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관/객관의 구분은 논의 맥락에 따라 상이한 의미를 갖는다. 이 논의 맥락을 구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중 한 맥락에서 타당한 결론을 다른 맥락으로 그대로 이전시킴으로써 오류를 범하기 쉽기 떄문이다.

 

첫 번째 논의 맥락은 존재론적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주관적인 것은, 그 존재 여부가 인식 주관과 떼어낼 수 없는 관계에 있어 인식 주관이 없어지면 그 대상(사물 내지 현상)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빛의 파장은 객관적이다. 반면에 색은 빛의 파장을 어떤 시각적 감각질로 인식하는 생리학적 구조를 가진 주체가 사라지게 되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주관적이다. 만일 우주의 모든 유정적 존재가 빛의 파장에 청각적으로만 반응하는 감각질을 경험하는 생리학적 구조를 갖고 있고 시각은 아예 갖지 않는다면 색이란 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맥락에서 주관적인 것은 바로 색이라는 현상이지 어떤 존재자가 색감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진술하는 명제가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인간은 색감을 경험한다는 참인 명제이며, 따라서 인간이 모두 죽고 청각만 있는 외계인이 고고학적으로 인간에 대해 탐구하더라도 이 명제는 참이다. 그러므로 색이란 없다라는 진술은 애매한데, ‘색이란 없다색감을 경험할 인식 주관이 없어지면 색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를 의미하는지 인간의 인식 주관이 다양한 빛의 파장에 따라 색감을 경험하지 않는다를 의미하는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전자를 뜻한다면 그 진술은 참이고 후자를 뜻한다면 거짓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인식 주관은 색감을 경험하고, 그러한 인식 주관을 배경적 전제로 두는 논의 차원에서 색이란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미 인간의 인식 주관이나 합의를 배경적 전제로 논의 차원에서 어떤 현상을 언급하며 진술된 것을, 존재론적으로 주관적인 어떤 현상을 포함하는 진술이므로 참거짓을 판정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영역 혼동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여기 종로구 0000로 내 소유 집 문 앞에 빨간 색 사과가 두 개 있다라는 명제는 참이거나 거짓이 될 수 있는 진술이다. 주소 체계라든지, 소유 관념이라든지, 집이라는 개념, 빨간 색이라는 색감, 사과라는 식용 과일 개념 등등은 모두 그런 개념들을 사용하여 대상을 특정할 수 있는 논의 영역 내의 진술임을 가리켜준다. 어떤 사과가 빨간색인지 아닌지는 참과 거짓을 판정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집이 내 소유인지 아닌지도 참과 거짓을 판정할 수 있다. 주체와 사물이 맺는 소유라는 관계는 오로지 법체계를 갖고 있는 인간이 있어야만 존재하는 관계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관계를 주체와 사물이 맺는다는 명제가 참거짓을 판정할 수 없고 그에 대한 어떠한 주장도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두 번째 논의 맥락은 대상(사물이나 현상)의 소재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맥락이다. 이 맥락에서는 인식 주관이 곧 현상이 소재하는 기판이어서 그 인식 주관인 주체가 변경되거나 사라지면 변경되거나 사라지는 현상을 주관적이라고 한다. 반면에 애초에 그 현상이 소재하는 곳이 인식 주관의 기판이 아니어서 그 주관의 기판이 변경되거나 사라지더라도 여전히 존속하는 현상을 객관적이라고 한다. 흥분되거나 불안하거나 사랑스러운 마음이 들거나 관대한 미덕을 갖고 있거나 하는 것은 모두 인간의 신체와 정신에 소재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그 현상이 발생할 기판인 인간 자체가 없어지면 그런 현상은 사라질 것이다. 또 인지치료를 성공적으로 받아서 정신의 구성이 변화되어 같은 상황에 마주해도 불안하지 않게 된다면 불안의 현상은 사라질 것이다. 반면에 어떤 해변가에 쓰나미가 닥쳐오고 있다면, 설사 그 해변가에서 모든 주민들이 대피하고 모든 통신시설과 감지시설이 먹통이 되어 그 쓰나미의 파고를 어떠한 방법으로도 관측할 수 없다 하더라도 쓰나미는 일어난다. 왜냐하면 쓰나미라는 현상이 소재하는 곳은 바다와 해변가이지, 사람들의 육체와 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단히 사소한 의미의 주관과 객관으로서 사실은 특별히 주관과 객관이라는 말을 쓸 가치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어떤 현상은 그 현상이 소재하는 바로 그 기판이 변경하거나 사라지면, 변경되거나 사라진다는 뻔한 이치의 구체적인 적용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태양이 사라진다면 태양빛은 사라질 것이다. 우주가 빅 크런치로 완전히 작은 점으로 쭈그러든다면 퀘이사도 사라질 것이다. 우주가 가속적 팽창을 거듭하면 밤하늘에 보이는 은하는 오로지 우리 은하와 안드로메다은하 밖에 없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기판의 변화에 따라 거기 소재하는 현상의 변화를 가지고서 주관과 객관이라고 이름 붙여 이것을 그 현상을 언급하는 명제의 참거짓 판정가능성에 의의를 갖는다고 보는 것은 참으로 엉터리같은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도 그런 기판에 소재하는 현상이 있다는 진술은 참과 거짓을 판정할 수 있기 때문다. ‘영숙이네 강아지는 자주 못 먹는 간식을 먹게 되어 매우 기분이 좋다.’는 진술은 참이거나 거짓이다. 실제로 그 강아지가 기분이 좋아서 방방 뛰고 있다면 그 진술은 참이다. 그에 반해 그 진술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영숙이네 강아지가 기분이 중립적이거나 나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반대 주장도 참이거나 거짓이다. 영숙이네 강아지가 사라지면 그 강아지의 육체와 정신에 소재하는 매우 기분이 좋음이라는 현상이 사라질 것이라고 해서, 그 현상을 언급하는 진술 자체가 주관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세 번째 논의 맥락이야말로 사람들이 진지하게 관심을 갖는 것으로, 명제의 참거짓, 부당의 판정가능성의 맥락이다. 이 맥락에서는 어떤 명제가 명제태도와 독립적으로, 이유들에 근거하여 참거짓과 당부당을 따질 수 있는 의미 있는 논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면 객관적인 것이고, 명제태도와 독립적으로 이유들에 근거하여 참거짓과 당부당을 따질 수 있는 의미 있는 논의 영역을 가지지 못한다면 주관적인 것이다.

아기를 재미로 고문하는 것은 그르다는 이 맥락에서 객관적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기를 재미로 고문하는 것은 지극히 옳다라고 생각한다 해도, 아기를 재미로 고문하는 것은 그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명제태도와 독립적인 의미 있는 도덕의 논의 영역을 갖는 것은 인간 실천에서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이런 논의 영역을 갖지 못한다면 어떤 진지한 규범의 발령이나 준수는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규범의 발령이나 준수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해야 한다’, ‘해도 된다’, ‘할 수 있다등의 말을 사용하는 것은 수행적 모순이다. 그러므로 수행적 모순을 범하지 않으려면 도덕적 진술의 당부당을 판정하는 논의 영역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특히 도덕을 가치의 최대화나 조화로운 상의 달성이 아니라,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들의 근본적 관계의 유지, 복구, 강화를 위한 관계 구체화에 관한 명제로 이해한다면, 그런 존재들 사이에 합당하게 거부되지 않을 관계란 무엇인가에 관한 진술은 당부당을 판정할 기초를 가질 수 있다.

반면에 저 사람의 외모는 나의 마음에 든다는 이 맥락에서 주관적이다. 이 진술은 그 목적 자체가 자신의 지향적 심적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저 사람의 외모가 마음에 들면 마음에 드는 것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 경우에는 오로지 진술의 진솔성만이 문제되고, 그 진술 내용 자체의 타당성은 문제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할 수는 있겠지만, 참말을 말했을 경우에 그 사람의 외모가 화자의 마음에 드는 것이 타당한지 부당한지를 다툴 아무런 유의미한 논의 영역이 없는 것이다. 그런 논의 영역이 없다고 해도 아무런 수행적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논리학이나 수학의 명제가 객관적이라는 것은 바로 이 맥락에서 객관적인 것이다. 논리학이나 수학의 기호나 등식들이 우주 어딘가에 새겨져 있는 것도 아니다. 즉 논리학이나 수학의 명제의 참과 거짓을 논하고 고민하고 사유하는 감각질 자체는 그 감각질 경험의 주체인 인간이 사라지면 없어진다. 그러나 논리학이나 수학의 명제 자체는 그렇지 않다. 또한 새로운 타당한 수학적 아이디어가 어느 수학자의 머릿속에 떠올랐는데, 그 착상을 손으로 써서 논문에 남기기 전에 비극적으로 강도의 총을 맞고 사망하고 말았다면 그 착상된 정보의 접근가능성은 기판인 그 수학자가 사망함으로써 사라졌지만, 그 아이디어에 담긴 수학적 명제 자체는 참이다. 그리고 전혀 다른 기판을 가진 별개의 후대의 수학잦에 의해 똑같은 명제가 발굴될 수 있다.

그러니 첫째와 둘째의 맥락에서 논리학이나 수학의 사유 경험이라는 현상, 그리고 논리학이나 수학의 특정 정보의 파지 현상이 주관적이라는 이유로, 셋째의 맥락에서 논리학이나 수학의 명제가 객관적이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엉터리이다.

마찬가지로 첫째와 둘째의 맥락에서 도덕의 사유와 준수 경험이라는 현상, 그리고 도덕에 관한 지식의 파지 현상이 주관적이라는 이유로, 셋째의 맥락에서 도덕의 명제가 객관적이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엉터리이다. 그러한 엉터리 짓거리를 규범학에 대해 완전한 문외한인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자신의 책에서 어마어마한 분량을 할애하여 반복해서 자행한 바 있다. 그가 든 주관/객관의 구분 개념은 첫째와 둘째 맥락가 묘하게 섞인 맥락에서 사용되는 것이었는데 이를 확인하고나서 곧바로 세 번째 맥락에서 도덕이나 정의가 완전히 주관적이라는 결론으로 치닿는다. 사고를 엄밀하지 않게 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태도를 보여준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세 번째 맥락으로, 이 맥락에서 도덕의 명제가 객관적이지 않고 주관적이라는 점을 입증하려면, 도덕 명제를 표현하는 영어 문장이 원자의 구조 내에 아로새겨져 있지 않다거나 흡입하거나 접촉하게 되면 도덕적 행동으로 사람을 자동적으로 이끄는 도덕입자(morons)가 어떠한 물리학 장비에 의해서도 검출되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고는 만족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 번째의 맥락은 전혀 건드리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도덕의 명제가 도덕을 사유할 수 있는 주체의 명제태도와 독립적으로 당과 부당을 의미 있게 논의할 수 있는 논의 영역을 가지지 못한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부터 좌초될 운명에 처한 기획(non sequitur)이다. 왜냐하면 도덕의 명제의 당부당이 의미 있게 논의될 수 있는 영역이 없다고 본다면, 어느 누구도 진지한 규범 발령과 요구를 할 수 없고 어느 누구도 진지한 규범 수령과 준수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덕의 질서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지적은 도덕의 질서가 물리적 질서가 아니라거나 도덕의 명제 지식의 파지 현상은 그 지식을 파지하고 있는 사람이 죽으면 사라진다는 아주 사소한 지적에 불과하다. 그것은 진지한 규범의 발령과 수령이 없는 세계가 수행적 모순을 범하지 않는, 실천적으로 매우 좋은 세계라는 점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

 

물론 세간에서 '도덕'이라는 이름을 붙여 이야기하는 모든 것이 객관적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며, 도덕이 매개변수를 통해 상이한 통상적 기대를 가진 사회에서 어느 범위에서 상이하게 구현될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도덕'이라는 명칭 하에 개진되고 있는 어떤 주장이 그 명칭을 달 자격이 없는지, 그리고 사회의 여건과 기대에 따라 감안할 수 있는 차이의 범위는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 자체가 이유들에 근거하여 이성적 존재에게 객관적으로 답해져야 할 질문이다.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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