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장에서 활용되는 지식체계의 우열을 판별하는 방식에 대한 간략한 언급과 함께
여론의존적 대의민주주의에서 대중이 지식을 검증하는 방식을 묘사하고
그러한 방식이 갖는 문제점과, 지금의 정치체제는 그렇게 도입된 지식을
여과없이 반영하는 것임을 밝히는 글입니다.
대중은 자신의 세계관을 어떻게 검증하는가? I - 퇴행적인 프로그램의 존속-
논의에 앞서, 편의상, 규범 및 방법론 탐구를 포괄하는 단어로 사회과학이라는 말을 쓰겠다는 점을 일러두려고 한다. 왜냐하면 경제학에도 규범경제학이 있듯이, 사회과학은 필연적으로 어떠한 규범적 전제를 포함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절대빈곤선을 규정하는 사회과학적인 통계작업이나, 아니면 정치적 참여의 불균등한 기회분포를 밝혀내는 연구작업이나, 또는 지니계수를 측정하는 통계작업은 모두 어떤 윤리적인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이 윤리적인 전제가 얼토당토 않은 것이라면 그 사회과학은 가치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대중이 얼마나 대통령의 말을 잘 듣는가, 잘 듣게 하려면 어떤 수단이 효과가 있는가를 연구하는 사회과학은 방법론을 훌륭하게 사용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규범적 전제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별 가치가 없다. 개별적인 연구 하나하나는 규범적인 전제가 없을 수도 있지만, 그 규범이 부분을 이루어 공헌하는 연구 프로그램은 규범적인 전제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그러한 규범적인 전제에 대한 성찰도 당연히 사회과학의 정당한 부분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한편, 여러가지 방법론의 우열을 가리기 위해서는, 과학철학적 분석이 필요한데, 이러한 분석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적용하는가도 사회과학 지식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라 보겠다.
그리고 그에 따라, 여기에서는 경험적 가설에 관련된 과학철학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겠으나, 경험적 가설과 직접 관련되어 있지 않은 지식체계 역시 ‘비판적 오류주의’라는 큰 틀에서 동일한 논의가 적용된다.
그렇다면, 이제 사회과학적 지식이란 어떻게 검증되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해서 세밀한 부분으로 들어가면 엄청난 차이가 난다. 우리는 엄격한 실증주의자부터 상대주의적이기까지 하는 실용주의까지 만날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제시되는 입장은 상당한 정도로 편파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이 전적으로 편파적이라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매우 세밀한 부분과, 지식의 심층 수준으로 들어가면 극에서 극으로 갈리는 과학철학적 입장을 만날 수 있지만, 지식의 구체적 수준으로 올라와 보면 사실상 같은 방법을 쓰는 철학자들, 사회과학자들만을 만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주택임차인을 보호하는 방법으로 임차가격 상한선을 정하는 정책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에 대한 어떤 명제가 있다고 하자. "임차가격 상한선을 정하면 주택의 질이 낮아지고, 새로운 주택이 건설되지 않으며, 새로 그 지역에 입주하려는 사람들이 큰 피해를 본다"라는 명제가 있다고 해보자. 이제 우리는 주택임차가격 상한제도를 통과시킬 것이냐 말 것이냐의 실존적으로 급박한 정치적 상황에 놓여 있다. 그냥 한가하게 철학을 심층까지 논하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파이어벤트나 쿤, 로티가 포퍼나 라카토스 또는 빈 학파의 실증주의자들과 다른 방식을 택할까? 택할 수 있다면 어떤 방식을 택할까? 이 명제를 써 놓은 종이를 뒤집어 놓은 뒤에 포커카드를 흩뿌려서 그 흩뿌려진 모양으로 진리치를 결정하는 미신적인 방법을 택할까? 아니면 계룡산 도사한테 물어볼까? 전혀 수용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자기자신들도 '점성술로 이 문제를 연구해봤는데 이런 결과가 나오더라' 하면서 이에 서명한 유명한 점성술사의 리스트를 제공하는 정당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전에 이러한 정책을 썼던 지역에서 일어난 일들의 결과를 어떤 때에 질적 방법을 써서 탐구할지 어떤 때에 양적 방법을 쓸지를 파악하고, 질적 방법을 썼을 경우 그 결과를 계량화할 수 있는지를 다시 고민 한 후, 일정한 원자료가공 방법을 통해 데이터를 정리하고 이를 통해 가설을 검증하여, 그 인과관계의 고리를 가장 개연성이 있는 방식으로 구성하는 일반적인 사회과학방법을 쓴 연구결과가 신빙성이 있다고 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정치적인 결정을 내리는 차원에서, 지식을 검증하는 방식으로는, 일반적으로 사회과학에서 통용되는 방식 이외에 더 나은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임의적으로 전혀 다른 지식구성 방식을 쓰는 주장도 있을 수는 있지만, 그런 주장을 전면에 내세운 정당은 하나도 없었다. 점성술 따위를 기초로 했다고 논거를 마련한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이는 정치적 자살과 다를 바 없다. 다시 말하면, 대중들 또한 '그 우월성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방법론'에 대해서 신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 방법론으로 어떤 정책을 채택하였다는 것이 명백하게 알려지지 않은 상태라면 이러한 정책은 살아남는 것은 물론 지배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이 문제는 II부에서 다루도록 한다)
그렇다면 대중들이 어렴풋하게나마 신뢰하고 있는 사회과학적 방법론, 상대주의자들도 정치적 결정 순간에는 신뢰할 수 밖에 없는 사회과학적 방법론이란, 어떤 원칙들을 가지고 있을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사회과학자들이 이러저러한 방식을 실제로 채택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철학적으로 우월한 검사의 원칙들이 무엇일까를 규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과학자들이 자신의 작업에서 암묵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원칙들은 차이들이 있으며, 이러한 차이들에게 모두 똑같은 점수를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원칙들도 정당하게 평가해서 더 나은 원칙들로 인도하게끔 하는 기초가 될 수 있는 과학철학을 원하는 것이다. 열등한 원칙을 채택하고 있는 과학자들은 연구대상의 성질상 그럴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있고, 또는 연구대상의 성질 덕택에 퇴행적인 연구 프로그램 안에서도 명백히 반증받지 않아서 그러고 있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진화론을 신봉하는 생물학자의 경우에는 전자의 한계 때문이고, 마르크스의 '유기적 자본구성의 하락'이라는 명제로 경제현상을 연구하려는 경제학자의 경우에는 후자의 한계 때문이다.
이 평가의 기준에 대해서 답을 말하기 이전에 포퍼의 반증주의와 관련된 이야기를 간략하게 살펴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철학의 규범적 기준을 마련하려는 시도는 실증주의자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포퍼에 의해 혁명을 맞이하였고, 현재 사회과학의 방법론의 큰 틀은 포퍼의 반증주의에 기초하였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매우 단순화하자면 이는, 세계에 대한 가설을 세우고, 자료를 통해서 가설을 반증하려는 시도를 해보고, 이 시도가 실패하면, 가설은 그만큼 오류가 덜한 것으로 즉 우월한 것으로 남아 있게 된다는 틀이다.
논리학에서 P이면 Q이다라는 명제를 살펴보자.
P Q P->Q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T T T
T F F
F T T
F F T
보통 과학적 연구를 하면, P->Q는 구체적인 연구대상과 관련된 가설이되고, P는 전체 이론 또는 가설이 진리냐 아니냐와 관련된 명제, Q는 가설에서 예상한 결과 중 알려진 사실이 된다. 예를 들어서, P는 "임대차 가격 상한제도는 주택의 질을 심각하게 떨어뜨리고, 신규진입자들에게 높은 장벽을 세우며, 장기적인 주택공급의 부재를 가져온다"라는 명제가 된다. 그리고 "뉴욕에서 실시한 임대차 가격 상한제도의 결과"는 Q가 된다. 자, 이제 실제로 조사를 해보니까, 실제로 이론에서 예상한 결과가 사실로 확인되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이론은 참이 되는가?
좀 더 쉬운 예로 설명해보자.
"사람이면 죽는다"라는 명제가 옳다면, 소크라테스는 죽을 것이다. (명제 P->Q)
소크라테스는 죽었다 (명제 Q)
따라서 "사람이면 죽는다"라는 명제는 진리다.
별 문제가 없어 보이는가?
"부산 남자라면 쏠로다"라는 명제가 옳다면, 내가 아는 부산남자들은 쏠로일 것이다.(명제 P->Q)
내가 아는 부산 남자들 전부 한 10명 쯤 되는데, 그들은 쏠로다 (명제Q)
그러므로 "부산남자는 쏠로다"라는 명제는 참이다.
자신이 서울에서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부산남자들을 많이 많이 만나서 그들이 모두 쏠로라는 것을 확인해도, 여전히 자신이 검사하지 못한 많은 경우가 있기 때문에 명제P의 진리는 불확정적인 채로 남아 있는다. 좀 더 구체적인 사고를 들어 보자.
"점성술이라는 지식체계가 진리라면, 가서 점을 보면 맞출 것이다"(명제P->Q)
오늘 점성술사 한테 내 친구들과 함께 가서 점을 봤는데, 신기하게 우리들의 성격을 맞췄다(명제 Q)
그러므로 점성술은 진리다.
"우리 부족의 신념체계가 진실이라면, 지금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올 것이다"(명제 P->Q)
기우제를 지내고 나서 이틀이 지나니까 비가 내렸다.
그러므로 우리 부족의 신념 체계는 진실이다.
기우제를 지내고 나서 비가 온 것은, 단지 우연일 수 있다. 즉, 신념 체계는 틀렸는데, 비가 왔을 수도 있는 것이다. 즉 Q가 진실이라 할지라도 P는 거짓일 수 있다.(진리표의 세번째 줄)
그렇다면, 이 황망한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포퍼는 전칭명제의 진리성을 완전하게 담보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경계함으로써 이 사태를 수습하였다. 우리가 과학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지금 잠정적으로 건전하다고 생각하는 가설이 얼마나 더 잘 검증에 버틸 수 있느냐 뿐이다. 진리표를 다시 보라. 귀납적 검증이 전칭명제의 진리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까닭은 P의 진리치를 먼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P가 진리라는 것을 먼저 알고 그 다음에 P->Q를 보면 Q의 진리치는 쉽게 알 수 있다. 화살표 방향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P라는 것은 바로 우리가 진리성을 알고 싶어 하는 그 명제이다. 그걸 일단 참이라 전제해야지 다른 검증이 의미를 띤다. 이제, P->Q를 뒤집어 보자. 수학시간에 대우명제라고 배운 것이다. 대우 명제가 원래의 명제와 같다는 것은 밴다이어 그램으로 쉽게 알 수 있다.
~Q->~P
자, 이제 우리는 화살표 방향 대로 검사를 할 수 있게 된다. ~Q가 진리라면, ~P는 진리다. 즉, 예상한 결과와 반대되는 결과가 나오면 P가 틀렸다는 것은 한방으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모든 SWAN이 희다"라는 명제의 진리치는, 아무리 흰 SWAN을 많이 확보해도 보장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검은 SWAN을 하나만 확보하면 "모든 SWAN은 희다"는 명제의 진리는 한방으로-즉, 거짓으로-확정된다. 기우제를 지냈는데도, 비가 안오면, 부족의 신념체계가 틀렸다는 것은 확실하게 정해진다.
그렇다면, 과학적 탐구에서 논리적으로 확실한 진리치를 보증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론에서 예상한 결과와 반대되는 결과가 나오는 경우이다. 그 경우에 우리는 확실하게 이론을 폐기할 수 있다. 따라서, 좋은 이론은, 그 이론의 결론과 반대되는 경우를 찾는 시도에 불구하고 계속 못찾는 경우가 된다. 그리고 계속 못찾는 경우에 그 이론은 그 만큼 튼튼한 이론이 된다. 그 이론은 완벽한 참은 아니다. 그렇지만 풍파를 겪어낸만큼 우월하다. 반증이 될 때까지는 잠정적으로 참인 가설이 되는 것이다.
포퍼는 여기서 이론의 우월성을 판별하는 여러가지 기준을 제시하였는데, 자세한 내용은신중섭 교수의『포퍼와 과학철학』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런데 포퍼에 쏟아진 비판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포퍼의 기준이 너무나 엄격해서 실용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론이라는 것은 한 문장으로 표현될 수 있는 독립된 하나의 가설이 아니다. 이론은 검증이나 반증이 불가능한 기초 개념이 있고, 그 기초 개념을 바탕으로 연계된 여러가지 가설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것이다. 그래서 가설이 한 두개가 아니다. 그런데 어떤 이론이 가진 가설이 100개인데, 98개는 맞추고 2개는 틀렸다고 하면, 그 이론을 버려야 하는가? 다음과 같은 세가지 가능성이 있다.
1) 이론은 완전히 틀렸고, 98개를 맞춘 것은 우연이다.
2) 실험설계가 틀렸거나 실험이 부정확해서 실험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
3) 이론이 충분히 탐구되지 못해서, 불완전한 까닭에 잘못된 가설이 부분적으로 나왔다. 실험결과에 맞추어서 고치면 된다.
1)번식으로 생각하고 지식을 탐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소박한 반증주의에 대한 반론). 왜냐하면, 더 나은 지식이 나오지 않는 한, 연구의 패러다임을 전부 소멸시켜 버리면 아예 연구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보통 2)번으로 생각하고 여러번 실험을 되풀이 하다가, 실험결과의 진리치가 충분히 보장이 되면, 이제 3)번의 사고로 넘어가게 마련이다.
다만, 패러다임이 더 발전함에 따라 가설이 300개가 되었는데, 100개는 맞추고 30개는 틀린다, 이 정도 되면 대안적인 패러다임도 경쟁하는 단계가 된다. 사회과학처럼 보다 덜 엄밀한 분야에서는 100개는 맞추고 20개는 틀리고, 150개는 맞추고 50개는 틀리는 놈들이 공존하면서 오랜 시간 계속 경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포퍼의 단순한 반증주의는 '이론의 패러다임적 성질'에 적용되지 못하기 때문에 실용성이 없다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패러다임화 된 과학탐구'는 전혀 그 우월성이나 열등성을 판단하지 못하는 바보 상태에 머무르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반증주의적인 논리를 참고하면서도 실용성있는 규준을 마련할 수가 있다.
근대이전의 부족 신념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부족의 신념체계가 옳다면 요번에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온다'라는 명제가 있다. 그런데 요번에 기우제를 지냈는데, 비가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부족의 신념체계는 바로 기각되는가? 그런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기우제 지냈는데 비가 계속 안온 경우가 있다. 우리 집 할아버지는 50년 동안 기우제를 지내봤는데, 25년 정도는 비가 안왔다고 한다. 그래서 물어봤다. '할아버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아아, 우리 부족의 신념체계는 기각되는 것입니까?' 그러자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에끼 이놈, '정성'이 부족해서야 정성이!'
할아버지가 한 짓을 바로 '임기응변적 가설 부가'라고 한다. 영어로는 ad hoc 가설이라고 한다. 이론의 예상결과가 들어맞지 않자, 새로운 가설을 첨가한 것이다. 즉 "기우제를 지내고, 그 기우제가 온 '정성'이 담겨 있어야지만, 비가 온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 부족 할아버지가 하는 짓을 사회과학자들도 많이 한다. 실험결과가 이론의 예상과 어긋났을 때, 많이들 택하는 3)번의 해결책 중 상당수는 애드 호크적 가설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변수를 도입한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없다. 그런 짓을 안 하는 패러다임이 없으니까. 새로운 변수를 도입하는 것은 이론을 정교화하기 위해 필수적인 조치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서, 케인즈는 '투자성향'과 '저축성향' '유동성 선호성향'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서 불황시기의 자본시장이 청산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한 셈이다. 에릭 올린 라이트는 계급 개념을 착취중심적으로 재개념화해냄으로써 중간계급의 문제를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새로운 변수를 도입하고, 새로운 가설을 첨가하는 것이 잘못된 짓인지 아니면 잘된 짓인지 판별한 방법은 무엇인가?
상대주의자들이나, 단순한 실용주의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전혀 답해 줄수가 없다. 그들은 '효과가 있는 이론'은 다 좋다는 식으로 답한다. 그러나,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별하는 것 역시 이론이 하기 때문에 어떤 규준 없이 이론을 다듬는다는 것을 망각한 소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시 우리는 포퍼의 후계자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그는 바로 라카토스이다.
라카토스는 '패러다임적 이론의 성격'이나 '관찰의 이론의존성' ‘공약 불가능성’과 같은 현대과학철학의 발전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그러한 도전에 응답하고자 하여, '퇴행적' '발전적' 패러다임 이론을 만들어 내었다.
패러다임은 가설 하나로는 기각될 수 없다. 그리고 어느 패러다임이 거짓이다라고 확실하게 결정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다만, 우리는 그 패러다임이 발전적 패러다임인지, 퇴행적 패러다임인지 알 수있다.
발전적, 퇴행적이라는 말은 이해하기 쉽다. 뭔가 목적이 있는 주체가, 그 목적을 더 잘 달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발전적이고, 그 목적은 비슷하게 달성하면서 괜히 힘만 더 들면 퇴행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목적이 있는 두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철희는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분야를 더 늘려나가고, 그 분야를 수행하는 행동들을 지혜롭게 배치하고, 항상 활기차게 살아간다고 해보자. 반면에 영수는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분야는 그대로 둔 채, 자신은 왜 행복하지 않을까 자아를 막 분석하면서 행복하지 못한 이유들을 마구 생각해 내고 남들을 비난하면서 골방에 틀어박힌다고 하자. 철희는 발전적인 삶을 살고 있고 영수는 퇴행적인 삶을 살고 있다. 영수는 그런 생각에 골몰해서 여러가지 이론들을 만들어낼수록, 비난할 대상을 더 많이 발견할 수록, 퇴행한다.
마찬가지로, 이론이 새로운 가설을 첨가하고, 개념들을 고치고, 변수를 도입함으로써 목적(대상을 예측하고 인과관계를 설명한다는 목적)을 더 잘 달성한다면 그 이론 패러다임은 발전적이다. 다음과 같은 평가기준들을 생각할 수 있다.
1) 경험적으로 검토될 수 있는 가설들의 수가 늘어난다.
2) 이전에는 경험적으로 검토될 수 없었던 개념들을 고쳐서 경험적으로 검토될 수 있도록 만든다. 또는 경험적으로 검토되지 못하는 개념의 수를 줄인다.
3) 이전에 하지 못했던 예측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4) 이전에 설명하지 못했던 인과관계나 실험결과를 정합성 있게 설명한다.
즉, 대상의 예측과 이해라는 목적을 더 잘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퇴행적인 패러다임은 이 반대이다.
1) 경험적으로 검토될 수 있는 가설들의 수를 줄인다.
2) 이전에는 경험적으로 검토될 수 있었던 개념을 고치거나 개념을 첨가해서 경험적 검증이 불가능하게 만든다.
3) 예측량이 늘어난게 없다.
4) 설명하지 못했던 사항들을 설명하는 것도 없다.
케인즈의 새로이 도입된 개념들은 모두 발전적 패러다임의 1) 2) 3) 4)를 만족시킨다. 저축성향이나 유동성 선호 성향은 직간접적으로 측정될 수 있는 것들이다. 반면에 부족신념에 도입된 '정성'이라는 개념은 퇴행적인 패러다임을 1) 2) 3) 4)를 모두 만족시킨다. ‘정성’은 오로지 비가 오느냐 안오느냐라는 이전의 가설 속에 이미 들어 있던 변수, 그 변수를 결정짓는 관찰결과를 통해서만 측정된다. 즉, 사실상 새로이 독립적으로 측정되는 요소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요소를 도입하는 것은 퇴행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정성'이라는 개념이 도입되지 않은 가설은, '비가 오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이다'라는 명백히 반증가능한 가설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런데 '정성'이라는 측정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아예 스스로가 거짓일 가능성을 완전히 없애 버리는 것이다. 또한 ‘정성’은 오직 그 이유로 가설 속에 도입된 개념이다.
이것이 극한으로 가게 되면 독단이 된다. 독단은 극단적으로 퇴행적이다. 독단은 스스로가 잠정적으로만 유용한 가설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진리라고 전제해 버리는데, 이것은 논리학적으로 보았을 때 불가능한 사항을, 신념으로 어거지로 매꾸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P가 참이라는 것을 Q의 관찰결과를 통해서 보증할 수 없다) 독단적 패러다임은, 절대적 진리가 전제되어 있는 책이나 명제들을 중심으로 해서, 그 명제들이 경험적 결과에 반하게 되면, 절대 반증될 수 없는 형태로 스스로를 숨긴다. 예를 들어서 기독교는 처녀임신이나 해가 멈춘다는 성경의 기록들을 '기적'이라는 개념으로 처리해 버린다. '기적'은, 그 자체가 일상의 과학법칙으로부터 벗어낫다는 개념이므로, 아무리 지금 자연상태의 원리를 탐구해 보았자 반증될 수가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독단의 형태를 띠고 있다. 독단이라고 해서 전부 사라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 뿐만 아니라 알게 모르게 사람들은 여러가지 독단을 갖고 산다. 독단의 채택은 실존의 한 부분을 이룬다. 그러나 독단은 자신의 실존 방향을 결정짓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그것이 타인의 삶에 권력체계를 통해서 영향을 끼친다면 그것은 결론 뿐 아니라 논거로서도 기능해서는 안된다. 즉, 사회적인 정책에 대한 판단이 독단적 패러다임을 오직 참고로 해서 나온다면 그것은 정치적 공론의 장에서 받아들일 수가 없다. (예를 들어서, 이혼을 정책적으로 금지하는 이유로 오직 교회의 교리를 들고 나온다면 이것은 정치적으로 합당하지가 않다. 다만 가톨릭 신자들이 교회의 교리를 기초로 동일한 교리를 믿는 자들로부터 정치적 자원 동원을 하는 방편으로 교회의 교리를 드는 한편, 다른 공적 논거를 든다면 이것은 그 타당성 여부는 별론으로 하고 정치적 공론의 장에서 퇴출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퇴행의 극단에 있는 독단이 아니라도, 우리는 많은 퇴행적인 연구 프로그램들을 만날 수 있다. 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도 퇴행적인 연구 프로그램이다. 잉여가치이론을 통해 유기적 자본구성의 하락이라는 공황의 원인을 밝혀내는 이론은 아직도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학습하고 여러가지 개념들을 추가시켜 나가고 있지만, 한번도 발전적 패러다임의 1) 2) 3) 4)를 만족시켜 본 적이 없다. 전형 논쟁은 전형적으로 비생산적인 논쟁이다. 왜냐하면 논리적으로 잉여가치가 가격으로 전형되는 과정을 밝혀낸다고 해도, 언제 어디서 공황이 발생되는가 하는 예측이라든가, 공황을 효과적으로 완화시킬 수 있는 정책을 새로이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그 이론은 스스로 경험적 이론임을 주창하면서도 ‘이러이러한 현상이 발견되면 이 이론은 반박되는 것이다, 또는 개선이 필요하게 된다’는 정식화를 갖고 있지 않다. 또한 그 이론은 발전적 패러다임의 1) 2) 3) 4)에 맞지 않는다. 그 연구프로그램이 산출할 수 있는 유일한 생산물은 '원래 이윤율이 하락해서 공황이 오게끔 되어 있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윤율 하락이 안일어날 수도 있지만-물론 언제 이러저러한 이유가 작동하는지는 예측할 수 없다-어쨌거나 자본주의는 이윤율이 하락하게끔 되어 있다'이다.
IMF의 경제정책을 뒷받침하는 신자유주의 경제학도 퇴행적인 프로그램에 가까운 성격을 띤다. 왜냐하면 IMF가 어떤 경제정책을 차관도입국가에 관철시켰는데도 계속해서 외환위기가 일어나면 '정성이 부족하다'고 호통치기 때문이다. 십수개의 남미 나라들이 계속 경제불황에 시달린다는 증거는 무시하면서, 그러다가 한국처럼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나라가 하나쯤 나오면 '봐라, 정성이 있으니까 되잖아!'라고 말한다. 핵심적인 정책 패키지들을 거의 다 실천했는데도 외환위기가 일어났다면, 그 정책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봐야 하는데도, 검증의 칼날 앞에 오히려 자신의 정책을 숨기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거의 독단의 수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발전적인 패러다임을 기초로 하고, 개별 가설들은 반증적인 관찰결과로 검사받는 그러한 지식체계만이 온당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개인들이야 자기 삶에서 어떤 패러다임을 택하던 그것은 상관이 없다. 미신을 믿던지, 종교 교리에 따라 살아가든지, 인간은 모두 늑대라는 명제를 채택하든지 상관이 없다. 그렇지만 정책을 선택하는 상황에서 그 논거를 제시하거나 판별할 때에는 적어도 현재시점에서의 발전적인 프로그램과 퇴행적인 프로그램을 구분하고, 잠정적으로 발전적인 프로그램에 따라서 논의를 진행시켜 나가거나 적어도 명백히 퇴행적인 것으로 드러난 프로그램에 따라서는 논의를 진행시켜서는 안될 것이 실천적으로 요구된다. 그러나 현재의 여론의존적 대의민주주의 체제는 그러한 프로그램의 우열 판별을 할 수 있는 논의의 장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대중의 다수가 수행하는 '지식체계 구축'은 단순히 '퇴행적인 프로그램'이라는 말로는 포착이 안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나 신자유주의 경제학자와 대중은 다르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연구할만큼 대중은 시간이 한가하거나 먹물을 먹지 않았다. 자신의 논리를 철두철미 정교하게 정당화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대중의 지식체계 구성은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질까?
대중은 자신의 세계관을 어떻게 검증하는가? II : 생활의 지혜로서 확증의 원리
대중에게는 '생활의 지혜'가 있다. 생활의 지혜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명제들을 명시적으로 노트에다 정리해놓고 사는 사람은 없다. 또는 생활에 필요한 지혜를 조작가능한 변수로 구성해서, 가설형태로 만들어서 실험구 대조구 해서 만족시키는 사람도 없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가장 편하고 이익이 되는 것'을 지혜로서 택한다. 여기에는 사실에 관한 명제건, 아니면 윤리에 관한 명제건 무차별적인 인식의 문으로 들어간다. 사람들은 이것 저것 다 해보고 엄밀히 그 결과를 비교해서 뭔가를 자기 생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서, '서울대를 나온 사람들이 더 능력이 좋다'라는 명제를 생각해 보자. 보통 경제생활에서 공유되는 생활의 지혜는 그나마 상당히 정교한 편이다. 그래도 많은 중소기업 사장들은 이런 명제를 신봉하고 있다. 그런데 중소기업 사장들이 이런 명제를 어떻게 아는가? 학력과 업무능력의 상관관계를 조사한 연구결과를 열심히 탐독하였는가? 그랬다면 그 명제가 거짓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들은 학력에 따라 사람들을 채용하였고, 이미 채용한 관례에 따라 새로이 채용할 사람들의 성질을 판별한다. 만약 이전의 생활관행이 자신에게 명백하게 불리한 사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러한 관행의 기초를 이루는 명제는 결코 기각당하지 않는다. (서울대를 나온 사람들이 명백히 업무능력이 떨어지는 짓을 하지 않는다면 학력신봉명제는 계속될 것이다)
또는 10대 후반기에는 '고등학교'를 다녀야 좋다라는 명제를 보자. 이런 명제를 기초로 많은 학부모들이 자퇴하고 싶어하는 많은 비참한 청소년들을 퇴로없는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 그런데 학부모 자신이 지금의 시대에서 고등학교를 억지로 다녀도 보고, 또 자기 하고 싶은 것도 해보고 두 개 다 해보았나? 그렇지 않다. 그들은 '모든 청소년들은 국가가 관리하는 학교에 간다'라는 명제가 자신에게 명백한 불이익을 주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옳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여자들은 업무능력이 떨어진다. 지도력이 없다'라는 성편견은 어떠한가? 이런 편견을 갖고 있는 대기업 인사권자는, 이러한 성편견을 기각할 기회를 가질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업무능력이 그럭저럭 하고 지도력도 남자에게 뒤지지 않는 다른 회사의 고위 간부를 보면 그 편견이 기각될까? "뭔가 업무 능력이 떨어질꺼야" 하고 검증할 수 없는 어떤 업무능력의 영역을 하나 더 추가해 버릴 것이다. 또는 업무능력이 자타가 공인하도록 탁월한 다른 회사의 중견 여성 간부를 보면 어떨까? "우연이지 우연. 거의 안생기는". 이런 편견을 계속 유지하고 있어도, 그에게는 아무런 불리함이 없다. 회사가 여성을 공정하게 대우한 경우와, 대우하지 않은 경우의 이윤 차이를 그는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항상 공정치 않게 대우해 왔으니까. 그리고 개별 회사에서 여성을 공정하게 대우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회사의 이윤이 명백하게 내려가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 일을 그럭저럭 잘 수행할 수 있는 남자사원들도 많이 경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찰 불가능이다. 관찰 가능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업무능력이 떨어지고 지도력이 없는 여자사원'이다. 이 눈 앞에 명명백백한 증거. 이 인사권자의 눈에, 그것은 자신의 생활의 지혜를 명백히 참으로 만드는 훌륭한 증거이다. 그의 눈은 이런 증거들에서만 탁월한 포착의 능력을 발휘한다. 자신의 가설과 반대되는 증거는 관찰이 어렵거나 관찰이 불가능하도록 만든 상황에서 스스로를 놓아두고, 자신의 가설과 맞아떨어지는 증거는 놓치지 않고 포착한다.
'생활의 지혜'는 대상을 보다 잘 이해하고자 하는 체계적인 동기가 없다. 경쟁하는 사회과학의 연구 프로그램들은 서로를 짓누르고 생존하기 위해 비판하고 비판을 받고 스스로를 정교하게 만들기 위해서 고심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직장생활하고 남는 시긴에 티브이만 보는 대중들은 자기가 암묵적으로 지니고 있는 생활의 지혜를 다른 사람 앞에서 공식적으로 검증받고 논리적으로 철저히 따지는 기회를 가지지 않는다. 설혹 있다고 하더라도 피할 것이다. 왜냐하면 생활의 지혜의 목적은 세계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아니라 '내 삶이 어떻게 더 편할 것이냐'이기 때문이다. 굳이 자신이 잘 믿고 있는 명제에 반하는 의견과 불똥튀기는 논쟁을 벌이는 것은 매우 불편하다. 설혹 논쟁한다고 하더라도 생활의 지혜는 '의견을 수정할 것'이 아니라, '저놈이!'하는 분노를 불러 일으킨다.
대중은, 자신의 생활의 지혜를 퇴행적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그렇게 만들면 아주 살기가 편해질 뿐 아니라, 그렇게 해도 별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퇴행적 사고장애는 결코 "면접시에는 면접관에게 어떻게 보여야 하는가"라고 하는, 자신의 이익과 직결되고 그 결과가 바로 눈에 보이는 문제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일과는 직결되지 않거나 시간적으로 매우 인접해있지 않거나, 자신의 이익 변화라는 결과로서 가늠할 수 없는 문제에만 적용된다.
간단하게 말해서, 대중은 '퇴행적으로 가설을 경험적 검토로부터 숨긴 뒤에, 확증의 방식으로 자신의 세계관의 진리치를 흐뭇해 한다'.
대중은 '반증의 원칙'이나 '발전적 패러다임의 원칙'을 쓰지 않는다. 오직 '확증의 원칙'만을 쓸 뿐이다. 객관적인 검증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기 때문에, 통계를 세심하게 살펴보지 않는다. 명목임금의 상승을 실질임금의 상승으로 은근슬쩍 바꿔치기 하는 대기업의 임금상승률 발표를 그대로 믿고, 1999년 당시 전라도의 불황이 경상도의 불황보다 더 심하다고 하는 경제통계 결과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조차 모른다. 택시 타고 다니면서 택시 기사랑 전라도 욕하는 것으로서-그 부산의 택시 기사는 정밀한 통계자료로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을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 보증된 자료의 출처다-자신의 '증거'를 확보한다.
생활의 지혜는 건드리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잘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실용주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러한 신념은, 늘 고심하고 연구하는 사회과학자의 신념에 비해 전혀 열등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적 장에 나오게 되면, 매우 열등한 결과를 낳는다. 내가 살아오면서 이때까지 만난 황당한 신념들, 그러나 본인은 절대 굽히려고 하지 않는 신념들의 목록.
1) 미국이 모병제를 할 수 있는 까닭은 기부 문화가 발달해 있기 때문이다. (기부문화와 모병제 예산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2) 우리나라의 학력경쟁이 심한 이유는 땅은 좁고 인구는 많기 때문이다. (스웨덴과 핀란드도 땅이 작고 인구도 많은 편이지만 학력경쟁이 심하지 않다. 학력과 학벌이 인위적으로 희소하게 된 자원이라는 특수성을 전혀 모르고 있다)
3) 세상사는 좋은 일이 일어나면 나쁜 일이 다음에 일어나고, 나쁜 일 다음에는 좋은 일이 일어나는 식으로 균형이 맞추어져 있으며, 따라서 각 개인의 행복량은 다 같다. (예를 들어 부자에게는 건강이 안좋다던가 정신적으로 불행하다거나 하는 문제가 있다-그러나 이러한 이론은 반증불가능한 이론이고, 반증사례를 제시하면 행복과 불행의 재개념화를 통해서 빠져나가므로 유의미한 이론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모른다)
4) 김대중 정부의 통계 발표는 모두 거짓이다. (다른 통계자료를 제시하거나 거짓으로 만드는 통계관련 기구의 체계적인 부패를 지적해야만 한다)
5) 북한의 안보 위협에 대응하는 길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방식의 단순한 맞받아치기 전술이다. (억지전략과 관련된 전략게임의 복잡성과 관련된 지식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6) 여자는 집에서 밥하면서 살도록 만들어져 있다. (생물학적 특성에 근거해서 확고한 신념을 가져버렸기 때문에 여성의 능력에 대한 다른 반론들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자연주의의 오류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없다)
7) 인구가 줄어들면 사회의 존속이 위협받으므로, 결혼해서 애를 낳지 않는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어야 한다. (체계적인 자유론이 부재하다)
8) 동성애자의 성적 성향은 환경적 영향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다. (경험적 진술이면서도 반증사례에 의한 반박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한 그것이 청소년기 동성애 억압 정책과 연결되면, 체계적 자유론의 부재와 결합된 자연주의적 오류의 반대해석-자연스러운 것은 억압할 수 없고 놔둬야 하나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라면 얼마든지 억압할 수 있다-이다.)
9) 경제의 중앙계획기관은 주인-대리인 문제에 직면하지 않는다. (교조적인 사회주의 정치주장에 눈이 멀어, 기본적인 경제법칙에 따른 논변을 제대로 상대하고 있지 않다)
10) 그 외에, 명백하게 사실과 반대되는 통계나 경험적 사실을 사실로 믿으면서 검증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앞으로 남은 인생도 살아갈 것 같은 경우 (자료를 찾아볼 생각이 없고, 자료를 찾아줘도 자료를 ‘단순히’ 믿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기존 의견과 일치하는 자료는 ‘믿는다’.) - 이 경우 매우 많음.
11) 이전 논문의 실험이 제대로 되었는가는 후속논문의 발표로 검증할 수 있다. (과학적 검증과 반증의 기본논리조차 모르는 태도다)
12) 싸이언스지가 맞다고 하였으므로 기자는 그 과학적 진실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과학적 진리치는 가설의 체계적 타당성과, 솔직하고 투명한 실험과정, 논리고리에 오류없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권위에서 오는 일종의 종교적인 담론체계라고 오해)
이러한 사례 말고도 황당한 경우는 더 많고, 한 사람을 두고 쟁점 100개를 뽑아서 물어봤을 때 오히려 이런 오류를 다수 저지르지 않는 사람들이 소수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 쟁점에 대해서 명백히 퇴행적이거나 말도 안되는 방법론을 통해 결과에 다다랐다 하더라도 살아가는데 아무런 불편이나 불이익이 없기 때문에 결코 그 결론을 기각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대중 개인개인이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해도 세상은 때때로 바뀐다. 그 이유는 두가지다. 첫째는 지식인들, 바뀐 경제적 기술적 환경들이 개인 개인이 확고히 신봉하게 되는 ‘신념’체계의 기초를 바꾸기 때문이다.(수십년만에 유교문화 및 농경사회문화가 몇가지 피상적인 규칙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라진 것을 보라) 둘째는 대중은 각 쟁점 모두에 대한 결론에 비추어 정치적 권력집단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에-선거는 정책 패키지로 이루어지고 대중은 공식적인 국가권력을 활용할 수 있는 지식집단에 대해서 파악할 기회가 별로 없다-때때로 변화를 할 수 있는 구멍이 생기고, 이 구멍을 통해서 권력을 활용하게 되면 쟁점에 대한 결론 선택에 대한 이익/불이익 구조를 바꿀 수도 있다. (예를 들어 Brown판결을 통해 결과적으로 미연방대법원은 인종분리교육에 대하여 적어도 공공연하게는 옹호할 수 없는 이익/불이익 구조를 만들었다) 셋째, 이렇게 구멍이 있기 때문에 매스미디어 및 학교교육을 통해서 지배계급의 ‘조작’이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확증의 원칙은 반증을 하지 않기 때문에 조작-특히 기존에 억압되는 욕구를 활용한 연상작용을 통한 이미지 조작(ex 세금폭탄이라는 말은 세금을 덜 내고 싶다는 대중의 욕구를 활용해서 정부가 과세대상 기준 안에 드는 사람 뿐 아니라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위협이 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에 매우 취약하다. 따라서 변화는 나쁜 방향으로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대중의 정치적 참여가, 여론 조사나 선거 시기의 투표로만 표현되는 집계적 민주주의에서는, 생활의 지혜가 갖는 이러한 맹점을 극복하기가 힘들다. 이런 맹점은 여론의존형 대의민주주의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또 치유되었다가 또 병리적 환경 때문에 나타났다가 줄어들었다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고질적으로 내재해 있는 문제다.
일상적인 문제나, 정치적인 문제 할 것 없이 이러한 ‘확증의 원리’에 의해서 대중이 사고한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는 정치제도 디자인은 그 합리성에 명백한 한계가 있다. 적어도 자신의 의견이 정치적 영향력과 의사결정력을 갖는 범위에서는 확증의 원리를 버리고 ‘비판적 오류주의’ ‘세련된 반증주의의 원리’를 채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원리를 채택하게 만드는 것은 잘 디자인된 새로운 심의민주주의와 성인대중에 대한 평생교육시스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