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6/5 시민교육센터 게시판에 올라왔던 질의 응답


Q) 소봉
몇가지 질문 드립니다.

1
윤리학 수업 중 "동물에게 쾌고감수력이 있는 이유로 그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하자 교수님이 그건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일축하시더군요.
생각해보니 위의 주장은 쾌고-이익을 제일의 도덕적 고려요소로 삼자는 공리주의식의 주장인 것 같아, 의무론에 심정적 지지를 보내는 저로서도 받아들이기 힘들더군요.

그래서 "쾌고가 제1의 도덕적 평가대상은 될 수 없지만 하나의 도덕적 고려요소로는 고려될 수 있지 않는가-즉 동물은 고통을 느낀다->고통을 주는 것은 옳지 않다->동물에 고통을 주는 것은 옳지 않다는 식의 논변이 이루어질 경우 이것은 자연주의적 오류가 아니지 않는냐"고 다시 여쭈었습니다.
요컨대 의무론도 쾌락과 고통-이익을 전혀 도외시할 수는 없고 어떤 식으로든 고려되어야 하지 않느냐(이익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도덕원칙의 도입)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은 무슨 야매같은 말을 하느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시면서 "윤리"와 이익은 본래 어울리는 것이 아니고 그런 것은 상인의 윤리라고 잘라 말하시네요;;

교수님이 말하시는 "윤리"가 의무론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겠는데요, 그러면 애당초 의무론을 기초로 결과론적 요소를 도입하는 것은 체계상 불가능한 것인가요? 만약 그러하다면, 1억명을 살리기 위해 1명의 무고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도 의무론을 취하는 이상 반대해야 하는 건가요? 상당히 상식과 어긋나는 결과로 보입니다..

2
성윤리 시간에 성매매나 포르노그라피는 허용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니 교수님이 "네 어머니나 아내가 성매매한다면 찬성하겠느냐"고 물으시더군요. 제가 아무래도 달갑지는 않을 것 같다고 하니, "자기를 예외로 하는 것은 윤리의 보편화가능성에 맞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논법이 타당한 건가요?

먼저 드는 의문점은, 형법에서는 친족의 경우 일정한 고려를 하고 있는 것처럼 자기 자신(의 가족)의 일과 타인의 일을 같이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가령 강간죄의 법정형을 가중하자는(심지어 사형까지;) 주장이나 간통죄 존속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반대측에게 "네 아내나 딸이라도 그러겠느냐"는 말을 종종하는데요, 이는 그다지 타당성있는 논변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반대로 강간 혹은 간통한 사람의 가족이라면 어떻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요).


물론 "내 가족만 예외로 하고 성매매는 허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타당하지 않음은 너무나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는 않고, 윤리적 원칙이 자신의 일에 적용되는 것에 주저를 느낀다는 것에서 그 윤리적 원칙이 부당하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사람의 이중성은 비판될 수 있을 것입니다(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은, 규범적으로 동성애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미적 취향상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동성애를 혐오하는 것은 이중적인 것은 아닌가요?)    


A) 이한

 1. 동물을 윤리적 고려 대상에 넣어야 한다는 것은 윤리적 적용의 범주 문제이지 자연주의적 오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말씀하셨듯이, ‘고통이 존재한다’로부터 ‘고통을 줄여야 한다’를 바로 도출하는 것은 자연주의적 오류이지만, '어떠어떠한 존재의 고통은 줄어야 한다'는 명제는 이미 가치규범의 명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떠어떠한 존재의’라는 말에서 ‘어떠어떠한’에 무엇이 들어가야 되고 그 경계는 어디인가의 문제입니다. 이는 독립적인 윤리적 주제라고 할 수 있으며 간단히 ‘자연주의 오류’라는 빗나간 화살로 맞출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2. 일단 ‘불필요한 고통을 줄여야 한다’는 것은 인간들 사이에 적용되는 것에는 상당 부분 폭넓은 합의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물론 안락사의 문제처럼 아직 충분히 적용되고 있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의무론은 '이성을 가진 사람들이 자율적인 상황에서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서 공정하게 채택했을 규율'이 무엇인가를 그 기초로 삼는 윤리체계입니다. 즉, '이성을 가진 존재‘는 그 윤리학 체계에서 결론을 이끌어내는 방법론에서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 윤리체계의 결론을 '충분한 이성을 가진 사람에게만' 제한하지는 않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유아의 예입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 ‘유아는 호혜적인 규범을 이해하고 실천할 이성을 가진 사람으로 결국 자랄 것이다’고 반박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평범한 어린이 뿐만 아니라 어린 나이에 죽을 병에 걸린 사람들, 지능이 현격히 낮은 사람들 역시 보편적 윤리체계의 적용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반면에 사후피임약의 사용은 이제 막 수정된 수정란에게는 그 잠재성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권리’를 부여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하지만 의무론에서는 '격률'을 도출해내는 논증의 기초로서 '이성적인 능력을 가진 인간들의 보편적 수용'이 사용되는 것이지, 그렇게 도출된 격률의 적용범위를 '현실적으로 이 격률을 이해하고 호혜적으로 따를 수 있는 사람'만으로 한정시키지는 않는 것입니다.
  만약 현실적인 수범가능성을 기초로 한다면 차별과 배제의 역사가 깊이 새겨져 있는 곳에서 인종차별주의, 국가 쇼비니즘, 남녀차별주의, 배타적 계급통치'를 막을 만한 논변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18c에 부르주아 계급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을만한 나름의 이유를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제국주의 시절에 말이 통하지 않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영국인의 눈에 '이성에 기초하여 도출한 격률'을 상호 수범할 수 있는 존재로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국주의자들이 원주민들을 무차별학살하는 것은 그르다라는 명제를 두고서, ‘자연주의의 오류’를 저질렀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도덕적 격률의 적용범위는, 피터 싱어가 말해왔듯이 확장되어 왔으며, 오늘날에는 적어도 하나의 이상ideal으로서는 '전 세계인의 보편적 인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3. 다만, 이러한 논증으로써 동물과 인간이 완전히 동일한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없습니다. 도덕적 고려에도 법으로 강제하거나 사회제도가 책임져야 할 도덕적 고려(드워킨의 용어에 따르면 moral의 영역)가 있는가 하면, 개인이 무엇이 좋은 삶인가를 물을 때 판단의 기초로 삼는 도덕적 고려(드워킨의 용어에 따르면 ethic의 영역)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동물에 대하여는 ① 아예 ethic의 영역에도 들어가지 않는 것인가 ② ethic의 영역에는 들어가지만 moral의 영역에는 들어가지 않는가 ③ moral의 영역에 인간과 같은 자격을 갖추고 완전히 들어가는가의 세가지 가능한 답이 있을 것입니다.
  우선 ①은 답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하더라도 동물에게도 일종의 고유한 존엄성sanctity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 존엄성은 그 동물의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하는데, 이 능력은 대체로 ‘현재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을 느끼고 이해하며 과거를 일관된 자아로 통합시켜 반추하고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능력을 줄여서 이해관심interest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해관심을 충분히 갖춘 동물을 함부로 대하는 일을 우리는 ‘바람직하지 못한 일’로써자연스럽게 바라보게 되며, 그러한 능력이 없는 동물들에 대해서 우리는 같은 감정을 갖지 않습니다. 집에 들어와서 사람을 귀찮게 하는 모기를 죽였다고 해서 죽이기 전의 나와 죽인 후의 나가 갖는 삶의 선함(good)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올해는 모기 30마리를 죽였는데 전해에는 방충망이 좀 안좋아서 모기 100마리를 죽였다고 해서 올해 더 선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모기의 자리에, 거리에 떠돌아 다니는 고양이를 집어넣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고양이 울음소리가 귀찮다고 해서 고양이의 머리에 대못을 박아 넣었다면 그 사람의 삶을 그 짓을 저지르기 전과 평가적 의미에서 달라집니다. 더군다나 대못을 박아 넣은 고양이가 100마리가 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삶에 뭔가 큰 문제가 있다는 평가의 근거가 될 것입니다. 부모가 되어 자녀를 기르는데, 자녀가 하루종일 돌아다니면서 흙장난을 한다면 우리는 위생에 대해서만 걱정하겠지만, 하루종일 돌아다니며 길 고양이들을 괴롭힌다면 자녀가 뭔가 잘못되지 않았나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는 고양이가 ‘현재 자신에게 주어지는 고통을 느끼고 이해하며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기억하며 미래에도 어떤 삶이 벌어질지를 예측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능력은 침팬지의 경우에 비해서는 현저히 떨어집니다. 인간과 비교하면 더 떨어질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쾌고감수능력’과는 다릅니다. 가상적으로 모기나 파리가 다른 점은 지금 현존하는 모기·파리와 동일하지만 죽을 때 느끼는 순간적인 고통이 10억배 늘어났다고 해서 모기의 이해관심은 고양이의 이해관심보다 늘어나지는 않습니다.  물론 대체로 뇌의 발달과 이해관심능력, 쾌고감수능력은 상관관계를 갖기 때문에 현실세계에서는 이해관심은 쾌고감수능력과 일치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쨌든 의무론에서는 ‘이해관심’을 기준으로 하여 도덕적 고려의 대상을 가려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③ 역시 포괄적인 답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무리 극단적인 동물해방론자라 하더라도 동물의 정당방위권이라든가 동물을 위한 긴급피난이라든가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외딴 곳에서 조난당한 사람들이 애완동물을 잡아먹는 것은 애완동물의 권리를 침해한 것으로 처벌받을 행위가 아니지만, 사람들끼리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이는 살인죄를 구성하게 도리 것입니다. 설사 일부가 moral의 영역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이는 동물에게 ‘인간과 동일한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식이 될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따라서 동물의 윤리적 지위의 문제에 관해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은 최소화되어야 한다는 다분히 독단적인 자연주의적 오류 형식을 취하지 않고서도 진지하게 고려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이 주제가 ‘사람이 아닌 동물’의 윤리적 지위 문제로 편하게 다루어질 수 있는 이유는 B.C.1만3천년 전 인류가 심각한 멸종 위기를 통해 유전자 흐름의 병목 과정을 거쳤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인류의 숫자는 침팬지의 숫자보다 훨씬 많지만, 그 유전적 다양성은 침팬지 사이의 유전적 다양성보다 훨씬 적습니다. 만약 네안데르탈인 등 우리의 친척에 해당하는 다양한 호미니드 종들이 아직도 살아남아 있다면 이 문제는 ‘우리의 종에 속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수준의 이해관심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에 의해서 판가름될 문제임이 보다 명확해졌을 것입니다.
  가상적으로 인류가 지구에 조난당한 외계의 존재와 조우하게 되었는데 그 외계의 존재는 인류와 똑같은 외형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문화와 언어를 쓰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리고 유전자 검사를 해보니 겨우 80% 정도만 일치했다고 합시다. 이 경우에 우리는 그 외계의 존재의 도덕적 지위를 인류의 종에 속하느냐 아니냐로 판가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4. 성윤리 시간의 질문에 대한 교수의 반박은 대단히 그릇된 논리에 기초한 것입니다. 과연 그 교수가 글을 읽고 쓰는 것으로 먹고 살 자질을 갖추었는지 의심됩니다. 법적으로 성매매를 금지할 것인가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 “아내가 성매매를 한다면 찬성하겠느냐?”라는 질문을 가지고 논증을 진행시켜 나가는 것은 아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법적인 권리를 남편이 가진다는 명제를 전제하지 않으면 무의미한 질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 많은 사람들의 행동을 달갑지 않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특정 언론사의 기자로 사는 삶을 대단히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고 하여봅시다.(요즘은 이런 일이 많습니다.) ‘아내가 그 특정 언론사의 기자를 한다면 찬성하겠느냐?’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당연히 ‘달갑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답이 나오겠지요. 그러나 그 ‘달갑지 않음’을 근거로 해서 ‘달갑지 않는다는 느낌을 갖는 사람들A이 달갑지 않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B의 행동을 금지시킬 수 있다’라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은 ‘A가 B보다 더 많은 양의 자유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숨은 명제를 전제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실제로 이슬람권에서는 그런 명제들이 전제됩니다. 남성들은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지, 어떻게 연애할 것인지에 대해서 왈가왈부합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근본주의자는 영국 남자에게 공격적으로 질문합니다. “왜 너희 남자들은 여성들을 창녀처럼 입히고 거리를 돌아다니게 하는가?” 이 질문은 오직 영국의 남자들이 여성들에게 어떤 옷을 ‘입히고 말고 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명제를 전제로 해서만 성립합니다.
  그런 명제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내가 그것에 대해 왈가왈부할 법적인 권리를 갖지 않는, 달갑지 않은 일을 법적으로 허용한다’는 것은 ‘윤리에는 예외가 없다’는 원칙에 전혀 어긋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낙동강에 페놀을 뿌리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말 것을 요하는 내용을 포함하는 법적인 권리를 갖습니다. 반면에 길거리에 지나가는 C씨의 성적 취향에 대해서는 그런 취향을 가지거나 행사하지 말 것을 요하는 법적인 권리를 갖지 않습니다. 어떤 이성애자 부모들은 동성애에 대하여 아무런 혐오도 갖고 있지 않지만 자녀가 동성애자로서 힘든 삶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유에서 자신의 자녀는 동성애자가 아니기를 바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는 그 부모가 ‘예외를 추구하고자 함’이 아니라, 단순히 자신의 삶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평등한 자유권을 옹호하는 자유주의에서 원리상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자신의 견해에 어긋나는 다른 사람의 행위를 허용하는 것은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자유주의의 핵심은 바로 그러한 관용을 이론적으로 구축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이중성’이니 ‘정신분열증’이니 하고 공격하는 공동체주의자들은 ‘헌신하는 공동체의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그릇된 이해, 즉 공동체적 삶은 오로지 동일성의 압력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이해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미적 취향에 비춘다면 우리는 밤새도록 디아블로를 하는 청년들, 아프리카 난민 구호에 평생 한 푼도 보내지 않은 살림이 넉넉한 사람들, 별 마음도 없이 연애를 했다가 상대방에게 헛된 기대를 품게 하여 여러가지를 착취한 뒤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로 떠나는 사람들, 꼴통보수들, 다른 사람을 철저히 자신에게 이익이 되느냐로 가름해서 교묘하게 인간관계를 맺는 사람들 모두를 어떠한 형식으로 처벌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들의 삶을 싫어하는 것과 그들의 삶을 법적으로 처벌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들의 삶을 싫어한다고 하는 것은 ‘윤리에 예외’를 두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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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1.12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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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잘 보고 갑니다!!
  2. 123
    2019.09.12 20:32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이런 사이트가 있는지 몰랐네요.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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