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 히스 - 정의. 형이상학적이 아니라 선험론적인(서요련 번역) (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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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의 정의: 형이상학적이 아니라 선험론적인>에 대한 역자의 소개글 이 논문은 하버마스와 롤스의 논쟁을 주제로 한 논문 선집 Habermas and Rawls: Disputing the Political에 수록된 논문입니다. 하버마스-롤스 논쟁은 이 시대 최고 거장들의 의견 교환인 만큼 잘 뜯어보면 배울 점이 무수하고, 품격 있는 논쟁을 추적하는 즐거움 자체가 상당합니다. 그러나 으레 그렇듯이 두 거장들의 논쟁은 독자들을 오도하는 방향으로 흐르기도 합니다. 이는 일정 부분 하버마스와 롤스가 각각 자초한 측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두 논쟁에서 무언가를 배우려 한다면, 하버마스와 롤스가 실제로 말한 바와 더불어 그들이 "말했어야 하는 바"를 재구성하면서 읽어야 할 것입니다.

 

조지프 히스는 “말했어야 하는 바”의 측면에서 정확하게 하나의 핵심 쟁점을 다룹니다. "롤스가 하버마스에게 제기한 혐의, 즉 하버마스의 민주적 법치국가 이론이 형이상학적 성격이 강한 포괄적 신념체계(comprehensive doctrines)에 불과하다는 혐의는 온당한가?" 히스는 이 쟁점에 '아니요'라고 답합니다.

 

(1) 하버마스의 정치이론은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가 제시하는 "정치적" 이론의 기준을 충족한다. 따라서 하버마스의 정치이론을 형이상학으로 분류하거나 포괄적 신념체계로 취급하여 정치적 자유주의와의 논쟁 대상에서 단번에 배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 점에서 하버마스의 대응도 빗나갔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대응 방식 대신 롤스의 ‘정치적’ 규정을 공격하는 대응 방식을 택했다. 이로 인해 논의의 많은 부분이 생산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흘렀다. 하버마스는 자신의 이론도 정치적 이론이라고 주장했어야 했다.

 

롤스는 하버마스에게 응답하는 논문에서, 하버마스의 이론이 넓은 의미에서 헤겔적인 형이상학에 속하며, 자신의 정치적 이론과 달리 포괄적 이론에 해당한다고 응수합니다. 롤스의 응수가 옳다면,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와 하버마스의 민주적 법치국가 이론은 동일한 논의 선상에 있지 않습니다. 이 경우 사실상 하버마스의 이론과 롤스의 이론을 대질하는 논의는 상당 부분 힘을 상실하게 됩니다. 하버마스의 이론은 기껏해야 시민사회에서 향유되는 다양한 신조, 인생관, 세계관 중 하나가 되며, 롤스의 정치적 정의관처럼 합당한 다원주의의 사실을 특징으로 삼는 입헌민주주의 사회에서 공통 기반을 이루는 원칙이나 규범을 제시하는 이론이 될 여지는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버마스의 정치이론 저작 『사실성과 타당성』을 읽어본다면, 과연 하버마스의 이론이 롤스가 포괄적-형이상학적 이론으로 넣는 것들과 똑같은 유형의 이론인가 하는 정당한 의문을 품게 됩니다. 히스는 바로 이 의문을 해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히스의 해명은 하버마스-롤스 논쟁을 더욱 생산적으로 공부하기 위한 일종의 '기본 논제'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히스의 해명이 옳다면 하버마스의 이론과 롤스의 이론 모두 정치적 이론에 속하므로, 동일한 논의 선상에서 양자의 상호 강약을 분석하고 본인이 염두에 둔 문제 영역에 적합한 통찰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수확과 함께 히스의 논의는 아래와 같이 좀 더 세밀한 부수 성과를 제공합니다.

 

(2) 하버마스의 약한 선험론적 주장(weak transcendental claims)은 형이상학적 주장이 아니다. 하버마스는 특정한 사회적 실천의 불가피한(unavoidable) 전제조건을 밝힐 목적으로 선험론적 주장을 제시한다. 이 주장이 약한 선험론적 주장인 까닭은 "원칙적으로 다른 어떤 생물이 우리와는 전혀 다른 인지 형식이나 언어 형식을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고, 그 결과 그러한 제약에 구속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의사소통적으로 구조화된 생활세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들에게 그러한 언어 형식과 인지 형식은 불가피하게 전제된다. 그러므로 하버마스가 제기한 약한 선험론적 주장이 옳다면, 그러한 주장은 "이미 모든 포괄적 신념체계의 구성요소"일 것이다. 약한 선험론적 주장이 모든 포괄적 신념체계의 구성요소라면, 특정한 포괄적 신념체계에 종속된 주장이 아니다.

 

(3) 하버마스의 정치이론은 단순히 논증대화윤리(Diskursethic)의 응용 버전이 아니다. 정치 영역은 논증대화윤리에서 제시한 보편화 원리 U가 지배하는 영역이 아니다. 하버마스가 도덕적 논증대화의 이상화를 정치 영역에 그대로 전이하고자 했다는 것은 오해이다. 하버마스의 정치이론은 근대 사회에 특유한 실정법이라는 매체와 탈전통적 정당화의 요건을 절약적으로 기술하는 논증대화원리(Diskursprinzip)의 상호 침투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런 이유에서 하버마스의 정치이론은 도덕이론과 구별된다.

 

(4) 적어도 정치이론으로 한정하면, 하버마스의 이론은 과도한 비관주의라 할 정도로 현실주의적이다. 그럼에도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의 세가 강한 유럽적 맥락에서 하버마스는 흔히 순진한 이상주의자로 인식되고는 한다. 이러한 인식 역시 오해이다. 하버마스는 국가를 행정권력으로 운행되는 자기조절 체계로, 반드시 정당성의 원천인 생활세계가 "포위"해야 하는 대상으로 본다. 즉 하버마스는 국가를 낭만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도한 비관주의가 하버마스의 정치이론을 오도하는 측면이 있을 수 있다.

 

(5)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행위-도구적 행위 구별을 반드시 화행이론으로 뒷받침할 필연성은 없다. (히스가 보기에) 화행이론은 언어철학에서 꽤나 숱한 논쟁에 휘말리고 있기에, 이 구별을 정당화하는 데 화행이론을 동원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지 의문이다. 하버마스의 핵심 구별을 덜 논쟁적인 방식으로 도입하는 방법이 있다. 예를 들어 게임 이론이 그렇다.

 

위 논점 하나하나가 매우 흥미진진합니다. 히스의 글은 제가 읽은 영어권 철학자 중에서도 글을 읽는 재미가 가장 뛰어납니다. 비영어권 연구자들도 상당히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짧고 간결한 단문 위주의 문장과 함께 특유의 과단성 있는 어휘 선택 덕분에 번역하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 이 점은 히스 스스로 뛰어난 대중 저술가인 점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4)와 관련하여, 히스는 캐나다 출신으로 북미 강단의 논의 지형과 유럽의 지성계 간에 나타나는 미묘한 기질적, 문화적 차이를 아주 예리하게 지적해줍니다. 이는 하버마스-롤스 논쟁처럼 북미와 유럽 대륙을 넘나드는 주제 영역에서 한국인 연구자가 갈피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물론 특유의 과감한 필치 덕에 일부 단순화된 논의도 눈에 보입니다. 이를테면 롤스가 제시한 합당성-합리성 구별을 논하는 대목이 그러합니다. 히스의 지적대로 롤스 자신이 합당성-합리성 구별을 적극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많은 이론적 노력을 투입하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롤스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들의 논증에서 오류를 발견한다면 나는 그 이론가들 역시 그것을 알고 처리했을 것이라고 가정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것을 어디서 처리했을까요? 나는 나의 해법이 아니라 그들의 해법을 찾아보았습니다. 때로 그들의 처리 방식은 역사적 한계 안에 있었습니다. 즉 그들의 시대에는 [*우리가 잘못이라고 본] 그 문제가 제기될 필요가 없었거나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생산적으로 논의될 수 없었을 겁니다. 아니면 그 텍스트에서 내가 간과하거나 읽지 않은 부분이 있었던 게지요."[John Rawls(2000), Lectures on the History of Moral Philosophy, 김은희 역(2020), 『도덕철학사 강의』, 서울: 이학사, pp. 19-20.]

 

따라서 히스의 지적에 만족하기보다는, 롤스의 합당성-합리성 구별 혹은 도덕적 인간관을 방어하거나 정당화하는 논증을 개발하는 것이 후배들의 몫이라 하겠습니다. 롤스가 비교적 간단하게 "민주 사회의 공적 정치 문화와 그 헌법 및 기본법들의 해석 전통"에서 그러한 구별과 인간관을 이끌어낸다고 말한 데서 착안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https://www.civiledu.org/1221에서 제시한 논증이 그러한 착안을 명료하게 표현한 사례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히스의 해명은 어디까지나 하버마스의 정치이론도 롤스의 기준에 따라 '정치적' 이론이 될 수 있음을 보이는 것에 그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즉 이러한 기본 논제를 받아들인다고 하여 자동적으로 하버마스의 롤스 비판이 모두 옳았다는 식으로 추론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히스의 논문을 근거로 하버마스의 이론과 롤스의 이론 간에 상대적 강약을 평가할 수 있는 전제가 마련된 것입니다.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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