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데이비드 베너타의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를 겉핥기식으로 읽거나 아예 읽지 않고는, 반출생주의 논증이 소극적 공리주의(negative utilitarianism)에 기대고 있다고 오해한다. 실제로 구글 검색이나 유투브 검색을 하면 영미의 많은 일반인들이 이 책에 대하여 소극적 공리주의를 채택하면 반출생주의가 도출된다는 내용이라는 리뷰를 올려 놓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결론을 지지하면서도 자기 수준에 맞춰 근거를 곡해해서 없는 내용을 지어낸 것이다. 베너타는 공리주의자를 표방하지 아니하며, 당연히 소극적 공리주의자도 아니다. 이 책의 색인 어디에도 소극적 공리주의negative utilitarianism는 등장하지 않는다.

 

고전적 공리주의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론이다. 소극적 공리주의는 이 목표를 “모든 이들의 최소 괴로움(the least amout of avoidable suffering for all)”로 대체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론이다. (이 정식에 대한 언급은 Karl Popper,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2nd. edn. revised (1962), vol. i, chap. 5, n. 6 (2)에 나온다.) 소극적 공리주의의 매력은 주로 쾌락과 고통이 각각 인간 복지에 미치는 영향이, 비대칭적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온다. 고통은 정신을 지배하는 성질이 강하다. 잠을 잘못 자서 어깨와 목 부위가 결리고 아프다는 고통은 그것이 나을 때까지 온종일 정신을 지배할 수 있다. 이로써 사소한 일상의 쾌락은 거의 이 일상의 고통에 덮여 버린다. 반면에 일상의 쾌락이 일상의 고통을 덮는 경우는 훨씬 드물다. 쾌락이 고통을 덮으려면 그 쾌락이 정신을 몰두하게 할 정도로 상당히 강렬한 것이어야 하며 그 효과 또한 일시적인 것에 그칠 뿐이다. 게다가 평소에는 상당한 즐거움을 주던 활동이라도 괴로움이 있을 때에는 더 이상 아예 쾌락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더 나아가 사람들은 같은 단위라면 고통을 겪고 쾌락을 얻기보다는 쾌락을 포기하고 고통을 회피하길 바란다. 최고의 쾌락은 최악의 고통을 결코 상쇄하지도, 보상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사소한 비용으로 줄 수 있는 큰 쾌락을 줄 의무는 없지만, 사소한 비용으로 구제할 수 있는 큰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의무는 있다고 일반적으로 생각된다. 이 비대칭성에 착안하면 처음 보기에는 소극적 공리주의는 매력적인 이념인 것 같다. 그 매력은 추상적으로 표현했을 때에는 큰 울림을 주는 지침에서 드러난다. 쾌락의 증진은 고통의 감소보다 인간 복지를 위해 축차적으로 후순위이다. 그러므로 '개인과 정부의 우선적 목적은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지 쾌락을 증진하는 것이 아니며, 고통의 제거라는 의무를 개인이 모두 다 달성하고 나서야 비로소 쾌락의 증진을 이야기할 여지가 생긴다.'

 

그러나 소극적 공리주의에는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반대 논거들이 있다.

 

첫째로, 소극적 공리주의는 사실 어떤 유형의 사안에서 고전적 공리주의를 적용하면 원래 나오는 결론을, 다른 유형에까지 잘못 확장한 이론이라는 지적이 통렬하다. 고전적 공리주의는 효용 최대화를 추구한다. 만일 어떤 경우에 정말로 고통이 쾌락을 덮고, 쾌락으로 결코 상쇄되거나 보상되지 못한다면, 그 때 고통과 쾌락은 효용 단위가 결코 같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즉, 애초에 고통은 효용 ?100단위이고 쾌락은 효용 +1단위인 것이다. 따라서 둘을 제대로 측정만 한다면 효용 -100단위를 0으로 올려 놓는 일은, 0에서 +1로 올려 놓는 일보다 일반적 공리주의에서 당연히 중요할 수밖에 없다. 비대칭성은 효용측정을 제대로 하지 못한 착오를 범한 결과로 생기는 환상에 불과하다. 효용측정을 제대로 하기만 한다면 비대칭성은 효용 측정 결과에 그대로 반영되므로, 고전적 공리주의를 여전히 유지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와 달리 소극적 공리주의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그 어떤 쾌락의 추가를 위해서도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는 것은 불필요하다.

 

둘째로, 그런 축차적 우선순위는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실제 사람들의 효용판단 및 효용선택과도 맞지도 않다. 이는 많은 유형의 사안에서, 사람들은 작은 고통은 큰 쾌락을 위해 감수하려고 한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악기를 처음 배울 때의 괴로움을, 악기를 능숙하게 연주할 수 있게 되었을 때의 즐거움을 위해 감수한다. 해외여행의 즐거움을 위해 고통스러운 장거리 비행을 감수한다. 날렵하게 활동하는 즐거움을 위해 운동을 하는 괴로움을 감수한다. 상당히 많은 경우 수술 이후의 보다 온전한 신체로 누리는 쾌락을 위해서 수술 과정과 재활 기간의 고통을 견뎌낸다. 특히 확률의 문제로 들어가면 이런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사람들은 자동차 사고의 위험을 감수하고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 자동차 사고의 위험은 기대효용의 마이너스 부분을 구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이너스 부분을, 자동차를 타고 다님으로써 생기는 유익함을 위해 감수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어떤 활동의 고통을 그 활동의 쾌락이 보상하지 못할 때에는, 또는 고통의 위험을 기대쾌락이 보상하지 못할 때는 그 활동을 하지 않는다. 자기자신의 복리하고만 주로 관련된 이 모든 선택과 판단 사안들에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은 폰 노이먼-몰게스턴 효용함수에 의해 도출된 기대효용(expected utility)을 최대화한다는 지침에 대한 대략적인 추종이다. 소극적 공리주의를 따르는 실제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얼핏 보기에 매력적인 소극적 공리주의는 실제 우리 삶의 수행적 실천에서 아무런 매력도 가지고 있지 않음이 드러난다.

 

셋째로, 소극적 공리주의도 공리주의의 한 판본이기 때문에, 여전히 공리주의의 문제점 상당부분을 그대로 보유한다. 공리주의는 효용이라는 단일한 궁극적 가치로 모든 것을 환원한 다음, 그 효용합산의 결과에 따라 옳은 것을 결정한다. 그러나 옳음이 효용 계산 이후에야 오는 것이라는 이념은, 존엄을 가진 존재들의 지위와 관계에 어긋난다. 그 지위와 관계에서 사람들이 서로에 대하여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석명책임을 지며, 사람들은 효용계산과 무관하게 자신의 권리 침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다. 그러나 소극적 공리주의는 이 자격을 아예 고려에 넣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다섯 사람이 장기 부전으로 고통스럽게 죽는 큰 비효용을 피하기 위해, 무작위로 건강한 한 사람을 선발하여 몰래 마취하여 납치한 후(그래서 그 사람은 아무 고통도 느끼지 않으며 죽음의 공포도 느끼지 않는다) 몸을 해부하여 그 사람의 장기를 떼어내어 다섯 사람에게 장기이식 수술을 하는 제도를 생각해보자. 즉 해리스의 '생존 로또'(Survival Lottery)를 운영하는 것이다.( John Harris, “The Survival Lottery”, Philosophy, Vol. 50, Issue 191, 1975. Jan, pp. 81-87.) 해리스는 동명의 논문에서 결과주의 이론 내에서는 이 제도를 거부할 수 없음을 보여준 바 있다. 주디스 자르비스 톰슨은 이에 더 나아가, 행위의 속성까지 포함시키는 비결과주의적인 판본의 공리주의도 개인이 경계를 가진 독립된 별개의 구분된 존재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가치 추구의 제약이 되는 청구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 바 있다.

 

"왜냐하면, 당신이 행위가 가치를 가진다고 보고, 비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를 선택했다고 해보자. 당신이 장기이식(자연적 원인) 사안을, 내가 앞 절에서 드러내 보인 방식으로 다룰 수 있다고는 논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은 장기이식(5명의 악당 원인) 사안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 (138) 외과의사가 젊은 남자를 조각조각 자르고 그의 장기를 떼어내는 것은 (당신의 견해에서는) 어마어마한 부정적 가치를 지닌 행위이다. 그러나 만일 이 행위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다섯 악당 각각이 누군가를 죽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만일 외과의사가 행위로 나아간다면, 어마어마한 부정적 가치를 갖는 하나의 행위가 있게 된다. 만일 외과의사가 행위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적어도 그만큼 큰 부정적 가치를 갖는 다섯 개의 행위가 있게 된다. (나는 “적어도 그만큼 큰 부정적 가치”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외과의사가 다섯 환자의 삶을 구하기 위해 행위로 나아간다면 외과의사의 의도는 좋은 의도인 반면에, 악당의 의도는, 그 내용이 정확히 무엇이든 간에, 악의적인 의도라고 우리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비결과주의적 행위 공리주의는, 외과의사가 장기이식(5명 악당 원인)에서는 행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결론을 산출하는 것으로 보인다."(Judith Jarvis Thomson, The Realm of Rights,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0, pp.37-38).

 

그래서 모든 판본의 공리주의는 그 제도를 지지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다섯 사람이 계속 살게 되는 효용이 한 사람이 계속 살게 되는 효용보다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극적 공리주의 역시 그 제도를 지지하게 된다. 왜냐하면 소극적 공리주의는 비효용(disutility)의 최소화를 추구하며, 다섯 사람이 죽는 비효용보다 한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비효용이 더 적기 때문이다.

 

넷째로, 소극적 공리주의는 존재의 말살에 관하여 공리주의보다 더 터무니없는 결론을 지지하게 된다. R. N. 스마트가 이 점을 신랄하게 지적한 바 있다. (R. N. Smart, “Negative Utilitarianism”, Mind, Vol. 67, No. 268, 1958, pp. 542-543.) 즉각 인류 전체를 고통 없이 멸종시킬 수 없는 무기를 통제하고 있는 통치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그 통치자가 그 무기를 사용하여 인류를 한꺼번에 죽이는 일은 허용될 뿐만 아니라 꼭 해야 하는 최고의 의무가 된다. 그 통치자가 사용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반역을 포함해 무슨 일을 벌여서라도 그 무기를 탈취하여 사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무기를 사용하는 경우 고통은 0으로 최소화되는 반면, 그 무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모든 사람들의 삶의 고통이 합산된 어마어마한 양이 미래에 계속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벤저스 시리즈에 등장하는 타노스의 인피니티 스톤을 가지고 있는 이가 있다면, 그는 우주의 인구 절반을 소멸시킬 것이 아니라, 우주의 인구 전부를 소멸시켜야 한다. 벤덤식의 고전적 공리주의는, 이런 무기를 선별적으로 사용할 것을 주장하게 될 것이다. 즉 어떤 사람의 남은 삶이 쾌락보다 고통을 더 많이 담고 있는 경우, 즉 순 쾌락이 마이너스인 경우에는, 그 삶의 주인인 그 사람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 사람을 고통없이 소멸시키는 것이 통치자의 의무이다. 현대 후생경제학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이론인 선호 공리주의는, 남아 있는 삶의 순 쾌락이 플러스인지 마이너스인지와 상관없이 그 주체의 때이른 죽음을 맞지 않고자 하는 선호가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선호바더 더 강하다면 그 선호를 좌절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소극적 공리주의의 난점은 비단 이런 가상적인 상황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고통 없이 사람을 소멸시키는 약은 이 세상에 현실로 존재한다. 소극적 공리주의를 채택하게 되면 스마트가 지적했듯이, 고통 없이 죽게 만드는 약을 잠자는 사이에 투여하여 사람을 죽이는 개개의 행위 자체가 모두 의무가 된다. 이런 방식으로 죽임을 당하지 않고자 하는 사람들의 선호는 소극적 공리주의의 관점에서는 비합리적이다. 왜냐하면 소극적 공리주의의 관점에서는 죽임을 당한 사람을 위해 최선임이 틀림없는 사태가 그 사람에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즉 괴로움의 최소화라는 최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 주위 사람의 슬픔과 괴로움을 고려에 넣는다 하더라도 이 문제를 소극적 공리주의 내에서 교정할 방도는 없다. 애초에 그 사람과 가까운 사람들 또한 고통 없이 한꺼번에 죽인다면 그런 슬픔과 괴로움을 발생시키지 않을 것이니, 더 많이 소멸시키면 소멸시킬수록 한층 더 좋은 일이 되기 때문이다. 고전적 형태인 적극적 공리주의는 이런 결론을 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죽임을 당한 사람이 누렸을 순효용이 사라진 만큼, 총효용이 감소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칼 포퍼가 소극적 공리주의 정식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그가 실제로 소극적 공리주의를 주창했다고 진지하게 보는 사람은 학계에 없다. 오히려 포퍼가 충분히 분석적으로 자신의 말을 음미하지 못한 채, 특정한 조건을 충족하는 한정적 사안에서 두드러지는 정부의 우선적 임무에 관하여 말한 것이라는 이해가 대체적이다. 왜냐하면 포퍼는 이것을 모든 행위자를 구속하는 하나의 전면적인 도덕 이론으로 제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포퍼는 사회가 덜어줄 수 있는 커다란 고통 구제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원리를 열린 사회의 원리(관용의 원리와 전제정 반대)와 함께, 사람들의 권리를 존중하는 한에서 정치적 권위 행사의 방향을 지도하는 지침 중 하나로 보았다. 그리고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 구제해줄 수 있는 극악한 고통에 빠진 구성원을 구하는 것이 (예술의 번영이나 체육경기를 통한 국위선양 등에 비해) 국가의 가장 우선되는 과제 중 하나라는 점은 합당한 사람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진술이다. 물론 이 취지를 소극적 공리주의의 언어로 표현한 것은 포퍼의 실수다. 이러한 우선순위는, 소극적 공리주의가 옳기 때문이 아니기 때문에 확립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까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에서 이탈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요청되기 때문이다. 공동의 부담을 통해 충분히 구제해줄 수 있는 커다란 고통으로부터 구성원을 구제하지 않는 것은, 그 구성원을 협동적 과업에서 한 역할을 하는 존엄을 가진 동등하게 자유로운 존재로 충분히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즉 목적론인 공리주의의 한 판본을 취하지 않아도 한정된 사안에서 커다란 고통의 제거나 감소에 우선순위를 두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사실, 스캔론주의적 계약주의(Scanlonian Contractualism)에 의한 이론적 해명은 오히려 공리주의에는 수반되는 커다란 난점 없이 이런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순 효용의 최대화가 고통 제거의 우선시에 대한 궁극적인 이론적 근거(rationale)가 된다고 보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사안에서 난점에 빠진다. 어떤 사람이 기아에 시달린다. 그 사람을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한, 그 사람을 기아에서 구제해주어야 할 부담을 질 의무가 있다는 점에 그 사람은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그 기아에 시달리는 사람이, 자신의 남은 삶에서 기아로부터 자신을 구제해줄 그 돈으로 자신이 너무나 염원하는 성지 순례를 하는 데 지원해달라고 강하게 탄원한다고 해보자. 그리고 그 사람의 강렬한 종교적 신념 때문에 성지 순례 여행을 하지 않음에서 오는 좌절과 괴로움이 그 사람이 곧바로 자살함으로써 끝낼 수 있는 기아의 괴로움보다 작다고 해보자. 공리주의의 경우에는 효용 수혜자(utility recipient)의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정신 상태(negative or positive mental state) 또는 선호(preference)의 충족이나 좌절(satisfaction or frustration) 여부에 의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고전적인 쾌락주의적 공리주의 입장을 취하건, 현대의 판본인 선호 공리주의 입장을 취하건, 이 사람이 성지 순례 요구가 좌절됨으로써 한층 더 큰 괴로움을 겪는다고 한다면, 이 사람을 기아에서 구제해줄 의무보다 한층 더 강력한 의무를 공동체가 진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러나 기아에서 구제될 권리는 우리 헌법에서 사회권에 포함되는 내용이지만, 같은 처지에 빠진 사람의 성지 순례를 지원받을 권리주장의 인정은 사회권에 포함되는 내용이 아니다. 성지 순례를 비롯해서 그 좌절이 커다란 괴로움을 가져오는 값비싼 기호들(expensive taste)들을 충족하는 권리주장은, 단지 실정헌법의 문제가 아니라 헌법의 내용의 타당성의 근저에 놓인 정치적 도덕(political morality)에 대한 최선의 해명에서도 인정하지 않는 권리이다. 공리주의에서는 이 사람이 더욱 더 강하게 원하고 충족되지 않으면 훨씬 더 괴로워할 요구를 들어주지는 않는 것이 허용되면서도, 그보다 덜 강한 주관적 욕구의 충족에 대해서는 공동체가 의무를 지는 것은 적어도 자연스럽게는 해명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당사자의 주관적 마음상태나 선호에 기초하여 권리의 우선순위를 매기는 체계가 발생시키는 역설은 Leo Katz, Why the Law is so Perverse. 이주만 옮김, <법은 왜 부조리한가>, 와이즈베리, 2012, 94-95면에서도 중심 주제가 되고 있다. 여기서 레오 카츠는 응급순위순환이란 문제를 제기한다. 앨과 클로이는 부부다. 두 사람은 사고를 당했다. 앨은 두 다리를 다쳤고 클로이는 한 손가락을 다쳤다. 그런데 클로이는 피아니스트다. 그리고 이 부부가 병원으로 실려온 같은 시각, 이들과 관계 없는 환자인 베아도 사고로 실려온다. 베아는 한 다리를 다쳤다. 각자는 자신이 다친 부분을 치료하면 신체 완전성을 회복하지만, 사고가 일어난 근처의 유일한 병원인 이 곳의 의료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오직 한 명만 제때 수술을 할 수 있다. 앨의 두 다리를 고치는 것이 가장 급선무이므로 앨이 응급순위에서 우선권이 있다. 그런데 이때 앨이 말한다. "나의 우선권을 클로이에게 양보합니다. 클로이도 이를 양보받기를 바랍니다. 제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아내가 이후 피아니스트로 커리어가 망가지는 것으로 생기는 고통, 그리고 우리 가계를 책임 지고 있는 아내 클로이가 자신의 일을 하지 못했을 때 생기는 경제적 소득 감소가, 제가 두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될 때 생기는 괴로움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쩄거나 저는 클로이가 저의 우선순위를 양보받아 치료 받는 데 최고로 강력한 선호를 갖습니다." 그러나 이때 베아가, 말한다. "한 다리를 다친 내가 두 다리를 다친 앨보다 응급순위가 후순위라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한 손가락을 다친 클로이보다 후순위는 아니다. 그러므로 클로이부터 먼저 치료한다면 당신은 나의 권리를 침해한 것이다." 실제로 베아가 옳으며, 앨은 설사 자신의 치료에 관해서는 우선권을 가지더라도 이 우선권을 클로이에게 양보하는 식으로 행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소극적 공리주의와 일반적인 판본 공리주의 모두 해명을 하지 못한다.

 

이에 대하여 토머스 스캔론은 "선호와 긴절성Preference and Urgency"(in T.M. Scanlon, The Difficulty of Tolerance: Essays in Political Philosoph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ch. 4)에서 중요한 것은 객관적 긴절성(緊切性; urgency)이지 주관적 선호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나의 주장은, 그렇다면 우리가 어느 쪽이 우세해야(prevail) 하는지를 결정하려는 도덕 판단을 지지하려는 목적에서 이 두 상충하는 이해관심을 비교하려고 할 때, 우리가 하는 일은 해당 사람들이 그 이해관심들에 대해 얼마나 강하게 느끼느냐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그들이 기꺼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일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무엇을 희생하려고 하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그러한 강도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이 혜택들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이유들에 대한 탐구라는 것이다."

 

객관적 긴절성은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서 평화롭게 공존하고 공정하게 협동하기 위해 중요한 인간의 두 능력 발휘에의 필수성과 밀접성에 의해 판단된다. 이 인간의 두 능력은 존 롤즈가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밝힌 선관 형성 및 추구의 능력과 정의감의 능력이다. 굶주려 죽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항상적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은 입헌 민주 사회 구성원에게 열려 있어야 하는 전형적 행위 경로들을 전부 또는 대부분 닫아버린다. 그리고 이렇게 닫힌 행위 경로들은 구제가 필요한 그 사람의, 선관 형성 및 추구의 능력과 정의감의 능력 발휘에 필수적인 인격적 통합성과 신체 완전성에 핵심적 경로들이다. 반면에 그러한 행위 경로를 열기 위해 제한되는 행위 경로들은 그와 같은 질서정연한 사회에 필수적인 핵심적 경로들이 아니다. 예를 들어 추가적인 과세로 인해 돈이라는 전목적적 수단의 일부가 줄어드는 것은 그와 같은 필수성과 밀접성을 훼손하지 않는다.

 

레오 카츠가 수수께끼와 같은 역설(puzzling paradox)라고 본 응급순위순환 사태도 이러한 해명에 의해 깔끔하게 해결된다. (카츠는 이 역설이 다양한 사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패턴을 관철하고는 원래 그런 것이라는 선언만 제시했을 뿐, 이 역설을 해명하지는 못하였다.) 앨이 우선권이란, 앨의 주관적인 선호의 강도나 앨이 이후 전개될 사태로 인해 겪을 긍정적 부정적 정신상태에 결부된 것이 아니다. 앨의 우선권은 앨이 처한 의료상황의 객관적 긴절성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두 다리를 잃는 것은 한 다리를 잃는 것보다 입헌 민주주의 사회 구성원의 두 능력 발휘에 필수적인 행위 경로를 더 많이 닫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다리를 잃는 것은 한 손가락을 잃는 것보다 그 두 능력 발휘에 필수적 행위 경로를 더 많이 닫는다. 따라서 객관적 긴절성의 순서는 앨, 베아, 클로이의 순서이며, 이 세 사람은 각자 자신의 객관적 긴절성에 의해 부여된 우선순위를 스스로의 의사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포기하지 않을 권리를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앨은 자신의 주관적 선호의 강도를 내세워서 클로이에게 자신의 우선순위를 양보할 수 없는데, 이것은 객관적 긴절성에 비례하여 평등하게 배려하는 대우를 받을 베아의 권리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또한 주디스 자르비스 톰슨 <권리의 영역Realm of Rights>에서 들었던 한 청년의 몸을 해부하여 다섯 사람을 구하는 외과의사 사안도 해명할 수 있다. 몸이 해부되어 소멸되는 청년은 자신의 인격적 통합성과 신체적 완전성을, 인간의 두 능력 발휘에 필수적인 부분까지 훼손당하는 것을 감수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요구가 설사 더 많은 인명을 살린다는 이유에서 제시된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은 이에 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존 해리스가 든 가상적 제도인 생존 로또 사안도 마찬가지다. 그 생존 로또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해부될 사람으로 뽑힌 사람이, 정의감의 능력과 선관 능력에 필수적인 신체 완전성과 인격 통합성의 소멸을 감수해야 한다는 규범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그런 필요의 대상이 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 해악이 가해져도 되는 존재라는 상위 규범을 도입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위 규범은 모든 개인 각자가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라는 규범적 논증대화의 근본적 전제 조건을 위배한다. 근본적 전제 조건을 위배하는 규범적 발언은 수행적 모순을 범한다. 즉, 그것은 그렇게 뽑힌 사람의, 제안된 규범에 대해서 '아니요'라고 말할 권리를 박탈하면서도 동시에 그 사람의 규범에 대한 승인을 얻고자 하는 발화를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게 된다. 그런데 수행적 모순을 범한 발화를 유효한 것으로 인정할 경우에, 규범적 논증대화 자체가 붕괴된다. 왜냐하면 누구나 수행적 모순을 범하여 규범을 제창하면서도 그것이 타인도 타당하게 승인할 수밖에 없는 옳은 규범이라고 간단히 선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토머스 스캔론이 든 성지순례와 기아구제의 사례를 생각해보자. 기아에서 구제되는 것은 입헌 민주주의 사회의 전형적 구성원으로 살아가려면 필수적으로 열려 있어야 하는 행위 경로를 열게 하는 효과를 낳게 한다. 이 행위 경로가 닫힐 때 그 사람은 궁극적으로 소멸, 즉 규범을 승인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유지되어야 하는 두 능력을 잃게 된다. 반면에 해외로 나가야 하는 성지순례를 갈 돈이 없는 것은 입헌 민주주의 사회에서 평화롭게 공존하고 공정하게 협동하는 전형적 구성원의 행위 경로가 닫힌 것이 아니다. 즉 그 행위 경로의 닫혀 있음은 롤즈가 말한 질서정연한 사회의 시민의 기본적 두 능력이 수용할 수 없도록 인격적 통합성과 신체적 완전성을 훼손시키는 결과를 낳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두 권리주장은 선호나 욕구의 강도에서는 동등하거나 성지순례 쪽이 더 강하다 할지라도, 그 긴절성에서는 현격한 차이가(그래서 기아구제는 객관적 긴절성이 큰데 반해 성지순례는 그렇지 않은 차이가) 나오는 것이다.  

 

반면에 어떤 유일무이한 희귀한 면역체를 가진 청년이, 지금 대규모로 유행하고 있는 세균에 대한 치료제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피를 채혈하는 것을 거부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국가가 처음에는 청년의 동의를 얻고, 또한 적정한 규모의 최대한의 보상을 제시하고자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청년은 동의하지 않는다. 이러한 예외적인 경우에 국가가 청년을 채혈하는 데 필요한 시간 동안 억류하여 그 피를 채혈하는 것은 입헌 민주주의 사회에서 향후 발휘해야 하는 그 청년의 두 능력을 훼손하지 않는다. 물론 통상의 경우에는 청년이 가졌던 자기 신체에 대한 간섭을 배척하는 효력을 갖는 소극적 방해배제청구권이 잠시 제한되는 데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명이 걸려 있다는 점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목적론적 추론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청구권 제한의 한계를 분명히도 통합성을 해할 수 없는 지점으로 설정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주디스 자르비스 톰슨의 말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 전체에 걸친 선이 아무런 총합을 갖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단지, 청구권이 관련되는 경우에는, 사람들 전체에 걸친 선의 총합은 문제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한층 더 간략한 형태로 말하자면, 청구권이 관련된 한에서는,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where claims are concerned, the numbers do not count)(주석 5-나는 여기서 이념은, 청구권이 관련되는 경우에는 수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여기서 제시된 이념은 도덕에서 수가 중요하지 않다는 이념이 아니다. 그저 분배의 문제만이 관련되는 경우에는, 수는 거의 틀림없이 중요하다.(the numbers arguably do count) John Taurek, “Should the Numbers Count?”, Philosophy and Public Affairs, 6 (Summer 1977)을 보라. 수는 중요하지 않다는 논증이자 Taurek의 논증에 대한 비판으로는 Derek Parfit, “Innumerate Ethics”, Philosophy and Public Affairs, 7 (Summer 1978)을 보라. 이것을 높은 문턱 논제라고 칭하도록 하자.(High-Threshold Thesis)(Judith Jarvis Thomson, The Realm of Rights, Cambridg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0, p. 167)"

 

이처럼 스캔론의 계약주의 이론은, 매우 작은 부담을 각 개인에게 지워 공적인 구조 체계를 조성하여 긴절한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는 것을 허용하는 공적 원리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이 합당하게 거부할 원리임을 보여줄 수 있고, 그것도 역설의 난점을 발생시키지 않고도 그럴 수 있다. 반면에 소극적 공리주의가 처음 겉보기에 매력적이었던 까닭은 몇몇 사안에서는, 공리주의의 원래 판본(orginal version of utilitarianism)보다 그런 객관적 긴절성에 부합하는 판단을 더 낳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많은 사안들을 다루게 되면, 소극적 공리주의 역시 객관적 긴절성에 제대로 기초를 두지 않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따라서 베너타가 이와 같이 처음 보기에는 반짝반짝 빛나지만 결국 깊은 분석을 거치면 만신창이가 되어 너덜너덜 뭉개질 수밖에 없는 이론에 기초하여 자신의 논의를 전개했다고 보는 것은 터무니없는 오독이다. 베너타의 결론은 일반적 이념으로 소극적 공리주의 원리를 채택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의 논의는, 존재하게 되는 선택지와 존재한 적이 없는 선택지를 비교하는 일이 매우 특수한 경우라는 사실에 터잡고 있다. 그리고 그 특수한 경우에 관하여 우리의 도덕적 실천에 관한 원리들은 모두 기본적 비대칭성을 지지한다. 기본적 비대칭성이란, 어떤 새로운 존재가 세계로 오지 아니하여 그런 존재가 세계에 왔더라면 향유했을 선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박탈이 아니므로 나쁘지 않은 것인 반면에, 존재했기 때문에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악으로 괴로워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나쁘다는 것이다.

 

기본적 비대칭성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비대칭성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전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첫째로, 우리는, 비참한 삶을 살게 될 사람들을 존재케 하는 것을 피할 의무는 있는 반면에, 행복한 삶을 살게 될 사람들을 존재하게 할 의무는 갖고 있지 않다. 둘째로, 그 아이가 존재하게 됨으로써 이득을 보게 될 것이라는 이유를 아이를 갖는 이유로 대는 것은 이상하지만, 그 아이가 고통을 겪을 것이라는 이유를 아이를 갖지 않는 이유로 대는 것은 이상하지가 않다. 셋째로, 고통을 겪는 아이를 존재케 한 경우에, 그 아이를 존재케 한 것을 후회하는 것은 이치에 닿는다. 그리고 그 후회를 그 아이를 위해 하는 것이 이치에 닿는다. 반면에, 행복한 아이를 존재케 하지 않았을 때, 그 아이를 위해 그런 아이를 존재하지 않은 것을 후회할 수는 없다. 넷째 우리와 먼 곳에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타당하게 슬퍼한다. 반면에 먼 곳의 무인도에 살았을지도 모르는 부재하는 행복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다.

물론 다른 학자들은 이 네 가지 비대칭성이, 기본적 비대칭성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도 해명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해명에 쓰인 이론들은 논쟁의 여지가 많거나(예를 들어 적극적 의무란 없다는 이론), 행복한 아이들을 낳을 수 있는 한 계속해서 낳아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결론을 내거나, 아니면 네 가지 비대칭성 중 일부만을 해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네 가지 비대칭성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도덕의 세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기본적 비대칭성은 정말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원리일 것이다. 이러한 논의 어디에도 소극적 공리주의라는 독특한 독트린은 사용된 바 없다. <끝>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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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등대
    2019.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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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잘 읽었습니다.

    책이 좀 어려운것 같습니다

    저자의 논증에 익숙치 않네요.

    몇번 다시 읽어봐야 겠습니다.
    • ㅇㅇ
      2019.07.07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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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지하게 논증 형식을 갖춘 것일 뿐 어렵지는 않지 않나요? 당사자 동의를 얻을 수 없는 상황에서 미필적 고의로 당사자의 고통 리스크를 당사자 대신 멋대로 감수하고 합리화하는 것은 윤리적이지 않다는 것이죠. 단지 이미 태어난 자들의 복리를 위해 합리화하고 있을 뿐.
    • 2019.07.07 22:5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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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렵고 쉬운 것은 논증이 담긴 글에 본질적으로 내재한 속성이 아니라, 그 글과 대면하는 행위자에 상대적인 속성입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 논문은 오늘날 물리학자에게는 쉽겠지만, 저 같은 문외한에게는 어려울 것입니다.

      2. oo님이 말씀하신 내용은 논증의 여러 단계 중 하나를 뒷받침하는 논거 중 하나를 표현한 것이지만, 논증의 전체를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삶에서 누리게 될 선이 삶에서 직면하게 될 악보다 더 크다면 그러한 감수가 합리적이다라는 반론에 대한 처리야말로 책 내용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합적 논증을 개진하는 책의 내용을 단 하나의 문장으로 쉽게 요약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그렇게 쉽게 요약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논증의 일부분들을 생략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독자에 따라서 책이 달리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서로 이야기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2. ㅇㅇ
    2019.07.07 06:55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공리주의적으로 결과주의적으로 해석한다면 인류가 몇백억을 감당할 역량을 갖추기 전에 강제로 더 낳게 만들어서 핵전쟁을 유도하고 멸종을 앞당기는 게 나을 수도 있겠지요..
    • 2019.07.07 23:00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공리주의를 채택하면서 동시에 인류 절대다수의 삶의 효용합계가 마이너스(-)라는 명제까지 채택할 때에는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통상의 공리주의자는 삶의 효용합계는 플러스(+)라고 볼 것이며, 그런 가정의 합리적 근거를 논구하기도 어렵지만(그리하여 베너타는 그런 전반적 합계에 대한 아무런 논급도 하지 않았지만) 삶을 지속할 가치에 대한 통상의 판단을 염두에 둔다면, 그러한 통상의 공리주의적 가정이 비합리적이라고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물론 삶을 지속할 가치를 긍정하면서도 그러한 가정에 반대하여 논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칸트는 통상의 공리주의자와 달리 즐거움과 괴로움으로만 살펴본 삶의 효용합계는 마이너스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즉 행복의 면에서 삶의 괴로움은 즐거움을 능가한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칸트는 행복 이외의 가치가 삶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또는, 삶의 효용합계는 0보다 작지만, 또한 죽음의 비가치가 그 발생시기에 따라 절대값이 커진다고 본다면, 삶을 지속할 가치에 대한 판단과 양립가능하게 삶의 효용합계가 마이너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가치와 비가치의 순 결과에 대해 어느 쪽 입장도 완전히 합리성의 관점에서 자신의 우위를 주장할 수는 없는데, 이는 삶의 가치와 비가치가 통약불가능성을 갖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의 척도 위에 눈금을 매겨 줄지워 세우고 합계할 수 없는 성질을 갖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통약불가능성을 감안한다면, 어떤 철학적 논증의 충격(impact)은 그것이 위와 같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쟁점에 관하여 어느 쪽 입장을 택하더라도, 여전히 그 결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형태를 취할 때 가장 커질 것입니다. 데이비드 베너타의 논증은 이 문제에 관해 어느 입장을 취하더라도 적용되도록 세심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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