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이 진지한 논의의 대상이 된다면, 바로 그것을 구성하는 명제의 참과 거짓이 논증대화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 만일 논증대화의 주제가 다른 것과 쉽게 혼동되고 이탈된다면, 문제된 그것은 적어도 일부 참여자에게 진지한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논증대화에서는 식별된 주제에 따라 적합한 논거와 적합하지 않은 논거가 가려지기 때문이다. 즉 주제를 정확하게 식별하지 못하면 적합하지 않은 논거를 적합한 논거로 잘못 생각하게 된다. 다음과 같은 대화를 살펴보자.

 

A: 지금 기온이 몇 도지?

B: 영하 4도야.

A: 어쩐지 춥더라! 추워서 짜증나 미치겠어!

B: 네가 짜증이 나면 안 되지. 그렇다면 영상 10도야.

 

기온을 묻고 답할 때 주제는 실제 객관적인 사실로서 현재의 기온이다. 왜 영하 4도인지 물으면 기온계가 영하 4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논거를 투입할 수 있고, 그 기온계가 고장 난 것이 아니냐고 물으면 또 고장 나지 않았음을 근거 짓는 논거를 투입할 수 있다. 반면에 지금은 영하 4도라면 좋겠다는 욕구를 A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나, 영상 10도라고 잘못 믿게 되면 믿은 사람의 기분이 좋아진다거나 하는 사실은 이 주제의 논거로 적합하게 투입될 수 없다. 그런 사실은 어떤 주체의 심리적 상태의 예측 등이 언어 행위의 주제일 때만 적합한 논거가 된다. 따라서 B는 적어도 이 대화에서 기온에 관한 명제의 참, 거짓을 진지한 논의의 대상으로 다루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 명제의 참, 거짓은 B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B의 주제는 A의 기분이 좋으냐 좋지 않으냐 하는 것뿐이다. 

 

통치의 쟁점이 진지한 논의의 주제가 된다면, 그 주제는 통치에 관한 논증대화에서 식별되고 고정되어야 한다. 통치에 관한 대화가 그런 주제를 식별하지 못하거나 일견 식별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쉽게 거기서 이탈한다면, 사실은 그것은 진지한 논증대화가 아니며 그저 목적지향적이고 전략적인 수많은 행위들 중 하나로 전락한다. 

 

통치라는 주제는, 통치권능을 부여받은 주요 공직자가 그 통치권능을 어떻게 행사하는 것이 구성원들의 권리를 준수하는 바탕 위에서 그 사회 전체 구성원들의 괴로움을 감소시키고 번영을 추구하는데 적합한가의 주제이다. 따라서 이런 논증대화에서는 어떤 여건 하에서는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합당하고, 저렇게 행동하는 것은 비합리적이거나 비합당하다는 점이 주제로 식별되고 고정되어야 한다. 반면에 이렇게 행동하였다 하더라도 이해될 만하다거나 아니면 다른 당파는 더 나쁘게 행동했을 것이라거나, 그래도 저 당파의 말에 동조할 수는 없지 않는가, 아니면 효과적인 정책 추진과 사회의 통합을 위해서는 비판을 자제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무엇이 주어진 여건에서 바로 그 영역의 정책의 입안과 실행으로서 합리적이고 합당한가라는 논의의 주제를 어리석에 놓치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이다. 

 

일반 사인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 행위와 관련된 진지한 대화를 나눌 때 주제를 혼동하게 되는 경우 매우 비생산적인 결과에 이르게 된다. 어떤 사람이 친구에게서 다음과 같은 조심스럽게 꺼낸 말을 듣는다고 하자. "네가 그 때 그 가게의 주인에게 그토록 벌컥 화를 내는 것은 부적절한 일이었다. 우선 네가 화를 내게 된 이유는 사람에 따라서 달리 설정할 수도 있는 기준을 임의로 절대적인 것으로 내세워 그 가게의 주인도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어서, 그토록 격렬한 언사를 정당화하기에는 불충분했다. 게다가 설사 명백하게 정당한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문제의 제기나 불평은 예의를 지키는 선에서 이쪽의 근거를 제시하고 그래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공적 절차에 따라 처리해야지, 그렇게 그 사람에게 모독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톤과 반말로 이야기하는 것은 부적절했다" 이 때 보통 사람은 아무래도 일단은 방어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아니, 그 사유가 명백하게 정당하지 않다니,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닌가. 그런 짓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짓이다."(a)라거나 "어떻게 그런 다툼이 있는데도 내 편을 곧바로 들지 않는 것이냐. 무조건 이런 다툼이 있을 때에는 친구라면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건 내 편을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b)라거나 "그 가게의 주인이 너무나 화를 내게 만들어서 나도 어쩔 수 없었다"(c)라고 답하는 일이 흔할 것이다. 이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취약함을 감안하면 대단히 이해할 만한 방어적인 태도이지만, 평생을 이렇게 방어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사람은, 적절한 피드백과 부적절한 피드백을 가려낼 기회를 가지지 못해서 자신의 행동을 교정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한 것은 그저 자신의 결론을 다시 수사적으로 힘주어 강조한 것(a), 그리고 그 여건에서의 적절한 행동이 무엇인가라는 주제 대신에 당신은 나의 편인가라는 주제로 교환한 것(b) 또한 부적절한 행동을 하게 된 나름의 변명 사항을 제시한 것(c)이기 때문이다. 만일 정말로 그 행위가 정당하고 적절한 행위였다고 생각한다면, 정면으로 논거를 들어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중용은 단지 감정적으로 단조롭고 평이하기만 한 대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화를 분명하고 단호하게 내야 할 때는 낼 줄 아는 감각을 가진 성향이며, 그 상황은 분명하고 단호하게 화를 낼 상황이었음이 분명하다. 특히 그 사유는 이런이런 실천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기준에 의하면 사람을 대하는 사람이 놓쳐서는 안 될 사유였다"는 식의 논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조언과 충고를 들은 자리에서 곧바로 이런 대화를 실제로 나눌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홀로 차분한 시간에 친구의 조언대로 그 여건에서 덕스러운 사람은 달리 행위했어야 하는지 아니면 자신이 행위한 것이 미덕에 딱 들어맞는 것인지 독백식의 논증대화는 전개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이건 독백식이건 그런 논증대화를 전개하고 그리하여 의미 있는 결론에 이를 수 있는 사람만이, 비슷한 여건에서 자신의 행동을 이후 조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이다. 

사인의 사사로운 문제에서도 생산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식별된 주제는 그대로 고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통치권의 담당자가 결정하고 시행하는 문제에서는 한층 더 강력한 이유로 주제는 정확하게 식별되고 논증대화 내내 고정되어야 한다. 통치권의 담당자가 어떤 정책을 시행하는 것이 합리적이었고 합당하였는가에 대한 평가는 이후 유사한 상황에서 어떤 정책의 시행이 합리적이고 합당할 것인가와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합리성과 합당성에 대한 정확한 평가야 말로 통치의 쟁점에 관한 주된 주제다. 그 이외의 주제는 대단히 부수적인 것이며, 주된 주제가 해결되고 난 뒤에 별도로 논의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은 통치의 쟁점은 완전히 중구난방으로 뻗어나가는 부수적인 주제로 곧바로 변질되어 버린다. 어떤 정책이 비합리적이거나 비합당하다는 비판으로 개시된 논증대화는, 그 정책에 반대했던 정치집단은 더 문제가 많다는 총점 비교에 의한 당파 비교로 곧바로 새어버린다. 또는 그런 정책을 펴는 것이 인간적으로 이해할 만한 했다는 변명(excuse)에 관한 논의로 새어버린다. 더 나아가 그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니 같은 편, 즉 유일하게 올바르고 타당한 집단에 속하는 편으로 볼 수 없다는 식의 당파 마킹 하기의 논의로 전환된다. 심지어는 '이렇게 하면 이렇게 한다고 욕했을 것이고, 저렇게 하면 저렇게 한다고 욕했을 것이잖아'라는 말로 '어차피 욕할 것이므로 욕하는 대상이 되는 정책의 옳고 그름은 아무래도 좋다', 또는 '통치란 욕을 먹지 않는 것이므로 어떻게 해도 욕을 먹을 때는 어떻게 해도 좋다'는 식의 허무주의적인 논의로 빠지기까지 한다. 통치권능 행사를 승인하고 비판하는 주체인 일반 시민들이 이와 같이 주제도 제대로 식별하지 않고 이상하게 다른 주제로 새어버리는 일이 워낙 표준이 되어버리니, 통치권능의 직접 담당자들도 이제는 어떻게 하면 위와 같이 전혀 엉뚱하게 전환된 주제에서 최대한 많이 면피할 것인가를, 통치권능 행사에 관한 설명과 그 행사 자체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고려사항으로 삼아버리게 되었다. 

누구든 개별 정책의 합리성과 합당성의 문제를 당파의 소속 문제나 도덕적 평가가 이미 심하게 혼입된 집단 분류의 네이밍 문제, 그리고 당파들의 비교 문제, 당파의 행위의 변명 사유 존부 문제로 바꾸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금 입헌 민주주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통치의 쟁점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통치권능의 담당자를 선출하고, 그런 사람들이 통치권능을 직접 담당하는 사회는 어느 누구도 권리의 준수와 사회의 번영 그리고 고통의 축소라는 중요한 주제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 사회가 된다. 말은 그저 승인하고자 하는 충동이 드는 쪽에는 긍정적인 감정적 결부가 일어나도록 그리고 불승인하고자 하는 충동이 드는 쪽에 부정적인 감정적 결부가 일어나도록 하는 은밀히 뿌리는 향수와 같은 한낱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도구나 물질에 지니지 않게 된다. 말하기는 원래의 진지한 목적을 잃어버리며 따라서 중요한 문제들이 책임질 사람 없이 표류한채로 심화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입헌 민주주의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주제의 전환, 변질, 이탈에 동참, 또는 그러한 것들은 상찬하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언어적 쓰레기를 양산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에 불과하며, 그런 일을 할 바에는 그저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고 백일몽을 꾸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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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산타할배조아
    2020.12.24 23:34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산타 할아버지가 갖다주신 선물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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