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선생님 안녕하세요.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를 읽는 도중 책의 반직관적인 결론에 동의하기가 어려워 글을 올립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첨언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비대칭성 문제를 거부해도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281p에 보면, "우리가 비대칭성을 다른 방식으로 -- 즉 시나리오 B에서 부재하는 고통은 단지 '나쁘지 않음'이라고 주장함으로써 -- 거부하려고 한다면 사태는 더 나빠진다. 그것으로 우리로 하여금 가능한 미래의 괴로움을 겪는 사람의 이익에 근거하여 그 사람을 창조하는 것을 피할 아무런 도덕적 이유가 없다고 말하게끔 만들 것이다. 우리는 괴로움을 겪는 아이의 이익에 기반하여 우리가 그 아이를 창조했다는 것을 더 이상 후회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우리는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 괴로움을 겪는 비참한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이 창조되었다는 점을 유감스러워할 수도 없게 된다." 이런 설명이 있는데요.

 

여기서 고통의 부재가 '나쁘지 않음'이면 사태가 더 악화된다고 했는데, 저는 뒤에 열거한 사태가 왜 더 악화된 사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사태가 왜 더 악화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시나리오B에서 고통의 부재가 '나쁘지 않음'이라면, 비존재가 존재에 비해 반드시 우위점을 갖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경우에 따라 시나리오A에서 좋음이 나쁨보다 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베너타 교수님은 단순히 좋음과 나쁨의 크기만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좋음과 나쁨의 분포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저는 쾌락의 빈도나 순서, 그리고 수명을 고려하는 것, 즉 분포의 특성까지도 모두 좋음과 나쁨으로 환원하여 비교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경우는 오히려 시나리오A가 시나리오B보다 우위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나리오A는 좋음(+)에 가까운 반면 시나리오 B는 나쁘지 않음(=<0) 이므로) 따라서 이 경우 비존재가, 즉 창조되지 않는 것이 더 뛰어난 대안일 이유가 없으므로 창조했다는 (혹은,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후회할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시나리오A에서 좋음과 나쁨의 합계가 '나쁘지 않음' 이상이기만 하다면, 시나리오B가 더 우위점에 있는 대안이라고 볼 수 없고 오히려 시나리오 A가 더 우위점에 있으므로, 사태가 더 나빠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좋아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위 진술이 참이라면, 인용문에서 악화되는 사태로 들은 예시들은 타당하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낙천편향과 적응의 영향으로 인해서 시나리오A에서 좋음과 나쁨의 합계가 좋음(+)에 가깝다고 '착각'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의 관점(sub specie aeternitatis)에서 좋은 삶을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관점(sub specie humanitatis)에서 맥락 특수적으로 좋은 삶을 바라 본다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 아닌가요? -- 이에 대해 책에서는 겸손(modesty)을 미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원의 관점을 택할 수 밖에 없다고 진술하는데, 그렇다면 겸손이 미덕이라는 관점을 포기하면, 인간의 관점으로 좋은 삶을 판단하는 것이 부적절한 것은 아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관점에서 좋은 삶을 판단한다면, 시나리오A, 즉 존재가 비존재보다 가치있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히려 이게 직관에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답변:

의미론적 규정과 가치론적 해명의 차이

(difference between a semantic definition and an axiological account)

 

의미론적 규정은 용어들에 어떤 뜻을 할당하는가를 정하는 일입니다. 반면에 가치론적 해명은 어떤 사태 또는 행위 또는 관계가 어떤 격위와 내용의 가치를 갖는가를 규명하는 작업입니다.

 

논증을 펼치는 논자는 자신의 논의 체계 내에서 어떤 용어들을 할당하는 임의의 작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당된 뜻을 가진 용어들 자체가 우리의 일상용법에 분명하게 어긋나거나 의미론적으로 모순 등을 범하지 않는 한, 그러한 의미론적 규정은, 통사적인 문제나 논리적인 문제를 야기시키는 바가 없습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논의를 펼치면서 아예 태어난 적이 없는 상태에 대해서도 비존재’(non-existence)라는 용어를 할당하고, 일단 태어난 사람이 소멸하고 난 뒤의 상태에 대해서도 같은 용어인 비존재를 할당하는 것(A)은 의미론적인 문제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비존재 상태에 있다가 출생이라는 사건으로 인해 존재하게 된 우리는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인해 또 다시 비존재 상태로 돌아간다.’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이 문장이 문법적으로 어긋남이 없고, 이해가능한 뜻을 가진 것이라고 봅니다.

 

반면에 누군가 그렇게 단어를 각각의 사태에 할당한 자신의 의미론적 규정을 발판으로 삼아, 다음과 같은 K주장을 한다고 해봅시다.

 

K: ‘태어나기 전의 상태도 비존재요, 죽고 난 후의 상태도 비존재다. 그런데 태어나지 않았던 비존재 상태는 나쁠 것이 전혀 없었고 두려워할 상태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똑같은 비존재 상태인 죽음도 역시 나쁠 것이 전혀 없고 두려워할 상태도 아니다. 물론 죽는 과정에서 고통을 겪는다면 그것은 나쁘겠지만 그런 고통이 없다면 전혀 나쁠 것이 없다. 또한 죽은 사람에게 가까운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면 그 슬픔만큼 나쁘겠지만, 그런 사람이 없다면 전혀 나쁠 것이 없다. 그렇다면 고통 없는 죽음은 죽는 사람에게 해악이 아니다. 이것은 태어나지 않은 상태가 태어날 수도 있었던 존재에게 해악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이익을 위해, 실업 상태에다 연고도 없는 사람이 자는 사이에 고통 없이 죽는 약을 투여해서 누군가를 죽여도 나는 그 죽는 사람에게 전혀 나쁜 일을 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주장을 우리는 심각하게 검토해봐야 할 이례적인 주장이라고 여깁니다. 설사 비존재라는 같은 용어를 출생 전 상태와 죽음 이후 상태에 무리 없이 할당하는 용법을 사용하여 문법에 어긋나지 않고 그 뜻이 이해가 되는 문장들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는 논자의 주장에는 동의하더라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동의는 논자의 비존재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의미론적으로 크게 무리가 없다(A)는 데 그치지, 그런 개념 할당과 규정을 활용하여 만들어낸, 출생 이전의 상태와 죽음 이후의 상태의 가치에 관하여 논하여 문장들이 나타내는 명제(이를테면 K)가 필연적으로 참을 진술하는 것이라는 점(B)에는 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K와 같은 주장은 가치론적(axiological) 주장입니다. 가치론적은 주장은 그 주장이, 가치의 구조에 들어맞는지를 뜯어봐야 그 진위 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출생 이전의 비존재(pre-vital non-existence)와 죽음 이후의 비존재(post-mortem non-existence)의 가치를 비대칭적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박탈과 소멸을 겪은 주체가 없지만, 후자는 박탈과 소멸을 겪을 주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자는 전혀 나쁘지 않지만, 후자는 나쁩니다. 논자가 둘 다 비존재이므로 출생 이전의 비존재와 죽음 이후의 비존재 모두에게 나쁘지 않음을 할당하겠다고 선언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선언이 어떤 참인 가치론적 결론을 도출하는 타당한 전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선언은 단지 자신이 어떻게 용어를 사용하겠다는 점을 알린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존재하기 전의 비존재와 일단 존재하게 된 이후의 비존재가 대칭적(symmetrical)이라는 가치론적 주장하려면, 그런 대칭성 가정이 가치의 구조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논박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논박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하나의 논박은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조차 실천적으로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데이비드 베너타는 <인간의 곤경Human Predicament>, p.123에서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상상합니다.

 

테러리스트가 에피쿠로스주의자를 묶었다. 그는 총을 들이밀어 에피쿠로스주의자의 입에다 처넣고는, 방아쇠를 당기겠다고 계속 위협한다. 그 위협대로 그가 행위한다면, 에피쿠로스주의자는 즉각 죽임을 당할 것이다. (a) 에피쿠로스주의자가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그의 신념에 진실되게 남아서 전혀 동요 없이 앉아 있든지 (b) 그의 정서를 그의 신념에 일치시킬 수가 없어서, 불안으로 가득차서 똥오줌을 지리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죽음이 전혀 나쁜 일이 아니라면 누군가 우리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일도 또한 나쁜 일이 아니며, 그래서 적어도 자기 말에 따르지 않으면 고통 없는 죽음을 가하겠다는 행위를 처벌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닌 것을 처벌하는 것으로 옳지 못하다는 결론이 도출될 것입니다.

 

대표적인 또다른 논박은, 그런 대칭성을 받아들이는 일이 아이를 낳지 않는 것[출생 전 비존재를 초래하는 행위]과 고통을 주지 않는 실업자이자 무연고자의 살인[죽음 이후 비존재를 초래하는 행위]이 동등하게, 나쁘지 않다는 것을 함축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 비출산을 처벌하지 않는 것처럼 많은 사안에서 살인을 처벌하지 않아야 한다는 결론을 산출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결론을 함의하는 애초의 대칭성 주장은 가치론적 주장으로 틀렸습니다. 그 가치론적 주장에 대한 근거로 나는 두 종류의 비존재를 구분하지 않는 용법을 담는 의미론적 규정을 사용하겠다는 결심을 내세울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논의는 그 반대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가치론적 검토를 한 이후에, 가치의 구조를 제대로 포착하는 의미를 갖는 용어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원래의 비대칭성 문제로 돌아와서,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데이비드 베너타에 반대하면서 부재하는 고통에 나쁘지 않음이라는 개념을 할당하는 의미론적 규정을 취할 수는 있겠지만, 이는 다음과 같은 가치론적 논박에 부딪힙니다.

논의의 맥락에서, 논자가 할당한 나쁘지 않음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음을 의미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할당된 나쁘지 않음좋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베너타가 주장한 행렬과 동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통의 부재가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는 명제(P1), ‘고통의 부재가 좋다는 명제(P2)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차이를 염두에 두고 이 둘 중 어느 쪽이 가치의 구조를 더 잘 포착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베너타가 주장한 명제(P2)가 가치의 구조에 더 잘 들어맞습니다.

고통의 부재가 그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부재가 좋다고 하는 것이, 고통의 부재가 선택 행위 이유의 차원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위치를 잘 드러냅니다. 어떤 사태가 누군가에게 좋을 것이라면 우리는 그 누군가를 위해 그 사태를 발생시킬 이유가 있지만, 어떤 사태가 누군가에게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것이라면 우리는 그 사태를 누군가를 위해 발생시킬 이유가 통상 없습니다. 예를 들어 딸이 특정 가수의 콘서트에 몹시 가고 싶어한다면, 이 딸의 복지에 마음을 쓰는 어머니는 구하기 힘든 그 가수의 콘서트 표를 아주 수고스럽게 구해서 딸에게 선물로 줄 이유가 있습니다. 반면에 딸이 그 특정 가수의 팬이 전혀 아니고 콘서트에 가는 것을 그다지 특별히 즐기지도 않아서 콘서트를 보러 가도 딸의 복지는 콘서트 표가 없었던 경우와 동일한 경우에는, 다름 아닌 이 특정 가수의 표를 딸이 갖는 것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으로, 적어도 그 어머니가 대단한 수고를 거쳐서 발생시킬 이유는 없는 사태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가치망에서 부재하는 고통이라는 사태는, 우리가 대단한 수고를 거쳐서라도 발생시킬 가치가 있는 사태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가 자신의 발현되지 아니한 유전적 결함 때문에, 자신의 정자가 누구의 난자와 수정하더라도 그로 인해 태어나는 아기는 고통을 겪다가 10개월만에 사망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 남자는 정관수술이라는 상당한 비용을 치러서 그러한 아기가 태어나지 않도록 하기로 결심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매우 적합한 행위로 평가받습니다. 즉 이 남자가 정관수술이라는 이례적인 사건과 그에 따르는 비용 및 위험을 감수하는 행위는 할 가치가 있는 행위입니다. 만일 부재하는 고통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라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함축될 것입니다. 콘서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콘서트 관람이 다른 식으로 여가를 보내는 것과 똑같을 딸에게 굳이 큰 고생을 해서 표를 구해줄 이유가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 남자는 정관수술이라는 수고스러운 과정을 거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고통의 부재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특별히 그 사태를 야기할 이유가 없는 그런 중립적인 가치가 아니라, 수고를 들여서라도 그 사태를 야기할 이유가 분명히 있는 긍정적 가치를 갖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통의 부재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것에 불과하지 않고, ‘좋은 것입니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281면의 다음 내용 역시, 같은 취지를 가리킵니다.

 

첫째, 우리는 우리가 비대칭성을 거부할 경우 지지하게 될 바가 어떤 것인지를 정확히 기억해야 한다. 물론 비대칭성을 거부하는 여러 방법이 있지만, 가장 덜 그럴 법한 방법은 부재하는 쾌락이 '나쁘지 않음'이라는 점을 부인하면서 대신 그것이 '나쁨'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미래의 가능한 행복한 사람들의 이익에 기반하여 그 사람들을 창조할 (강한?) 도덕적 이유, 그리하여 추정적 의무를 갖는다는 견해를 지지하게 한다. 또한 비대칭성의 거부는 우리로 하여금 아이를 위하여 아이를 창조할 수 있으며, 우리가 창조할 수도 있었지만 창조하지 아니한 행복한 사람들을 위하여 후회해야 한다고 말하게끔 한다. 마지막으로, 비대칭성의 거부는 지구의 일부나 우주의 나머지 부분에 아무도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유감스러워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장소들에 존재할 수도 있었던 이들에 대한 배려에서 이 점을 유감스러워해야 한다고 견해를 지지하게끔 한다.

우리가 비대칭성을 다른 방식으로-즉 시나리오 B에서 부재하는 고통은 단지 '나쁘지 않음'이라고 주장함으로써-거부하려고 한다면 사태는 더 나빠진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가능한 미래의 괴로움을 겪는 사람의 이익에 근거하여 그 사람을 창조하는 것을 피할 아무런 도덕적 이유가 없다고 말하게끔 만들 것이다. 우리는 괴로움을 겪는 아이의 이익에 기반하여 우리가 그 아이를 창조했다는 것을 더 이상 후회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우리는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 괴로움을 겪는 비참한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이 창조되었다는 점을 유감스러워할 수도 없게 된다.”

 

위 인용된 내용은, ‘고통의 부재좋지도 나쁘지도 않음을 가치론적으로 할당한다면, 고통의 부재는 그 사태를 야기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상태가 된다는 터무니없는 함의를 갖게 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무엇인가 그 사태를 야기하거나 추구할 이유가 있으려면 그 사태는 좋은 것이어야 하며, 그 사태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에 불과하다면, 그 사태를 추구할 아무런 도덕적 이유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애초에 아무런 도덕적 이유도 없었던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아무런 후회도, 아무런 유감도 있을 수 없을 것이며, 아무런 이치에 어긋나는 바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부재하는 쾌락이 나쁨이라고 볼 때 귀결되는 함의보다 더욱 기괴한 함의입니다. 왜냐하면 부재하는 쾌락을 나쁨이라고 볼 때는 쾌락을 누리는 존재를 탄생시킬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언제나 그렇게 탄생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기이한 결론이 나오지만, ‘부재하는 고통나쁘지 않음이라고 볼 때는 고통을 겪는 존재를 탄생시키지 않을 아무런 이유도 없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 존재를 무심하게 탄생시키고는 조금의 후회도 느끼지 않아도 괜찮다는 한층 더 기이한 결론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대칭성을 회복시키려는 시도는 사태를 더 악화시킨다고 언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고통의 부재를 좋지도 나쁘지도 않음이라고 하는 것은, 고통의 부재를 딱히 추구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므로, 인간 행위의 이유 차원에서 드러나는 가치의 구조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가치론적 주장이 되어, 틀린 것입니다.

 

2. 두 가능세계의 비교, 그리고 서수적 비교에서 분해와 종합의 방법론

 

(1) 가능세계 비교 판단

 

질문자께서는 비존재가 존재에 비해 반드시 우위점을 갖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경우에 따라 시나리오A에서 좋음이 나쁨보다 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질문자께서 가능세계의 비교라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론을 시야에서 놓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존재를 시작하는 것’(시나리오 A)인 가능세계를 존재를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것’(시나리오 B)의 가능세계와 비교하는 것입니다. AB보다 낫다거나, AB보다 못하다거나, AB가 아무런 상관이 없다거나 하는 비교 판단(comparative judment)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두 개의 가능세계에 있을 때, 두 가능세계를 비교하지 않는 대신, 하나의 가능세계만 떼놓고는 그 가능세계가 계속 지속할 가치가 있는지를 따지는 것은,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이 비교 판단이라는 점을 시야에서 완전히 놓친 것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 봅시다. 확고한 절대적 독신주의자이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형태로 정관수술을 해버린 몽룡이는 지금 A라는 회사에서 채용 제의를 받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인기도 좋은지, B라는 회사에서도 채용 제의가 옵니다. B라는 회사는 집에서도 더 가깝고, 야근도 없고, 급여도 더 많습니다. 즉 다른 점에서 B회사는 모두 우위점을 가집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B회사가 우위점을 가지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피고용인의 자녀 양육에 대한 복리후생 환경입니다. A 회사는 회사 바로 옆에 그 회사 직원은 자녀를 무료로 보낼 수 있는 어린이집을 운영합니다. 또한 A 회사는 직원의 자녀가 대학에 가면 그 대학 등록금을 전액 지원해줍니다. 예를 들어 1년 등록금이 1천만원이라면, 4년치인 4천만원을 모두 지원해줍니다.

그런데 몽룡이가 사는 국가의 법은 노동자는 처음 자신이 취직한 회사에 정년때까지 계속 다니거나 아니면 실업 상태에 있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몽룡이에게 문제되는 질문이 일단 다니게 된 A 회사를 계속 다닐 것인가 말 것인가라면, 몽룡이는 A 회사를 계속 다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A 회사를 다니는 것이, 이제 와서 실업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A 회사를 다녀서 얻는 이득이 A 회사에서 얻는 비용보다 큽니다. 그래서 A 회사를 다녀서 얻는 이득에서 비용을 뺀 값, 즉 순이득은 0보다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몽룡이가 선택해야 할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몽룡이는 A회사를 다닐 것이냐, B회사를 다닐 것이냐, 이것을 비교해야 합니다. 몽룡이의 애인 춘향이가 몽룡이 자취방에 와보니, 몽룡이가 어느 회사를 갈 것인가를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가, 몽룡이가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

“A회사에 가겠어.”

그 말을 들은 춘향이가 묻습니다

왜 그렇게 결정했어?”

왜냐하면 A 회사를 일단 다니게 되었을 때, A 회사를 다녀서 얻는 이득에서 비용을 뺀 값, 즉 순이득은 0보다 크기 때문이다.”

몽룡아, 그건 우리나라의 이 강력하고 절대 깰 수 없는 법률 때문에, A 회사를 일단 다니게 되었을 때, 실업 상태에 처하지 않고서는 A회사에 근로관계를 존속하는 것을 중지할 수 없기 때문에 계속 A회사를 다닐까 말까를 고민할 때 고려해야 하는 사항이잖아! B 회사하고 비교해야지! B 회사와의 비교 판단은 어디 간 거야!!”

춘향이의 지적은 통렬합니다. 지금 아주 중차대한 결정의 시점이고, 그래서 선택지가 되는 두 시나리오를 비교해야 하는데, 한 시나리오 내부에서의 순이득을 계산하고 앉아 있으니 이건 완전히 지금 사고의 쟁점을 엉뚱한 데로 잡고 있는 것입니다.

일단 A 회사를 선택한 가능세계에서는 실업상태에 빠지지 않고서는 A 회사를 그만둘 수 없습니다. B 회사를 선택한 가능세계로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한편 B 회사를 선택한 가능세계에서도 A 회사를 선택한 가능세계로 건너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가능세계 중 무엇이 몽룡이 자신을 위해 더 나은 세계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A 회사를 일단 다니게 된 이후에 계속 다니는 것이 몽룡이 자신을 위해 더 나은 선택인가의 문제와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질문자께서는 이 두 문제를 혼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서수적 비교에서 분해와 종합의 방법

 

복합적인 요소들을 갖고 있는 두 선택지를 서수적으로 비교할 때, 우리는 분해와 종합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복합적 요소를 갖고 있는 두 선택지에 대한 기수적 비교는 각 요소별로 가진 장점과 단점에 수치를 할당해서 모종의 방식으로 합산하여 그 합산값을 비교하는 방법입니다.

반면에 복합적 요소를 갖고 있는 두 선택지에 대한 서수적 비교, 각 요소별로 우위와 열위를 판단하여, 만일 한 선택지가 열위점은 갖지 않으면서 우위점들을 갖는다면 그 선택지를 서수적으로 우선시키는 방법입니다.

 

당연히 복합적 대상에 대한 서수적 비교는 비완결적인 판단을 도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서수적 비교에서는 우위, 열위, 우위도 열위도 아님이라는 세 판단이 요소(쟁점)별로 나오는데, 특히 우위와 열위가 엇갈리는 경우에는 서수적 비교 판단은 하나의 선택지를 가려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다음의 경우에는 AB는 서수적으로 어느 쪽도 우선하지 않습니다.

 

 

선택지 A

선택지 B

요소1

열위

우위

요소2

우위

열위

(그림1)

 

예를 들어 소개팅을 두 번 했는데 소개팅 상대방 A는 성품이 훌륭하지만 대화가 도대체가 재미가 하나도 없고 상대방 B는 성품은 평범하지만 대화하는 것이 상당히 재미있는 경우가 있겠습니다. 그러면 A는 성품에서 우위를 대화에서 열위를 가지며, B는 반대로 성품에서는 열위를 대화에서는 우위를 가집니다. 이럴 경우에 서수적 비교 판단은 어느 쪽 선택지도 우선한다고 가려내주지 못합니다.

 

다른 한편 다음의 경우에는 A보다 B가 서수적으로 우선한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선택지 A

선택지 B

요소1

열위

우위

요소2

열위

우위

(그림2)

 

그러니까 소개팅 상대방 B가 성품도 훌륭하고 대화도 재밌는데, 상대방 A는 성품도 평범하고 대화도 다소 지루한 편이라고 한다면, 애프터는 B와 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입니다. 여기서 고민하는 것이 B와 이미 사귀어 와서 정이 많이 들었고 A와 교제를 중단한다면 죽을 때까지 싱글로 남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계속 A와 사귈 것인가의 쟁점이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A와 일단 사귀고 그 대안은 싱글밖에 없는 상태에서 A와 계속 사귈 가치가 있다는 점은, 선택지 B와의 비교에서 아무런 합리적인 항변이 되지 않습니다. AB를 서수적으로 비교 판단할 때는, 요소1에서도 열위에 있고 요소2에서도 열위에 있는 선택지 A를 더 낫다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 판단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서수적 비교에서 분해와 종합의 원칙입니다.

 

서수적 비교에서 분해와 종합의 원칙:

복합 선택지에 대한 서수적 비교에서는, 그 선택지들의 복합구조를 단순한 요소로 분해한 뒤에, 각 요소별 우위와 열위를 살펴보아서, 모든 요소별로 한쪽이 우위에 있다면, 이 요소들을 합산하여 다시 종합하더라도, 어느 한쪽의 합산된 기수적 가치가 0보다 크다는 이유로 판단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

 

이 원칙을 위반하면서 그런 식으로 판단을 바꾸는 것은 서수적 비교 판단의 요점(point)을 놓치는 것입니다. 기수적 비교 판단이 어렵기 때문에 서수적 비교 방식을 취하였다는 이유도 무시하는 것이고,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이 AB 선택지의 비교라는 점도 시야에서 놓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요소별로 이렇게 우위와 열위가 명확히 가려져야만, 종합해서 AB의 서수적 우선성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두 요소로 이루어진 두 대상이 있는데, 그 두 대상의 우위점과 열위점이 다음과 같다고 해보겠습니다.

 

 

선택지 A

선택지 B

요소1

열위

우위

요소2

우위점 없음

열위점이 없음

(그림3)

 

이 경우 요소1에서는 B가 분명한 우위에 있습니다. 요소2 면에서는 AB 어느 쪽도 우위를 갖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요소1, 요소2의 판단을 종합하면 서수적 판단으로는 BA보다 우선한다고 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B는 요소2에서는 열위점이 없으면서 요소1에서는 우위점이 있기 때문에, 종합적으로 B가 서수적으로 우선함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B가 서수적으로 우선하지 않는다고 본다면, 이 경우 요소1의 비교를 전적으로 무시하게 되는데, 이것은 매우 이치에 어긋납니다.

 

예를 들어 몽룡이가 춘향이의 일란성 쌍동이 여동생 춘심이에게서도 사귀자는 제안을 받았다고 해봅시다. 정신적인 면에서 춘향이는 몽룡이에게 지혜로운 파트너가 될 수 있는 자질을 보였는데 반해 춘심이는 그런 자질은 평범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체적인 면에서 둘은 단 한 가지만 제외하고는 똑같았습니다. 즉 춘심이는 육체적으로 비범한 한 가지 기량이 있었는데 그것은 얼굴 뒤 근육을 움직여 귀를 좌우상하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몽룡이는 그것을 보고 신기하여 춘향이를 만났을 때에도 한 번 귀를 좌우상하로 움직여보라고 슬쩍 권해보았지만, 비록 쌍둥이임에도 불구하고 춘향이는 도저히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몽룡이는 처음 신기함을 느끼고 나서는 춘심이의 그러한 기재(奇才)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몽룡이는 인생에서 고통을 감소시키고 쾌락을 증대시키며 인간적 애착과 유대를 형성하고 가꾸어나가며 진리를 추구하는 등의 활동은 의미가 있지만, 귀를 좌우상하로 움직이는 것은 하등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가치관이 확고합니다. 그래서 몽룡이는 앞으로도 귀를 좌우상하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자 하는 의미 있는 욕구를 가질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몽룡이가 그렇게 춘심이가 원할 때 자신의 귀를 좌우상하로 움직이는 능력을 싫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 보았을 때 신기한 능력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뿐이었습니다. 즉 춘심이는 춘향이가 갖지 못한 어떤 능력을 갖고 있었지만, 몽룡이에게는 애인으로서 적합성을 판단할 때 이 점은 전혀 우위점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춘향이는 춘심이가 가진 바로 그 귀 움직이기 능력을 갖지 못함이 분명했지만, 몽룡이에게는 애인으로서 적합성을 판단할 때 이 점은 전혀 열위점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로움에서는 춘향이가 우위에 있고 다른 신체적인 면에서는 춘향이는 열위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몽룡이에게 주어진 연인 선택지가 오로지 둘밖에 없다고 했을 때, 춘향이를 선택하지 않는 것은 이치에 어긋납니다. 춘향이는 애인으로서 서수적으로 춘심이에 우선합니다. 그리고 춘심이가 귀를 좌우상하로 움직이는 능력이 아무리 증가한다고 해도, 즉 예전에는 초당 1번만 움직였지만 이후에는 초당 10번을 움직일 수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전혀 서수적 판단을 바꿀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그 속성은 우위점의 근거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또한 주목할 것은, 신체적인 면에서 모든 속성이 춘향이와 춘심이가 같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춘심이는 신체적인 능력 면에서, 춘향이가 갖지 않은 하나의 속성을 더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위점이 아니었습니다. 즉 어떤 능력이나 속성이 더 갖추어져 있다고 해서, 그것이 우위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선택 맥락에서 문제가 되는(what matters) 면에서는 그런 더 있는 속성이나 능력이 우위가 아닌 경우는 흔합니다.

예를 들어 커피를 하루에 두 잔 이상 결코 마시지 않는 사람에게, 오로지 본인만 커피를 추가로 마실 수 있으며 양도나 판매는 결코 할 수 없는 그날이 유효기간 만료일인 커피 쿠폰을 100장 주는 것은 커피 쿠폰을 2장 받는 것에 비해 우위점이 없습니다.

가나어를 전혀 배울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그 받은 사람만이 언어 학습에만 사용할 수 있는 가나어 학습 앱을 선물로 받는 것은, 가나어 학습 앱을 받지 않는 것에 비해 우위점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서수적 판단에서 어떤 분해된 요소에서 우위나 열위가 없다고 하려면 그 분해된 요소면에서 물리적 속성의 보유 여부가 꼭 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판단을 내리는 그 맥락에서 판단의 목적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이 우위나 열위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면 족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위점이 없던 것이, 여러 분해된 요소에서의 서수적 우선순위 판단을 종합하여, 복합적 선택지 전체에 대한 비교 판단을 할 때, 갑자기 우위점이 생기는 것으로 변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서수적 우선성 판단의 방법론 전체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방법론은 부인하는 것은, AB의 비교 판단에서 A자체의 지속할 가치 판단으로 쟁점을 변경시키는 데 기초하므로, 논리적 혼동을 범한 것이어서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림3)과 같이 요소별 서수적 판단이 성립한다면, 이를 종합하여 우위점은 있으나 열위점은 없는 B가 더 나은 선택지라는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3) 복합 선택지의 한 요소가 서수적 비교에서 우위점이 되는 경우에 관한 정리

 

그러면 이 절의 서두에서 제시한 A회사와 B회사를 선택하는 몽룡이의 고민으로 돌아와보겠습니다. B회사는 다른 면에서는, 급여, 출퇴근거리, 상사의 능력과 인품, 회사의 전망, 노동시간 면에서 모두 A회사보다 약간의 우위에 있습니다. 반면에 A회사는 그 소속 직원의 자녀가 있을 경우에 그 자녀에게 다대한 지원을 해줍니다. 그런데 몽룡이는 확고한 독신주의자인데다가 이미 복구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정관수술을 해버렸습니다. 설사 A회사가 지금 당장 그 후생복지 혜택을 없앤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몽룡이 자신에게는 아무런 차이를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몽룡이는 실업상태에 있더라도 세상의 무슨 회사를 선택하더라도 어린이집 지원에서 대학 등록금 지원에 이르기까지의 후생복지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점은 몽룡이에게서 박탈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A회사를 다닌다고 하여도 자녀에 대한 후생복지 혜택이 많다는 것은 전혀 우위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녀에 대한 후생복지 혜택은 자녀를 가질 생각이 있거나 자녀가 있는 사람에게만 그 회사의 우위점으로 평가되고 또한 그런 혜택의 부재의 초래는 박탈로 평가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확고한 독신주의자이자 어떠한 유효한 정자 생산도 하지 못하는 몽룡이로서는 A회사와 B회사의 선택은 (그림3)과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면에서는 B회사가 우위에 있지만 자녀에 대한 후생복지 혜택의 면에서도 열위에 있지 않으므로, B회사가 서수적으로 우선하는 선택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데이비드 베너타의 두 가능세계 사이의 선택도 마찬가지 구조를 갖습니다.

 

 

가능세계 A (X가 존재함)

가능세계 B (X가 존재하지 않음)

요소1 쾌락

쾌락의 존재 (우위가 아님)

쾌락의 부존재 (열위가 아님)

요소2 고통

고통의 존재 (열위)

고통의 부존재 (우위)

 

요소1면에서 평가할 때 가능세계A는 가능세계B에 비해 우위점이 없습니다. 또한 BA에 비해 열위점이 없습니다. 여기서 가능세계A에서의 쾌락의 존재는, 가능세계B에는 없는 속성임이 분명합니다. 한 선택지에는 없는 속성이 다른 선택지에는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가치론적으로 우위점이 꼭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춘심이의 귀를 좌우상하로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몽룡이에게 우위점이 아님에서, 그리고 A회사의 자녀에 대한 후생복지 혜택은 몽룡이에게 우위점이 아님에서 분명히 확인됩니다.

물론 다른 선택지는 갖지 못한 속성을 한 선택지가 갖는 것이 우위점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급여와 여가 모두에 이해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회사를 선택해야 하는데, 한 회사가 급여가 다른 회사보다 더 많다면 이것은 분명히 급여라는 요소에서는 우위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입니다: 서수적 우선순위 판단에서, 선택지A가 선택지B는 갖지 못한 추가적 속성을 보유하는 것이, 어느 경우에는 우위점이 되고 어느 경우에는 우위점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

 

그에 대한 답은 이미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복합 선택지의 한 요소가 서수적 비교에서 우위점이 되는 경우에 관한 정리:

(i) 만일 하나의 선택지를 취했을 때, 취하지 않은 다른 선택지가 보유한 그 추가적 속성이 없다는 점이, 선택의 우위 평가가 유관한 주체에게 박탈이 될 경우에는 우위점이 된다.

(ii) 만일 하나의 선택지를 취했을 때, 취하지 않은 다른 선택지가 보유한 그 추가적 속성이 없다는 점이, 선택의 우위 평가가 유관한 주체에게 박탈이 되지 않을 경우에는 우위점이 아니다.

(iii) 여기서 박탈이 된다 함은 그 요소를 이미 존재하는 주체가 긍정적으로 향유하고자 하거나 유의미하게 유관한 시간 내에 그렇게 향유하고자 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 그 요소를 누리지 못하게 됨을 의미한다.

 

이 정리는 우리가 살펴보았던 사례들을 완전히 해명해줍니다. 여가와 급여 두 요소 모두에 이해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회사를 선택할 때 급여가 더 많다는 요소는 그 요소 면에서는 우위점입니다. 왜냐하면 이 회사를 택하지 않고 다른 회사를 택하게 되면 이 회사를 택했을 때는 누릴 수 있었던 급여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추가적 급여는 이 구직자가 긍정적으로 향유하고자 하는데, 다른 회사를 선택함으로써 누리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박탈이 됩니다.

반면에 자신의 애인이 귀를 좌우상하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욕구가 몽룡이에게는 전혀 없고 그런 것을 의미 있는 요소로 앞으로도 판단할 가능성이 유의미하게 유관한 시간 내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애인이 귀를 좌우상하로 움직이는 속성을 갖지 못한 것은 몽룡이에게는 박탈이 아닙니다. 박탈이 아니므로 춘향이는 갖고 있지 않은 그 속성을 춘심이는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사실은 전혀 춘심이의 우위점이 아닙니다.

또한 A회사와 B회사를 선택하는 처지에 놓인, 확고한 절대적 독신주의자이자 돌이킬 수 없는 정관수술을 해버린 몽룡이는, 자신의 자녀에게 후생복지혜택을 긍정적으로 향유하고자 하지도 않고 앞으로 긍정적으로 향유할 가능성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몽룡이에게 박탈이 아닙니다. 박탈이 아니므로 B회사는 갖고 있지 않은 그 속성을 A회사는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점은 전혀 A회사의 우위점이 전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출산 결정의 평가에 유관한 주체를 바로 그 결정으로 인해 태어날 주체로 놓고, 그 주체가 존재하게 된 가능세계A와 그 주체가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가능세계B를 비교하여봅시다. 가능세계B를 취하게 되었을 때, 태어나지 않은 이는 인간 삶에서 누리는 쾌락을 비롯한 선을 누리고자 하지도 않고, 누릴 가능성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태어나지 않은 이에게 박탈이 아닙니다. 박탈이 아니므로 가능세계B는 갖고 있지 않은 그 속성을 가능세계A는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가능세계A의 우위점이 아닙니다.

 

(4) 박탈이 아닌 것을 박탈이 되도록 변경시킨 다음, 박탈을 구제하는 행위의 평가

 

박탈이 아닌 것을 박탈이 되도록 변경시킨 다음에, 그 박탈을 구제할 수 있는 경우가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행위의 성질(박탈이 될 상황으로 변경한 다음 그리고 박탈을 구제한다는 성질)만 놓고 본다면, 그것은 평가가 유관한 주체에게 혜택을 준 것이 아니며, 더 나아가 박탈이 완벽하게 구제되지 않는 경우-현실에서는 이것이 바로 사실상 전부의 경우입니다-에는 해악을 가하는 것입니다.

 

행위의 성질만 잘 분리해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지 않을 경우 다른 사정을 감안하게 되기 때문에 해당 쟁점만 살펴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정치철학에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에게 아주 흥미로운 정치철학 입문서를 소개해준다면, 그 사람은 예전에는 없던, 정치철학을 더 알고자 하는 욕구를 가질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이제 이 사람의 삶은 조금 변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정치철학의 쟁점에 관하여 삼척동자도 누구나 직관으로 다 파악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사려깊게 검토하고 엄밀하게 논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더 많이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깁니다. 그래서 정치철학을 원하는 만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자각을 하게 되어이것은 공부의 과정에서 필연적인 일인데-, 답답함을 느끼고 좌절할 것입니다. 또한 유투브에서 별 대단한 의미는 없지만 낄낄거리를 수 있는 내용의 영상-이를테면 계피를 한 숟가락 먹고는 자기도 모르게 내뿜는 유투버의 바보같은 행위를 담은 영상-을 시청하는 행위도, 언제나 그만큼 정치철학을 추가로 알 기회를 상실한다는 기회비용이 증가합니다. 그러므로 정치철학에 그 사람을 입문시킨 사람은 이전에는 박탈이 아니던 것을 박탈로 바꾸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안은 박탈의 문제만 떼어내서 탐구하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인식하고 그 인식의 바탕 위에서 행위를 향도해야 하는 실천적 필요에 처한 주체에게, 진리를 추구하고 이해하고 공유하는 것은 그 자체로 선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애초에 더 큰 맥락에서 보면, 진리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은 채로 아예 진리 향유를 하지 못하는 것이 박탈이므로, 그보다 작은 맥락에서 생겨난 박탈 형식(forms of deprivation)은 실제로는 더 큰 맥락의 박탈을 구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쟁점이 되는 문제, 박탈이 아닌 것을 박탈이 되도록 변경한 다음, 그 박탈을 구제하는 행위의 도덕적 평가의 문제만을 발라낼 수 있는 사안을 선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박탈 형태의 새로운 창조가, 더 큰 맥락의 박탈을 구제하는 것에 해당되지 않는 사안을 생각해보아야만 합니다.

 

따라서 아름다움, 진리, 인간적 애착과 유대의 형성과 유지와 같이 인간의 삶에서 적절하게 내적 관계(internal relation)를 맺어야 하는 내재적 선(intrinsic goods)을 누리도록 인도하는 사안은 제외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음악에 대한 감식안을 갖추게 한다거나, 학문탐구의 논리를 알게 한다거나 하여, 더 아름다운 음악과 더 타당하고 건전한 논증을 추구하는 욕구를 발생시키는 행위는 검토에서 제외되어야 합니다. 또한 인간에게 주어진 신체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필요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행위, 이를테면 비타민D를 생성하려면 햇살을 쬐어야 한다는 점을 알려줌으로써 햇살을 쬐고자 하는 욕구를 만들어내는 행위는 검토에서 제외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소득이나 부와 같은 모든 목적에 소용이 되는 재화나 고차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직위들에 가고자 하는 욕구를 만들어내는 행위 또한 검토에서 제외되어야 합니다. 위와 같이 쟁점이 되는 문제를 분리하기 위해 제외되는 사안들의 공통점은, 그것이 인간이 일단 삶을 개시하고 나면 그것과 적절한 관계를 맺는 것을 그 사람의 선으로 볼 수밖에 없는 내재적 선이나, 그 내재적 선을 추구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적 선에 대한 욕구를 발생시키는 행위라는 점입니다. 그런 욕구를 전혀 갖지 않는 것은 더 큰 맥락에서는 오히려 박탈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진리 추구에 일고의 관심을 갖지 않도록 아이를 기르는 양육행위는, 그 아이의 삶을 망치는 행위, 즉 아이의 삶에서 선을 박탈시키는 행위입니다. 오히려 진리 추구에 정당한 관심을 갖도록 하여 진리에 대하여 갈구를 느끼도록 하는 기르는 것이 그 아이의 삶에 대하여 보살피는 자의 관점(point of view who cares about the child’s life)에서 지향할 행위입니다. 즉 더 큰 맥락에서 그 아이의 삶이 선을 누리도록 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쟁점으로 삼는 문제만을 분리해서 살펴보기에 적합한 사안은, 더 큰 맥락에서 인간 삶의 내재적 선과 적절한 관련을 맺을, 행위 시점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필요를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충족하는 행위가 아닌 사안입니다.

 

그런 한 예로 아직 춘심이의 존재도 춘향이의 존재도 모르는 몽룡이에게 친구 길동이가 있다고 해봅시다. 길동이는 몽룡이에게 몰래 약을 먹입니다. 이 약은 애인이 얼굴 뒤 근육을 자유자재로 조종하여 귀를 상하좌우를 흔들흔들거리는 모습을 보고자 하는 욕구를 발생시킵니다. 그 뒤 길동이는 몽룡이를 몰래 짝사랑해왔던 춘심이를 소개시켜줍니다. 이 약을 먹은 결과 몽룡이는 춘심이와 연애를 하게 됩니다.

이 사안에서 귀를 좌우상하로 움직이는 모습은, 길동이가 약을 먹이기 이전 시점에는, 몽룡이든 누구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리는 것이 적절한 선은 아닙니다. 귀를 흔드는 모습을 보고자 하는 욕구가 없는 상태에서 계속 그런 모습을 보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인간 삶의 전체 맥락에서 박탈이 아닙니다. , 길동이의 행위는 원래는 몽룡이에게 박탈이 아니었던 것을 박탈이 되게끔 변경시킨 후에, 그 박탈을 구제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쟁점으로 삼는 문제만을 분리해서 살펴보기에 적합한 사안입니다. 이제 이 사안에서 길동이의 행위를 도덕적으로 평가해보겠습니다.

첫째로, 몽룡이가 춘심이와 연인으로 사귐으로써 귀를 흔드는 모습을 보고자 하는 욕구를 완전히 만족하는 경우를 보겠습니다. 이 경우에도 길동이는 몽룡이에게 무슨 이득(benefit)을 준 것은 아닙니다. 즉 몽룡이는 길동이 때문에 그런 욕구를 갖고 나서 그 욕구를 충족하게 된 것으로 인해 더 나아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자체만 놓고 보아도 길동이는 몽룡이에게 아무것도 잘 해준 바가 없습니다. 즉 길동이의 행위는 도덕적인 측면에서 우위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둘째로, 몽룡이가 그 욕구를 완전히 충족하지 못하는 경우를 보겠습니다. 춘심이와 24시간 내내 붙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몽룡이는 춘심이가 곁에 없을 때에는 귀를 움직이는 모습을 보지 못하여 그 욕구를 완전히 만족할 수는 없어 상당한 불만족에 시달립니다. 즉 그때마다 좌절하고 답답해 합니다. 이 경우 길동이는 몽룡이에게 아무것도 잘 해준 바가 없는 것에 더해,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몽룡이가 겪을 필요가 없는 괴로움을 겪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길동이는 몽룡이에게 이 괴로움을 부과(impose on)한 것입니다. ‘부과라는 말이 적합한 것은 약을 먹일 때 몽룡이의 동의는 전혀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길동이가 이런 약을 몽룡이에게 먹이려고 하는 행위를 춘향이가 본다면 춘향이는 이를 잘못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반대할 것입니다. 즉 길동이의 행위는 몽룡이에게 해악을 가하는 것이라고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데이비드 베너타가 책 73-74면에서 든 예를 이런 틀에다 적용해보겠습니다. 이번에는 몽룡이가 결코 질병을 겪지 않는 몸을 갖고 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길동이는 이런 몽룡이에게 약을 먹입니다. 이 약은 몽룡이가 질병에 종종 걸리기 쉬운 보통의 몸으로 만드는 대신 그런 질병에서 아주 빠르게 회복하는 능력을 함께 줍니다. 길동이의 이 행위는 몽룡이에게 아무런 혜택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행위는 더 나아가 몽룡이에게 해악을 가한 것입니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박탈 정리가 도출됩니다.

 

박탈 정리(deprivation theorem):

더 큰 맥락에서 인간 삶의 내재적 선과 적절한 관련을 맺을, 행위 시점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필요를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충족하는 행위가 아닌 사안에서, (i) 동의를 받지 않고서 어떤 박탈 가능 상태를 새롭게 창출한 후 그 박탈을 완벽하게 구제하더라도 그것은 무슨 이득을 준 것은 아니며, (ii) 동의를 받지 않고 어떤 박탈 가능 상태를 새롭게 창출한 후 구제하지 못하고 부분적으로만 구제하는 것은 바로 그 박탈을 겪을 존재에게 해악을 가하는 것이다.

 

이 박탈 정리를 출산 행위에 적용하여보겠습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박탈을 겪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을 존재케 하는 행위 시점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필요 자체가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존재하게 만드는 행위는 바로 박탈 가능 상태를 새롭게 창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존재케 하는 것은 그렇게 존재케 되는 인간에게 무슨 아무런 이득을 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인간 삶은 다대한 고통과 괴로움, 좌절, 내적 선과의 부적절한 관련이나 단절로 가득 차 있으며 계속 살고자 하는 이해관심은 결국에는 필연적인 죽음으로 인해 좌절됩니다. 즉 그 박탈의 아주 큰 부분이 필연적으로 구제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존재케 하는 행위는, 아무런 이득을 준 것이 아님을 넘어서서 그렇게 일방적으로 존재케 되는 인간에 해악을 부과하는 것이라고 도덕적으로 평가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해악의 크기에 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위 길동과 몽룡 사례에서 길동이가 한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귀를 움직이는 모습을 제때 보지 못해 몽룡이를 답답하게 만든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반면에 사람을 존재케 하는 일은, 그 사람에게 질병, 노화, 짜증과 스트레스, 우울과 비통, 불편, 고통, 그리고 죽음을 필연적으로 예정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아주 높은 확률로 억압과 착취, 약탈과 전쟁, 때이른 비극적 죽음, 사고와 장애에 노출시키는 일입니다. 반면에 이렇게 필연적인 해악을 부과하는 일을 정당화할 만한, 행위시점에 존재하던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출산(procreation)이라는 행위시점에는 박탈 가능 상태에 있었던, 충족시켜줘야 하던 필요의 주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박탈 가능 상태의 창출은, 그 박탈의 크기에 비례한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길동이의 행위보다는 출산 행위가 훨씬 더 도덕적으로 시리어스한 행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현재 사회에서는 길동이의 행위를 더 시리어스한 것으로 보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에 지배적인 태도는, 해악의 크기와는 무관한 사항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즉 몽룡이가 그런 이상한 욕구를 갖게 하는 것에는 길동이든 누구든 어느 누구의 자기본위적 이해관심(egoistic interest)도 걸려 있지 않은 반면에(not at stake), 출산 결정을 좌우하는 이미 태어난 사람들의 자기본위적 이해관심-부모되기의 이해관심, 연금재정이 안정적으로 유지되기를 원하는 이해관심 등-은 대단히 강하기 때문에 결론이 흐려진 것에 불과하지, 타당한 논증의 결과는 아닙니다.

 

3. 호모 페인쿠스와 영원의 관점에 대한 이해

 

우선 지적할 것은, 데이비드 베너타의 제3장의 논증, 즉 인간 삶의 질이 (영원의 관점에서) 형편없는 축에 속한다는 논증은, ‘인간 삶에 담긴 선과 악을 합산하여 그 합계가 음(-)이다라는 논증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 기수적 합산 논증은 지성적으로 뒷받침하기 힘듭니다. 베너타가 그런 논증을 했다면 제3장에서 그런 합산의 방법론이 제시되는 부분이 나와야 되는데, 그런 부분은, 올바르게도, 나오지 않습니다.

베너타의 제3장의 논증은, 오로지 인간이 존재케 됨으로써 입는 해악의 규모(magnitude of harms)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을 베너타가 살펴보는 이유는, ‘인간이 존재케 되는 것이 해악이라 하여도 그 해악의 규모가 매우 작다면, 이미 존재하고 있던 인간에게 가는 이득(benefit)으로 인해 그것이 쉽게 능가될(outweighed)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가능한 이의를 처리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를 들어 다섯 사람을 목숨을 구하기 위해 어떤 사람의 손톱이 부서뜨려야 한다면, 손톱이 부서지는 일은 해악이기는 하지만 부과하는 것이 허용되는 해악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섯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어떤 사람을 다발성 장기부전에 빠뜨리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해악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해악의 크기가 너무나 다대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인간 삶의 질이, 삶의 질을 상대적으로가 아니라 절대적인 기준에서 판단할 때 유일하게 타당한, 영원의 관점에서 형편없다면, 그 해악의 규모가 큰 것이므로, 인간이 존재케 되는 해악은, 출산 결정을 하는 이미 존재하고 있던 인간에게 가는 이득에 의해 능가될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 삶의 질을 평가하는 기준점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인데, 이 기준점은 영원의 관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베너타의 제안입니다.

미덕으로서의 겸손에 관한 언급은 영원의 관점이 지성적으로 완전히 이해가능한 관점이라는 설명 도중에 나옵니다. 베너타는 겸손이 미덕이라고 강변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겸손을 미덕으로 이미 보고 있고, 미덕에 대한 그런 이해가 비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최고의 탁월성을 지닌 사람들조차 겸손을 보이는 것을 미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의 능력은, 영원의 관점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의 증거라는 논증입니다.

그러므로 겸손을 미덕으로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베너타의 논점은 손상되지 않습니다. 겸손을 미덕으로 보는 사람들의 능력은, 영원의 관점이 지성적으로 이해가능한 관점이며 사람들이 이를 일상적으로 자주 취하고 상상할 수 있다는 더 일반적인 논점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증거 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진술이 지성적으로 이해가능한(intelligible) 것인지 검토하여 봅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간의 세포의 텔로미어가 짧아지지 않고 산소의 독성도 축적되지 않으며 완전하게 배출된다면, 인간은 노화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인간 삶의 질은 더 나아질 것이다.”

인간의 뇌의 능력이 지금보다 2배 더 높다면, 인간은 지금 난국에 빠져 있는 많은 문제들을 더 잘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수의적으로, 즉 의식적 의지를 발휘하여 신진대사율을 조절할 수 있다면, 많이 먹어도 살이 불필요하게 많이 찌지 않을 것이며, 그로 인해 건강이나 미모에 관한 걱정이 없게 될 것이다.”

인간의 면역체계가 훨씬 더 효과적이라면, 자가면역질환을 겪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세균과 바이러스의 돌연변이에 훨씬 더 빠르게 대응해서 대규모 전염질환으로 인한 문제도 없을 것이다.”

인간이 느끼는 성적 쾌락의 강도가 지금보다 10배가 높다면, 인간의 삶의 질은 상당히 더 높을 것이다.”

 

다시 말해 베너타가 말하는 영원의 관점이라는 것은, 자의식과 이성을 갖춘 유정적 존재(sentient being)이면서도 가능한 한 단점은 줄이고 장점은 훨씬 크게 늘린 존재의 관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존재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은 연장성을 갖기 때문에, 단점은 한없이 줄일 수 있고 장점은 한없이 늘릴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이성이 있는 유정적 존재인 어떤 외계인의 구체적인 모습과 특성을 우리의 지금 상상력을 발휘하여 최대한 좋게 묘사한다고 하여도, 그 묘사된 모습에 장점을 조금 더 더하여 상상하는 것이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이를테면 건강한 상태의 수명이 300년인 존재를 누군가 상상했다면, 그에 더해 301년인 존재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고, 결국에는 불멸인 존재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종에 속한 구성원들의 지능이 지금 인간의 10배인 존재를 누군가 상상했다면, 그에 더해 11배인 존재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고, 이런 식으로 지능의 정도를 계속 늘려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적 쾌락을 강도를 100배로 이야기했다면 101배로 또 늘릴 수 있을 것이고, 성적 쾌락을 누리면서도 부작용은 겪지 않는 특성도 추가할 수 있을 것이고, 성적 쾌락을 누리는 시간도 훨씬 긴 존재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무한히 좋은 특성들은 확대하고 팽창되고, 나쁜 특성들은 무한히 축소되는 사고실험을 언제나 보탤 수 있는 관점으로 영원의 관점이라는 개념이 다소 오도하는 면이 있으면서도 적절한 것입니다.

 

이제, 인간 삶의 질을 평가할 때, 인간의 관점이 부적절하다는 점은 이미 단초가 드러났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사람들 스스로도 삶의 질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한 방편들을 찾으면서 영원의 관점을 그때그때 직면하는 대로 제한적으로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노화를 극복하고자 하는 연구를 시도하는 것 자체가 이해불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 노화를 겪지 않는 존재의 관점에서 노화를 겪는 존재의 삶의 질은 형편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100년 이후에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노화를 겪지 않으며, 따라서 젊은 시절의 생기와 아름다움을 사고로 죽을 때까지 보존하는 인류의 후손이 지금의 인류의 생활상을 평가할 때, 그 삶의 질이 형편없는 것이었다고 판단하지 않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때의 시각으로는 노화는 극복된 치명적인 질병이며, 이전 선조들은 모두 이 치명적인 질병에 하나같이 걸려서 이 질병에 대처하느라 고군분투하였다고 평가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질병을 삶의 필연적인 부분으로, 그래서 그것을 질병이 아니라고 합리화하면서, 오히려 아름답다고 찬양하면서 헛되게 자위하면서도 뒤로는 각종 대응책을 갈구한 존재로 평가할 것입니다.

 

노화를 겪지 않는 인간이 되기 위해 어떤 큰 유전적 변화를 일으켜야 했기에, 이 후손들은 노화를 겪는 인간과 같은 인간 종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즉 이러한 후세대가 타임머신을 타고 현세대로 와도 현인류와 성교를 하여 후손을 낳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물학적으로 같은 종에 속하는가는 그 관점이 삶의 질을 평가하는 관점이 될 수 있는가와 무관한 사항입니다. 이에 더해 현인류와의 유사성도 삶의 질을 평가하는 관점이 될 수 있는가와는 무관한 사항입니다. 왜냐하면 삶의 질을 평가하는 적절한 관점의 필수적인 유사성의 기초로 쾌락과 고통을 비롯한 선과 악을 누릴 수 있는 유정적 존재임이외의 것을 넣는 것은 부당한 자의성을 도입하여 인위적으로 관점을 좁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대변을 보지 않아도 되는 존재는 인간과 소화와 배출 기능에서 크게 다른 구조를 가진 존재일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질을 평가하는 관점이 되는 상상의 존재가 대변을 보아야 한다는 특성을 갖춰야만 할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이는 삶의 질을 평가하는 관점이 되는 상상의 존재가 노화를 겪어야 한다는 특성을 갖춰야만 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자의적인 한계를 두는 것은 예를 들어 정기적으로 대변을 봐야 하고 변의를 느끼며 불편을 겪는다는 삶의 질은 그냥 절대적으로 고정된 것이라고 단언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식으로 단언하는 것이 불합리함은 대변의 문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아주 건강한 인간은 황금변을 죽죽 아침마다 빠른 시간 내에 뽑아내고는 하루 중 특별한 불편을 느끼지 않는 존재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존재는 사실 현인류 중에서 예외에 가까울 것입니다. 오히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급똥을 유발하는 과민성대장증후군, 변비, 치질, 용종으로 인해 단순히 대변을 정기적으로 봄이상의 나쁨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평균적인 현대인들 개개인의 입장에서는, 아침마다 황금변을 간단히 처리하고 그 이외의 불편은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된 존재이지, 현재의 특성이 아닙니다. 완벽한 황금변을 건강하게 보는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시기는 젊은 시기로 제한되며, 나이들면 어차피 그러한 특성들을 잃게 됩니다. 따라서 전생애에 걸쳐 완벽한 똥누기를 경험하는 존재는 틀림없이 상상의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삶의 질을 평가하는 관점이 황금변이라도 꼭 봐야 하는 존재로 제한된다는 것은 자의적입니다. 아예 변을 보는 행위 없이 어떤 다른 방식으로 영양소를 흡수하고 신진대사하는 존재를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똥누기의 사례를 살펴보았듯이, 영원의 관점은, 이성적인 유정적 존재의 삶의 질이 계속해서 나아질 수 있는 무수히 많은 논리공간들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삶의 질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 평가는, 그 논리공간들 전체를 가능한 한 채우는 존재를 상정함으로써 정당하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 논리공간들 일부를 그냥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아주 작은 논리공간만을 허용하는 삶의 질 평가는 자의적으로 자신의 삶의 질을 과대평가하기 위한 논리조작에 불과합니다. 그런 식의 논리조작을 허용한다면, 인간의 관점(sub specie humanitatis)이 삶의 질의 평가기준이 될 이유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나 평균적 인간이라는 것은 실은 개념이며, 실제로는 구체적인 인간 개체만이 실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장점이 늘어나고 단점은 축소되는 논리공간을 이런저런 자의적인 이유를 들어 제한하는 논리조작을 허용하는 귀결은 모든 각각의 인간의 삶이 최고의 질을 지닌 삶이라는 터무니없는 명제입니다, 왜냐하면 각자의 삶의 질 평가는 평가를 내리는 인간 개체 자신이 현재 지니고 있는 특성에 의해서만 해야 한다고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평가를 내리는 한 명의 인간 개체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속성을 얼마간 지니고 있을 것이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속성을 얼마간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논리공간의 자의적 제한이 허용되므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속성이 연장성을 따라 더 확대될 수 있는 논리공간을 그냥 없애버릴 수 있습니다. 또한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속성이 연장성을 따라 더 축소될 수 있는 논리공간을 그냥 없애버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한 명의 인간 개체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면에서 최고의 속성을 갖춘 완벽한 존재로 선언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터무니없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자기매몰적이고 자기탐닉적인 망상이라고 평가받을 것입니다. 논리적 오류를 범하는 망상을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수십억명이 범한다고 해서 그것이 망상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현재 인류가 지니고 있는 나쁜 속성은 어쩔 수 없이 지녀야 하는 고정적인 것이며, 좋은 속성은 그 이상 가지는 것을 감히 상상해서는 안 되는 이미 한계에 부딪힌 것이라고 여기는 관점은 자의적이며 부당합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정리를 정식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의 질 평가의 기준으로 취하여야 하는 논리공간 제한의 자의성 원칙: 어떤 개체의 삶의 질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논리공간을 제한하는 것은, 모든 개체의 삶이 각자 최고의 질을 갖춘 삶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므로 다른 평균적인 구성원과 비교한과 같은 조건이 붙지 않은 삶의 질 그 자체에 대한 평가는 영원의 관점에서의 평가다.

 

 

이 정리가 옳다는 점, 즉 이 정리를 위반하여 인간의 관점을 취하는 것이 부당함을 하나의 가상의 사례를 통해 한 번 더 생각해봅시다. 어떤 괴짜 과학자가 새로운 장치를 발명했습니다. 과학자의 연구실에 설치된 이 장치는 안드로메다 은하의 어느 별 주위를 도는 생명체가 살기에 적합한 행성에 지적인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장치입니다. 워낙 멀리 떨어져 있기에 인류가 이 행성의 생명체와 조우할 일은 없다고 가정합시다. 박사가 장치에 버튼을 한 번 누를 때 마다 호모 페인쿠스라는 유정적 존재가 탄생합니다. 호모 페인쿠스는 다른 면에서는 인간과 빗스한 지적인 생명체이며 언어를 쓰고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능력을 가집니다. 다만 호모 페인쿠스는 한 가지 점에서 뚜렷하게 지구의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와 다른데, 이들은 다쳤을 때나 질병에 걸렸을 때의 육체적 고통이나 따돌림 당하거나 질투를 느낄 때의 정신적 고통을 포함하여 모든 고통을 인간의 10배로 느낍니다. 예를 들어 감기에 걸렸을 때의 고통이 인간이 감기에 걸려 겪는 고통의 10배입니다.

과학자는 자신이 장치를 만든 것이 너무나 기뻐서, 장치의 버튼을 마구 눌러서 호모 페인쿠스를 수만 명을 한 번에 창조합니다. 이 호모 페인쿠스들은 자신들이 왜 창조되었는지 모른 채, 출산 능력을 발휘하여 출산을 합니다. 그렇게 하여 박사는 처음 장치 버튼을 누른 뒤에는 개입하지 않았는데, 세대를 거듭하여 호모 페인쿠스가 재생산됩니다. 어느날 호모 페인쿠스 중 한 명이, ‘왜 이렇게 격렬한 고통을 때때로 겪다가 죽는데 우리의 삶의 질은 형편 없다. 왜 나를 낳았는가?’라고 묻자, 다른 호모 페인쿠스가 답합니다.

우리의 삶의 질이 형편 없다라는 너의 평가는 관점이 잘못되었다. 호모 페인쿠스의 삶의 질은 오로지 호모 페인쿠스의 현재 평균적 특성이 고정되어 있다는 전제에서만 평가할 수 있다. 즉 우리의 삶에서 우리 모두가 겪거나 많은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우리 호모 페인쿠스 모두의 삶의 불가피한 부분이므로 삶의 질을 낮게 평가할 요인으로 전혀 작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계산에 넣지 않는다. 오로지 평균적 호모 페인쿠스보다 특별히 더 운이 나쁜 호모 페인쿠스가 삶의 질이 나쁘다는 평가만이 가능하다.’

그러자 이의를 제기한 호모 페인쿠스가 응수합니다.

왜 평균적 호모 페인쿠스의 삶의 질이라는, 하나의 구체적인 개체를 넘어선 추상 개념에 기초한 기준은 허용되는 반면에, 호모 페인쿠스와 같은 쾌락을 누리면서 고통은 지금보다 10분의 1인 삶의 기준은 금지되는가? 나는 오히려 후자의 기준에서 보아, 우리 호모 페인쿠스의 삶은 형편없다고 하겠다.’

위 대화에서 당연히 이의를 제기한 호모 페인쿠스의 말이 옳습니다. 왜냐하면 삶의 질이 나쁘지 않다고 강변하려는 호모 페인쿠스의 말을 따르자면, 또 다른 은하의 행성에 호모 페인페인페인쿠스가 탄생하여 그 종 전체가 삶에서 겪는 고통이 인간의 30배인 존재가 되더라도, 그들의 삶의 질은 전혀 형편없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도출되기 때문입니다.

사고실험을 좀 더 진행해보겠습니다. 그러다가 호모 페인쿠스의 환경에 변화가 생겨서 호모 페인쿠스들이 모두 불임이 되는 사태가 생겨나고 호모 페인쿠스는 멸종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구에서는 이 괴짜 과학자 사후 연구실을 정리하다가 다른 과학자들이 호모 페인쿠스의 탄생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후대 과학자들은 호모 페인쿠스를 웜홀의 관측통로를 통해 몰래 관찰하고 있었고, 그들의 멸종을 지켜보았습니다. 후대 과학자들은 괴짜 천재 과학자의 장치를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 개선하면 호모 페인쿠스-2를 버튼으로 창조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다른 점에서는 원래의 호모 페인쿠스와 똑같고, 단지 변화된 환경 하에서도 가임능력이 있는 존재라는 특성만 추가됩니다. 그리고 웜홀의 관측통로는 하루 뒤에 닫히게 됩니다. 그래서 이 후대 과학자들은 호모 페인쿠스-2를 새로이 창조하여도 관측의 이익은 얻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 후대 과학자들이 버튼을 마구 눌러 호모 페인쿠스-2를 수만 명 새로이 창조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괴짜 과학자의 장치를 관리해오던 후대 과학자들이, 호모 페인쿠스-2를 수만 명 새로이 창조하는 것은 그렇게 태어날 호모 페인쿠스-2들에게 심각한 해악을 가하는 것이라고, 즉 비도덕적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삶에서 보통 겪는 고통의 10배를 어떤 존재에게 불필요하게 가해버린 것입니다.

이에 대해, 과학자 그룹 중 하나가, 다음과 같이 항변한다고 하여봅시다.

호모 페인쿠스-2의 삶의 질을 우리 처지가 더 나은 인간이 평가해서는 안 된다. 호모 페인쿠스는 우리 인간의 삶을 상상을 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실제로 있는지는 전혀 모른다. 그렇다면 호모 페인쿠스-2의 삶의 질은 호모 페인쿠스-2의 관점, 즉 호모 페인쿠스의 그렇게 고통으로 점철된 삶의 특성은 고정된 것으로 전제하는 관점으로만 평가할 수 있다. 그 관점만이 유관하다. 그런 관점에서 호모 페인쿠스-2의 삶은 전혀 형편없지 않다. 오히려 있을 수 있는 최선의 삶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 태어날 호모 페인쿠스-2에게 이득을 주는 것이다.’

그런 항변은 궤변이며, 호모 페인쿠스-2의 삶의 질은 영원의 관점에서 형편없습니다. 또한 웜홀이 다음날 닫히지 않고 계속 관측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인간이 얻는 관측의 이득은 호모 페인쿠스-2에게 해악을 가하는 것을 허용가능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논리에 의해 인간의 삶의 질 역시 영원의 관점에서 형편 없으며, 그로 인해 새로 태어나는 인간에게 가해지는 해악은 이미 존재하는 인간들이 그로 인해 얻게 되는 이득으로 능가되지 않습니다. 호모 페인쿠스-2의 삶도, 인간의 삶도 지속할 가치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개시할 가치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존재케 하는 결정을 내릴 때, 박탈 상태에 있으면서 충족되지 아니한 필요는 없었고, 존재케 하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완전하게 구제될 수 없는 심각한 박탈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4. 요약

 

(i) 데이비드 베너타의 2*2 행렬에 좋음’, ‘나쁨’, ‘나쁘지 않음과 같은 가치 평가 개념을 할당하는 것은 의미론적 작업이 아니라 가치론적 작업이다. 특히 나쁘지 않음좋지도 나쁘지도 않음을 의미하며, 이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유도 피해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고통의 부존재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유도, 피해야 할 이유도 없는 것이 아니라 추구할 이유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의 부존재를 나쁘지 않음이라고 할당하는 것은 가치론적으로 논박에 견뎌내지 못한다.

(ii) 데이비드 베너타의 논증은, 여러 개의 요소를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는 선택지 둘을 비교하는 서수적 비교 판단의 작업으로 볼 때, 그 강력함이 두드러진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다음 원칙이다.

서수적 비교에서 분해와 종합의 원칙:

복합 선택지에 대한 서수적 비교에서는, 그 선택지들의 복합구조를 단순한 요소로 분해한 뒤에, 각 요소별 우위와 열위를 살펴보아서, 모든 요소별로 한쪽이 우위에 있다면, 이 요소들을 합산하여 다시 종합하더라도, 어느 한쪽의 합산된 기수적 가치가 0보다 크다는 이유로 판단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

 

이 원칙을 적용할 때, 하나의 선택지는 보유하고 있는데 반해 다른 선택지는 갖고 있지 않은 추가적 속성 모두가, 요소별 서수적 우위 판단에 유관한 것은 아니다. 애인의 귀가 자유자재로 상하좌우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도 않고 보고 싶어할 가능성도 없는 사람에게 그러한 속성은 애인으로서의 요소별 우위조차 확립하지 못한다. 이것을 일반화한 정리가 다음과 같다.

 

복합 선택지의 한 요소가 서수적 비교에서 우위점이 되는 경우에 관한 정리:

(i) 만일 하나의 선택지를 취했을 때, 취하지 않은 다른 선택지가 보유한 그 추가적 속성이 없다는 점이, 선택의 우위 평가가 유관한 주체에게 박탈이 될 경우에는 우위점이 된다.

(ii) 만일 하나의 선택지를 취했을 때, 취하지 않은 다른 선택지가 보유한 그 추가적 속성이 없다는 점이, 선택의 우위 평가가 유관한 주체에게 박탈이 되지 않을 경우에는 우위점이 아니다.

(iii) 여기서 박탈이 된다 함은 그 요소를 이미 존재하는 주체가 긍정적으로 향유하고자 하거나 유의미하게 유관한 시간 내에 그렇게 향유하고자 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 그 요소를 누리지 못하게 됨을 의미한다.

 

위 정리가 참이므로, 이에 따라 존재한 적이 없는 것은, 존재하게 되는 것에 비해 열위점은 없고 우위점만 있어, 우위에 있다. 우위에 있는 가능세계를 택하지 아니하고 열위에 있는 가능세계를 택함으로써 박탈 가능 상태를 부과하는 것은 다음 박탈 정리에 의해 해악이다.

 

박탈 정리(deprivation theorem):

더 큰 맥락에서 인간 삶의 내재적 선과 적절한 관련을 맺을, 행위 시점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필요를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충족하는 행위가 아닌 사안에서, (i) 동의를 받지 않고서 어떤 박탈 가능 상태를 새롭게 창출한 후 그 박탈을 완벽하게 구제하더라도 그것은 무슨 이득을 준 것은 아니며, (ii) 동의를 받지 않고 어떤 박탈 가능 상태를 새롭게 창출한 후 구제하지 못하고 부분적으로만 구제하는 것은 바로 그 박탈을 겪을 존재에게 해악을 가하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해악을 가하는 행위에 의해 창조된 존재가 겪는 해악은, 그 삶의 질이 어떤가에 따라 그 규모가 달라지는데, 인간의 삶의 질은 호모 페인쿠스의 삶의 질과 마찬가지로, 논리적으로 가능한 전체 공간에서 평가되어야만 한다.

 

삶의 질 평가의 기준으로 취하여야 하는 논리공간 제한의 자의성 원칙: 어떤 개체의 삶의 질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논리공간을 제한하는 것은, 모든 개체의 삶이 각자 최고의 질을 갖춘 삶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므로 다른 평균적인 구성원과 비교한과 같은 조건이 붙지 않은 삶의 질 그 자체에 대한 평가는 영원의 관점에서의 평가다.

 

그러므로 삶의 나쁜 부분이 축소될 수 있고 삶의 좋은 부분이 확대될 수 있는 무한한 논리공간의 가능한 관점에서 비추어, 인간 삶의 질은 형편없으며, 인간의 삶은 아주 제한된 좋음만을 담고 있는데 반해 다대한 나쁨을 담고 있다. 따라서 호모 페인쿠스-2를 창조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잘못인 것과 마찬가지로 호모 사피엔스를 창조하는 것도 도덕적으로 잘못이며, 그로 인해 이미 존재하던 호모 사피엔스의 삶에 주어지는 이득으로도 능가되지 않는 다대한 해악을 미치는 행위이다.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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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jh
    2019.05.21 21:37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 정말 감사합니다. 와... 읽으면서 내내 감탄만 나옵니다... 이런 양질의 긴 글을 읽을 수 있어 영광입니다.

    글의 주제와는 약간 다른 내용입니다만, 경제학을 배울 때 서수적 비교를 배웠던 기억이 있는데, 그때는 서수적 비교를 그저 x축을 순서대로 세는 방법 정도로 이해했었습니다. 쓰신 글을 보니 왜 경제학에서 효용을 설명할 때, 왜 서수적 비교를 사용하는지도 짐작이 갑니다. 특히, '분해해서 우위와 열위를 비교할 때, 꼭 물리적 속성이 같을 필요는 없다'는 명제를 예를 들어 설명해주신 덕분에 한층 깊게 서수적 비교를 이해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 이외에도 서수적 비교의 특성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여러 정식화들을 예를 들어 친절하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가능세계와 영원의 관점에 대한 설명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덕분에 제가 책을 겉핥기로 읽고 저자의 논증을 왜곡해서 이해했다는 점을 느꼈습니다. 책 사이의 행간을 메울 수 있는 설명 감사합니다. 가능세계들을 서로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가능세계를 판단하고 그것을 서로 비교한 것 처럼 범주 착오를 한 점, 그리고 인간의 관점이 임의적인 논리공간 선택 문제를 수반한다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은 점, 모두 차후에 더 깊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정말 감사합니다 :)
  2. 873
    2019.05.23 19:56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1. 인간 삶의 질을 평가할 때, 영원의 관점으로는 평가하고 자의식과 이성을 갖춘 유정적 존재(sentient being)이면서도 가능한 한 장점은 줄이고 단점은 훨씬 크게 늘린 존재의 관점으로는 평가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2. "더 큰 해악을 막기 위하여 그 사람에게 더 작은 해악을 가하는 것은 허용되며 아마도 의무적"이라면 임신한 여성한테 작은 해악을 가해 유산하게 만드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우위점에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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