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감사하는 습관의 수수께끼 같은 성격

 

많은 심리학 연구들이 감사하는 습관이 인간의 주관적 행복감에 긍정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심리학 연구는 감사에 대한 철학적 해명 없이, 단지 감사를 조작적으로 정의할 뿐이다. 즉 그것은 어떤 사태가 일어난 것은 그보다 열악한 다른 사태가 일어난 것에 비해 좋은 일이라는 당사자의 인식과 음미로 정의된다. 그래서 이 연구들이 제시하는 감사의 목록에는 원칙적으로 한계가 없다. 어제 자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지 않고 깨어나서 오늘을 살게 된 것도 감사하고, 오늘 통근하면서 교통사고가 나지 않은 것도 감사하다. 외식을 했는데 늘 먹는 맛있는 음식이 나와서 감사하다. 헬스장에 가서 가뿐하게 운동을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등등.

따라서 이런 연구들에서 말하는 감사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들은 통상적 기대를 기준으로 하여 그 기준을 넘는 일에만 감사를 느끼지 않는다. 만일 통상적 기대를 기준으로 삼아 그것을 초과하는 일에만 감사를 느낀다면 위에서 언급한 일들은 전혀 감사할 일이 아니다. 평균적으로 사람이 자가다 심장마비로 죽을 확률은 매우 낮다. 따라서 오늘 밤 잠이 들면 내일 아침에 일어나리라는 것은 당연한 기대이며, 당연한 일이 일어난 것은 기준을 넘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교통사고라는 것은 누군가 고의나 과실로 법규를 어겨서 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교통법규는 구성원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하는 것이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단지 통상적 기대에 부합한 것뿐이다. 이는 이웃 사람이 강도짓을 하지 않아야 하는데 오늘도 이웃이 강도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규범적으로 기대되는 바를 넘어서 좋은 행위를 한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외식을 하러 가서 돈을 냈다면 기대하던 그 질과 양으로 음식을 제공받고 기본적인 서비스를 받는 것이 통상적이다. 서로 이득이 되는 시장 교환을 할 때 속이지 않고 동의 없이 재화와 용역의 질이나 양을 낮추지 않는 것은 당연한 규범적 기대다. 그런 기대대로 일이 일어난 것뿐이다. 헬스장에는 돈을 내고 회원으로 가입한 것이고 거기 가서 수고스럽게 운동을 하고 나면 가뿐한 기분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이 모든 일들이 기대한 대로 일어나지 않으면 화가 나고 분개하고 모욕감이나 굴욕감을 느낄 수도 있고 짜증이 날 수도 있지만 감사할 일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감사 습관에 대한 연구들에서 다루는 감사하는 습관은 특별한 습관이다. 누구나 다 그런 습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사람들만 그런 습관을 가지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습관이 없다. 보통 사람들은 단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감사의 뜻에서 감사할 때가 되어서 감사하는 확고한 경향성이 있을 뿐이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감사할 때란, 통상적 기대를 넘어서 어떤 좋은 일이 일어났거나 아니면 규범적 의무를 넘어선 어떤 사람의 호의를 받았을 때다. 예를 들어 경쟁이 치열한 일자리에 지원했는데 합격했다. 그저 내 책을 몇 권 읽은 사람이 이후 크게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이 되는 강연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기념일도 아닌데 꽃을 사주었다. 낯선 이가 지나가면서 내가 떨어뜨린 돈을 굳이 주워서 달려와서 등을 치며 알려주었다. 이런 일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감사함을 느낀다.

물론 예외적으로 보이는 사안들도 있지만, 그런 사안들은 외관상의 예외에 불과하고 그 실질은 원칙의 예화다. 외관상 예외란 사실로서 통상적 기대나 규범으로서 마땅한 기대의 기준보다 오히려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는데도 감사함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다. 즉 일견, 보통 사람들도 나쁜 일에 감사를 느끼는 경우로 보이는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비행기를 간발의 차로 놓쳤는데 그 비행기가 조종사의 조종과실로 추락해서 승객들이 모두 사망한 경우 비행기를 놓친 사람은, 이런 경우 단적으로 기분이 좋다고 말한다면 끔찍한 사람 취급을 받겠지만어떤 의미에서 감사함과 비슷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비행기를 제시간에 타는 것은 사실적으로 통상적인 기대고, 조종사가 조종과실을 범하지 않는 것 또한 규범적으로 통상적인 기대다. 따라서 이 사건은 사실적인 기대 측면에서나 규범적인 기대 측면에서나 기준점 이하의 사태가 발생한 경우로 보인다. 그래서 이런 경우 보통 사람들이, 적어도 자기에게 추락이라는 사태가 벌어지지 않은 것에 감사함을 느끼는 것은, 바로 앞 문단에서 설명한 원칙의 예외처럼 보인다. 그러나 좀 더 살펴보면 위와 같은 외관상의 예외 사안들은 모두, 기대의 기준점이 낮아지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다. 그 특별한 사정이란 자신이 해당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것이 오히려 통상적으로 보일 정도로 그 사건 발생에 시공간적으로 매우 인접해 있었다는 것이다. 통상적 기대는 주체가 처한 구체적 사정을 고려에 넣어 형성된다. 예를 들어 운전면허 필기시험을 많은 시간을 들여 충분히 준비한 보통의 지능을 가진 사람은 그 시험에 단박에 붙는 것을 기대한다. 필기시험준비에 1초도 쓰지 않은 사람의 해당 시험 결과에 대한 통상적 기대와는 다르다. 그러므로 주체가 처한 구체적 사정까지 고려에 넣으면 어떤 나쁜 사건에 휘말리는 쪽이 통상적인 사건 진행으로 인식될 만한 경우에는 기대의 기준점 자체가 그런 구체적 사정이 없을 때보다 낮아지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주체와 관련된 구체적인 사정은 그런 구체적 사정이 없을 때보다 통상적 기대의 기준점을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운전면허 필기시험을 많은 시간을 들여 철저하게 준비한 사람의 통상적 기대는 올라간다. 즉 합격과 불합격의 동등한 확률이 기준점이 아니고 합격이 기준점이 된다. 십년지기 친구에게 심한 욕을 퍼부은 사람은 다음에 연락했을 때 통상적 기대가 내려간다. 즉 십년지기 보통의 친구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호의적인 반응이 아니라, 냉랭하고 쌀쌀한 반응이거나 최소한 사과를 요구하는 태도를 기대하게 된다. 그러므로 추락한 비행기에 하마터면 탈 뻔한 사람의 구체적 사정을 고려하면, 그 사람의 통상적 기대가 추락한 비행기에 탑승해서 사망하는 것이었다고 보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그것이 기준점이 되므로, 그 비행기를 우연히 간발의 차이로 타지 않게 되어 살아남은 것은 기준점 이상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감사 연구에서 말하는 습관을 가지지 못한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구체적 상황까지 고려에 넣어 자연스럽게 생기는 통상적 기대를 넘어서는 좋은 사태가 발생한 경우에 감사하는 확고한 경향성에는 아무런 신비스러운 점이 없다. 그것은 통상적 기대에 못 미치는 나쁜 사태가 발생한 경우에 화가 나고 굴욕감을 느끼고 짜증이 나는 확고한 경향성에 아무런 신비스러운 점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은 기대를 형성할 수 있고 그 기대에 부합하는 후속 사태가 일어났는지 기대에 어긋나는 후속 사태가 일어났는지를 판별하고 대응할 수 있는 의식 기제를 지닌 모든 복잡한 동물들에게 진화적 측면에서 자연스러운 경향성이다. 고양이나 강아지와 같은 동물을 관찰해보아도 이러한 경향성은 확고히 관찰된다. 복잡한 생물체의 기능상 통상적이라고 여기는 바를 넘어서는 사태의 발생에는 관심을 가지는 성향은 자연스럽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적자생존의 환경상, 그런 기능을 가진 복잡한 생물체들이 살아남아 후손을 계속 남기는 것이 진화론적인 설명과 부합한다는 것이다. 만일 통상적 기대를 넘어서는 좋은 사건이 발생하거나 통상적 기대에 못 미치는 나쁜 사건이 발생했는데도 아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성향을 가진 복잡한 생물체가 있다면, 이런 성향을 발현시키는 유전자를 가진 개체들은 도태될 것이다. 이를테면 천적이 나타날 것 같은 낌새가 있는데도 이에 주의하지 않는 개체의 유전자는 도태될 것이다. 또한 아주 영양가가 좋은 먹이가 풍부한 곳을 발견했는데도 이에 특별히 주의해서 제대로 기억하지 않는 개체의 유전자도 도태될 것이다. 놀라운 사건은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통상적 기대와 차이가 많이 나는 것에는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서 반응할 필요가 있다. 규범적 기대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인간과 같이 무리 생활을 하는 동물은 자신에게 호의적으로 대한 개체를 기억하고 이에 대해 호의적으로 되갚는 성향을 가져야 생존과 후손번식에 유리하다. 반면에 자신에게 적대적으로 대하거나 기만한 개체에 대해서는 이 또한 기억하고 적어도 이후에는 협력하지 않거나, 가능하다면 소문을 내어 다른 개체와 연합하여 따돌림을 시켜 배제하는 성향을 가져야 생존과 후손번식에 유리하다.

이처럼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경향성은 진화적으로 형성될 기제와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전혀 신비스러운 점이 없고 대단히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와 대조적으로 매사에 감사하는 확고한 성향이란 대단히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그것은 통상적 기대의 기준점도 없이 좋은 사건이건 나쁜 사건이건 그저 감사하고만 있는 무조건적인 정신적 지향을 가진 존재로 변모하는 습관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심리학 연구가, 통상적 기대의 기준점 없이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주관적 행복감은 높아진다는 결과를 제시하였을 때에도 사람들은 감사하는 마음을 쉽게 가지기 어렵다. 특히 이런 연구결과가 '감사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는 윤리적 함의를 가지는지가 의심스러운 상태에서는 그런 습관을 가지기 더 힘들 것이다. 과연 감사하는 습관을 갖는 것은 좋은 삶(good life)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응당 취하여야 할 것인가? 이 질문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감사하는 습관이 주관적 행복감을 높여준다면, 그건 당연히 삶을 좋게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할 법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두 가지 면에서 적실하다. 하나는 주관적 행복감은 삶에서 누릴 가치 중 하나에 불과하므로 주관적 행복을 높여주면서도 악덕에 빠지지 않는 삶의 방식을 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감사하는 습관이 주관적 행복을 위해 인위적으로 작출된 태도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제대로 지성적으로 처리하지 않는다면, 설사 도덕적 의무에 위반되지 않는다면야 주관적 행복감을 최고의 가치로 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런 습관을 삶에 뿌리내리기가 간단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 감사하는 습관은 악덕인가?

 

주관적 행복감이란 '만족하고 기분 좋은 긍정적 정신 상태'(satisfied and pleasurable, positive mental state)를 의미한다. 물론 이러한 긍정적 정신 상태는 가치 있다. 따라서 주관적 행복감은 다른 사정이 동일하다면(other things being equal) 높은 것이 좋다.

그러나 모든 가치가 그렇듯이 '다른 사정이 동일할 때'의 조건이 중요하다. 가치들은 때로 충돌하고, 가치가 충돌할 때 임의로 한 쪽을 선택하는 것은 비판적으로 좋은 삶을 음미하는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즉 어떤 삶의 지침을 택하면 주관적 행복감을 높여주더라도 다른 중요한 가치와 충돌한다면 그 지침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보기 힘들다.

주관적 행복감은 다른 것을 희생한 대가로 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표적인 것이 진실에 눈을 감는 것이다. 예를 들어 표현의 자유가 부당하게 제한된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금지된 표현은 애초에 악덕이며 표현할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믿을수록 더욱 행복할 것이다. 종교의 자유가 없는 사회에서는 국교로 지정된 것이 진실이라고 믿을수록 더욱 행복할 것이다. 자신이 정의에 가담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불의를 저지르고 있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을 매우 올바르게 잘 살아온 사람이라고 평가하게 된다면, 더욱 행복할 것이다.

다른 주관적 행복감은 허황된 속물적 사고와 인식론적 의무의 불이행에서 오기도 한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매우 정의롭고 인품이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게다가 자신은 매우 화려한 학력과 경력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우러러 본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뛰어남을 넌지시 자랑하는데, 다른 사람들을 예의를 지키느라 또는 그 사람의 하급자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자랑에 전혀 깊은 인상을 받지 못하고 다소 짜증나기도 한다는 점을 알려주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평생 그 사람을 상대하며 예의를 지키기 때문에 그 사람은 평생 그 점을 모르다가 죽는다. 그 사람이 자신이 살아온 삶의 탁월성에 대해 매우 정확한 평가를 내렸다면 주관적 행복감은 훨씬 덜할 것이다. 즉 자신이 선택한 척도의 위계에서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얼마나 더 높은 곳에 있는가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자신이 내재적으로 좋은 것을 누리고 만들어내며 제대로 살았는가를 기준으로 판별했다면 자신의 삶이 도전에 제대로 응전하지 아니하고 외적인 것들만 쌓는데 주력한 껍데기 같은 삶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껍데기 같은 생활양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꼭 자유로운 것은 아니기 때문에, 만일 그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여지에 한계가 크게 있었다면 허황된 속물적 사고를 하는 것이 (위계에서 낮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리) 그 사람의 주관적 행복감에는 기여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스스로 대단히 정의롭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과 세계의 정의로움을 실현하는 일을 동일시하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부정의한 인생을 살았다. 그리고 부정의한 인생을 살고 다른 사람의 권리를 함부로 침해하고 절차적 공정을 해치면서도 스스로 정의롭다고 생각한 것은 규범적 진리와 관련해서 인식적 의무를 해태했던 덕분이었다.

이런 사람의 모습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매우 좋은 존재라고 생각하려는 강력한 경향이 있다. 스티븐 다월이 그의 명저 <이인칭 관점>에서 분석했듯이 스탈린조차도 스스로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러한 평가를 타인에게서 계속 반복해서 확인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주관적 행복감을 주된 목적으로 삼는다면, ‘속물의 세계관에서 높이 평가 받는 표지를 실제로 갖출 능력이 있다면 속물적 사고를 반복해서 하는 습관이나 대단히 부정의한 삶을 살면서도 스스로 계속 정의롭다고 생각하도록 진지한 규범적 사고를 멈추는 습관등을 받아들이는 것이 대단히 유용할 것이다.

그러나 주관적 행복감이 하나의 선(good)이자 가치(value)이기는 하여도 그것이 어떤 실천의 맥락에서는 지고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속물적 사고를 하는 습관이나 진지한 규범적 사고를 멈추는 습관은 악덕이며, 그런 습관을 가진 사람은 설사 그 습관 덕분에 좀 더 많이 행복해졌다고 하더라도 좋은 삶에서는 오히려 더 멀어진 것이다. 따라서 일반론으로서, 주관적 행복감에 기여하는 습관도 악덕이 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글에서 관심을 두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감사할 때로 적절하기 때문에 감사하는 확고한 경향성을 넘어서, 이런저런 일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감사하는 습관은 악덕인가?

 

3. 타인의 불행을 재료로 삼는 비교의 방법과 불가해한 존재에 대한 굴종의 태도

 

그 질문에 그렇다는 답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두 가지 고려사항들이 있다.

첫 번째 고려사항은 사람들에 의해 주관적 행복감을 도모하는 괜찮은(legitimate) 지침이라고 인정되는 것 중에 감사하는 습관과 상당히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그 자체가 악덕의 향기를 강하게 풍기는 것이 있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자신보다 더 좋은 처지에 있는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보다 더 나쁜 처지에 있는 사람과 비교하라'는 격언이다.

 

이 격언은 승진을 일찍 한 친구를 부러워하며 승진이 안 된다고 괴로워 하지 말고, 암 병동에 있어 방사선 치료로 괴로워하는 사람을 보고 건강의 소중함을 느끼라고 말한다. 이것은 감사하는 습관 중 일부와 중첩되기는 하지만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여기서 주관적 행복은 그 자체로 오는 것이 아니라 '비교'를 통해 비로소 오는 것으로 상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만약 행복이 그 자체로 오는 것이었다면 애초에 주관적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 '비교'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지침에 의해 도모되는 행복에서 비교는 핵심적인 요소다.

그런데 여기서 비교를 효과 있게 하기 위해서는, 불행에 빠진 사람의 입장에 진지하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으면서도 자신은 그 처지에 빠져 있지 않다는 점에 매우 안도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자신의 처지는 그 자체로는 좋은지 잘 몰랐지만, 불행에 빠진 사람이 얼마나 괴로움을 크게 겪고 있을까를 완전히 몰입해서 숙고해보면 좋은 것이 된다. , 여기서 다른 사람의 고통과 괴로움, 불행은 바로 그런 식으로 비교하는 이의 주관적 행복감을 위한 필수 재료(essential ingredient)가 된다. 이를 어떤 면에서 관찰해보면, 그 사람은 자신이 감정이입할 수 있는 불행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행복해하는 셈이 된다. , 그 사람은 남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과 비슷한 모습을 취하게 된다. 거꾸로 이런 태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처지가 나쁜 사람들의 처지가 나아지기를 진심으로 바랄 수가 없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의 처지에 안도할 발판이 그만큼 사라지게 되고, 주관적 행복감은 그만큼 줄어들테니 말이다. (virtue), 주어진 상황에 적합한 태도를 보이고 적합한 행위를 하는 성향이다. 그런데 타인의 불행한 처지와 비교해서 자신의 처지에 감사하는 것은 매우 부적합한(inappropriate) 행위로 보인다. 그것은 자신의 주관적 행복감을 위해 불행한 타인이 존재할 것을 요구하는 데다가, 감사를 받을 만하지 않은 존재에게 감사하는 태도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고려사항은 '매사에 감사하라'는 지침이 갖는 석연치 않은 전제이다. 감사는 누군가에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매사에 감사한다면 누구에게 감사할 것인가? 예를 들어 감사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두 다리를 마음대로 쓸 수는 없지만 지속적으로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질병은 타고나거나 걸리지 않았다는 점에 감사한다고 해보자. 즉 그 사람은 출생 시에는 예견할 수 없었던 유전적 질병이 곧 발현되어 어릴 때부터 몹시 고통을 겪고 깨어 있는 시간 내내 괴로워하며 잠도 잘 들지 못하는 동료 시민의 처지와 자신을 비교하며 감사한다. 이 감사는 누구에게 돌려야 할 것인가?

자신의 부모가 감사할 상대는 아닌 것 같다. 두 다리를 못 쓰는 아이를 낳은 부모나, 지속적 고통을 주는 질병을 타고난 아이를 낳은 부모나, 두 경우 모두 부모들은 특별히 칭찬할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 모두 그저 통상의 주의를 기울여서 아이를 임신하고 출생했을 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 부모들은 두 다리를 못 쓰게 되거나 지속적인 고통을 주는 질병을 아이가 겪을 위험을 감수하였다. 즉 그런 괴로움과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는 존재를 부러 세상에 탄생케 함으로써 바로 그 괴로움과 고통을 산출한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 경우 한 쪽은 두 다리를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불운이 현실화되었고 다른 쪽은 지속적인 고통을 겪는 불운이 현실화되었다는 점은 전자의 경우를 후자의 경우보다 특별히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좋은 일을 했다고 치하와 감사를 표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따라서 이 경우 부모에게 감사를 표한다는 것은 한낱 상대적 운의 운반자에 불과하고 아무런 도덕적으로 의식적인 결정을 하지 않은 존재에게 응분이 없는 감사를 표한다는 점에서 악덕의 기운을 강하게 풍긴다.

그 다음으로 어떤 초월적인 인격적 존재, 즉 신에게 감사한다는 안을 생각해보자. 이 안은 당장 두 가지 반대에 부딪힌다. 첫 번째 반대는, 이미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겠지만, 적어도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감사하는 습관을 받아들인다 함은 자신의 종교에 관한 믿음(신이 없다는 믿음) 및 그 믿음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관련 믿음(참인 명제를 파악하는 분석적, 경험적, 규범적 탐구에 관한 믿음)과 양립불가능한 전제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양립불가능한 두 가지 믿음을 하나의 삶에 적극적으로 담고자 하는 것은 인지적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악덕 중 하나다. 따라서 이 답안을 취하게 되면 감사하는 습관을 가지라는 조언은 적어도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악덕에 찬 삶을 살라고 하는 조언이 되어버린다.

두 번째 반대는 초월적인 인격체의 존재에 대한 질문은 제쳐놓더라도, 감사하는 습관이 힘에 대한 무조건적인 굴종의 태도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사안의 경우 비교 대상으로 삼은 지속적인 가혹한 고통을 유전적 질병을 타고난 사람이 겪도록 만든 장본인은 바로 그 초월적인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가혹한 고통을 겪게 해서 비교대상을 만들어준 면에서 감사를 한다는 것은, 심성이 매우 흉악한 존재에게 굴종적으로 아첨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그 초월적 인격체에게 감사하는 것은 그토록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는 존재가 다행히 자신에게는 가혹한 고통을 주지 않은 것에 대하여 그저 안도하고 계속해서 그 힘을 자신에게는 불리하게 발휘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 그친다. 이것은 이성이 아니라 힘(might)에 완전히 압도되는 삶이다. 힘에 의해 완전히 압도되는 삶은, 선을 좇고 악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힘이 가리키는 방향만을 좇는 삶이므로, 역시 악덕으로 완전히 가득 찬 삶이다. 따라서 모든 사태의 근원이 될 힘을 갖고 있는 초월적인 인격체에게 감사하는 태도가 그런 인격체의 존재 여부의 질문을 차치하고서라도 따라서 훨씬 더 까다로운 해명을 필요로 한다. 즉 애초에 왜 그 인격체는 모든 의식적 존재들을 위해 최고의 것을 준비하지 않고 내가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주관적 행복감의 재료로 쓸 가혹한 선천적인 고통을 누군가에게는 예비하였는가라는 질문을 해결해야 한다. 이 문제는 악의 문제(problem of evil), 해결이 간단치 않은 문제이다. 특히 앞에서 예로 든 선천적 질병으로 극악한 고통을 겪게 되는 사람의 탄생, 천재지변으로 인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한 지역의 사람들을 모두 죽음과 괴로움에 빠뜨리는 사태의 발생 등은 간단히 인간의 궁극적 자유의지라는 개념을 또 다시 신비스럽게 끌어들인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태어날 때부터 심각한 선천적 질병을 가지게 된 아기는 자유의지를 잘못된 방식으로 발휘한 적이 전혀 없는데도 고통을 겪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무고한 아기에게 고통을 겪게 만든 어떤 초월적 존재에게 자신은 그런 고통을 겪께 하지 않아서 참으로 감사한다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납득이 가지 않는 태도로 보인다.

따라서 감사의 대상을 초월적 인격체라고 보고 이성적인 기반 위에서 감사하는 습관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그러한 초월적 인격체의 존재를 믿고 그리고 그러한 초월적 인격체가 인간의 책임 있는 잘못에 기초하지 않거나 비례하지 않는 고통을 예비한 까닭에 대한 해명이 모두 납득이 간다고 보는 사람에 한정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감사하는 습관에 대한 심리학 분야의 연구를 보고, 습관을 뿌리내리는 테크니컬한 요령을 활용한다면, 문제 없이 감사하는 습관을 자기 삶에 구현할 수 있다.

반면에 그런 존재를 믿지 않거나, 그런 존재를 믿거나 논의의 목적을 위해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악의 문제가 납득가능하게 해명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초월적 인격체의 존재 문제나 악의 문제를 그대로 놓아둔 채 초월적 인격체에게 감사하는 습관을 받아들이라고 강변하는 것은, 수행적 모순이 되는 권고이거나 아니면 모욕적인 강압이다. 한편으로 그런 문제에 대한 기존의 해명이 그에 대한 이의를 물리치고 참이라고 믿으라는 명령은, 구체적인 명제를 곧바로 믿으라는 명령이므로 불가능한 것을 명령하는 것이어서 명령으로서 진지하게 성립할 수 없다. 곁에 있는 사람에게 아무리 엄숙한 태도로 지구가 달 주위를 공전한다고 믿지 않으면 3초 뒤에 쏘겠다고 하여도 곁에 있는 사람은 그것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목숨이 걸려 있다 하더라도 실천불가능한 명령은 한층 더 강력한 이유로, 한낱 주관적 행복감의 고양을 위해서도 실천불가능하다. 다른 한편으로 참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지만 마치 참인양 전제하고 행동하라는 조언은 모욕적이다. 왜냐하면 이는 결국 주관적 행복감을 위해서 지금은 분명히 힘에 대한 전적인 굴종에 불과하다고 보는 태도를 취하라고 강변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자연에게 감사한다는 답도 이상하다. 그러나 자연이 나의 주관적 행복감을 낳게 한 비교의 대상이 된 다른 사람의 고통에 그토록 무심하다면, 자신이 우연히 그런 고통을 겪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자연은 역시 무심할 것이다. 애초에 어떠한 의도와 목적도 없이 사태의 진행에 따라 이루어진 일에 대해서, 무인격적인 존재에게 감사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자연에게 감사한다는 것은. 2년 전에 책으로 쳐서 잡은 모기 피의 흔적이 남아 있는 벽지에 감사한다는 것이 전혀 이치에 닿지 않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치에 닿지 않는다.

 

4. 감사하는 습관에 대한 윤리적 해명: 부조리한 삶 속에서의 가능한 가치 경험에 우호적인 기질, 여건, 행위의 긍정적인 측면에 대한 또렷하고 깊이 있는 음미라는 현명한 태도의 지속

 

그러나 이 모든 논의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습관을 찬성하는 윤리적 해명이 가능하다고 본다. 즉 감사하는 습관이 필연적으로, 주관적 행복감을 고양하기 위해 악덕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를 함축하지는 않는다. 이하에서는 오히려 감사하는 습관은 인간의 삶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예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현명한 삶의 기예에 해당할 수 있다는 점을 논하겠다.

그러한 가능성은 감사(gratitude)라는 말의 심층성과 애매성에 내재해 있다. 감사하는 습관(habit of gratitude)는 고마움을 표시하는 습관(habit of expressing thanks)과는 뉘앙스가 다르다. 고마움은 구체적인 인격적 존재에게 표현하는 것이다. 반면에 감사 습관 연구에서 다루는 바로 그 뜻에서의 감사는 어떤 실존의 상태 자체에 대한 심층적인 긍정적 음미까지 내포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우리가 누군가에게 고마워”(thank you)라고 말할 때의 그러한 일상적인 의미의 고마움보다는 더 깊은 의미의 어떤 사태나 조건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음미가 감사를 느낀다”(feel gratitude)에는 있을 수 있다. 물론 후자는 전자의 사태에 대한 긍정적 음미까지도 포함할 수 있지만 이 경우에도 훨씬 더 깊은 조망과 실천의 관점이 들어오게 된다.

그 조망과 실천의 관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두 가지 관점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인간 실존의 부조리함에 대한 철저한 통찰의 관점이고, 적어도 죽음이라는 커다란 박탈이 삶의 유지를 합리적으로 만드는 동안에는 부조리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으므로 참여자의 이성에 입각하여 가능한 한 현명하게 살고자 하는 실천적 지혜의 관점이다.

우선 인간 실존의 부조리함에 대한 철저한 통찰부터 살펴보자. 모든 개별 인간은 이미 태어남으로써 운이 대단히 없게 되었다. 가치론적 관점에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나으며, 존재하게 되기 전에는 겪을 수 없었던 박탈(deprivation)을 겪을 조건이 완비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복지에 대한 이론에 따라 그러한 박탈은 고통(pain), 욕구의 좌절(frustration of desires), 그리고 선의 부인(denial of goods)이라는 여러 범주를 통해 파악되곤 한다. 인간은 태어난 이상 항상적으로 정신적이고 신체적인 불편들을 겪을 수밖에 없으며 인생의 몇몇 시기-특히 종기-에는 커다란 고통을 겪게 되며, 또한 이런저런 크고 작은 욕구의 좌절을 맛본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삶은, 논리적으로 가능한 지복의 존재에 비해 너무도 작은 선만을 누리고 너무도 큰 악을 경험한다. 그러나 의식 있는 존재의 종식은 그 자체가 커다란 박탈이다. 그리고 때이른 박탈은 그만큼 더 큰 박탈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살아간다. 즉 부조리 속에서 살아가기로 한다. 살아가려면 부조리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은 인간 실존의 조건, 간단하게 말해서 인간 조건(human condition)이다.

부조리에서 살아간다는 진지한 자각은, 단순히 추상적으로 인간은 부조리에서 살아간다는 명제에 동의한다고 해서 확립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가능한 부조리에 대한 철저한 자각까지 포함한다.

부조리에는 종류와 정도의 차이가 있다.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겪는 부조리도 다기하고 그 정도의 차이가 크다. 일단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처한 여건이 다르고 기질과 신체가 태어난 모습이 다르다면 인과법칙에 묶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는 부조리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논리적 필연성은 그보다 더 거대한 형태로 온다. 실제 겪는 부조리뿐만 아니라 가능한 사람들(possible people)이 겪는 부조리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겪을 수도 있는 가능한 부조리까지 생각하면, 부조리의 격차는 어마어마하게 크다. 예를 들어 나는 레지스탕스 같은 것을 해야만 하는 시대에 태어나서 아무 낙도 없이 저항운동에 복무하다가 결국 전체주의 전쟁광의 수하들에게 잡혀 끔찍한 고문을 당하다가 비명횡사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사지가 무력하게 되는 근무력증과 함께 끔찍한 고통을 매초마다 겪는 질병에 걸릴 수도 있었다. 또한 아주 빈곤한 지역에서 태어나 오염된 물을 먹고 장기부전에 빠져 평생을 무력하게 살다가 결국 가벼운 전염병을 마지막 타격으로 받아 사망할 수도 있었다. 결국 더욱 더 끔찍한 부조리가 현실화되지 않은 결과가 지금 내가 살아가면서 처해 있는 상대적으로 그보다는 나은 부조리한 실존이다.

그러므로 태어났다는 불행을 전제로 삼고 때이른 죽음이라는 이례적인 박탈을 지금은 피하려고 하는 이상,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 지금의 실존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음미에 깊이 새겨져 있다. 사태는 훨씬 더 나쁠 수 있었다. 그러나 사태는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다. 그리고 사태가 언제까지나 계속 이 상태 정도로 온건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후에 사태는 더 극단적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 언제라도 백두산이 화산폭발하여 낙진이 한반도 전체를 뒤엎고 세계의 농작물 대부분이 고사하여 대규모 식량위기와 전염병이 돌 수도 있다. 어마어마한 대지진이 일어나 중국, 일본, 한국의 해변가의 모든 원자력 발전소들이 파괴되고 내진 설계가 제대로 되지 않은 건물들이 거의 대부분 무너지거나 더 이상 안전하게 살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될 수 있다. NASA조차도 발견하지 못한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하리라는 것을 불과 1달 전에 알게 될 수도 있다. 더 치명적이고 전염성이 강한 감염병이 여러 종류가 돌아 정상적인 경제운영이나 민주주의 운영, 심지어 최소한의 사회질서 유지가 불가능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가능성들이 현실화되지 않았다. 지금은 적어도 나의 실존은 그런 가능한 더 격한 부조리보다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부조리다.

상대적으로 온건한 부조리는 단기적이고 중기적인 인생계획을 세우고 실현하는 정신적·육체적 활동의 상당한 여지를 허용한다. 즉 어떤 기획에 집중하고 어떤 경험을 즐기고 어떤 과업을 성취하고 어떤 관계를 맺고 돈독하게 하고 하는 것들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 면에서 온건한 부조리는 훨씬 더 격한 가능한 부조리에 비해 두 가지 장점을 갖는다. 설사 신체적 불편과 고통, 그리고 좌절과 괴로움이 있으며, 가능한 선들의 부인과 박탈이 있다 할지라도, 내가 지금 무엇을 할지 행위 이유를 식별하고 그 이유에 따라 행위할 정도의 신체적·정신적 능력과 여지는 남겨두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실제로 그러한 능력과 여지를 활용하여 어떤 제한된 종류와 범위의 선을 누리는 것이 가능하며, 일상적으로 그런 선들을 누리는 기회가 널려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조건인 부조리에 대한 통찰은, 가능한 격한 부조리가 현실화되지 않은 결과로서 지금 여기의 온건한 부조리가 갖는 두 가지 장점에 대한 통찰까지 포함한다.

이러한 통찰은 결국 현명하게 살고자 하는 실천의 관점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우리가 처해 있는 부조리가 온건한 것인 한, 때이른 죽음이라는 커다란 박탈을 피해야 할 이유가 있다. 물론 어떤 행위 이유를 식별하고 그 이유에 따라 행위할 정도의 신체적·정신적 능력과 여지가 사실상 제거되거나, 그런 능력과 여지를 활용하여 누릴 만한 선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면 계속해서 살아갈 이유란, 어떤 독단적인 선언 외에는 남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무도 치료할 수 없는 질병에 걸려 뼈가 부러질 때의 고통과 같은 고통을 매초마다 겪어야 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그 고통에 시달리는 것 외에는 아무런 가능한 경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는 이유를 식별하거나, 이유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그래서 TV 드라마를 보는 등의 아주 수동적인 선을 누리는 것조차도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온건한 부조리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다. 온건한 부조리 상황에서는 어떻게 살 것인가가 문제된다.

당연히 하나의 가능한 길은 부조리를 곱씹어보면서 그 부조리에 잠식당하고 그 면면을 세세히 들여다보며 괴로워하는 데 시간을 많이 보내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이 우리가 꾸준히 스토아적 수련을 하지 않으면 빠지게 되는 길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길이 현명한 길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살아가기로 한 이상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어찌할 수 없는 부조리에 대해 한탄하고 실의에 빠지는 것은 참여자이자 실천자인 주체가 할 만한 가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토아학파의 가르침을 따라 세 단계의 조치가 필요하다. 첫째로 우리에게 속하는 것과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것을 구분한다. 둘째,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오로지 우리의 실천에 차이를 가져올 수 있고 실천과 연결되는 부분에 대해서만 하나의 자료로 삼는다. 셋째, 우리의 기질 및 처한 여건과 주도하는 행위로 주로 구성되어나가는 경험의 가치를 깊이 있고 뚜렷하게 음미한다.

여기서 세 번째 단계가 감사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 가치란 행위를 찬성하게 하는 이유로서 긍정적인 힘을 갖는 어떤 속성이다. 우리의 경험은 여건과 우리의 행위 자체로 구성되는데 이 둘 다 적어도 우리가 현실적으로 목표로 할 수 있는 가치 경험에 우호적인 면이 있다. 예를 들어 지금 필자가 글을 쓰는 것은 글을 쓸 만한 시간이 주말에 마련이 되었고, 필자에게 맞는 편안한 자세로 노트북을 앞에 두고 앉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여건은 논리적으로 가능한 지고한 존재가 누릴 여건에 비해서는 별 것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런 여건이 긍정적인 가치 경험을 가능하게 한 여건임은 부인할 수 없다. 또한 필자는 책을 즐겨 읽고 적어도 어느 정도 읽을 만한 글을 종종 쓰고 싶은 욕구를 느끼는 기질이 있는데, 이런 기질이 지금 글을 쓰는 것을 가능하게 한 기질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이 글을 쓰기로 결심하고 이 글을 써나가는 행위를 하고 있다. 필자가 이 글을 써나감에 따라 처음에는 하나의 아이디어였던 것이, 핵심 논지를 써보고, 목차를 작성하고, 뼈대를 잡고 실제로 문장으로 써나가면서 하나의 논증이 담긴 글로 살이 채워져 나가며 정돈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분명히 어떤 특유한 지향적 쾌락을 발생시킨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시간을 보내면서 현명하게 산다는 것은, 이 글을 쓰는 것을 가능하게 한 여건, 기질, 그리고 이 글을 실제로 쓰는 행위가 가치 경험에 기여하는 긍정적인 면들을 깊이 있게 음미하고 이 시간에는 오로지 그것들만을 음미함을 의미한다. 만일 이 글을 쓰는 시간에 다른 번잡한 것들을 걱정하거나 현실적으로 가능한 운이 더 좋은 사람이나 논리적으로 가능한 지고의 존재에 비해 훨씬 못하다는 처지를 곱씹는다면 제대로 글을 쓰도록 정신을 집중하는 것, 그리고 글을 쓰면서 어느 정도 긍정적인 특유한 쾌감을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크게 간섭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여건과 기질, 행위의 가치 경험에 대해 갖는 우호적이고 긍정적인 면을 또렷하고 깊이 있게 음미하는 것은 우호적이지 않을 수도 있었던 가능세계들, 특히 지금 실재하는 세계와 오로지 그 우호적인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만 제외하고는 가장 가까운 가능세계들과의 비교를 통해 더 생생해질 수 있다. 지금 이 시간에 정돈된 하나의 글을 쓰지 못할 수도 있었던 가능세계에 비해 현실세계는 특별히 불편한 것 없이 오히려 리듬감을 느끼면서 타닥타닥 노트북의 키판을 두드리며 생각이 문장으로 기록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의 긍정적인 면에 대한 음미가, 그와 같은 가능세계와의 대비에 의해 더 강화될 수 있는 것이다. 특정된 우호적인 여건, 기질, 행위만을 제외하고 가장 인접한 가능세계와의 비교를 통해 현재의 가치 경험을 더욱 또렷하고 깊이 있게 음미하는 것은 스토아학파의 기예 중 하나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삶을 사는 지혜로운 실천 양태로서 또렷하고 깊이 있는 음미는, 앞서 살펴봈던 감사해야 할 인격적 존재나 자연적 존재가 누구인가에 대한 적어도 상당수 사람들에게는 납득하기 힘든 전제를 깔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인접 세계와의 비교를 통해 때때로 강화되는 우호적인 여건, 기질, 행위의 긍정적인 면에 대한 또렷한 음미를 한 마디로 감사하는 태도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태도는 정말로 규범적이거나 사실적인 통상적인 기대를 벗어난 일에만 적용될 필요가 없다. 그런 자연스러운 경향성은 진화된 존재인 인간 모두가 갖고 있는 것이다. 일단 부조리 속에서 살아가기로 한 인간의 지혜로운 실천으로서 감사하는 태도는, 단지 지금 현재의 가치 경험을 더 또렷하게 인식하고 더 잘 수행하기 위한 사고의 양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적인 의미에서는 당연한 일이 그대로 진행되었을 때-예를 들어 저녁 시간에 집 주위에 원래부터 늘 그렇게 있던 공원을 산책하기로 해서 산책할 때-, 이런 스토아적인 삼 단계의 의미로서 감사하는 태도를 얼마든지 가질 수 있다. 첫째로 지금 나에게 속한 일은 산책을 하거나 다른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둘째, 논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사태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어차피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므로 이를 생각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셋째, 두 다리를 멀쩡하게 갖고 있고 산책을 좋아하는 기질이 있는데다가 집 근처에 조용하고 나무가 많은 산책로가 있고 지금 산책하기로 하여 산책을 하고 있는 이 모든 것의 긍정적인 면들은, 이보다 (얼마든지 현실화될 수 있었던 가장 인접한 가능세계들의) 덜 우호적인 여건에서는 가능하지 않았던 가치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므로 분명히 그 긍정적인 면을 또렷하고 깊이 있게 음미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 입각하면, 누군가가 나에게 특별한 호의를 베풀었다 하더라도, 그 긍정적인 면의 귀속은 오롯이 그 호의를 베푼 사람에게만 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이 가능세계는 덜 우호적이거나 훨씬 더 비극적인 가능세계에 비해 훨씬 낫다는 생생한 가치론적 음미에도 상당 부분 가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이런 가치 경험을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것은 스토아적 삼단계 실천의 축약어(shorthand)에 불과하다. 그것은 감사해야 할 상대방으로서 인격적 주체를 상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축약어로서 감사하다라는 말은 실제로 상당한 효과를 발휘한다. 단계를 나누어서 매번 사태를 음미하기보다는 습관적으로 '감사하다'고만 해도 긍정적인 면을 오히려 더 간단하고 뚜렷하게 음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감사하다고 하는 것은 습관화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축약적 진술에 불과하며, 인격적 상대방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앞서 이야기했던 부모, 초월적 존재, 자연 등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감사가 만들어내는 난점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게다가 이렇게 스토아적으로 재해석된 감사하는 습관은 이러한 또렷하고 깊이 있는 음미가 타인의 불행을 재료로 삼거나 타인과의 비교를 통한 우월감에서 쾌락을 느끼거나 하는 악덕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오로지 자신이 처할 수 있었던 가능세계의 부조리와의 비교일 뿐이다. 부조리에 대한 통찰이 깊을수록, 감사의 태도의 깊이도 깊어진다. 부조리에 대한 철저한 통찰은 오히려 부조리에 자신의 실천을 지배당하지 않는 태도에 이른다. 가능세계는 현실적으로 타인의 불행이 있어야만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자신의 현재 직접 실천에 우호적인 여건, 기질, 행위에 대한 가능세계적 음미는, 어떤 속성에 따라 사람들을 줄세워놓고 열등한 위치에 있는 자보다 우월하니 자기 삶이 가치 있다는 보증되지 않는 속물적 태도를 전제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마지막으로 감사하는 태도는 현실존 전체를 총체적으로 긍정하는 태도가 아니다. 부조리한 세계를 총체적으로 긍정하는 이는 팡글로스 박사처럼 어리석은 독단을 채택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다만 나에게 속한 실천의 영역이 있고 그 실천의 영역을 가능케 한 우호적인 조건, 기질, 행위의 긍정적인 면을 음미하고 자각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온갖 유정적 존재가 태어나는 바람에 논리적으로 꼭 겪지 않아도 되는 고통을 겪게끔 되는 현재의 실존은 전반적으로 평가했을 때 나쁜 것, 즉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사멸해야 할 것이라고 보면서도, 부분적으로 우리에게 속하는 것과 관련된 것을 가능케 한 조건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음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라"가 아니라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부조리를 통찰하되, 현명하게 살아가고 싶은 것이라면 부조리에 휩쓸리지 않고 가치 있는 경험을 가능케 한 여건, 기질, 행위의 긍정적인 면과 감각에 집중하라"가 되는 것이다. 전자는 팡글로스식의 어리석음이지만 후자는 스토아식의 지혜다.

 

5. 결론

감사하는 태도 내지 감사하는 습관에 대한 이러한 스토아학파적 해명은, 감사 습관이 상당수 사람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어떤 비정합적이거나 납득할 수 없는 신념을 전제하거나 한낱 주관적 행복감을 위하여 악덕에 빠지지 않고서도 현명한 삶의 기예로 실천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이것은 감사하는 습관에 대한 심리적 연구가 더 정교한 요소로 분해되어 이루어질 여지가 있음도 시사한다.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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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탐구자2
    2020.06.12 12:18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사람들은 쾌락을 주고 행복한 일이 그 자체로 삶의 미덕이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좋은 삶으로서의 행복이 쾌락으로서의 행복과 명확히 구분되는 것인지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하곤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설명하신대로, 만약 다른 사람과 비교해 '우연히' 더 나은 삶의 여건에 놓인 것에 감사하거나 '초월적 존재'에 대해 감사하는 습관을 갖는 것이 더 행복할지라도, 이러한 삶이 더 가치있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긍정심리학과 행복 연구의 모호성을 둘러싼 논쟁은 꽤 오래된 것이라서, 굳이 '긍정의 배신'과 같이 공격적으로 이 주제를 다루는 책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관련된 주장을 담고 있는 책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령 연세대 서은국 교수는 그의 책 '행복의 기원'에서 행복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이 잘못되었으며, 행복(=주관적 안녕감Subjective well-being)은 어떤 행동을 추동하거나 억제하기 위한 생리적 유인일 뿐이라면서, 행복이 삶의 목표나 기준점으로 삼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행복수치는 건강이나 돈과 같은 삶의 객관적 여건보다는 그 사람이 '긍정적 자극에 민감한 성격(=BIG5외향성)'을 타고났는지에 좌우되기에, 정서적 사건의 영향력 또한 일시적일 뿐 어떠한 일을 계기로 삶이 극적으로 바뀌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행복해지기 위해' 삶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고민하는 게 큰 의미가 없다는 뜻이죠.

    그러나 (서은국 교수와 같이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를 번역하기도 한) 서울대 최인철 교수는 그의 책 '굿 라이프'에서 SWB 중심의 계량적 행복 연구들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적극적인 해명을 내놓지 못한다고 비판하면서, 계량화된 행복을 넘어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다루는 다양한 심리학 연구들을 조명합니다.
  2. 김태희
    2020.06.14 17:42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저는 나와 연결되어 있는 세상의 협력과 희생의 시스템에 대해 감사하고, 사과하는 습관을 가지고자 노력해왔습니다. 이는 협력 체계로서의 사회 구조 속 시민적 가치를 감사하는 마음의 미덕과 연결시켜주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의 삶은 수 많은 사람의 협력, 혹은 부당한 희생을 전제로 서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맛있는 만두를 먹기 위해서는 안전한 도시 가스 체계를 설계하고 점검해온 사람들, 냉동 만두를 저에게 배송해준 물류센터와 배송원, 두부의 재료가 된 콩을 재배하는 미국,호주,캐나다,중국의 농민들의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제가 고기를 먹던 시절에는 어떤 지성을 가진 생물의 죽음도 전제되었겠죠.

    이렇듯 거대한 협력 체계가 없거나 부정의하게 파괴된 가능세계와 비교해보았을 때, 저는 상당한 복지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는 비단 현제 세대의 협력 뿐만 아니라, 세대에 걸쳐 쌓아온 기술과 경제성장, 민주화된 정부를 물려 받은 것이지요. 여기에 얼마나 많은 노력 혹은 희생이 따랐는지 셀 수조차 없을 겁니다.

    제가 "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면?"이라는 생각은 무지의 베일을 떠올리게 합니다. 공감이란 타인의 이익을 내 것처럼 생각하며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그런 왜곡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지의 베일과 같이 "과연 이러한 구조는 합당한가?" "다른 여건 속에 태어날 수도 있었던 나에게 공정한가?"하고 묻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렇기에 단순히 감사 뿐만 아니라 '사과'해야할 일이기도 합니다.

    살다보면 이러한 사회 구조를 마치 주어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고는 합니다. 최소 수혜자들의 요구는 생생하게 와닿지 않고, 우리는 쉽게 자신의 이익을 공적 논증으로 포장하는데에 급급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구조를 만들어왔고,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과연 이 체계가 정의로운지 성찰하고, 변화시켜 나갈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이 민주주의 속의 시민이겠죠. 우리는 적극적으로 이 구조 속에 살아가는 수 많은 이들의 삶을 상상할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

    병원의 의사들을 대상으로 마음챙김하는 공감을 연구한 사례가 있습니다. 의사들은 죽은 환자들에게 지나친 책임을 느낍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의사들은 환자에게 공감하지 않으려 하고 냉담하게 대하게 되었습니다. 연구진은 그래서 의사들에게 그저 환자들이 무엇을 느끼고 필요로 하는지, 여기서 의사의 책임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행동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의사들은 환자를 더 따뜻하게 대하면서도, 주관적인 행복감도 올라갔습니다. 이렇듯 진실을 알아차리고 책임 지는 삶은 꼭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니며, 오히려 의미있는 삶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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