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질서가 무비판적으로 추동하는 방향으로 몸과 정신을 맡기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 중심을 위협하는 자동발화기계들의 자동발화를 듣게 되는 상황에 처한다.

 

출세를 하고, 돈을 많이 벌고, 권력을 휘둘러 다른 사람에게 굴종을 얻어낼 수 있는 지위를 차지하거나, 최소한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는 삶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은 비아냥이 쏟아진다.

 

"그건 네가 경쟁에서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냐?" "현실을 보지 못하는 처사다." "잘 난 것이 없으니까 자기가 못났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정신승리해서 은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아냥들은 상당한 파괴적 효과가 있는데, 그것이 삶의 이유에 대한 '언어'를 교묘히 빼앗기 때문이다. 이런 발화들은 애초에 경쟁, 현실, 잘났다 못났다의 질서를 부인하는 자를 그러한 질서의 관점에서 규정한다. 그래서 현존 질서와 위계적 그림 바깥의 '가치'는 없다는 메타적인 협소성을 강요한다.

 

이것은 순환 논리이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들을 '저글링을 얼마나 잘 하느냐'로 등급을 매겨 그 등급이 곧 그 사람의 가치를 규정한다고 생각하는 사회와, 그 사회의 가치질서를 완전히 받아들이는 A가 있다고 하자. B는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고 자기 삶의 방향타를 다른 중심에서 잡고자 한다. 이 A에게 B가 말한다.

 

B: 나는 저글링에 전 인생을 몰두하는 것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글링 말고도 할 일들은 많다. 그리고 또한 인생의 가치가 저글링을 얼마나 잘 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A: 그건 네가 저글링을 못하니까 자기 위안의 합리화, 정신승리를 하려고 하는 비겁한 수작일 뿐이다. 너의 삶은 저글링을 못하는 만큼 무가치한 것이 확실하다!

B: 내가 저글링을 잘 하지 못하거나, 저글링에 의욕이 별로 없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내 인생의 가치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A: 저글링을 잘 하면 사회에서 인정받는다는 것을 모르는가?

B: 물론 사회는 저글링 잘하는 정도에 따라 사람들을 우대하기도 하고 사람들을 홀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왜 내 인생의 가치를 규정하는가? 과거에 사회는 귀족이나 양반을 우대하고 평민이나 천민을 홀대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인생의 가치를 규정하지 않았다. 사회의 질서가 힘이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로 가치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A: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네 멋대로 가치를 규정할 수는 없다.

B: 물론 그렇다. 그러나 '사회'라는 말로 어떤 공동체를 명명한다 할지라도, 그 공동체가 일률적이고 획일적이고 통일된 만장일치의 가치관을 갖고 있다는 결론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 속에서도 저마다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가치가 맞는 사람들끼리 협동적 네트워크를 꾸리고 살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협동적 그물망 속에 기꺼이 들어가고자 한다. 또한 '멋대로' 가치를 규정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나의 의도는, 사회가 임의로 인정했다고 해서 곧바로 그것의 '가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가치'라고 우리가 이성을 통해서 정말로 인정할 수 있는 것에 내 삶을 정초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저글링'은 하는 사람과 보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점에서는 가치가 있기는 하지만 딱 그만큼이다. 그 이상의 가치는 인플레된 것이다.

A: 그렇다고 해도 네가 저글링 경쟁에서 실패한 자라는 점을 변경하지는 못한다. 너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B: 아니, 나는 기꺼이 내가 저글링 경쟁에 적합하지 않은 자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 점에 대해서 반박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래서 '저글링을 못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한다고 해도 별 이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내 삶의 가치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X는 평균인보다 못생겼다. 그러므로 X의 삶은 가치가 없다, 덜하다"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타당한가?

A: 아니. 그렇지 않다. 나는 평균인보다 못생겼지만 그것이 나의 삶의 가치를 결정짓는 건 아니지.

B: 저글링도 마찬가지다.

A: 그러나 잘생기고 못생긴거는 삶의 아주 자그만 일부분이지만, 저글링은 다르다. 저글링은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B: 저글링이 사회에서 중심적으로 떠받들여지고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X는 평균인보다 저글링을 못한다. 그러므로 X의 삶은 가치가 없다, 덜하다"라는 추론의 논리적 타당성을 조금이라도 더 개선시켜주는 것은 아니다. 그건 잘생기고 못생긴 것에서 인생의 가치를 추론하는 것만큼이나 논리적 오류다. 추론의 타당성은 이성이 결정하지 사회의 임의적인 추세가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A: 저글링의 중요성 때문에 추론의 타당성 차이가 생긴다! 그 중요성을 제멋대로 부인하다니 현실을 모르는 처사다.

B: 당신이 보고 있는 현실은 나도 그대로 보고 있다. 문제되는 것이 '사실'의 보고라면 그 점에서 당신과 나 사이에는 견해 차이가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견해 차이는 가치에 있다. 나는 사회가 부여한 중요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고, 그 근본을 좀 더 파고들었을 뿐이다. 무언가가 중요하고 가치 있다면, 그것은 쾌락을 증대시키고, 고통을 줄이고, 진리와 아름다움을 증진시키고, 사람들 간의 관계를 공정하고 애정이 넘치는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저글링이 여기에 기여한다면 딱 그만큼의 수단적 가치만을 가질 뿐이지, 저글링 자체가 근본적 가치일 수는 없다. 나는 위에서 언급한 근본적인 가치에 기초해서 직접 내 삶의 방향타를 재설정하고자 할 뿐이다. 당신이 계속 저글링 관점 위에서, 저글링 이외의 가치를 평가하려고 한다면, 한 단계 더 들어가야 하는 분석을 일부러 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저글링 순환 논리'다.

A: 아니, 나는 이해를 못하겠다. 저글링이 삶의 전부까지는 아니지만 중요하다. 그리고 잘생기고 못생긴 것도 결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역시 조금 중요하다. 내가 잘생기고 못생긴 것이 결정적이지 못하다고 한 것은 이런 의미다. 이런 포인트들에서 두루 점수를 잘 따야지 전체 점수가 높아지고 그래야지 좋은 인생이 된다. 저글링은 종합점수에서 특히 큰 위치를 차지하므로 매우 중요하다.

B: 당신이 인생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여러가지 측면들에서 점수를 매기는 '심사관'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어떤 측면들을 고르느냐, 어떤 채점기준에 의해 점수를 매기느냐에 따라 그 심사관의 입장은 무수히 많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중 어느 특정 심사관의 입장이, 이 삶을 지금 살아가는 '나' 자신이 수용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A: 당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지배적인 관점이 바로 당신이 수용해야 하는 심사관의 입장이다.

B: 당신은 내 말을 오해하고 있다. '수용해야 한다'는 것은 어떤 질서가 힘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관찰 보고가 아니라, 그 질서를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가치 판단에 민감한 태도다. 그런데 '속성으로 점수 매기기' 관점은 그 삶을 살아가는 입장이 아닌 입장에서 제시된 것이다. 당신이 만약 신체의 이동이 자연스럽지 않게 태어난 사람이라고 하자. 그 경우 '신체의 이동이 빠른 정도'에 따라 당신의 삶을 점수 매긴다는 것을 수용한다는 것은, 당신 삶의 지침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

A: 음, 그건 내 삶이 나쁜 삶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의미를 갖겠지.

B: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그로부터 도출되는가?

A: 좀 더 빨리 이동하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B: 그러나 당신이 아무리 신체를 빨리 이동하려고 여러 수단을 쓴다고 할지라도 평균에 훨씬 못미치는 정도에만 머무를 것이다. 당신이 한계에 달했다고 하자. 이 경우 당신의 인생을 그 측면에 따라 점수를 매겨버리는 것은 수용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나의 하위권 자리에 찌그러져서 신체 이동이 빠른 사람에게 굴종적 태도를 보내고 찬탄해야  한다는 뜻인가?

A: 아니, 나는 그런 뜻으로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B: 그렇다, 1인칭 관점에서 가치를 자기 인생의 방향타로 수용한다는 것은, 어떤 실천적 의의가 있어야 한다. 자의적인 척도의 조합으로 구성된 심사관의 관점은, 무엇이 "나에게" 성공적인 인생인가라는 질문에 답답하면서 살아나갈때, 아무런 실천적 의의도 갖지 않는다.

A: 당신의 반론은 물샐틈이 없다.(watertight). 나는 저글링을 여전히 중요시하지만, 당신이 저글링을 중요시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아무 토대 없는 '반'저글링 정신승리가 아니라, 오히려 근본적인 가치를 검토해서 나온 결론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저글링을 포함한 여러 속성들의 합계 점수로 인생의 가치를 판단한 것은, '능동적인 1인칭 입장'이 아니라, 인생을 사는 것은 이미 고정되거나 끝이난 상태에서 제3자인 심사관의 관점에서 말한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내가 저글링을 중시한다 해도 이런 심사관의 관점은 적절한 토대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다음에 또 이야기하도록 하자.

 

순환 논리는, 이성의 언어를 빼앗는다. 순환 논리와 그 논리에 기초한 비아냥은 현재의 중심 관점에서 이탈한 것을 비난한다는 기계적 반응에 불과하다. 언어적 트릭은 그러한 비난을 그럴듯하게 보이게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어떤 '속성'에 기초한 위계 등급으로 인생을 환원하는 보증되지 않은 가정을 기초로 하고 있다. 어떤 속성에 관하여서건 우리는 위계를 구성할 수 있다. 키, 지능, 돈, 아부실력, 노예근성, 복종심 등등등. 그러나 어떤 척도를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척도가 본래적으로 가치있다는 점을 전혀 보증해주지 않는다. 심지어 진화적 적합도도 자연적 이점에 불과하다. 자손을 많이 남긴다는 것이 인생의 가치를 결정짓는다고 생각할 아무런 가치론적 이유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치에 뿌리박고 있지 않고, 그냥 부유하는 언어들이 오히려 그 본래적 가치를 지닌듯이 납치를 일삼는다. 이것은 언어적 혼동에서 비롯된 심리적 착각이다. 이에 대한 대응은 가치에 뿌리박고 있는 언어를 사용하며, 어떤 것을 가치로 주장할 때 그 근저에 있는 가치는 도대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것은 '가치'가 될 수 있는가? 그건 '가치'라는 용어를 잘못 쓰는 것이다. '가치'는 공적인 어휘이다. 한 특정 개인의 관점에서'만' 바람직한 것은 가치가 아니라 전혀 다른 무엇이다. A가 B를 지배한다면 그것은 A의 지배욕구는 만족시켜줄 지 모르나, 그것은 오로지 그 지배욕구만을 만족시켜주는 것이다. B에게 그 사태를 허용하는 일반법칙은 결코 가치있다고 할 수 없는 일반법칙이다. 그렇다면 A가 스스로 지배욕구를 충족하면서 그것을 가치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언어의 찬탈이 아니겠는가. 그는 자신의 지배욕구 만족을 차라리 '아부리카타부리어버버버'라고 부르고, 자신은 '아부리카타부리어버버버'에 끌린다고, 유혹된다고, 그것에 대한 충동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끝>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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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주희
    2013.12.03 01:24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잘 읽었습니다. 전 자주 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질문을 해 주는 사람이 절실 할 때가 있는데, 변호사님은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능력이 있어 보이네요. ㅋㅋㅋ 부럽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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