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울프_도덕적성인_SusanWolf_MoralSaint.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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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논문의 개요

 

수전 울프가 도덕적 성인(moral saint)에 관하여 논의한 논문입니다. 

 

여기서 도덕적 성인이란 가능한 최대한도로 도덕적으로 선한 인물을 가리킵니다. 

수전 울프는 우리 스스로 또는 우리 주위 사람 중 누군가가 이러한 도덕적 성인이 되고자 열망하는 것, 그리고 실제로 도덕적 성인이 되는 것이, 우리나 그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인지 질문을 던집니다. 

울프는 도덕적 성인의 여러 특성들을, 원래의 정의인 '가능한 최대한도로 도덕적인'의 조건에서 뽑아내어 이 논의를 체계적으로 전개합니다. 그러한 논의 끝에 울프는 그 질문에 도덕적 성인이 도덕적으로 선한 인물임은 부인할 수 없지만, 예를 들어 나의 자식이 도덕적 성인이 된다면 이는 안쓰러운 일이지, 그 아이를 위해 좋은 일이 아니라고 여길 것이라는 답을 내립니다. 이에 더해 그 사람은 같이 함께 친하게 지내기에도 즐겁지 않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한 사람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의 삶의 풍부함과 탁월성의 많은 부분들이 그 자체의 고유한 작동원리를 갖고 있는 도덕 외적 관심사에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학문탐구 활동을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이 쓸 수 있는 돈과 진리탐구활동에 쓸 수 있는 시간과 정력을 언제나 도덕적으로 더 선하고 효과적인 일에 투여될 수 있는지를 가늠하여 그런 일이 없을 때 또는 그런 일에 최대한도로 기여할 때 조건부로만 학문탐구활동을 한다면, 그 사람은 진리추구활동에 진정으로 몰두하고 전념한 관심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수전 울프는 도덕의 관점이 어떤 사람이 얻고자 분투할 삶을 전적으로 빠짐없이 규정할 수 없으며, 우리가 그래야 할 이유가 있는 것(what we have reasons to do)에는 완전성의 관점에서 포착되는 것들도 부인할 수 없다고 합니다. 

수전 울프가 도덕적 성인의 모델로 삼은 두 가지 대표적인 모델은 공리주의적 모델-사랑의 성인-과 칸트적 모델-이성의 성인-입니다. 공리주의에서는 유일한 궁극적 원리가 자비의 원리이므로 당연히 공리주의적 도덕적 성인의 삶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에 가장 효과적으로 기여하는 것에 의해 수단적으로 구성될 것입니다.  칸트의 경우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즉 상대적으로 제한된 의무 집합, 특히 해서는 안 되는 측면 제약에 해당하는 것들을 철저히 준수한다면 그 이외의 일은 도덕적 평가가 더 이상 미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할 길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수전 울프는 이러한 해석의 갈래는 그럴법하지 않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칸트가 불완전 의무라고 부른 다른 사람들의 복리를 증진할 의무를 어떤 형태로든 도덕적 의의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즉 소극적 의무들을 가장 우선시하는 칸트주의자라고 해도, 그러한 소극적 의무만 준수하는 사람과 소극적 의무 준수에 더해 불완전한 의무까지 더 준수하는 사람을 더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수많은 궁핍한 사람이나 병자를 돌보는 기회가 있을뿐만 아니라 부정의한 체제를 정의롭게 바꾸는 기회도 광대한 현실의 여건에서, 그러한 기회를 도외시하고 사는 삶이 그런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는 사람의 삶과 도덕적인 면에서 다르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은 터무니없다는 것입니다. 

도덕적 성인은 그래서 자기 고유의 진지한 개인적 관심을 아예 가지지 않거나 일견 가진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은 조건부의 매우 피상적인 관심만을 가진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분야에 완전히 전념하기 위해서는 도덕 외적 이유들의 고유한 논리에 의해서 그 분야의 어떤 활동이나 성취를 의의 있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도덕적 성인은 그렇게 할 수 없으므로 언제나 조건부로만 언제든지 자신의 정력과 시간을 돌려 가장 최우선적인 도덕적으로 효과적인 일에 써야 합니다. 따라서 어릴 때부터 도덕적 성인인 사람은 어떤 한 분야에 진지한 관심을 계발하기가 어려울 것이며, 어른이 되고 나서 도덕적 성인이 된 사람도 수단적으로 도덕적인 일에 기여하지 않는 풍부한 취향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울프는 도덕적 성인됨이라는 이상이 만일 이토록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하고, 특히 우리 자신이나 우리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권할 모델이 되지 못한다면, 이러한 점들은 애초에 그러한 도덕적 성인을 도출하게 만든 도덕 이론의 어느 부분이 잘못되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던집니다. 

그러나 울프는 그 질문에 대해서는 '아니요'라고 답합니다. 잘못된 것은 도덕 이론들이 아니고, 오히려 그러한 질문을 던지게 된 전제가 된 가정, 즉 어떤 도덕 이론을 가장 완전한 정도로 준수한 인간 이상이 우리의 구미에 맞지 않는 것이라면 그 도덕 이론은 잘못된 것이다라는 가정이 문제라고 합니다. 즉 도덕적 성인의 매력적임/매력적이지 못함은 도덕 이론의 타당성을 살펴보는 테스트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는 도덕적 성인의 결함이 도덕 이론의 결함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히려 이는 더 메타도덕적인 문제, 즉 도덕적 이유가 삶의 모든 이유를 포괄하는가에 대하여 '그렇다'는 잘못된 답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메타도덕이론으로서, 도덕적 이유가 삶의 모든 이유를 포괄하지 아니하며 삶의 이유에는 완전성의 이유와 같은 다른 도덕 외적 이유들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점을 인정하는 어떤 도덕 이론도 '의무를 넘어선 행위'(supererogation)이라는 개념을 사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여기까지가 수전 울프의 논지인데, 저는 울프처럼 도덕적 성인의 매력적임/매력적이지 못함이 도덕 이론의 타당성 심사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논지는 자신의 논의가 시사하는 바 하나를 빠뜨린 것이라고 봅니다. 즉 저는 울프의 논의를 더 종교하게 확장해보면, 그 논의 자체가 도덕 이론이 그리는 성인의 우리가 그것을 우리 스스로나 우리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에게 권할 정도로 매력적임/매력적이지 못함이 여전히 도덕 이론의 타당성에 하나의 중요한 심사가 될 수 있음을 함의한다고 봅니다. 

이는 울프가 말한 바의 '의무를 넘어선 행위'를 인정하는지 인정하지 않는지의 심사입니다. 의무인 행위는 그것을 이행하는 일이 옳은 일이자 이행하지 않으면 도덕적으로 그르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의무를 넘어선 행위는 그것을 이행하지 않아도 도덕적으로 그르게는 되지는 않지만 그것을 이행하는 경우에는 도덕적으로 존경과 경탄을 받게 되는 긍정적 행위입니다. 

의무를 넘어선 행위 개념은 전제가 되는 다른 구성요소들을 갖고 있습니다. '의무'와 '넘어선 것'이라는 개념인데, 의무는 그 도덕 이론에 의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그런 종류의 사안과 여건에서 그렇게 할 도덕적 이유가 다른 도덕 외적 이유에 대해 우선성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넘어선 것'이라 함은 다시금 '각자에게 속하는 것'과 '각자에게 속하는 것을 도덕적 목적을 위해 투여함'이라는 개념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각자에게 속하는 것이 없다면 그것을 도덕적 목적을 위해 덜 투여하고 더 투여하고를 생각할 수 없으므로, 각자에게 속하는 것 개념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각자에게 속하는 것을 도덕적 목적을 위해 투여할 수도 있고 투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 갈래의 길이 없으면, 넘어선 것과 넘어서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없으므로 이 또한 필수 전제가 됩니다. 

이제 울프의 심사를 그저 직관적이고 선호의 뉘앙스를 풍기는 형태의 '매력적임/매력적이지 못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과 구별되고 고유한 개별적인, 그 자체로 그 사람에게 좋은 통합적인 삶이 있음/그러한 삶이 없음'으로 좀 더 엄밀한 구분으로 바꾸어 보겠습니다. 

울프는 도덕적 성인의 여러 특성들을, 원래의 정의인 '가능한 최대한도로 도덕적인'의 조건에서 뽑아내어 이 논의를 체계적으로 전개합니다. 그러한 논의 끝에 울프는 그 질문에 도덕적 성인이 도덕적으로 선한 인물임은 부인할 수 없지만, 예를 들어 나의 자식이 도덕적 성인이 된다면 이는 안쓰러운 일이지, 그 아이를 위해 좋은 일이 아니라고 여길 것이라는 답을 내립니다. 이에 더해 그 사람은 같이 함께 친하게 지내기에도 즐겁지 않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한 사람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의 삶의 풍부함과 탁월성의 많은 부분들이 그 자체의 고유한 작동원리를 갖고 있는 도덕 외적 관심사에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학문탐구 활동을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이 쓸 수 있는 돈과 진리탐구활동에 쓸 수 있는 시간과 정력을 언제나 도덕적으로 더 선하고 효과적인 일에 투여될 수 있는지를 가늠하여 그런 일이 없을 때 또는 그런 일에 최대한도로 기여할 때 조건부로만 학문탐구활동을 한다면, 그 사람은 진리추구활동에 진정으로 몰두하고 전념한 관심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수전 울프는 도덕의 관점이 어떤 사람이 얻고자 분투할 삶을 전적으로 빠짐없이 규정할 수 없으며, 우리가 그래야 할 이유가 있는 것(what we have reasons to do)에는 완전성의 관점에서 포착되는 것들도 부인할 수 없다고 합니다. 

수전 울프가 도덕적 성인의 모델로 삼은 두 가지 대표적인 모델은 공리주의적 모델-사랑의 성인-과 칸트적 모델-이성의 성인-입니다. 공리주의에서는 유일한 궁극적 원리가 자비의 원리이므로 당연히 공리주의적 도덕적 성인의 삶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에 가장 효과적으로 기여하는 것에 의해 수단적으로 구성될 것입니다.  칸트의 경우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즉 상대적으로 제한된 의무 집합, 특히 해서는 안 되는 측면 제약에 해당하는 것들을 철저히 준수한다면 그 이외의 일은 도덕적 평가가 더 이상 미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할 길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수전 울프는 이러한 해석의 갈래는 그럴법하지 않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칸트가 불완전 의무라고 부른 다른 사람들의 복리를 증진할 의무를 어떤 형태로든 도덕적 의의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즉 소극적 의무들을 가장 우선시하는 칸트주의자라고 해도, 그러한 소극적 의무만 준수하는 사람과 소극적 의무 준수에 더해 불완전한 의무까지 더 준수하는 사람을 더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수많은 궁핍한 사람이나 병자를 돌보는 기회가 있을뿐만 아니라 부정의한 체제를 정의롭게 바꾸는 기회도 광대한 현실의 여건에서, 그러한 기회를 도외시하고 사는 삶이 그런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는 사람의 삶과 도덕적인 면에서 다르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은 터무니없다는 것입니다. 

도덕적 성인은 그래서 자기 고유의 진지한 개인적 관심을 아예 가지지 않거나 일견 가진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은 조건부의 매우 피상적인 관심만을 가진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분야에 완전히 전념하기 위해서는 도덕 외적 이유들의 고유한 논리에 의해서 그 분야의 어떤 활동이나 성취를 의의 있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도덕적 성인은 그렇게 할 수 없으므로 언제나 조건부로만 언제든지 자신의 정력과 시간을 돌려 가장 최우선적인 도덕적으로 효과적인 일에 써야 합니다. 따라서 어릴 때부터 도덕적 성인인 사람은 어떤 한 분야에 진지한 관심을 계발하기가 어려울 것이며, 어른이 되고 나서 도덕적 성인이 된 사람도 수단적으로 도덕적인 일에 기여하지 않는 풍부한 취향들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울프는 도덕적 성인됨이라는 이상이 만일 이토록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하고, 특히 우리 자신이나 우리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권할 모델이 되지 못한다면, 이러한 점들은 애초에 그러한 도덕적 성인을 도출하게 만든 도덕 이론의 어느 부분이 잘못되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던집니다. 

그러나 울프는 그 질문에 대해서는 '아니요'라고 답합니다. 잘못된 것은 도덕 이론들이 아니고, 오히려 그러한 질문을 던지게 된 전제가 된 가정, 즉 어떤 도덕 이론을 가장 완전한 정도로 준수한 인간 이상이 우리의 구미에 맞지 않는 것이라면 그 도덕 이론은 잘못된 것이다라는 가정이 문제라고 합니다. 즉 도덕적 성인의 매력적임/매력적이지 못함은 도덕 이론의 타당성을 살펴보는 테스트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는 도덕적 성인의 결함이 도덕 이론의 결함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히려 이는 더 메타도덕적인 문제, 즉 도덕적 이유가 삶의 모든 이유를 포괄하는가에 대하여 '그렇다'는 잘못된 답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메타도덕이론으로서, 도덕적 이유가 삶의 모든 이유를 포괄하지 아니하며 삶의 이유에는 완전성의 이유와 같은 다른 도덕 외적 이유들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점을 인정하는 어떤 도덕 이론도 '의무를 넘어선 행위'(supererogation)이라는 개념을 사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2. 논지의 확장 및 정교화 

 

여기까지가 수전 울프의 논지인데, 저는 울프처럼 도덕적 성인의 매력적임/매력적이지 못함이 도덕 이론의 타당성 심사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논지는 자신의 논의가 시사하는 바 하나를 빠뜨린 것이라고 봅니다. 즉 저는 울프의 논의를 더 종교하게 확장해보면, 그 논의 자체가 도덕 이론이 그리는 성인의 우리가 그것을 우리 스스로나 우리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에게 권할 정도로 매력적임/매력적이지 못함이 여전히 도덕 이론의 타당성에 하나의 중요한 심사가 될 수 있음을 함의한다고 봅니다. 

이는 울프가 말한 바의 '의무를 넘어선 행위'를 인정하는지 인정하지 않는지의 심사입니다. 의무인 행위는 그것을 이행하는 일이 옳은 일이자 이행하지 않으면 도덕적으로 그르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의무를 넘어선 행위는 그것을 이행하지 않아도 도덕적으로 그르게는 되지는 않지만 그것을 이행하는 경우에는 도덕적으로 존경과 경탄을 받게 되는 긍정적 행위입니다. 

의무를 넘어선 행위 개념은 전제가 되는 다른 구성요소들을 갖고 있습니다. '의무'와 '넘어선 것'이라는 개념인데, 의무는 그 도덕 이론에 의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그런 종류의 사안과 여건에서 그렇게 할 도덕적 이유가 다른 도덕 외적 이유에 대해 우선성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넘어선 것'이라 함은 다시금 '각자에게 속하는 것'과 '각자에게 속하는 것을 도덕적 목적을 위해 투여함'이라는 개념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각자에게 속하는 것이 없다면 그것을 도덕적 목적을 위해 덜 투여하고 더 투여하고를 생각할 수 없으므로, 각자에게 속하는 것 개념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각자에게 속하는 것을 도덕적 목적을 위해 투여할 수도 있고 투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 갈래의 길이 없으면, 넘어선 것과 넘어서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없으므로 이 또한 필수 전제가 됩니다. 

이제 울프의 심사를 그저 직관적이고 선호의 뉘앙스를 풍기는 형태의 '어떤 도덕이론에서 말하는 도덕적 성인의 이상이 매력적임/매력적이지 못함'이 아니라, '어떤 도덕이론에서 의무적인 것을 모두 이행했을 때 다른 사람의 삶과 구별되고 고유한 개별적인, 그 자체로 그 사람에게 좋은 통합적인 인격적 삶이 있음/그러한 삶이 없음'으로 좀 더 엄밀한 구분으로 바꾸어 보겠습니다.

만일 어떤 도덕이론이 단순히 장려하고 북돋우며 고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도덕 외적 이유들로 뒷받침되는 다른 행위를 하지 않고 바로 그 행위를 해야 하는 우선적인 도덕적 이유를 제시하는 사항들을 모두 준수하고 나서 그 주체에게 다른 사람의 삶과 구별되고 고유한 개별적인, 그 자체로 그 사람에게 좋은 통합적인 인격적 삶이 없다면, 그 도덕 이론에서 도출되는 의무의 요구는 적어도 그 사람을 인격체로서 존중하면서 그 사람에 대한 정당화를 성공적으로 이행한 발령(issue of dictates)은 아니게 됩니다. 즉 '~를 해야 한다'는 말은 상정된 어떤 모종의 형이상학적인 관념에 부합함을 묘사하는 말에 불과할 뿐, 그 명령을 수령하는 행위자에 대한 정당화가 되었다는 점을 징표하는 말은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행위자의 도덕적 권위를 전제하지도 존중하지도 아니하며, 행위자를 단지 동원될 수 있는 자원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행위자는 이에 대하여 자기 고유의 삶과 자신에게 속하는 것에 기반한 정당한 이의(complaints)를 제기할 자격이 없으며 좋음들이 담기는 용기(container)에 불과하게 됩니다. 

공리주의적 성인인 사랑의 성인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최대다수 최대행복에 지향되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사랑의 성인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산출하는 행위를 하면서 스스로도 행복해하는데, 이는 어떤 독립적이고 고유한 기반 위에서 행복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복관을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산출하기 가장 좋은 형태로 주형했기 때문에 생기는 종속적인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의 삶은 일종의 군체 속의 한 원소, 개미떼 중의 한 마리의 일개이뫄 같은 것에 불과하며, 그 자체로 고유한 도덕적 권위를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른 한편 칸트주의적 성인인 이성의 성인 역시 불완전의무를 완전의무에는 후순위이지만 다른 도덕 외적 활동에 비해서는 우선하는 최대화 의무로 받아들이는 한, 완전의무를 준수하고 난 다음의 삶은 모두 다른 사람들의 복리의 증진에 지향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경우 이성의 성인은 사랑의 성인보다 현상적으로는 훨씬 더 비참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성의 성인은 타인의 행복이 곧 자기의 행복이라는 유정적 감각의 일치를 이룰 것이 보장되지 않고, 단지 타인의 행복 증진이 의무이기 때문에 자신의 것을 희생한다는 감각을 그대로 느낄 가능성이 높기 떄문입니다. 

만일 어떤 도덕 이론에서 도덕적인 면을 따질 수 있는, 즉 도덕적 평가가 가능한 모든 선택과 활동이 의무적이라면, 그 도덕 이론은 성인이 되기를 의무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도덕 이론에서 도덕적 평가가 가능한 선택과 활동이라도 의무적인 것과 도덕의 차원에서 장려되고 고무되는 것을 구분한다면, 그 도덕 이론은 성인이 되기를 의무화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런 구분을 긋는 도덕 이론에서 도덕적 성인은 그 도덕 이론에서 규범적으로 가능한 것을 두고 있는 수많은 삶 중의 하나가 될 뿐입니다. 

그런데 공리주의에서는 도덕적 성인이 되기를 의무화합니다. 왜냐하면 공리주의는 개인의 개별성을 부인하고 공리를 궁극적 가치로 삼으며, 그 궁극적 가치를 최대화하는 것이 규범의 모든 근거들을 다 다룬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도덕적 성인이 자신의 삶을 거의 아무런 고유한 흥미도 관심도 즐거움도 남지 않은 핍진적인 것으로 만들더라도, 절체절명의 더 심각한 상황에 있는 사람을 조금이라도 개선할 수 있다면 공리주의는 그 행위가 의무적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공리주의에서는 사실상 살아있는 누구에게나 도덕적으로 유죄 판정을 내리며, 도덕적 성인과의 거리에 따라 그 죄에 따라 받아야 할 도덕적 비난이라는 일종의 양형이 달라지게 될뿐입니다. 여기서 성인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자기 삶이 핍진적으로 된 사람은 아무것도 희생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리주의 도덕 이론에 따르자면 원래 자기 것이 아니며, 그래서 원래 가야 할 대로 정력과 시간과 삶이 향해진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즉 공리주의에서는 자신이 그 행위를 했을 때 최대행복을 증진할 수 있다면 그 행위를 하는 것이 의무적이며, '의무를 넘어선 행위'라는 개념은 아예 그 이론에서 아무런 자리를 갖지 못합니다. 결국 공리주의에서는 도덕적 성인에게 아무런 고유한 인격적 통합성을 가진 개별적인 삶이 남아 있지 아니하고, 또한 공리주의는 도덕적 성인이 되기를 의무화함으로, 공리주의는 결국 개별 인간의 도덕적 권위가 없다는 전제에서 '행복함수'의 값을 최대화한다는 기술적 의미(in a descriptive sense)에서 진술될 수 있는 것을, 도덕적 권위를 존중해야만 그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해야 한다'를 써서 발령하는 수행적 모순에 이르게 됩니다. 

반면에 칸트주의에서 완전 의무와 불완전 의무의 구분은, 후자에 '의무'라는 명칭을 붙였다는 점에서 오도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수행적 모순을 피할 길이 있습니다. 즉 완전 의무를 도덕 외적 이유들에 대하여 우선성을 갖는 도덕적 이유에 의해 명해지는 것들이라고 보고, 불완전 의무 또는 도덕적 차원에서 추가로 권고되는 것들은 도덕 외적 이유들에 대하여 체계적인 우선성을 갖지는 않는 것이라고 본다면, 도덕적 성인되기를 의무화하지는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한정된 의무 집합만을 준수하는 사람들은 도덕적 성인이라는 칭송, '의무를 넘어선 행위'를 한 사람만이 마땅히 받을 수 있는 존경과 찬탄을 받을 수는 당연히 없지만, 그렇다고 하여 누군가게에 잘못을 범하고 그래서 직접 누군가의 정당한 불평에 의해 도덕적으로 그른 행위를 했다고 비난받지는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로써 삶에서는 고유한 자율적 선택이 가능해지며 자기 자신의 삶에 그 자체로 좋은 것들을 선택하고 누릴 수 있는 인격적 통합성을 갖는 주체가 삶 전반에 걸쳐 오롯이 남습니다. 물론 완전 의무와 불완전 의무의 구분은 소극적 의무와 적극적 의무의 구분과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물에 빠진 아이를 자신의 양복을 적시면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 때, 그 아이를 구하는 것은 의무적이며, 그런 의무를 도덕 이론에서 부과하여도 여전히 그 주체에게 속하는 것은 통합성이 훼손되지 않은 채 계속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도덕적 성인'에 대한 논의는 다음과 같은 함의를 가집니다.

 

(1) 어떤 사람이 도덕적 성인이 되는 일은, 그 주체 자신의 삶을 위해 좋은 것으로 볼 수는 없는데, 이는 도덕적 성인에게는 다른 사람의 삶과 구별되고 고유한 개별적인, 그 자체로 그 사람에게 좋은 통합적인 인격적 삶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도덕적 성인이 해야 할 일은 도덕 이론과 기질, 능력, 여건의 세부사항들이 주어지면 곧바로 제한되거나 유일한 목록상 행위로 도출된다. 

(2) 완전성의 이상과 도덕의 이상은 분기하게 되며, 완전성의 이상과 도덕의 이상이 합치한다는 조화로운 상을 역설하였던 고대 그리스의 논의들은 이 점에서 오류를 범하였다. 

(3) 완전성의 이상과 도덕의 이상이 분기할 때, 도덕의 이상을 철저히 따르는 삶을 어떤 도덕이론이 의무화할 때, 그 도덕 이론은 도덕적 성인이 되는 것을 의무화하는 것이다. 

(4) 도덕적 성인이 되는 것을 의무화하는 도덕 이론은, 자유롭고 평등한 개별적인 존재들의 자신들에게 좋은 삶의 관념에 따라 살아가면서 평화롭게 공존하고 공정하게 협동하기 위한 일반적 원리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얼핏 보기에 구별되어 보이는 존재들은 실상은 서로 구별되지 않는 전체의 한 원소에 불과하다는 전제에서 그 전체에 대한 모종의 관념에 부합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그 무엇인가를 각 원소에게 부과하는 도덕 이론이다. 

(5) 따라서 도덕적 성인됨을 의무화하는 도덕이론은 도덕적 명령의 발령과 수령, 준수에 필수적인 전제가 되는 개별 주체의 도덕적 권위의 인정과 상치된다. 

(6) 개별 주체의 도덕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도덕 이론은, 수행적 모순을 범한다. 

(7) 보다 직접적인 검사는 그 도덕 이론이 '의무를 넘어선 행위' 개념이 사용될 자리를 이론에 마련해두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이는 분설해서 살펴보면 (i) 도덕 외적 이유들에 우선하는 의무의 영역과 그렇지 않은 장려와 고무와 상찬의 영역을 구분하고 있는지 (ii) 개별 주체의 삶의 경계와 개별 주체에게 속하는 것의 관념이 있는지 (iii) 그 속하는 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 투여하고 내어준다는 관념이 있는지를 차례로 살펴보는 것을 의미한다. 

(8) 즉 (7)의 각 요소들에 대한 적정한 해명이 없는 도덕 이론은, 도덕적 성인됨을 의무화하며, 결국 수행적 모순을 범하여 모든 인간에게 도덕적 권위를 인정하는 인간 존엄성 원리와 어긋난다. 

<끝>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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