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나는 한 가지 소원을 말했을 뿐이다. 바로 ‘국가안전보장’을 해달라고 한 것이다. 결국 한 단어로 묶일 수 있는 말이다. 다만 당신이 한국 상황을 잘 모를까봐 ‘국가안전보장’이라는 말을 자세히 설명한 것일 뿐이다.”
지니는 코웃음을 친다. “국가안전보장이라는 명사를 사용해 여러 가지 소원을 묶은 편법을 쓴 거잖아. 좋은 말로 할 때 진짜 한 가지 소원만 제대로 말해라.”
문지른 사람이 다시 묻는다. “지니여, 당신이 원하는 것이 여러 가지 소원으로 더 자세히 분석될 수 없는 최소 단위의 단일 사태라면, 나는 그런 단일 사태에 대한 소원을 말할 수가 없다. 지니 당신이 먼저 그런 사태의 예를 들어보라.”
“네가 말한 것 중 한국 군인들이 영양가 높은 식사를 하게 해달라는 소원이면 단일 사태겠지.”
“지니여, 우선 한국 군인의 수가 약 60만 명이다. 그러니 한국 군인들이 영양가 높은 식사를 한다는 사태는 일단 60만 개의 단일 사태가 복합된 사태다. 이 중 10만 명은 여전히 영양가 높은 식사를 못하고 나머지 50만 명만 영양가 높은 식사를 하면 그 소원은 들어주지 않은 거겠지? 그러니 군인 각자에 대하여 영양가 높은 식사를 한다는 사태가 성립되어야 비로소 그 소원이 충족된 것이지. 그러니 이건 단일 사태가 아니다.”
“음, 그건 그렇군.” 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지니가 생각난 듯 말한다. “예를 들어 네가 100억을 갖게 해달라는 소원은 어떠냐? 이게 원래 내가 종종 들어주는 전형적인 소원이거든. 이건 100억이 생긴다는 단일 사태 아니냐? 너 혼자에게만 관계된 것이고.”
문지른 이가 반박한다. “지니여, 그것이 어떻게 단일 사태인가? 100억이 내 소유가 된다는 것도 여러 가지 복합 사태다. 일단 100억이 현금으로든 예금통장으로든 내 수중에 들어와 있고, 그 100억을 지니 당신을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가져갈 수 없는 상태에 놓이며, 그 돈이 위조지폐가 아니라 진짜 지폐일 것을 요구하며, 국세청이 갑자기 100억이 생겼다고 증여세 추정해서 과세를 하지 않도록 따로 조치도 취해줘야 하고, 그 돈이 미래의 지폐가 아니라 현재의 지폐일 것을 요한다. 이들 요건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그것은 100억을 준 것이 아니며 따라서 100억을 갖는다는 사태는 복합 사태다. 만일 100억을 만 원짜리 현금으로 준다면 만 원짜리 한 장이라도 빠지면 안 되니까 그것만 보아도 만 원짜리 지폐가 내 앞에 놓인다는 사태가 백만 개가 복합되어 동시에 성립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니가 말한다. “까다롭게 구는군. 그럼 장동건과 똑같은 얼굴로 만들어주는 건 어떠냐?”
“장동건과 똑같은 얼굴이 되는 것은 장동건의 눈과 똑같이 만들어주고, 코도 똑같이 만들어주고, 입도 똑같이 만들어주고 뿐만 아니라 얼굴 각 부위를 똑같이 만들어달라는 소원들이 복합된 소원이다. 만약 입이 약간 삐뚤어지면 넌 소원을 들어주지 않은 것이니까. 지니여, 아직도 모르겠는가? 우리는 어떤 사태든지 그 사태를 좀더 단순한 요소들로 분해할 수 있고 그러한 요소들이 갖추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충족되지 못하는 사태로 변형시킬 수 있다.”
지니가 무릎을 꿇으며 탄식한다. “아아, 나는 수천 년 동안 세 가지 소원을 말하라고 얘기해왔는데 나의 그러한 말에는 도대체 아무런 철학적 근거도 없었단 말인가?”
문지른 이가 답한다. “그렇다. 당신이 소원 가짓수가 무제한으로 늘어나는 것을 통제하려고 했다면 그 수를 제한할 게 아니라 주체, 시간, 장소의 범위를 제한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자, 그러면 이제 내 첫 번째 소원을 들어주고, 두 번째 소원을 말하겠다. 다만 이번에는 좀 길게 말할 거야. 다 말하는 데 약 한 달이 걸릴 예정이라네, 중간 중간 숨을 고르며 쉬었다가 말할 거니까 잘 기억하시게.”
이 이야기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세 가지’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쓰고 있기는 하지만, 특정한 문제의 맥락에서 누군가 정확성을 문제 삼을 때는 일상적인 용법만을 내세우면서 대처할 수 없다.
<개그 콘서트>에서 “여자들이 싫어하는 것 네 가지”로 인기 없는 것, 촌티 나는 것, 키 작은 것, 뚱뚱한 것을 뽑았을 때에는 네 가지라는 언어의 용법에 대해 아무런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개그를 하는 맥락에서 가짓수를 세는 방법이 그렇게 정해져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지니 이야기처럼 그 가짓수를 가지고 어떤 권리와 기회, 성취에 제약을 가하려고 하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 단어가 정확히 어떤 의미를 갖느냐에 큰 소원을 하나 더 들어주느냐 마느냐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니는 자신이 설정한 경계를 정당화할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그 근거는 ‘단어 자체가 갖고 있는 자연스럽고 명백한 의미’에서 제시될 수는 없다. 그런 의미란 없다.
언어, 맥락 속에서 파악하기
공부는 문제 해결의 과정이고,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문제를 정식화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를 정식화하고, 그 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론하고 논증할 때, 사용하는 언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모든 것이 그간 지니가 해왔던 것처럼 실상 토대가 없는 일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좋은 일이 있으면 그만큼 나쁜 일이 생긴다”라는 가설을 증명하는 것을 공부 목표로 정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까닭은 그 사람이 어느 날 지갑을 잃어버려서 속이 무척 상해 있었는데, 자신이 무척 원하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방청객 신청이 받아들여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어랏, 마이너스가 있으면 플러스가 있는 게 인생의 법칙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몇 년에 걸쳐 좋은 일과 나쁜 일을 모두 기록하여 방대한 자료를 만들고 그것을 분석하였다. 결론은 좋은 일이 있으면 그만큼 나쁜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 문제에 그렇게 전심전력으로 뛰어들기 전에 검토해보았어야 하는 문제가 있다.
첫째, 무엇이 ‘좋은 일’이고 ‘나쁜 일’인가? 헬스를 할 때 근육에 힘이 들어가 고통스러운 것은 ‘나쁜 일’인가 아니면 근육이 잘 생성되고 있다는 신호이므로 ‘좋은 일’인가? 단 맛이 혀에 느껴지는 것은 쾌락이므로 ‘좋은 일’인가 아니면 비만으로 가는 지름길에 빠져들고 있다는 뜻이므로 ‘나쁜 일’인가? 이걸 확정하지 않으면 ‘귀찮음을 무릅쓰고 발톱을 깎는다’라는 사태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자신이 어떤 상대 평가 시험을 쳤는데, 발표된 정답이 하나 수정되어 자신은 간신히 붙고 반대로 모르는 누군가는 떨어졌다. 그러면 이건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인간사가 다 이렇게 연결되어 있는데 누구의 관점에서 좋은 일과 나쁜 일을 평가할 것인가를 결정하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그러면 이제 자신의 일만 기록하고 분석하는 것은 의미를 잃게 된다.
둘째, ‘생긴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지갑을 잃어버린 것은 자신이 부주의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기자신이 나쁜 일을 ‘한’ 것인가 아니면 자신은 가만히 있었는데 나쁜 일이 저절로 ‘발생된’ 것인가? 방청객으로 초청된 것도 자신이 신청했기 때문이다. 그건 ‘생긴 것’인가 ‘한 것’인가? 이 구분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만일 오늘 직장 상사에게 혼나 서러웠는데, 애인과 멋진 저녁 데이트로 기분을 풀었을 때, 이건 가설을 증명하는 일인가 아니면 스스로 가설에 맞도록 행위한 것인가를 구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 ‘그만큼’이라는 건 무슨 뜻인가? 일단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일어난 정도‘만큼’ 생긴다고 말하려면, 좋은 일과 나쁜 일을 같은 척도로 방향만 달리하여 (-5, +5 하는 식으로) 그 정도를 측정할 수 있다는 전제가 성립해야 한다. 그런데 각 숫자는 어떤 근거에서 경험이나 활동, 사태에 대응하는가. 꼭 그만큼의 숫자를 할당하는 이유가 있는가. 특히 좋은 일끼리, 나쁜 일끼리는 그 우열을 가릴 수 있지만 좋은 일과 나쁜 일을 한 번에 비교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것(A)을 +5로 점수 매기고, 꾸중을 듣는 것(B)을 -5로 점수매긴다고 해보자. 이 둘을 합하면 0이 되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상태의 점수와 같다. 그러나 케이크를 먹고 나서 꾸중을 들은 화요일은, 아무 일도 없었던 수요일과 같은 경험을 한 날이라 볼 수 없다. 저 두 날이 사실 동일한 기분을 경험하는 날이라는 근거를 탄탄하게 세우지 않으면, 여러 경험을 합산하는 의미가 없어진다.
넷째, “좋은 일이 생기면 그만큼 나쁜 일이 생긴다”는 진술은 보편적인 진술이다. 그러므로 그 문장에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라는 말을 생략되어 있다. 이 말이 생략되어 있지 않다면 아무리 자료를 분석하고 공부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한마디도 할 수 없다. 다른 사람에게 “야, 나쁜 일이 있으면 그만큼 좋은 일이 생길 거야.” 위로도 해줄 수 없다. 여기에는 귀납의 문제가 발생한다. 일정 기간 동안 한 사람에게 생긴 일을 분석해서 모든 사람에게 일반화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타당한 근거로 먼저 확정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기록하고 분석해도 나오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의 결과’일 뿐이다. 그 자료로부터 그 결론이 나오는 것을 애초에 보증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맥락과 무관하게 어떤 단어에 본질이 부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단어의 의미는 맥락 속에서 정해지는 것이지 맥락의 배경 없이 의미가 명백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석판’이라는 단어는 석판 모양을 한 물체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석판’이라는 말이 언제나 그 ‘물체 하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공사 현장에서 누군가 “석판!” 하고 외치는 것은 “나에게 석판을 하나 가져와라”라는 의미일 수 있다. 이 경우 석판을 가져다줘야 하는 사람이 석판을 연상만 하고 있다면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모기 잡는 데 망치 쓰기
이제, 헌법 사건을 하나 예로 들어 언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를 가져오는지 살펴보자.
국가가 법률로 어떤 정책을 시행한다. 그렇게 할 때 어떤 행위나 사람들을 하나의 ‘범주’로 묶어서 규제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사람 이름과 장소를 일일이 언급하면서 법을 제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을 시행할 때, 그 정책이 국민의 기본권을 제대로 존중했는지 따져야 한다. 그런데 언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머리에 떠오르는 범주를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게 되면 제대로 검토도 해보지 못하고 논의가 끝나게 된다.
가령 헌법재판소 1993. 5. 13. 선고 92헌마80 결정 사건은, 18세 미만 당구장 출입금지의 위헌성 여부가 문제된 사안이다. 이 사건에서 출입금지를 옹호하는 문화체육부장관의 의견은 다음과 같았다.
“당구장은 실내경기로서 여가를 선용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과거 당구장 내의 질서와 환경 등이 건전하지 못하였고 현재도 일부 당구장에서는 청소년의 흡연, 음주를 방임하거나 도박, 내기당구 등 불건전한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 당구는 일정 수준의 기량에 도달할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경비가 소요되는 한편 미성년자가 절제하기 어려운 오락적 요인 때문에 청소년의 탈선 또는 비행을 조장하는 장소로 인식되고 있음이 현실이다.”
이 의견은 당구라는 행위의 속성을 흡연, 음주, 도박, 탈선, 비행이라는 행위의 속성과 함께 범주화한 것이다. 당시 ‘당구’ 하면 떠오르는 것들을 모두 당구 행위에 밀어넣어 함께 묶었다. 결과적으로 청소년이 당구를 칠 수 있게 해주는 당구장 주인은 청소년의 흡연, 음주, 도박이라는 반反공익을 조장하는 집단으로 범주화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범주화는 그 자체가 어떤 언어의 본질에 부합한다고 옹호될 수도 없고, 본질에 어긋난다고 반박될 수도 없다. 중요한 건 그 언어가 사용되는 ‘맥락’이다. 그 맥락이란 무엇인가? 바로 국민의 기본권에 속하는 활동들이 공익을 해치는 이유가 없는데도 공익을 해치는 활동과 함부로 묶여서 제한받아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관철시키는 맥락이다. 그러므로 기본권 침해를 주장하는 쪽은 “그렇게 묶지 않고도 공익 추구가 가능하다”는 점을 논증하고, 기본권 제한이 합헌임을 주장하는 쪽은 “꼭 그렇게 묶을 수밖에 없다”는 결합 취급의 불가피성을 논증하여야 한다.
이 사건에서 헌법재판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구에는 약간의 신체운동적 요소와 아울러 경기의 속성상 정신을 집중시키고 성격을 침착하게 하는 기능도 없지 않은 것이고 나아가 문화체육부장관도 인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 짧은 시간에 스트레스 해소나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는 등 여가 선용이라는 의미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고 비용 부담의 문제도 승마장이나 골프장에 비해 반드시 과중하다고 하기 어렵다”고 하여 골프와 비교해서 스포츠로서의 속성이 모자라지 않음을 적시하였다.(범주의 재구획) 또한 “음주, 흡연이나 도박의 문제도 당구장에 한해서 문제되는 것은 아닐 것이고”, “당구에 관한 부정적인 시각은 당구 자체의 속성에서 유래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당구장의 시설·환경과 출입자의 성분 때문이라고 보여지기 때문에, 예컨대 학교보건법 제6조 제1항 제13호 소정의 학교와 당구장의 거리를 엄격하게 유지함과 아울러 형법의 도박방조죄를 활용하거나, 청소년기본법 제7조 소정의 사회의 책임을 당구장 경영자에게 강조하거나, 당구장의 시설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한다거나, 학교의 교사나 선도위원들의 적정한 계도방법을 모색한다거나, 학교·직장의 당구부 또는 청소년 전용 당구장을 설치함과 같은 적극적인 해결 방안을 우선적으로 모색해보는 것이 입법 목적에 부응하는 것이라 할 것이며, 그러한 시도조차 없이 무조건 18세 미만자의 출입을 봉쇄하는 규제방법은 합리적이라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라고 판시하였다.
여기서 헌법재판소는 ⓐ당구를 치는 행위는 ⓑ음주, 흡연이 만연한 시설 및 환경과 결부될 수도 있고(ⓐ+ⓑ), ⓒ음주, 흡연 등 탈선 환경과는 무관한 시설 및 환경과 결부될 수도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즉, 국가가 서로 결합되거나 분리될 수 있는 행위를 필연적으로 결합되는 행위로 함부로 다루었다는 점을 논증한 것이다. 이 논증이 성공한다면 국가는 ‘결합취급의 불가피성’을 보여주지 못한 셈이 된다. 한마디로 모기를 잡는데 망치를 써서 옆에 있는 사람까지 다치게 하는 셈이다. 이 사건에서 헌법재판소는 당구장 환경에 대한 통념과 당구 자체의 속성을 분리함으로써, 당구를 골프 같은 스포츠와 달리 18세 미만이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전혀 합리성이 없다고 판시한 것이다.
결국 언어 자체가 본질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고 보게 되면 자의적인 판단에 이르기 쉽다. 언어 사용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단순히 현학적으로 까다롭게 구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제 풀이가 진실로 의미 있는 활동이 되기 위한 전제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