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12년>은 남북전쟁 직전의 시기 북부의 자유인인 흑인이 남부 백인노예상에게 사기 당하여 순식간에 자유인의 신분을 잃고 노예로 12년을 살았던 고난의 실화를 기록한 책이다. 수난의 당사자인 이 책의 저자 솔로몬 노섭이 마지막으로 일했던 농장의 노예주는 에드윈 엡스였다.

 

노섭은 엡스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에드윈 엡스에 대해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마음속에 친절이나 정의 같은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교양 없고 탐욕스러운 정신으로 뭉쳐진 거치고 무례한 기운, 이것이 그의 주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노예파괴자’로 알려진 그는 노예들의 정신을 진압하는 능력이 특출났고, 다루기 힘든 말을 잘 부리는 기술을 자랑하는 기수처럼, 이런 평판에 대해 스스로 우쭐해했다. 그는 유색 인종을 자신이 가진 작은 자질에 대해 창조자에게 덕을 돌리는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단지 노새나 개와 다름없는 살아 있는 소유물로 여길 뿐이었다. 내가 그와 똑같은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명확하고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그의 앞에 놓였을 때, 그리고 내가 떠나던 날에 내게도 그와 마찬가지로 부인과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때, 그는 나를 빼앗아간 법을 비난하고 돈만 있다면 내 감금 상태를 폭로한 편지를 쓴 그 사람을 찾아내 죽여버릴 거라며 소리 지르고 욕을 해댔다. 그는 자신의 손해밖에는 생각할 줄 몰랐고, 내가 자유롭게 태어난 것에 저주를 퍼부었다. 그는 노예의 혀가 뿌리째 찢어진다 해도 미동도 없이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들이 서서히 타오르는 불에 재가 되도록 타고 있어도, 개들에게 죽도록 물어뜯기고 있어도, 이득만 된다면야 아무렇지 않게 바라볼 수 있는 그런 냉정하고, 잔인하고, 부당한 인간이 에드윈 엡스였다.(Solomon Norhup, Twelve Years A Slave. 박우정 옮김, 『노예 12년』, 글항아리, 2014, 164-165면)

 

물론 엡스는 자신의 삶이 극도의 부정의를 토대로 운영되고 있음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것도 아주 강렬한 확신을 갖고 그렇게 하였다. 그도 그럴듯이 그것은 적어도 그가 자라나고 살아가는 사회의 지배적인 통념에 합치하였기 때문이다. " 엡스 역시 어릴 때는 훌륭한 자질을 많이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떤 교육을 통해서도 그에게 “신의 눈에는 피부색에 상관없이 모든 이가 평등하다”라는 진리를 이해시키기란 불가능했다. 엡스에게 흑인들은 집에서 키우는 가축들과 전혀 차이가 없는, 한낱 동물에 지나지 않았다. 단지 노예들은 말을 할 수 있으며 가축들보다는 지능이 더 발달해 있기에 여(235)느 동물들보다 좀더 값진 재산이라는 점이 달랐을 뿐이다. 그가 생각할 때 노예에게 마땅한 삶이란 노새처럼 열심히 일하고, 평생 채찍질을 당하고, 발로 차이고 괴롭힘을 당하며, 모자 쓴 백인 주인을 섬기면서도 눈은 언제나 겸손하게 아래를 향하는 그런 삶이었다.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는 그런 사회 통념 속에서 자랐으니 우리를 핍박하던 백인들이 그토록 무자비하고 냉혹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Solomon Norhup, Twelve Years A Slave. 박우정 옮김, 『노예 12년』, 글항아리, 2014, 234-235면) 즉, 노예제 사회에서, 정직하고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주위 사람이 인정하고, 주위 사람들이 부인하는 것은 어느 것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노예제를 아무런 양심의 부담없이 승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노섭의 탈출을 도와주었던 노예폐지론자인 백인 배스와 노예주 엡스가 논쟁을 벌이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규범적 논증대화의 기본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므로 길게 인용할 가치가 있다. [인용자 생략 부분은 (...)로 표시했다.]

 

(인용시작) 하루는 엡스의 새 집 공사를 하던 중 배스와 엡스가 논쟁을 벌였다. 나는 이들의 대화를 매우 흥미롭게 여기며 엿들었다. 두 사람은 노예 제도라는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던 중이었다.
 “노예 제도의 실체를 말씀드리죠, 엡스씨.”
 배스가 말했다.
 “노예제도는 정말 잘못된 제도입니다. (...) 본질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엡스 씨는 자신에게 노예들을 통제할 권리가 있다고 보십니까?”
 “권리라고요!”
 엡스가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죠, 제가 돈을 주고 산 노예들인데요.”
 “물론 그러셨겠죠, 법에도 백인에게는 흑인 노예를 돈 주고 구매할 권리가 있다고 나와 있을 겁니다. 그러나 법한테는 미안한 얘기입니다만, 법도 바뀝니다. 그래요, 엡스씨. 법이란 것도 가변적이며 불변의 진리는 아닙니다. 법이 허용한다면 아무거나 해도 되나요? 의회에서 엡스 씨의 자유를 빼앗고 노예로 만들어도 좋다는 법안을 통과시킨다면 어떻겠습니까?”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오.”
 엡스는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저를 검둥이들에 대고 비교하지 말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배스 씨.”
 “글쎄요.”
 배스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꼭 그런 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껏 제가 만난 흑인들 중에는 저보다 훨씬 더 뛰어난 사람이 많았습니다. 반면 저보다 기량이 별로 뛰어나지 않은 백인도 많았죠. 과연 신이 보시기에 우리 백인들과 흑인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하늘과 땅만큼이나 큰 차이죠.”
 엡스가 대답했다.
 “차라리 백인과 개코원숭이의 차이가 뭐냐고 물어보시지 그러십니까? 사실 올리언스에서 실제로 개코원숭이를 본 적이 있는데 우리 농장의 몇몇 멍청한 검둥이 놈보다 훨씬 더 낫다는 생각이 들던데요. 그럼 그 원숭이들에게도 자유와 시민권을 줘야 합니까?”
 엡스는 자신이 말해놓고도 무척이나 웃기다는 듯이 큰 소리로 웃었다.
 “보세요, 엡스 씨.”
 배스가 말했다.
 “그런 식으로 농담거리로 치부하시면 안 됩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우스갯소리로 들리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걸 웃어넘길 수 없으니까요. 제가 엡스 씨에게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독립선언문에도 모든 인간은 자유롭(240)고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나오지 않던가요?”
 “그렇소.”
 엡스가 답했다.
 “그렇지만 모든 ‘인간’이 그렇다는 것이지 검둥이와 원숭이들까지 평등하다고는 하지 않았소.”
 엡스는 여기까지 말해놓고 전보다 더 크게 웃음을 떠뜨렸다.
 “원숭이보다 못한 지능을 가진 사람은 피부색에 관계없이 어디에나 있는 법입니다.”
 배스는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말을 이었다.
 “저는 웬만한 원숭이보다 못한 논리를 펴는 백인도 많이 봤거든요. 하지만 그건 제쳐두고라도 흑인들 역시 인간입니다. 흑인들이 백인들만큼 아는 게 없는 것이 어디 그들 잘못입니까? 애초에 뭔가를 배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데요. 엡스 씨에게는 책과 종이도 있고, 또 어디든 마음대로 다니며 여러 지식을 쌓을 수 있죠. 하지만 노예들에게는 그 어떤 권리도 없습니다. 노예들은 책이라도 한 권 읽다가 걸리면 채찍을 맞아야 합니다. 수 세대에 걸쳐 자유와 교육의 원리를 박탈당한 채 살아간다면 누구라도 무지한 상태가 되지 않겠습니까? 흑인들이 동물 정도의 사고 수준밖에 갖추지 못했다면 그것은 그들을 그렇게 만든 노예 주인들의 잘못이죠. 흑인들이 원숭이 정도의 지능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엡스 씨와 같은 백인들의 책임이란 걸 아셔야 합니다. (...) .”
(....)

 “말은 청산유수로군요. 내가 아는 누구보다 말을 더 잘하십니다, 배스 씨. 당신은 사람들에게 흑인이 백인이고, 백인이 흑인이라는 이야길 하고 다니시겠죠. 내가 볼 때 배스 씨는 이 세상에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는 사람 같습니다. 지금보다 더 좋은 것들을 갖게 되어도 결코 만족하지 않을 사람처럼 보이거든요.”
 (....) 엡스가 볼 때 배스는 단순히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소리마저 거리낌 없이 해대는 자만심 가득한 남자일 뿐이었다.(인용끝) (Solomon Norhup, Twelve Years A Slave. 박우정 옮김, 『노예 12년』, 글항아리, 2014, 238-242면).  

 

엡스야 말로 철저히 틀린 견해에 입각하고 있지만, 오히려 엡스는 배스가 허튼소리를 하는 터무니없는 인물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엡스의 견해는 당시 남부의 지배적인 견해와 일치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지 그 결론에서 지배적인 견해와 일치한다는 이유만으로, 타당성이 확보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엡스는 흑인들이 열등한 존재라고 단정하였지만, 실제로는 엡스는 '열등한 존재가 아니면 안된다'고 먼저 규범을 가정해 놓고 사실을 도출한 것이다. 솔로몬 노섭이 처음 엡스에게 팔렸을 때의 일이다. "그는 내게 글을 읽고 쓸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내가 읽기와 쓰기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하자, 그는 내게 한 번이라도 책이나 펜, 잉크 등을 가지고 다니는 모습을 본다면 채찍 100대를 때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고 자신이 돈 주고 검둥이를 산 것은 교육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일을 시키기 위함이라고 강조했다."(Solomon Norhup, Twelve Years A Slave. 박우정 옮김, 『노예 12년』, 글항아리, 2014, 204면). 즉, 엡스는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대등한 의사소통 능력을 갖추지 못하였다는 점을 근거로 자신의 결론을 도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규범적 결론을 내세워 그러한 의사소통 능력에 관한 사실이 발생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보다 핵심적인 오류를 징표하는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핵심적인 것은 이것이다. 엡스는 오로지 배스와 같은 백인들과 대화하는 경우만을 상정하고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결론을 흑인에게 정당화해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 마이클 샌델은, 남북전쟁 이전에 노예가 '인간'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권리 담론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애초에 권리의 주체냐 아니냐가 공동체적인 이해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권리 담론의 근본적 조건에 대한 오해이다. 권리 담론의 근본적 조건이란, 규범적 타당성을 따지는 의사소통적 행위 상황이다. 모두가 평등한 잠재적인 발언의 기회가 있고, 아니오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으며, 내가 아니오라고 제기한 것에 대하여 합당한 합의를 얻을 자격이 있는 근거를 제시받을 그러한 지위가 보증되는 것이다. 그러니 마이클 샌델이 '권리 논증대화'(rights discourse)의 한계를 언급하면서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흑인을 제외하고 이루어지는 권리 논증대화, 즉 오로지 백인들 사이의 대화다. 그러므로 그것은 흑인에 대하여 일정한 규범을 명하는 아무런 정당성의 원천을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러한 제한된 대화에서 나오는 어떠한 규범도 흑인에 대해서는 정당성을 갖고서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공동체의 특수한 이해가 무엇이냐와 상관없는, 우리가 규범을 논의하고 그 타당성을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언어에 내재한 조건이다.

 

흑인들이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명령과 제약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당시에도 명백하였다. 누구나 증거를 보고자 한다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노섭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혹자는 노예들이 자유라는 용어 혹은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예제가 시행되는 곳들 중에서도 극도로 잔인하고 절망적인 일이 많이 일어나는, 북부에서라면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들이 일어나는 바유뵈프의 가장 무지한 노예들조차도 자유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고 있다. 자유가 주는 특권과 의무로부터의 면제를 잘 이해하고 있으며 자유인이 된다는 것은 곧 자신이 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임도 알고 있다. 노예들은 백인들 중에서 가장 비참한 이의 생활수준조차 자신들의 생활보다는 낫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또 흑인들의 노동 대가를 가로채도록 허락하고, 흑인들에게 항의하거나 저항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제대로 된 치료도 해주지 않으며 부당하고 이유 없는 폭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용인하는 법과 제도가 잘못되었음도 잘 알고 있다."(Solomon Norhup, Twelve Years A Slave. 박우정 옮김, 『노예 12년』, 글항아리, 2014, 233면).

 

결국, 노예주 엡스가 어떤 규범을 논의하면서 그 규범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지위에서 흑인을 철저히 배제하였다면, 자신이 어떤 규범을 도출하더라도 그 규범은 흑인들에게는 아무런 규범적 효력은 없다.

 

결국 엡스는 다음과 같은 점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내가 나의 노예인 흑인에게 X를 명하면 흑인은 그 X를 해야 하는데, 이 '해야 한다'ought to에는 어떠한 규범적 타당성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흑인은 단지 내가 절대적인 폭력의 우위에 있기 때문에, 물리적인 제재를 받지 않기 위하여 가언적으로 그 명령을 따를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점하고 있는 폭력의 절대성이 조금이라도 흔들리게 되면, 그 흑인이 나를 죽이거나 나를 불구로 만들어도 나는 아무런 불평을 제기할 수 없다. 그 흑인의 그 행위에도 아무런 규범적인 잘못이 없다. 흑인이 죽음을 무릅쓰기만 한다면, 흑인은 언제든지 나를 죽이고 자신이 자살하여도 무방하다."

 

그런데 엡스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노예들은 자신의 목숨에 관하여 집착하지 않는다면, 노예주를 살해할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이 점은 오래 전에 홉스가 지적한 바다. 어떠한 인간도 다른 인간에 대하여 절대적인 폭력의 우위에 서지 않는다. 남들보다 재기가 뛰어나고 육체적 능력이 탁월한 인간이라 해도, 두 세 명 이상이 달려들어 제압하면 쉬이 제압당한다. 설사 그것보다 더 뛰어난 자가 있다 하더라도 독약을 타거나, 멀리서 독화살을 쏘거나, 자고 있을 때 급습한다면 적의를 가진 다른 이의 공격을 당해낼 수가 없다.

 

우리가 통상 어떤 사회 세력이나 계급이 '힘이 있다'고 이야기할 때 그것은 그 세력이나 계급 구성원 개인에게 붙박이로 박힌 어떤 물리적인 힘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 힘은 제도적 힘, 제도적 권능institutional power이다. 그런데 제도적 권능은, 그 권능을 인정하는, 규범 준수 능력이 있는 다른 주체들의 태도에 의존적이다. 동창회의 구성원들이 아무도 동창회장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자는 동창회장으로서의 권능을 행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제도적 권능은 그 권능을 행사하는 자의 지위 기능(status function)에 대한 사람들의 합의에 기초하며, 이 합의는 애초에 별로 차이나지 않는 물리력의 절대적 우위 사실에 대한 합의일 수는 없다. 그 합의에는, 그것이 정당하다는 정당성의 승인(affirmation of legitimacy)이 포함될 수 밖에 없다.

 

그러한 정당성의 승인이 없는 강제력이 행사되는 경우에, 그 강제력에는 기회만 있으면 언제든 저항할 수 있으며 그 강제력을 행사하는 자를 공격하여도 규범적으로 무방하다.

 

이러한 상태가 바로 '전쟁상태'다.  

 

 

“16. 전쟁상태는 적의와 파괴의 상태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말과 행동을 통해서 흥분한 심정과 성급한 마음에서가 아니라 냉정하고 차분한 의도로, 다른 사람의 생명에 대한 위해를 선언한 경우에 그는 자신이 그러한 의도를 선언한 상대방과 전쟁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이로 인해 그는 상대방이나 상대방의 방어를 돕기 위해서 합세한 상대방을 지지하는 자들에 의해서 자신의 생명이 박탈될 수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나를 살해하려고 위협하는 자를 살해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합당하고도 정당하다. 왜냐하면 근본적인 자연법에 의해 가급적 최대한 인간이 보존되어야 하겠지만, 모든 사람이 보존될 수 없을 때는 무고한 자의 안전이 선호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은 늑대나 사자를 죽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로 자신에게 싸움을 걸어오거나 자신의 존재에 위협을 가하는 자를 살해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이성이라는 공통의 법에 구속되지 않고, 힘과 폭력의 규칙 이외에는 어떠한 규칙에도 복종하지 않기 때문에 맹수, 일단 사람을 붙잡으면 죽일 것이 확실한 위험하고도 해로운 동물로서 취급되어 마땅하다."(John Locke, 『Two Treatise of Goverment: The Second Treatise of Government - An Essay Concerning the True Original, Extent, and End of Civil-Government』. 강정인·문지영 옮김, 『통치론 - 시민정부의 참된 기원, 범위 및 그 목적에 관한 시론』, 까치글방, 1996. 23면.)

 

전쟁 상태는, 정당성의 승인을 받을 자격이 없는 근거에서 다른 이에게 강제력을 행사함으로써 개시된다.

 

" 17. 그러므로 다른 인간을 자신의 절대적인 권력 하에 놓고자 하는 자는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방과 전쟁상태에 들어가는 것이(24)다. 그것은 상대방의 목숨을 해하고자 하는 의도를 선언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나 자신의 동의 없이 나를 자신의 권력 하에 장악하고자 하는 자는 실제로 나를 장악했을 때 자신의 기분이 내키는 대로 사용하고자 할 것이며, 또 마음만 먹으면 나를 살해하고자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절대권력이 나의 자유권에 반하는 것을 내게 힘으로 강제하고자 하는 것, 곧 나를 노예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나를 자신의 절대적인 권력 하에 두고자 의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힘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 나의 보존에 대한 유일한 안전책이며 이성은 나의 보존의 울타리인 그 자유를 박탈하고자 하는 자를 나의 보존에 대한 적으로 볼 것을 명한다.”(John Locke, 『Two Treatise of Goverment: The Second Treatise of Government - An Essay Concerning the True Original, Extent, and End of Civil-Government』. 강정인·문지영 옮김, 『통치론 - 시민정부의 참된 기원, 범위 및 그 목적에 관한 시론』, 까치글방, 1996. 23-24면)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점을 확인할 수 있다.

 

(1)  전쟁상태에 진입한 자에 대하여는 대항력의 행사가 허용된다. 이러한 대항력의 행사가 허용되지 않는다면, 자의적으로 먼저 전쟁상태에 진입하여 타인을 공격한 자가 이득을 얻어야 마땅하다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결론이 도출되기 때문이다. 

 

   “18. (…) 왜냐하면 그가 아무런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나를 그의 권력 하에 두고자 힘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그 사람의 동기가 무엇이든, 나로서는 나의 자유를 빼앗으려고 하는 자가 정작 나를 그의 권력 하에 두었을 때 그밖의 모든 것을 빼앗아가지 않으리라고 상상할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를 전쟁상태에 대치하게 된 자로 취급하는 것, 곧 가능하면 그를 죽이는 것이 합법적이게 된다. 전쟁상태를 개시하여 침략자가 된 자는 누구든 의당 자신을 그러한 위험에 노출시킨 셈이기 때문이다. 19. 여기서 우리는 자연상태와 전쟁상태 간의 명백한 차이를 인식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 차이를 혼동하기도 하였지만, 두 상태는 평화, 선의, 상호부조 및 보존의 상태와 적의, 악의, 폭력 및 상호파괴의 상태가 서로 다르듯이 현저히 다른 것이다. 사람들이 그들간의 분쟁에 대해서 재판할 공통된 우월자를 지상에 가지지 못한 채 이성에 따라 사는 것은 당연히 자연상태이다. 그러나 구제를 호소할 공통된 우월자를 지상에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의 인신을 해치고자 힘을 사용하거나 그 의사를 표명하는 것은 전쟁상태이다. 그리고 구제를 호소할 수 없는 곳에서 인간은 공격자에 대해서, 비록 그가 같은 사회에 사는 동료 신민이라 할지라도, 전쟁의 권리를 가진다.”  (John Locke, 『Two Treatise of Goverment: The Second Treatise of Government - An Essay Concerning the True Original, Extent, and End of Civil-Government』. 강정인·문지영 옮김, 『통치론 - 시민정부의 참된 기원, 범위 및 그 목적에 관한 시론』, 까치글방, 1996. 24-26쪽.
)

 

(2)  전쟁상태란 정당한 권리에 대하여 하늘에 호소하는 길과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는 것 외에는 기본적인 권리 박탈에 대하여 구제할 방안이 없는 상태이다.

(3)  이러한 전쟁상태에서 피공격자가 대항력을 행사하는 것을 종료시키는 행위는, 그러한 구제를 실현해주는 법적 질서를 수립하는 행위이다. 그러한 구제가 새롭게 ‘법적 질서’라는 명목으로 공표된 것에서도 여전히 근본적으로 박탈되어 있다면, 이것은 그러한 명목의 외피를 쓰고 일방의 타방에 대한 공격만을 허용하고, 타방의 일방에 대한 공격은 금지하는 지배의 상태에 불과하고, 전쟁상태의 계속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복자와 피정복자간의 노예상태와 같은 것이다.

 

 “23. 절대적이고 자의적인 권력으로부터의 이러한 자유는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이고 또한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그 자신의 보존과 생명을 몰수당하게 만드는 행위에 의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양도할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에 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협정이나 자신의 동의에 의해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될 수 없으며, 또한 다르 사람이 기분내키는 대로 그의 생명을 박탈할 수 있는 절대적이고 자의적인 권력 하에 그 자신을 내맡길 수 없다. 어떤 사람도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권력을 내줄 수 없으며, 따라서 자신의 생명을 박탈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그러한 권력을 내줄 수 없다. 실제로 과오에 의해서, 곧 죽어 마땅한 어떤 행위에 의해서 자신의 생명을 몰수당하게 된 경우에, 그의 생명을 몰수할 권한을 가지게 된 자는 (상대방이 자신의 권력 하에 있는 동안) 그 목숨을 취하는 것을 연기하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놈를 제공하게 할 수 있는데, 그럼으로써 그는 그 상대방에게 어떤 해를 가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은 노예로서의 고통이 생명의 가치보다 큰 경우에는 언제나, 주인의 의지에 저항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죽음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24. 이것이 노예상태의 전형적인 조건이다. 이러한 상황은 합법적인 정복자와 포로 사이에 지속되는 전쟁상태에 다름 아니다.”(John Locke, 위의 책, 31면.)

 

따라서 전쟁상태의 계속은 시민상태, 즉 법이 수립된 상태로 볼 수 없다.
 

(4) 만약 기존 헌법이나 무헌법 상태보다 새 헌법의 규율을 받는 상태로의 진입이, 자연상태의 사람들의 관점에서 더 합당하지 않다면, 새 헌법은 오히려 더 심한 전쟁상태나 노예상태의 수립에 불과하다.

 

위 (1)-(4)까지의 정리는 '법'이라는 단어로 불리는 것들이 실상은 법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IS와 같은 무장조직폭력배들이 일정 지역을 실효적으로 지배한다고 하여도, 그들이 공포한 규칙들은 법이 아니다. 어떠한 사람도 자신의 존재를 말살하고자 하거나 자신의 존엄성을 파괴하고자 하는 자들의 일방적인 명령에 복종하여야 할 여하한 규범적 의무를 지지 않는다.

 

이것은 또한 정당성을 갖는 '처벌'에 관하여 중요한 논점을 알려준다. 로크가 이야기했듯이, 전쟁상태의 개시는 과거의 잘잘못의 이력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A가 B에게 공격을 가했으나 B가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이로써 그 물리력의 충돌이 일단 잦아들었다면, 남은 것은 A의 가해행위에 대한 처벌이다. 그런데 이 처벌은 전쟁상태를 개시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처벌은 A 스스로도 합의할 수 밖에 없는 원리에 기초하여야 한다. 만일 A에게 전쟁상태를 개시하는 식으로 처벌이 시행된다면, A는 만일 기회가 있다면 그 처벌을 피하기 위하여 어떠한 일을 하여도 무방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처벌의 규범성을 도출하는 대화는 A를 제외하고 이루어진 것이며, 따라서 A에 대하여는 아무런 규범적 정당성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끝>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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