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이 한

추측과 논박1권에 나와 있는 이야기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어떤 지식을 숙고하고 심의하며, 어떤 견해를 견지할 때 칼포퍼의 방법론은 좋은 규준이 됩니다. 황우석 사태 때, 한국사람들이 칼포퍼의 규준에만 합의하고 있었어도 심각한 사회분열이나 광신의 경험 없이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칼 포퍼의 반증주의 사상에 대해서는 따로 소개하겠습니다. 여기서는 과학철학에 대한 이차문헌secondary article에 잘 나오지 않는 내용만을 다루겠습니다.

1. 흄의 경험론에 대한 비판

흄은, 지식의 근원은 ‘경험으로 얻은 감각인상’ 이외에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경험으로 얻은 감각 인상의 규칙 조차도 법칙이라고 일컫기에는 확실한 지식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당구를 이렇게 치면 저렇게 들어간다..라는 지식은, 그것을 옆사람에게 전해 들었다 하더라도 그 옆사람이 직접 쳐봤거나 아니면 그 옆사람을 가르쳐준 사람이 직접 쳐봤거나 하는 ‘경험’에서 나온다. 감각 인상으로부터 직접 얻지 않은 지식들은 일종의 ‘신화’로서 무의미한 이야기라고 흄은 주장한다. 그러나, 한편 당구공을 이렇게 치면 저렇게 공이 나아간다는 것도 ‘인과관계’가 아니라 실상은 시공간적 인접관계라고 한다. 우리는 당구공을 치는 것이 원인인지 아닌지는 결코 알 수 없고(인과관계는 사람의 마음 속에만 있는 것이고), 단지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당구공을 이 방향으로 치면 저리 나아간다는 관찰의 반복일 뿐이다. 따라서 실상 확실한 지식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고, ‘반복’에 의해 생긴 ‘습관의 기대’에 불확실하게 걸쳐 우리 인간은 살아가고 있다고 하였다.

포퍼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진술의 참은 그 진술의 근원 또는 기원을 탐구함으로써 확정될 수 없다. 어떤 지식의 참을 물을 때 우리는 그 근원을 조사하기 보다는 주장된 사실 자체에 대한 조사나 검토로 곧바로 들어간다. (예를 들어 ‘내일 비가 올 것이다’라는 주장을 검사하기 위해서 그 주장을 하게 된 감각인상으로 소급하지 않고 실제 내일 비가 올 것인지 아닐 것인지를 검사한다). 관찰에서 모든 지식의 궁극적인 근원을 추적하는 계획을 수행하는 일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어떠한 보고도 인물, 장소, 사물, 언어용법, 사회적 관습에 대한 배경지식을 십분 활용하여야 하며, 이 배경지식은 결코 모두 감각인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즉, 보고자는 자식의 눈과 귀에만 의존할 수 없고, 이러한 지식구성의 근원을 파헤치려는 시도는 무한 소급에 빠진다.

2) 완전히 순수한 감각인상으로만 이루어진 명제, 또는 관찰은 무력하고 무익하다. 그 관찰한 정보들을 연결시키는 어떠한 이론(그리고 이 이론의 주요 개념들과 논리는 관찰불가능한 지식들로 이루어져 있다)

3) 지식에는 온갖 종류의 근원이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권위를 갖고 있지는 못한다. 지식의 근원에 대한 질문, 즉 발생론적 질문은 다음 질문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 우리는 어떻게 오류를 검출하고 제거하기를 기대할 수 있는가?

4) 흄의 심리학은 세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째는 반복의 전형적인 결과에 대한 것으로서, 어떤 기대나 믿음을 명시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기대나 믿음을 묵시화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자전거 타기를 배울 때에는 이쪽으로 몸을 기울면 저쪽으로 간다..등의 기대가 명시적으로 머리 속에서 작동하지만, 익숙해지면 그런 것은 잊어 버린다). 둘째, 습관의 발생은 대개 반복 이전에 ‘시작된다’. 예를 들어 일찍 일어나는 습관은 그것을 하려고 하는 결단 이후에 발생하는 것이지, 일찍 일어남이 여러번 반복됨으로써 ‘습관’으로 나중에 자리잡는 것이 아니다. 셋째, 법칙에 대한 믿음은 순수한 반복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두 가지 이상의 사태가 ‘반복’이라고 인식하는 것도 ‘유사성’의 해석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 일어난 두 사태를 동일한 ‘틀’로 인식하지 않는다면, 그 틀이 없다면 애초에 반복의 관찰도 있을 수 없다. 즉, 반복의 관찰 전에 ‘틀’이 있는 것이지, 반복의 관찰로 인해 그 해석의 ‘틀’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가장 단순한 반복 조차도 유사성이라는 해석을 거쳐야 한다. 반복은 오직 어떤 이론적 관점 하에서만 반복일 뿐이다.

5) 반복이 기대나 신념을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다. 강아지는 단 한번 화롯불에 데이고도 그 다음부터 화롯불 근처에 가지 않는다. 단 한번의 사태만 겪고서도 기대나 신념은 발생될 수 있다. 개연성이 적은 사태가 일어날 것을 예측한 이론은, 단 한번의 결정적 ‘반박 시도’를 견뎌내고 나면 훌륭한 이론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 이론에 의하면 뉴튼이론이 예측한 빛의 궤도와는 다른 궤도를 예측하게 된다. 이것은 개연성이 매우 낮은 일이다. 과연 그런지 단 한번 실험하고서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진리성이 확정된다. 빛의 궤도를 반복 관찰하고 나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비귀납적인 절차에 의해 지식을 획득하며, 따라서 귀납적 절차에 근거한 흄의 회의주의적 논변은 건전하지 못하다. 오직 이론의 허위성만이 경험적인 증거에서 추론될 수 있으며, 이러한 추론은 순수하게 연역적인 추론이다.

2. ‘확률’이 높은 이론, ‘반박을 당할 가능성이 없는 이론’에 대한 대중적 선호의 비판

높은 확률, 개연성을 가진 이론은 내용이 없으며 설명력도 없다. ‘내일은 비가 오거나 오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은 확률이 100%이지만 아무 말도 담고 있지 않다. 반면에, 내일은 비가 오고, 모레는 비가 오지 않을 것이고, 글피는 비가 올 것이다라는 경험적 사태를 내어 놓은 이론은, 낮은 확률을 가진 이론이다. 이 낮은 확률이 검사된다면, 즉 ‘반증의 시도’가 이루어지고, 그것에 성공적으로 견뎌낸다면 그 이론은 ‘높은 확인도’를 가진 이론으로 볼 수 있다. 과학자로서 우리는 확률이 높은 이론을 찾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설명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잘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사태를 예측하는 이론을 추구한다.

3. 칸트 비판

경험이 우리에게 법칙을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에 법칙을 부과한다는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옳은 전환이다. 그러나 칸트가 틀린 점은, 인간이 자연에 법칙을 부과하는 방식에는 정해진 방법이 없으며 매우 여러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이해할만한 오류이다. 왜냐하면 칸트의 시대에는 뉴튼의 물리학이 일종의 ‘절대지식’으로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류 지성사에서 단 한번의 최후의 ‘궁극적 자연의 법칙’을 알아냈다고 생각했던 시대였다. 처음에 칸트는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처럼 그것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다가, 흄의 논변으로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 칸트는 뉴튼의 물리학이 어떻게 해서 참인가, 어떻게 해서 그것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를 면밀하게 검토하였다.

칸트의 시공간론은 뉴튼의 물리학과 떼어놓고 생각해 볼 수 가 없다. 칸트는 시공간이라는 인식틀이 다르게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인간이 선험적으로 갖고 있는 마음의 법칙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절대 시공간이라는 개념이 불필요하고 허위라는 것을 밝혀 냈다.

결국, 실상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인간은 단 하나의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설명을 선험적으로 결정짓는 ‘인식의 구조’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은 여러개의 신화를 제시할 수 있으며, 이 신화들은 경험적인 논박을 통해서 그 참을 반증받는 테스트를 거친다. 그리고 그 테스트에서 가장 성공한 이론이 우리에게 ‘현재로서는’ 가장 깊이 있는 설명을 주는 이론이 된다. 그러나 이 이론은 ‘인간의 인식구조’가 만들어 낼 수 있는 단 하나의 법칙도 아니며, 이것이 사물에 대한 본질적인 궁극 설명이 되는 것도 아니다.

4. 실재론 옹호

지식에 대한 세가지 견해가 있다.

(1) 본질주의 : 과학자는 모든 합리적 의심을 뛰어넘는 이론들의 진리를 최종적으로 확립하는데 성공할 수 있다. 최고의 진정한 과학적 이론은 ‘본질’ 즉 사물의 ‘본질적 성질’, 현상의 배후에 있는 성질을 진술한다.

비판 : 본질주의는 반계몽적인 철학이다. 현재 성공적인 이론으로 평가받는 설명보다 더 깊은 일반성과 보편성을 가진 이론이 나올 수도 있다. 중력이나 인력을 사물의 ‘본성’으로 치부해버리고 더 깊은 설명을 거부하는 것은 과학의 발전을 막는다. 궁극적인 설명이란 없다.

(2) 도구주의 : 본질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없으며 모두가 현상에 불과하다. 그 현상들을 연결짓는 이론은 도구이며, 계산 규칙에 불과할 뿐이다. 이 계산규칙들의 관계는 실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현상을 예측하기 위해 마련한 편리한 도구에 불과하다.

비판 : 서로 다른 이론들의 위계를 설명하지 못한다. 도구는 논박당하지 않는다. 뉴튼의 물리학은 아인슈타인의 물리학과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이 전적으로 다르다. 도구주의에 의하면 뉴튼의 물리학은 ‘논박’당한 것이 ‘아니며’ 단지 덜 효율적인 도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실제 과학의 발전은 논박과 새로운 신화의 제시로 이루어진다. 즉, 도구주으는 과학적 진보를 설명하지 못한다. 반증을 부정하고 적용을 강조함으로써 도구주의 역시 반계몽적 철학에 빠진다. 이론에는 위계가 있으며, ‘구름이 끼면 비가 온다’라는 지식보다는 ‘음전기와 양전기의 결합에 의해’ 비가 오는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더 실재를 깊이 파고 들어간 것이며, 더 보편성을 가진 좋은 이론이다. 도구주의는 이러한 이론적 위계를 설명하지 못한다.

(3) 시행착오의 이론 : 제 3의 견해

포퍼가 지지하는 견해다. 어떤 이론이 시험 가능하다면, 그 이론은 어떤 종류의 사건들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따라서 그것은 실재에 대한 어떤 것을 주장한다. 그 이론이 더 보편성을 갖고, 이전의 이론보다 더 배후에 있는 것을 더 일반적인 개념으로 설명할 때, 우리는 그 이론이 더 ‘실재’에 가깝다고, 그럼으로써 ‘더 참’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또한 도구주의자들의 착각과는 달리, 모든 일반적 개념들은 성향적이고, 성향 개념 역시 반증가능한 이상 이것의 실재성을 부정할 어떤 논거도 없다.

이론들의 위계는 존재하며, 시행착오를 통해 위계를 더욱 깊이 있게 진행시켜 나가는 것이 바로 과학의 발전이다.

이 이외에도 많은 논의들이 있는데 다 정리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위 논의가 흥미롭다고 생각되는 분들은 일독을 권합니다.
제가 기회가 있으면 추측과 논박 1, 2권을 가지고 강독을 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추측과 논박 2권에는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정치한, 그러나 단순하다는 평을 받는 비판이 나옵니다.
1권만큼 재미는 없지만, 2권 역시 훌륭합니다.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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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12.23 06:17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6년전의 글에 댓글을 달아 죄송합니다.

    제대로 된 학자는 아닙니다만, 그쪽 사회에서 시간을 좀 보낸 사람으로서 저는'도구주의'를 지지하며 다른 많은 과학자들도 그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비판'(포퍼의 비판이겠지요?)에 답하자면, '도구주의'로도 위계가 설명됩니다. 바로 포퍼가 이야기했듯이 어느것이 더 효율적인가, 뉴튼과 아인슈타인의 경우로 보자면 어느 것이 더 소숫점 여러자리까지 정확한가로 위계가 결정되며 과학적진보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 이한
      2012.12.24 00:55
      댓글 주소 수정/삭제
      저도 실재론 논쟁은 잘 모르므로 제가 갖는 의문은 문외한으로서의 의문입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위계'의 의미는 관찰자료의 예측 정확성의 '정도'와는 다른 뜻을 같는 것 같습니다. '정도'라고 한다면 '반증'의 개념과 친화적이지 않게 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태양의 주위를 지구가 공전한다"고 하였을 때, 이 언명은 실제로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단지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고 보고 천문 관측 자료를 해석하는 것이,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보고 천문 관측 자료를 해석하는 것보다 더 정확한 예측값을 내는, 더 효율적인 것에 불과한가?

      즉,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것은 참이 아니다'라는 언명이 가능한가?"에서 도구주의의 답(아니오)은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인간과 동물이 진화하였는가(A) 아니면 2천년 전에 창조되었는가(B)의 문제에서 '어느 것도 참이거나 실재가 아니지만, 다만 A가 더 관찰증거들을 잘 효율적으로 잘 설명하므로 우위에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불만족스러운 일로 보입니다.

      물론 과학자들은 과학제도 속에서 작업하기 때문에 도구주의로도 자신의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철학은 과학자들이 어떤 신념을 가질 때 자신을 잘 수행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도구주의와 실재론이 어떤 '실익'을 과학 탐구자의 입장에서나, 저같은 문외한으로서 수용자의 입장에서나 가져올지에 대해선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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