있어요. 여기에 제 반출생주의에 대한 글을 길게길게 썼는데 덧글이 3개 올라온 줄 알고 하나하나 삭제했다가 다 삭제해버린 참사가 일어났네요 나름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를 쓴 저자기도 하고 5시간 들여서 꼼꼼하게 썼는데 다 날라가고 너무 허탈해요. 그래서 대신에 제 블로그 글을 대신 링크할께요.
    https://blog.naver.com/mirorin24/222312688504
    요약한다면 "영원의 관점이란 건 없고 "영원의 관점"이란 "베너타의 관점"의 다른 말에 불과하며 삶의 가치에 대한 선호는 증명할 수 없는 것에 불과하고 네이글이 "은폐와 노출"에서 주장했듯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의 가치에 대해서 침묵해야 한다" 정도가 되겠네요. 베너타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과묵하지 못 하고 "너는 사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라고 하고서 다른 사람의 삶에 개입하고 싶어하는 것에 불과하지요. 이런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비대칭성 논증을 쓰기엔 베너타가 스스로 "비대칭성 논증이 무너지더라도 삶의 질 논증이 건재하다면 여전히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좋다"라고 말했기에 삶의 질 논증은 구제할 수 없고 붕괴한다고 전 생각해요. 우리는 어떤 사람이 직접 자기 자신에 대해서 평가하는 삶에 대해서만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뿐, 다른 사람이 말하지 않는 삶에 대해서 "영원의 관점"같은 걸 도입할 수도 없고 전혀 평가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비대칭성 논증에 대해선 저 링크 보면 나오긴 하는데 제가 삶의 질 논증 말고 비대칭성 논증을 붕괴시키는 글은 좀 오래된 글이라 구멍이 좀 있는 편이에요.
    https://blog.naver.com/mirorin24/222280196630
    이 글을 요약하면 "반출생주의는 반"출생"주의에서 "출생"도 제대로 정의하지 않은 채로 "출생"이란 단어를 마음대로 쓰고 있고 따라서 비대칭성 논증은 전혀 반출생주의를 이끌어내지 못 한다"가 되겠네요. 출생이란 무엇인가. 성관계? 난자와 정자가 만나는 과정? 반출생주의자들은 "출생은 비도덕적이다"라고 말하곤 하지만 프리츠 하버 argument가 말하고 있듯 반출생주의자들은 "무엇이 출생인지" 전혀 제대로 된 정의를 못 내놓고 있다고 생각해요. 결국 사람들이 보통 "출생"이라고 말하는 행위는 비존재를 베너타의 저 가능세계 4개 중에서 그 어느 곳에도 떨어트리지 못 하는 셈이고 (출생을 "모르던 아이를 만남"으로 정의한다면 말이죠) 결국 기본적 비대칭성이 완전히 건재하는데도 완전히 거꾸로 친출생주의를 주장할 수도 있는 셈이고, 저는 칸트와 같은 이유로 친출생주의자예요. 그리고 저 글을 보면 덧글이 난장판인데 반출생주의자들과 싸운 거예요.

    생각해보면 반출생주의자들은 어쩌면 로버트 노직하고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해요. 아이를 "만드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정의하지 않고 노직은 정당한 소득 취득으로 만들어낸 소유물은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반출생주의자들은 아이를 만드는 것은 비도덕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지요. 결국 둘 다 "소득 취득" "아이를 만듦"의 이데아를 가정하고 있는 셈이지만, 사실 이 둘의 이데아는 없는 셈이지요.

    그래서 "너는 아이를 부모가 맘대로 유기해도 된단 것인가"에 대한 제 대답은, "아니, 부모는 아이를 낳은 시점에서 책임이 발생하는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기로 한 시점"에서 책임이 발생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하고 싶네요. 그리고 제 best는 육아를 부모에게만 맞기는 것이 아닌 국가에서 전문적인 육아하는 사람을 기르고 모든 육아를 국가에서 도맡아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이한님께선 여기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가지고 계신가요?
    • 2021.05.09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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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것을 비판하려면 비판 대상을 먼저 적합하게 이해하고, 자신의 논거가 어떻게 상대의 주장을 논박하게 되는지 그 논리적 관계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1) 영원의 관점을 무엇으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반출생주의 논증과 관련되어 있는 영원의 관점이란 인간 삶의 복지나 삶의 질을 인간에게 실제적으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만 평가하지 아니하는 관점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인간이 누구나 불편함, 질병, 사고, 노쇠, 죽음을 겪는데 이런 것을 겪는 것은 고정된 전제이므로 아예 해악으로 보지 않거나 아니면 인간들이 겪는 해악의 상대적 정도 내에서만 비교하여 이 정도면 통상적인 것이므로 그다지 해악이 아니라고 평가하는 관점입니다. 이렇게 인간 삶의 질이나 복지를 자의적으로 고정한 범위 내에서만 평가하는 관점이 부당함은 시민교육센터의 다른 글에서 논증한 바 있습니다. 그러한 논증을 제대로 다루지도 아니하고 그저 그것이 '베너타의 관점'이라고 수사적으로 덧붙이는 것은 아무런 논박이 아닙니다.

      (2) 두 번째 지적은 우선 베너타의 책을 전혀 읽지 않았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베너타는 출생이 그 시점 0.01초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가, 바로 그 시점에는 완전히 존재하게 되는 사건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출생은 어떤 기간 동안 일어나는 점진적 과정이며, 우리는 그러한 과정으로서의 사건을 특정할 수 있습니다. 즉 적어도 유정성을 갖추게 되는 것으로 강력하게 추정되는 기간(임신 3분기가 시작되는 근방의 기간)으로 특정할 수 있으며, 출생이란 부모의 출산 행위를 통하여 그런 기간을 다 겪고 나서 유정성을 온전히 갖춘 존재가 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지적의 더 큰 문제점은 어떤 개념의 경계를 점의 표적으로 명확히 특정할 수 없다고 하여 그 개념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잘못된 전제를 깔고 있다는 것입니다. 머리가 점차 빠지기 시작하여 대머리가 되었다고 할 때, 대머리가 되는 시점이 언제인지 정확히 머리카락 갯수나 비율로 특정할 수 없다 하더라도 대머리임이라는 속성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안겨 주는 탈모라는 현상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탈모 치료제를 개발하고자 하는 의학자에게 '너는 탈모의 개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치료제를 개발한다는 것이므로 너의 모든 연구는 부당하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주장입니다.
      커플이 아이를 낳기로 하여 아이를 낳은 경우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하여 아이를 낳지 않은 경우와 분명히 다르며, 그 점은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선택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주장을 하는 게 아니라면, 개념의 경계에 대한 지적은 두 선택 중 어느 선택이 도덕적으로 더 나은가에 대한 실질적 논박이 될 수 없습니다.

      (3) 노직에 대한 노의는 무슨 주장을 펼치는 의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개념들의 바다에서 자유연상적 유비를 통해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논증이 아닙니다. 네이글에 대한 언급도 마찬가지로 자유연상적 개념 사용에 그치고 있습니다. 프라이버시의 관습과 권리 체계는 타인에게 도덕적 잘못을 가하는 것이 문제되지 않는 사안에서 내면을 드러내도록 강요하거나 폭로하지 않을 것을 요청하는 것이지, 타인에게 도덕적 잘못을 가하는 것인가 아닌가의 도덕철학적 논의를 하지 않도록 요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동의 양육과 교육이 전적으로 부모의 문제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아동을 학대한다면 아동에게 가하는 도덕적 잘못이 문제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동을 태어나게 할 것인가 역시 전적으로 커플의 문제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더군다나 사회 전체가 친출생주의의 전제에서 공적 정책으로 친출생주의를 실시하고 있는데, 이것이 현 사회에서 프라이버시의 문제이므로 이에 대한 도덕적 논의 자체를 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도 속지 않을 거짓말입니다.
  8. 2021.05.09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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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도 영원의 관점을 이한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어요. 다만 "인간 삶의 복지나 삶의 질을 인간에게 실제적으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만 평가하지 아니하는 관점"이 정말로 가능한 관점인지에 대해서 말하고 싶을 뿐이지요. 예를 들면 제 블로그 글에도 드러나 있는데 호모 페인쿠스의 삶은 인간의 관점에서 정말로 지독하게 볼품없기 짝이 없지만 어느 호모 페인쿠스가 이런 고통을 전제하고 "우리의 삶은 딱히 비참하지 않다"라고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죠. 하지만 연쇄살인마이자 자신의 자식들에게 못이 달린 주걱으로 자신을 마구 때리고 자신의 허벅지와 골반에 긴 바늘을 찔러넣어달라고 한 마조히스트인 알버트 피시가 보기엔 호모 페인쿠스의 삶은 정말로 최선으로 가득할 것이며, 이것이 너무 특수하다고 생각한다면 모든 사람들을 마조히스트로 만드는 약을 먹이면 되겠지요. 마찬가지로 베너타는 1000살 넘게 살고 싶은 욕망을 말했지만 어서 주군을 따라 죽고 싶어하는 일본 사무라이에겐 1000살 넘게 살고 싶다는 선호는 오히려 크나큰 해악이 될 테고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영원의 관점"이란 없다고 말하고 싶단 것이 제 주장이에요.
    이를 메타윤리학에서 논의해본다면, 베너타는 영원의 관점에서 봤을 때 사람들의 삶이 참 볼품없단 것을 "증명"했다고 생각했지만, 삶의 질 평가는 철저하게 가치론적으로 이루어지고 마치 기본적 비대칭성이 가치론적 논제인 것처럼 각 개인들의 삶의 질에 대한 가치론적 평가도 증명할 수 없는 셈이죠. 제가 제가 살고 있는 이 삶에 "좋다"라는 가치를 부여한다면, 베너타는 여기에 반박할 수 없지요. 네이글도 이런 의미에서 꺼냈어요. 저로서 이런 삶의 질에 어떤 가치론적 평가를 내릴 지는 분명 프라이버시에 들어간다고 생각하고(사실 이 부분이 저하고 이한님이 갈리는 곳인 것 같네요), 베너타가 맘대로 제 삶을 평가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말이죠. 이 점에서 사실 베너타는 내로남불을 하고 있는 것이, 비대칭성 논증을 방어하는 데는 가치론들에 대한 메타윤리학을 꺼내면서 정작 다른 사람들의 삶의 질에 대한 평가를 증명할 수 있단 태도를 보인단 것이지요.
    그리고 이 영원의 관점을 정당화하는 태도는 보통은 비대칭성 논증을 드는 모양이지만 (저하고 싸웠던 반출생주의자들도 제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말하니까 비대칭성 논증을 구원투수로 투입했고 이한님도 다른 글 보니까 다른 것 같진 않아요) 그렇다면 비대칭성 논증이 붕괴한다면 삶의 질 논증도 같이 붕괴하는, 베너타가 말했던 "비대칭성 논증이 붕괴하더라도 삶의 질 논증이 건재하다면 여전히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한다"하고 모순되는 일이 발생하고 저로선 베너타의 책에서 영원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하는 체계적인 논의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비관편향"같은 심리학적 용어들을 갖다 붙히고 별별 정말로 비관적이게 보이는 통계들을 들긴 하는데 저는 이것이 제대로 된 논증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도덕철학적 논의를 할 수 없다는 일종의 반실재론을 주장하는 건 아니었어요. 그저 삶의 질에 대한 가치론적 가치 부여가 프라이버시에 들어간다고 생각할 뿐이고, 저는 그 위에 도덕철학으로 칸트 윤리학을 채택해야 한다는 정치적 자유주의를 강하게 지지해요. 뭐 제 이런 지적을 본 반출생주의자들은 제가 상대주의자니 반지성주의자니 열심히 허수아비나 패고 있던데 전 거꾸로 도덕적 실재론자고 분명 이런 가치론적으로 정한 삶의 질 평가 위에 (적어도 롤스의 해석 하의) 칸트 윤리학이 메타 이론으로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한단 걸 밝힙니다.

    (2) 이한님의 말씀은 사실 제가 주된 공격상대로 삼는 포인트가 아니에요. 뭐 베너타가 책 후반부에서 신나게 말한 의식의 점진적인 발달 과정에 대해서도 저는 불만을 품고 있긴 한데 이 덧글의 주요 내용은 아니고... (저도 desriptivist는 아니고 출생의 경계에 대해서 실질적인 정의를 내릴 수 없단 것에 이한님에게 동의해요) 제가 "출생"의 정의를 명확히 하란 것은 정확히 말하면 "아직 이 세상에 있지 않은 비존재와 아직 만나진 않았지만 이 세상엔 있는 의식적 존재의 비대칭성"(앞으로 간단히 "존재와 비존재의 비대칭성"이라고 부르기로 하지요)을 입증하란 것이었어요. 반출생주의자들은 비대칭성 논증만으로 반출생주의를 유도할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 "존재와 비존재의 비대칭성"까지 같이 써야 반출생주의를 유도할 수 있는 것이죠. 그렇지 않으면 반출생주의의 논리는 당장에 제가 처음 가는 어느 카페집을 가는 것도 필연적으로 커피 점장님을 만나서 커피 점장님이 저에게 피해를 입지 않을 가능성을 박탈한 것이 되어(혹은 카페 점장이 사람들이 자신에게 오는 걸 허락했다는 일종의 계약주의로 이를 반박할 수 있다면 제가 남미로 여행가다가 남미 사람들에게 저에 의해 잘못될 수 있는 박탈 가능 상태를 만드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네요. 혹은 더 와닿는 예시로 올해 2월에 있었던 장애인들의 교통권 보장 시위로 다른 시민들의 교통권이 박탈되었단 시나리오도 있고요.
    https://www.sedaily.com/NewsVIew/22INN8BVX9
    그렇다면 장애인들이 잘못한 것인가?) 반출생주의 자체가 굉장히 허무맹랑해질 테니까요. 이를 막기 위해선 저로선 "존재와 비존재의 비대칭성"을 반드시 가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제가 저 블로그 글에 써놓은 프리츠 하버 argument를 revisiting해보죠.
    "프리츠 하버는 질소비료를 발명해 식량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한 사람이다. 하버 전에는 음식이 상당히 비쌌지만 하버가 질소비료를 발명한 후에는 식량문제는 사라졌으며 아직도 굶고 있는 사람이 발생하고 있는 것은 식량의 부족이 아닌 분배의 문제인 것이다. 그에 따라서 세계인구는 1920년 20억명이었던 인구는 현 80억을 바라보고 있다. 프리츠 하버는 자신의 과학적 업적으로 수많은 생명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하버는 이렇게 자신의 과학적 업적때문에 나타나게 된 아이들에 대한 책임이 있는가?"
    프리츠 하버는 이렇게 자신의 과학적 업적을 통해서 아이들의 출산을 촉진시킨 것에 대한 책임이 있을까요? 뉴스기사 찾아보니까 전체 인구에서 반이나 프리츠 하버의 이런 과학적 업적에 의해 탄생했다고 하네요.
    https://news.joins.com/article/23656877
    반출생주의에 따르면 분명 프리츠 하버는 분명 책임을 지어야 하고 인공질소비료로 인한 식량생산을 금지해야 하는 도덕적 이유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지만, 이건 어쩌면 친죽음주의 이상으로 굉장히 허무맹랑하거든요.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가능한 반박들을 보도록 하지요. (사실 이 부분을 처음 덧글 쓸 땐 굉장히 정성스럽게 썼는데 다 날아가면서 생략하게 되었네요 다시 쓰도록 하지요)
    1. 프리츠 하버는 아이들을 탄생시키려는 의도가 없었다.
    2. 프리츠 하버가 식량생산을 하지 않았더라도 아이가 태어날 가능성은 있지만 부모의 의지는 반드시 아이를 탄생시킨다.
    3. 아동 유기를 정당화하려는 것이냐??? (황당하시겠지만 제가 가장 많이 들은 반박이에요(...))
    1번에 대해선 프리츠 하버도 아이들을 탄생시키려는 강한 의도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거예요. 프리츠 하버는 멜서스 트랩을 깬 과학자로 전세계에 이름을 떨쳤고 그 덕분에 노벨 화학상을 받았고 "공기로 빵을 만드는 과학자"란 명성을 얻게 되었지요. 프리츠 하버가 자신의 업적으로 아이들이 많이 탄생할 것이라는 걸 몰랐다는 건 말이 안 되지요.
    2번에 대해선 두 가지 반박이 있을 수 있지요.
    2.1. 그렇다면, A를 하지 않아도 아이가 나오지만 A를 하면 훨씬 더 많은 아이가 나온다고 하면 A를 해도 되고 A를 하지 말아야 할 때는 A를 하지 않으면 아이가 나오지 않을 때 뿐인가? 이것 역시 허무맹랑한 것 같네요. 사람은 언젠가 죽으니 맘대로 사람을 죽여도 된단 논리도 아니고 말이죠.
    2.2. 부모의 의지 역시 별로 필연적이지 못 한 것 같네요. 우리는 뉴스를 보면서 여태껏 아이를 가지길 원했지만 사실은 유전자형이 남자여서/생식기에 어느 큰 문제가 있어서 아이를 가지지 못 하는 여성에 대해서 많이 접하곤 하지요.
    https://nownews.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1126601003
    따라서 부모의 의지 역시 아이를 탄생시키는데 있어서 필연적이지 못 할 수밖에 없지요.
    3번에 대해선, 실질적으로 가장 직접적인 사람은 부모니까 부모가 책임을 지어야 한단 것인데, 저는 사실 이 반박이 여태까지 있었던 인습적 관습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거꾸로 남자는 별로 관여 안 하는 것 같으니 여자만 책임지라고 할 수 있고, 이건 또 하나의 황당한 결론이 되겠지요.
    여기에서 제 결론은 이래요. "존재와 비존재의 비대칭성은 납득 가능하지 않다." 저는 자주 출생과 만남을 유비시키곤 했는데, 사람들이 이 둘을 다르게 보는 가장 강력한 이유는 저로선 존재와 비존재의 비대칭성이라고 생각하는데, 부모가 아이를 탄생시킨 것인가? 그렇다면 프리츠 하버가 아이를 탄생시킨 것으로 봐야 하는가? 프리츠 하버 뿐만 아니라 출생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들은 수도 없이 많지요. 그렇다면 "누가 아이를 출생시키는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는 전혀 대답할 수 없게 되고, 결국 남은 선택지는 딱 하나, 존재와 비존재의 비대칭성을 깨트리고 대칭적 관계로 만듦으로써 출생을 만남과 다를 것 없게 보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반출생주의는 제가 위에서 적은 허무맹랑한 예시를 막아낼 수 없게 되겠지요. "출생의 명확한 정의"를 요구한 것은 바로 이런 뜻이었어요. 결국 "출생이란 부모의 출산 행위를 통하여 그런 기간을 다 겪고 나서 유정성을 온전히 갖춘 존재가 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란 정의는 붕괴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출산 행위"엔 프리츠 하버의 과학 연구도 포함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사실 이 부분은 저를 친출생주의자로 만든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인 칸트도 저질렀던 실수죠)
    또 한가지 여기에서 생길 수 있는 반출생주의에 대한 공격 루트는, 반출생주의가 기본적으로 책임을 엉뚱한 사람에게 전가하고 있단 것이에요. 어느 아이가 학교폭력을 당했다고 생각해봐요. 그렇다면 "누가 잘못했는가"란 질문에서 우리는 아이를 학교로 보낸 부모가 아닌 그 아이에게 학교폭력을 행한 당사자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하지만 반출생주의자들은 부모가 기본적으로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보통 존재와 비존재의 비대칭성으로 방어하려고 하지만, 제가 위에서 말했듯 이 비대칭성은 붕괴해야 한다는 것이 제 의견이에요.
    쇼나 시프린의 금괴 예시는 이런 책임 전가의 대표적 예시인데, 시프린은 부자가 금괴를 던져서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다면 주민들은 그 부자를 고소할 수 있어야 하고 따라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를 고소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제 프리츠 하버 argument에 의하면 사실 그 고소 대상은 프리츠 하버도 포함이어야 하거든요(...) 도대체 뭐가 잘못되었는지 본다면, 출생행위와 이 금괴 예시를 정확히 비교하려면 "금괴를 던지는 주체"와 "사람들의 팔에 금을 가게 하는 주체"가 서로 달라야 한단 것이지요!
    결국 저는 기본적 비대칭성이 완전히 온전함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비대칭성 논증에 기반한 반출생주의는 붕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뭐 프리츠 하버의 책임도 묻는단 선택지도 있겠지만 그렇게 따지면 반출생주의는 친죽음주의보다도 훨씬 더 허무맹랑한 사상이 될 것이고, 아무도 모든 과학 연구가 비도덕적이라고 판단하기는 싫을 테잖아요? 결국 "존재와 비존재의 비대칭성"이라는 가치론적 논제는 채택할 수 없게 되는 셈이죠.

    (3) 네이글 이야기는 위에서 했고 노직 이야기는 노직은 정당한 취득물에 대해서 세금을 걷어가면 이는 그 사람을 그저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라 했고 반출생주의도 아이를 낳는 것은 아이를 그저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둘 다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여기에 대해선 제가 생각이 잘 정리된 게 없어서 너무 두서 없이 쓴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 2021.05.09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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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을 좀 더 보충하자면, 베너타가 저지른 실수는 서로 통약 불가능할 수도 있고 심지어 서로 모순되는 두 가치론적 선호가 있을 수 있단 것을 생각하지 못 한 셈이지요. 아마도 "통약 불가능한"엔 베너타의 Still Better Never to Have Been"에 이미 누군가가 지적했지만 반박한 걸로 봐서 "서로 모순되는"에 더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영원의 관점은 무엇을 더 선호해야 하는가? "고통 vs 고통 없음"에서도 알버트 피시가 카운터치고 "죽음 vs 영생"에서도 일본 사무라이가 카운터 치고 심지어 이런 가치론적 선호가 증명할 수조차 없이 그저 개인이 스스로의 삶에게 부여한 가치라면 더더욱 삶의 질 논증은 미궁에 빠지게 되는 셈이죠. 베너타는 똑똑함도 언급하던데 적어도 저에게 있어서 똑똑함은 선호가 아니고 "안정적인 직장"도 당장에 인생을 화끈하게 살고 사라지는 걸 미덕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겐 아니지요. "베너타의 관점"이란 것은 이런 걸 뜻하는 것이지요. 자신은 영원의 관점에서 생각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선호가 그 중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공리주의에선 그래도 환원주의적으로 모든 선을 하나로 환원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센의 결과주의도 내쉬 평형을 지키려고 하고 있는 것으로 이를 돌파해나가는데 베너타의 영원의 관점에선 저로선 어떻게 돌파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결국 이런 상황을 구제하기 위해서 비대칭성 논증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물론 그 비대칭성 논증은 프리츠 하버에 의해서 폐기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어요. 결국 비대칭성 논증(여기서 비대칭성 논증은 기본적 비대칭성 그 자체라기보단 기본적 비대칭성에서 반출생주의를 유도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의미로 썼어요)과 삶의 질 논증은 더 이상의 변론이 없는 한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 제 주장이에요.

      또 하나의 예시를 들어서, 제 경험을 여기에다가 이야기할 수 있다면, 제 아버지는 참 폭력을 자주 썼는데, 특히 제 어머니한테 "낳았으면서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다"란 핑계로 어머니를 심하게 폭행한 적이 참 잦았지요. 뭐냐면 어머니는 집에 있지 않고 맨날 바깥에 돌아다니며 자식이 밥 먹는지도 모르고 잘 있는지도 모르고 가족은 나몰라라하고 니 몸만 생각한다는. 아버지는 나름대로 절 평가한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어머니가 저를 제대로 챙기지 않았다고 고발한 셈이지요. 웃긴 것은 아버지 자신에 대해선 "낳은 게 무슨 죄냐"라고 하면서 자신이 낳아준 것에 무한히 감사하라는 내로남불을 보였단 점도 말하고 싶네요. 아버지는 제가 중2때는 "나는 너를 100%는 아니어도 99%는 안다. 너는 너무 이기적이다"란 소리나 해댔고 맨날 제 삶에 대해서 평가하기를 멈추질 않았지요.
      사실 다 틀렸거든요. 아버지의 저에 대한 평가는 그냥 다 틀렸고 오히려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절 훨씬 잘 대우해줬거든요. 반출생주의도 정확히 같은 함정에 빠진 것에 불과해요.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영원의 관점"에서 완벽히 평가할 수 있다는 태도가 결정적인 문제지요. 그 책엔 뭐지 전 영어 원문으로 책을 읽었으니까 healthy하고 sicky라고 합시다 healthy에게 건강을 빼앗은 대신에 빨리 회복되는 능력을 부여하는 건 잘못이라고 베너타는 말하지요. 하지만 "있었던 건강의 부재가 과연 박탈인가"는 우리는 전혀 알 수 없는 셈이고 말이에요.

      비판의 범위를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를 벗어날 수 있다면 "영원의 관점"이 등장하는 다른 베너타의 저서인 "The Human Predicament"를 보도록 하지요.
      "The point can be expressed another way. I may derive some meaning from helping another person, and that person may derive some meaning from helping a third person, but that provides no point to our collective existence. We can still say that human life in general is meaningless "sub specie aeternitatis". There would be something circular about arguing that the purpose of humanity's existence is that individual humans should help one another. Moreover, even if an individual human's life has some terrestrial meaning (perhaps by helping others), it does not follow that that individial's life also has cosmic significance."
      그 전엔 뭐 싱어랑 네이글이랑 투닥투닥하는 게 나오고 얘네들은 cosmic significance을 어떤 식이든 별로 가치 없게 본다고 하고 있고 그 다음에 58페이지에 나오는 내용인데, 우리는 사람들이 서로 도우면서 서로의 삶의 가치를 얻어내는 지도 모르겠고 사람들이 그렇게 얻어낸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여기에 가치론적 선호를 부여한다면 베너타는 여기에 딴지 걸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의 삶에 "의미 없음"이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뭐 베너타 마음대로겠지만 이런 가치 부여를 다른 사람들에게 일종의 강제를 하면 안 된다는 게 제 의견이에요. (앞에서도 말했듯 전 이것이 프라이버시에 속한다고 생각해서요) 뭐 이 책 베너타는 "A candid guide to life's biggest questions"라고 써놓고 있는데 그냥 자기가 느끼는 사람들의 삶의 의미에 불과하지 정말로 모든 사람들에게 통용될 수 있는 A candid guide가 될 수 없고 life's biggest questions는 더더욱 될 수 없는 셈이지요. 잘 쳐봐야 베너타의 자서전이지 철학서는 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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