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베너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에 관하여 한 회원분이 던지신 질문에 단 답글에 관하여, 다른 회원분이 추가 질문을 제기하신 것에 대한 답글입니다. 

 

회원질문

 

1. 인간 삶의 질을 평가할 때, 영원의 관점으로는 평가하고 자의식과 이성을 갖춘 유정적 존재(sentient being)이면서도 가능한 한 장점은 줄이고 단점은 훨씬 크게 늘린 존재의 관점으로는 평가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2. "더 큰 해악을 막기 위하여 그 사람에게 더 작은 해악을 가하는 것은 허용되며 아마도 의무적"이라면 임신한 여성한테 작은 해악을 가해 유산하게 만드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우위점에 있는지요?

 

답변:

1. 영원의 관점으로(영원의 상 아래에서) 삶의 질을 평가해야 하는 반면, 극악의 관점으로(극악의 상 아래에서) 삶의 질을 평가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해당 삶의 질 평가 논의는 비대칭성 논증이 성립되고 난 이후에,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킬 것인지 말 것인지라는 실천적 선택과 관련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천적 선택은 선택에 유관한 가치론적 이유에 근거해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니다.

 

그런 실천적 선택의 맥락을 전혀 도외시하자면, 의미론적으로(semantically) 인간 삶의 질을 가능한 장점은 줄이고 단점은 훨씬 크게 늘린 존재의 관점으로 평가하는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은 통사론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관점에 상대적으로 인간 삶을 평가하는 것은, 하나의 사고연습으로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언급하신 그런 존재의 관점에서 보건대 상대적으로, 그 어떤 구체적 인간 삶의 질이라도 정말로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좋을 것입니다. 사실 그런 악화되는 쪽의 논리공간의 일부만 채우는 존재가 보기에도, 인간 삶은 정말로 지극히 좋은 것이 될 것입니다. 이를테면 영원히 불멸하면서 우리가 제일 심한 화상을 입었을 때 느끼는 고통의 1000조배를 느끼는 존재가 보기에 태어난 지 두 달이 지난 뒤에 심한 화상을 입어 그 가상의 존재가 영원히 겪는 1000조배분의 1의 고통을 약 1달 가량 겪다가 사망하는 삶은 정말로 말할 수 없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처한 실천적 선택의 맥락과는 동떨어진 것임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가상의 존재와 비교한다는 상대적인 의미에서, 그 아기의 삶이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좋다는 사실은, 태어난지 2달만에 심한 화상을 입어 그 이후 극심한 1달을 겪다가 사망할 아기를 이 세계에 초청하는 것을 찬성하는 이유로 전혀 작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작용하지 않는 이유는 데이비드 베너타가 제2장에서 논증으로 확립한 비대칭성이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개체가 태어난다면 순전한 쾌락만을 누릴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개체가 존재하게 만드는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박탈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것은 열위점이 아닙니다. 즉 우리 앞에 그런 개체를 만들 버튼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개체를 만들어낼, 그 개체를 위한 아무런 가치론적 이유를 갖지 않습니다. 의무의 언어로 말하자면, 우리는 그 개체를 태어나게 할 아무런 의무를 지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호모 헤도니쿠스라고 칭해지는, 적어도 쾌락 면에서는 가장 완전함에 가까운 이성 있는 유정적 존재를, 지구로부터 100조 광년 떨어진 적합한 행성에 만들어낼 수 있는 기계를 괴짜 과학자가 제작했다고 합시다. 그래서 그 종의 삶은 오로지 순백의 쾌락으로만 가득 차 있고 불멸로 인해 죽음이라는 악조차 겪지 않는다 하더라도, 호모 헤도니쿠스를 탄생시킬 이유는, 그 탄생될 호모 헤도니쿠스를 위해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그 종의 삶이 오로지 극악한 고통으로만 가득 차 있는 삶을 불멸로 인해 고통의 중지라는 구제조차 가망이 없이 살아내야 하는 호모 에빌리쿠스를 100조 광년 떨어진 적합한 행성에서 태어나게 할 수 있는 기계를 괴짜 과학자가 제작했다고 합시다. 이 호모 에빌리쿠스를 탄생시키는 것은 적극적으로 피해야 할, 바로 그렇게 태어날 호모 에빌리쿠스를 위한, 이유가 있습니다. 심지어 그 호모 에빌리쿠스를 탄생시키지 아니할 의무가 있다고 말하는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극악 <---------논리공간의 스펙트럼-----------> 극선

순흑의 악을 겪는 불멸의 삶

겪는 악과 누리는 선이 모두 있는 삶

순백의 선을 누리는 불멸의 삶

태어나게 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박탈을 겪게 만듬

태어나지 않는다면 박탈을 겪지 않음.

태어난다면, 그러지 않았더라면 누릴 아무런 필요가 없었던 선을 누리기는 하지만, 그러지 않았더라면 겪을 필요가 없는 박탈을 겪게 됨.

태어나지 않게 하더라도 그 누구도 박탈을 겪지 않음.

출생시키는 행위를 반대하는 거의 무한대의 강도를 가지는 가치론적 이유

선을 누리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렇게 만들어줄, 즉 출생하게 하는 행위에 아무런 찬성하는 이유도 반대하는 이유도 없는 반면에, 악으로 괴로워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렇게 박탈 상태에 처하지 않게 할, 즉 출생에 반대하는 가치론적 이유가 스펙트럼의 위치에 따라 강도를 달리 하여 있음

출생하게 하는 행위를 찬성하는 이유도 없고 반대하는 이유도 없음

출생하게 하는 경우 도저히 말할 수도 없이 큰 해악을 가하게 되는 것임

출생하게 하는 경우 나오는 삶이 스펙트럼에서 점하는 위치에 따라 그 규모를 달리 하는 해악을 가하게 됨

출생하게 하더라도 해악도 혜택도 주는 것이 아님

[1] 스펙트럼의 양극단과 그 사이에 있는 사안이 갖는 지위

 

자의식과 이성을 갖춘 유정적 존재가 취할 수 있는 모습 중에서 악화되는 방향의 논리공간을 채워나갈수록 거의 절대적인 출생 금지의 가치론적 이유에 가까이 다가갑니다. 반면에 자의식과 이성을 갖춘 유정적 존재가 취할 수 있는 모습 중에서 개선되는 방향의 논리공간을 아무리 많이 채워나가도, 출생을 찬성할 가치론적 이유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 방향의 논리공간을 채워서 도달할 수 있는 최대한은, 그렇게 해도 되고 안 해도 상관 없다입니다.

 

왼쪽 끝에는 출생의 금지를 뒷받침하는 가치론적 이유가 오른쪽 끝에는 출생시키는 행위를 해도 되고 안 해도 상관 없다라는 가치론적 이유가 배치됩니다. 그렇다면 그 사이의 어떤 지점을 취하더라도, 출생에 반대하는 가치론적 이유가 자리잡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 가치론적 이유가 얼마나 강한가를 어떤 방식으로 가늠할 것인가입니다.

 

이것을 위 [표1]을 통해 알아낼 수 있습니다.

위 표는 순악과 순선으로 구성된 삶이라는 스펙트럼의 양극단과 그 사이에 있는 삶을 개시하게 하는 사안을, 박탈의 면, 가치론적 이유의 면, 도덕적 의무의 면, 해악과 혜택의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위 표는 비대칭성 논증을 받아들이는 경우 그로부터 나오는 자연스러운 귀결입니다.

 

인간의 삶은 위 논리공간 스펙트럼의 양극단의 사이에 있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은 양극단에서 상대적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오른쪽 극단의 관점에서 보기에 인간의 삶의 질은 형편없습니다. 왼쪽 극단의 관점에서 보기에 인간 삶의 질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상대적인 평가를 내리는 문장을 각각 만들어내는 작업은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아닙니다. 비대칭성 논증에 의해 출산이 해악 입히기라는 전제가 확립되고 나면, 그 다음 질문은 그 해악은 얼마나 큰가?’입니다. 이 해악의 규모를 평가하는 맥락에서 인간 삶의 질을 평가하게 됩니다.

 

가해야 할 필연성이 없는 해악 발생을 알면서도 그 해악을 야기하는 행위에 대한 가치론적 평가를 할 때 기준점은, 해악을 가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행위가 됩니다. 즉 해악을 입히는 행위의 평가의 기준점은, 혜택을 준 것도 해악을 준 것도 아닌 행위가 기준점이 됩니다. 반면에 문제의 해악보다 훨씬 더 크고 극악한 해악을 가하는 행위를 기준점으로 삼지 않습니다. 다음 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A: 당신은 그냥 길을 걸어가는 행인 C의 왼쪽 다리를 부러뜨렸다. 그로 인해 C는 고통을 겪게 되었고, 수술을 받게 되었고 수개월 동안 제대로 걷지 못하며, 다 나은 뒤에도 신체활동능력이 떨어지게 되었다. 당신의 행위는 잘못된 것이다.

B: 왜 내 행위가 잘못되었는가? 나의 행위로 인해 초래된 상태인 C의 왼쪽 다리가 부러진 상태는 아무 기준에서나 상대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나는 오히려 내가 야기한 C의 상태를 평가하기 위해 C가 처할 수 있는 아주 나쁜 상태를 기준으로 삼겠다. 즉 행인 C의 왼쪽 다리만 부러뜨린 것이 아니라, 오른쪽 다리도, 오른쪽 팔도, 목도, 척추도, 골반뼈도 부러뜨리고 다발성 장기부전까지 일으키고 눈과 귀를 멀게 한 뒤 통각을 극대화시키는 화학물질을 주입하고는, 인공호흡장치와 영양주입장치를 통해 앞으로 30년간 처절한 고통을 겪게 하는 상태를 기준으로 삼겠다. 그런 상태에 비하면 지금 C의 상태는 천국이다. 시원한 병실에 입원해서 삼시세끼 나오는 병원밥에 파라다이스가 따로 없다. 매일 감사기도를 올려야 할 정도다. 그렇다면 나는 C로 하여금 파라다이스를 누리게 해준 것이고, 따라서 나의 행위는 잘못된 것이 전혀 없다. 또는 설사 잘못인 점이 있다 하더라도, 거의 무한소에 가까운 아주아주 미약한 해악만을 가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C가 현재 처한 사태는 내가 방금 묘사한 극악한 사태와의 거리가 아주아주 멀기 때문이다.

A: 행위자가 개입하여 해악을 야기한 경우에 해악의 규모를 평가하는 기준점은 행위자가 해악을 가하지도 혜택도 주지도 않은 상태이다. 즉 당신이 C에게 어떤 물리적 간섭도 하지 않고 그저 가던 길을 가게 내버려두었다면 C가 처했을 상태이다. C가 자유롭게 두 다리를 움직일 수 있고 게다가 수술을 받고 병원에 입원하느라 생활계획이 다 어그러지지도 않고 소득이 감소하지도 않으며 고통을 겪지도 않은 상태이다. 이 해악을 가하지도 혜택도 주지 않은 상태에서 나쁜 방향으로 멀어진 정도만큼 당신의 잘못은 크다. 다리를 부러뜨린 사람이 가한 해악은 다리를 부러뜨리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기준점에서 나쁜 방향으로 멀어진 거리로 측정되는 것이지, 상상할 수 있는 더욱 더 나쁜 행위를 한 사안에서 볼 때 덜 나쁜 방향으로 멀어진 거리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인간의 단점은 가능한 모두 줄이고 장점은 가능한 모두 늘인 존재의 삶을 존재하게 할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스펙트럼의 오른쪽 극단의 사안이, 기준점이 되는 해악도 가하지 않고 혜택도 주지 않은 사안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안과의 거리가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 반대로 생각하는 것은 위 대화에서 B와 같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대칭성 논증이 확립되고 나면, 해악의 규모를 평가할 때 영원의 관점에서의 평가만이 유관하지, 극악의 관점에서의 평가는 유관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따라나옵니다.

 

2. 허용되지 않습니다.

 

존재케 하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가하는 해악은, 그 행위가 이루어지는 조건과 양상이 여러 면에서 다르므로, 이미 존재하는 사람에게 가하는 해악과 동평면에서 그대로 비교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건과 양상이 다를 경우, 한 측면에서 포착했을 때는 마치 같은 사태(same state of affairs)처럼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그 도덕적 의의가 현저하게 다르게 되는 것은 보편적인 도덕적 현상입니다. 이는 사태의 도덕적 의의(moral significance)가 그 사태를 야기한 방식, 그 사태가 존재하는 조건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잘 나가던 사업가의 사업을 망하게 하였다라는 어떤 측면에서 포착했을 때는 동일 사태[=사업이 망함]로 보이는 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경쟁 사업가가 흑색선전을 하고 스파이를 시켜 정보를 빼돌리고, 횡령을 교사한 행위로 인해 그 사업가가 망한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한편, 경쟁 사업가가 너무 사업을 잘 해서 손님을 더 끌 수 없어 그 사업가가 망한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는 잘못이지만, 다른 하나는 잘못이 아닙니다.

존재를 개시하게 하는 출산 행위는 죽을 운명을 부과하는 것이지만, 태어나게 함으로써 죽음을 그 삶의 끝에 예정시키는 행위는, 누군가를 죽이는 행위와는 도덕적으로 평면이 다릅니다. 죽음이라는 같은 사태를 야기한 동일한 도덕적 질을 가진 행위가 아닙니다.

데이비드 베너타는 출산 결정을 도덕적 잘못으로 만드는 속성인 해악을, 일단 태어났을 때 삶이 직면하는 나쁜 사태 그 자체와 동치시키고 있지 않습니다. 해악의 핵심은 그 태어난 존재를, 그 존재의 입장에서 열위에 있는 가능세계에 존재케 하였다는 점에 있습니다. 삶이 직면하는 여러 무수한 악(evil)들은 어느 정도나 열위였는가 열위점이 대안에 대하여 가지는 격차를 파악하도록 하는 요인, 그리하여 해악의 규모를 파악하게 하는 판단 요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삶이 직면하는 죽음과 같은 악을 예정시킴으로써 그러한 죽음에 처할 운명을 부모가 자식에게 부과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지만, 부모가 자식을 죽인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욕구의 좌절과 같은 악을 예정시킴으로써 욕구의 좌절을 맛볼 운명을 부과하였다거 말하는 것은 타당하지만, 부모가 자식의 욕구를 좌절시켰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존재케 함으로써 X를 겪을 운명에 처하게 하였다‘X를 가하였다와 동치가 아닙니다.

이런 비동치성, 사태의 도덕적 의의를 결정케 하는 평면의 상이성 때문에, 존재하게 되는 일의 해악은, 이미 태어난 존재에게 가하는 권리침해형 해악과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해악 맞교환(harm trade-offs)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말씀하신 예는 임산부의 신체 완전성을 침해하는 해악을 가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삶의 기획에 관하여 인격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결정에 물리적으로 간섭하는 행위를 포함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신체의 자유권과 종교의 자유권, 양심의 자유권을 침해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유형의 침해는 적어도 의무론을 택하는 한, 해악 맞교환의 한계를 넘는 행위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Judith Jarvis Thomson의 <Realm of Rights> https://www.civiledu.org/1456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데이비드 베너타가 살펴보고 있는 비교는 이와는 다른 종류의 것입니다. , 스스로 아이를 낳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행위자의 입장에서, 존재하게 되는 것의 해악을, 새 존재를 탄생시킴으로써 이미 존재하는 사람들이 얻는 추가로 얻는 이득을 얻지 못하는 것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즉 여기에서 실제로 맞교환이 고려되고 있는 것에는, 이미 존재하는 사람들에게 의도적으로 가해지는 권리침해형 해악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새롭게 존재하게 함으로써 얻는 이득을 추가로 얻을 권리는 없습니다. 만일 그런 권리 같은 것이 있다면 출산 가능한 커플에 대하여 구성원들은 집단으로, 언제나 추가적 출산을 명하는 일응의 권한을 가져 권리를 집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정당성이 있을텐데, 그런 권한은 정당성이 없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출산을 결정하는 이의 입장에서 누군가에게 출산을 하지 않는 것은 권리침해형 해악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러지 않았더라면 얻을 수도 있는 이익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적어도 이미 존재하는 사람들에게 해악을 가하는 문제와 비교하는 것과는 달리, 비교가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데이비드 베너타는 전제한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자식의 출산을 결정하는 이의 입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출산에 개입하고자 하는 입장은 사정이 다릅니다. 이 입장에서의 출산 결정 개입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가하는 권리침해형 해악을 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해악은 출산으로 인한 해악과 동평면에서 비교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맞교환을 정당화하는 데 철학적 난점이 매우 높습니다. 특히 현실에서 제3자의 출산에의 개입은 신체 완전성과 자유, 사생활의 자유와 비밀, 종교와 양심의 자유 등 핵심적인 인격적 권리의 침해를 수반합니다.

특히 출산이 도덕적 잘못이라고 할지라도 출산 자유권은 법적인 권리가 될 수 있고 실제로 법적 권리라는 점에서 이러한 침해의 심각성은 두드러집니다. 구체적으로 포착하여 특정한 행위로 보았을 때는 도덕적 잘못이더라도 그 행위가 속하는 일반적 범주에 속하는 것들을 법적으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 경우는 상당히 많습니다. 예를 들어 엄격한 야경국가를 주장하는 자유지상주의 정당을 강력하게 지지하며 법에 의해 집행되는 그 이외의 복지를 위한 과세와 프로그램의 실행을 반대하는 특정한 행위는 모든 것을 다 고려해서 보았을 때 (특히 그것이 효과적일 때는) 도덕적 잘못일 수 있지만, 이러한 특정한 표현 행위와 정치적 행위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법적 질서를 보유할 도덕적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도덕적 근거들에 의해 뒷받침되는 법적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는 큰 도덕적 잘못입니다. 예를 들어 자유지상주의 정당을 금지하는 것, 또는 자유지상주의 정당이 효과적이 될 정도로 설득력을 얻을 때는 금지하는 것은 법적인 정치적 자유권의 침해로서 허용되지 않습니다. 로버트 노직의 책을 판매했다고 투옥하는 것 또한 표현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 침해로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불허는 단지 법적인 불허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도덕적인 불허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출산 자유권 및 그 외에 관련되는 많은 기본권들은 그 질서를 가질 도덕적 이유로 뒷받침되는 법적 질서에서 보장하는 법적 권리이고, 이러한 법적 권리들을 존중해야 할 도덕적 이유가 있기 때문에, 동일 평면에 있지 않은 출산으로 인한 해악을 방지하기 위하여 이미 존재하는 사람들의 이러한 권리들을 침해하는 해악을 가하는 맞교환은 인정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만일 존재하게 되고 나서 겪는 사태를 이미 존재하는 사람에게 가한 사태와 도덕적으로 동평면에 있는 같은 크기의 해악으로 다룬다면, 즉 그 사태가 야기된 조건과 양상 및 여건을 무시하고 그 사태들의 도덕적 의의를 평가한다면, 다섯 명의 출산을 계획하고 있는 부부인 두 명을 죽이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다는 터무니없는 결론이 나올 것입니다. 상상하신 사안은, 이런 동평면 비교가 타당하다는 전제에서 서 있으므로 잘못된 해악 맞교환에 이르게 됩니다.  

데이비드 베너타의 주된 논의는 이것보다 훨씬 온건한 비교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 비교를 염두에 두는 질문은 출산으로 인해 추가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의 상실이 과연 출산으로 인한 다대한 해악을 능가할 정도로 출생으로 인한 해악은 그 규모가 아주 미미한가이며, 그렇게 출산 이익의 상실이 출생의 해악을 능가할 정도로 출생의 해악이 미미하지 않다는 것이 데이비드 베너타의 답입니다.

 

 

 

 

 

 

 

 

Posted by 시민교육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873
    2019.05.26 13:20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상세하게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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