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파스칼 대 볼테르

 

파스칼은 인간 조건은 본질적으로 비참하고 세속의 세계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은 천박하다고 보았다. 그것을 통해 종교를 통한 구원 이외에는 인간에게는 가치 있는 것이 없다는 결론에 암묵적으로 도달한다. 그러나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간 조건이 피할 수 없이 비참하다거나 인간 본성이 피할 수 없이 비열하다는 신념을 가지는 것이 신앙생활의 필수조건이라고 생각하여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파스칼의 <팡세>는 인간 조건과 이러저러한 여건에서 인간의 성향에 대하여 번뜩이는 통찰들을 많이 담고 있지만, 그것은 전반적으로 인간 혐오의 오류들을 담고 있다. 개념들을 제어되지 않은 채 쓰며, 작은 추론의 결과를 함부로 큰 추론으로 확장시키는 것이다.

 

파스칼의 시대에 모든 이들이 인간의 세속적 삶을 비관적으로 보았던 것은 아니다. 인류에 대하여 열정적으로 낙관적이지도 그렇다고 근거없는 데까지 비관적이지도 않은, 계몽의 옹호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볼테르다.

 

그는 <철학 편지>에서 [편지25] "파스칼 씨의 <<팡세>>에 관하여"라는 제목을 한 장을 할애하여, 파스칼이 저지른 오류 중 일부를 재치있게 바로잡는다.

 

볼테르는 "파스칼 씨의 재능과 글솜씨를 존경하지만, 존경하면 할수록 그가 나중에 검토하려고 종이 위에 되는 대로 써서 던져 놓은 이러한 많은 생각들을 그가 스스로 교정했어야 한다는 확신이 든다. 그의 생각들 몇 가지를 비판하는 것도 그의 재능에 감탄하면서 그리하는 것이다."라는 점을 서두에서 밝힌다.

 

2. 인간은 모순적이다.

 

그는 " 파스칼 씨가 이러한 팡세를 쓴 바탕은 혐오의 빛으로 인간을 비춰 보려는 사상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는 우리 모두를 사악하고 불행한 사람으로 그려 보이려고 애쓰고 있다. 그는 예수회파에 대항하여 글을 쓸 때처럼 대부분 인간 본성에 대항하여 글을 쓰고 있으며, 어떤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을 인간 본성의 본질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는 인간에게 모욕이 되는 말을 유창하게 하고 있는데, 나는 감히 이 숭고한 염세주의자에 반대하여 인간성의 편을 들고자 한다. 우리는 그가 말하듯이 그렇게 사악하지도 않고, 그렇게 불행하지도 않다고 나는 감히 확신한다."고 글을 쓰는 취지를 밝혔다.

 

파스칼은 "인간이 한순간에 과도한 자만으로부터 끔직한 절망으로 곤두박질칠 수는 없다고 여겨지"는데도 인간은 그렇게 하기 때문에 본성이 확연히 모순적이라고 단언한다. (<팡세>, 문단 [139, 536]

 

이에 대하여 볼테르는 인간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복합적인 존재이며, 이 복합성은 여러 여건에서 달리 발현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우리의 다양한 의지는 결코 본성 안의 모순이 아니며, 인간은 단순히 일개 주체가 아니다. 인간은 수많은 기관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만일 이러한 기관들 중 하나가 약간만 변질되어도 뇌의 모든 인상들을 바꿔야 하고, 동물은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의지를 갖춰야 한다. 우리가 어떨 때는 슬픔으로 무너지고, 어떤 경우 자만으로 부풀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것은 우리가 반대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이다. 주인이 쓰다듬어 주고 먹이를 주는 동물과 해부하기 위해 천천히 익숙하게 목을 조르는 동물은 아주 반대되는 감정을 맛본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안에 있는 차이는 그리 모순되는 것이 아니어서 그런 것이 없다면 오히려 모순일 것이다.
  우리가 두 개의 영혼을 지녔다고 말하는 미치광이들은 같은 이유로 우리에게 서른 개 혹은 마흔 개의 영혼을 부여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크나큰 정열을 지니고 있을 대 같은 사안에 대해 서른 개, 마흔 개의 다른 생각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그 사안이 여러 양상을 띠는 것이라면 반드시 다른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른바 인간의 이중성이란 형이상학적인 만큼 불합리한 생각이기도 하다. 물기도 하고 꼬리도 치는 개는 이중적이고, 병아리일 때는 정성껏 돌보다가 후에는 자기 새끼를 못 알아보고 내팽개치는 암탉은 이중적이며, 다른 사물들을 동시에 보여주는 거울은 이중적이고, 어떨 때는 잎이 무성하다가 어떨 때는 앙상해지는 나무는 이중적이라고 말해야겠다. 나는 인간이 불가사의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자연의 다른 모든 존재들도 마찬가지며, 다른 존재들보다 인간 안에 더 많이 눈에 띄는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니다." (Voltaire, Letters philosophiques, 이병애 옮김, 『철학 편지』, 동문선, 2014, 147-148면)

 

3. 인간 삶은 필연적으로 절망적이고 비참하다.

 

파스칼은 말한다. "인간의 맹목과 비참과 그의 본성 속에서 발견되는 놀라운 모순들을 보면서, 그리고 침묵을 지키는 온 우주와, 우주의 이 한 구석에서 길을 잃은 듯이 누가 이곳에 데려다 놓았는지, 무엇을 하러 왔는지, 죽으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채 자기 자신에게 내던져진, 빛이라고는 전혀 없는 인간을 보면서 나는 무서운 외딴 섬에 잠든 채 실려와서 잠이 깨자 그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그곳에서 빠져나갈 방도도 모르는 사람처럼 공포에 떨게 된다. 그리고 그 점에 있어서 나는 사람들이 그 비참한 상태에서 어떻게 절망에 빠지지 않는지 놀라게 된다. "(<팡세>, 문단 [184])

 

 볼테르는 친구의 편지를 언급하면서 이런 주장이 얼마나 과장된 것인지를 알려준다.

"이 명상을 읽고 있을 때, 나는 몹시 외딴 곳에 살고 있는 한 친구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다음은 그의 이야기다. 
  '나는 자네가 나를 두고 떠날 때 그 모습 그대로 여기서 지내고 있소. 더 즐거울 것도 없고, 더 슬플 것도 없이, 더 부유할 것도, 더 가난할 것도 없이, 나무랄 데 없는 건강을 누리며 인생을 유쾌하게 만들어 주는 모든 것을 지니고, 사랑도 인색함도, 야망도 선망도 없이 말이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지속되는 동안 나는 감히 나를 매우 행복한 사람이라 부르겠소.’'
  이 사람처럼 행복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동물들과 마찬가지인 사람들도 있는데, 어떤 개는 자기 암캐와 잠자고 먹고 어떤 개는 꼬챙이를 굴리며 역시 만족해하고, 어떤 개는 발광하여 죽임을 당한다. 나로 말하면, 파리나 런던을 바라볼 때 파스칼 시가 말한 것 같은 절망에 빠져들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 나는 외딴 섬과는 전혀 닮은 데가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호화롭고, 문명화된 도시를 보고 있는데 사람들은 거기서 인간 본성이 허락하는 한도껏 행복하게 살고 있다. 신을 마주 바라보듯이 알 수 없다고 해서, 그리고 그의 이성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파헤칠 수 없다고 해서 지혜로운 사람이 목을 매려고 하겠는가? 네 다리와 두 날개가 없다고 절망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째서 우리 존재 자체에 대해 우리가 두려움에 떨도록 만드는가? 우리 존재는 그가 우리에게 믿게 하려는 정도로 그렇게 불행한 것은 아니다. 세계를 감옥으로 보고, 모든 사람을 집행당할 죄수로 보는 것은 광신자의 생각이다. 세계를 인간이 기쁨만을 누리는 행복의 장소로 믿는 것도 향락가의 몽상이다. 땅과 인간과 동물은 섭리의 질서 안에 마땅히 이어야 할 곳에 있다고 여기는 것이야말로 지혜로운 인간의 생각이라고 믿는다."(Voltaire, Letters philosophiques, 이병애 옮김, 『철학 편지』, 동문선, 2014, 150-151면)

 

볼테르는 인간도 동물의 일종이며, 인간은 비참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지만 필연적으로 비참한 삶을 살아야만 하는 점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본성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이 점을 철저히 무시하는 것은 오로지 광신자의 사고다.

 

4. 육체를 가진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다.

 

파스칼은 말한다. "육체와 정신 사이의 무한한 거리는 정신과 자비 사이의 더욱 무한한 거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비는 초자연적이기 때문이다." (팡세, 문단 [290])

 

이에 대하여 볼테르의 대답은 간단하다.

"파스칼 씨가 시간이 있었더라면 자기 작품 속에서 이런 횡설수설을 쓰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Voltaire, Letters philosophiques, 이병애 옮김, 『철학 편지』, 동문선, 2014, 159면)

 

인간의 정신은 육체가 작동하는 것이며, 육체를 빼놓고 인간을 이야기할 수 없다. 정신과 육체를 별개의 것으로 근거없이 단언하고, 유한한 육체에 갇힌 죄수처럼 정신을 바라볼 때, 우리는 우리의 실존적 조건 자체를 근거없이 혐오하게 된다. 그리하여 육체와 관련된 것, 육체가 받아들이고 향유할 수 있는 즐거움들, 그리고 더 나아가면 타인의 육체가 느끼는 고통들에 대하여 무심하게 된다. 이것은 자비로운 인간이 아니라 냉정한 인간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금욕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으며, 우리 삶을 더 가치 있게 하는 절제의 방법으로만 가치 있을 뿐이다. 더군다나 육체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경시하고 오히려 혐오하는 것은, 부당한 억압을 낳는다. 적어도 이 세계에서의 우리 삶은 유한하며, 인간의 육체가 가장 아름다운 시기는 특히 그리 오랜 기간은 아니다. 그 시기에 마음껏 그 아름다움을 음미하고 누리지 못하고 온갖 강박의 구속 속에서 보내도록 하면서 인간이 육체로 인해 생기는 한계 운운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젊음을 낭비한 이들의 욕구불만을 가학적으로 표출하면서 핑계를 대는 것이다. 오히려 육체는 지치고, 질리고, 쉽게 물리기 때문에 그 욕구에서 유한성을 가진다. 누구도 밥을 하루에 20끼를 먹지 못하며, 잠을 매일 18시간 잘 수도 없으며, 섹스를 하루에 300회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인간이 탐욕을 행하는 이유는 육체에 있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육체와 동떨어진 욕구를 만들어내는 제도, 무한한 축적과 무한한 권력행사를 가능케 한 특정한 사회 제도, 그리고 그 사회 제도가 만들어낸 정신에 있다. 육체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고, 육체 자체의 욕구는 적정하게 유한하다. 우리의 생리현상의 일부 결과물에 대한 혐오감, 그리고 권력을 남용케 하는 것을 부추기는 제도에서 생기는 탐욕스러운 성향에 대한 혐오감을, '육체에 갇힌 정신'이라는 근거없는 모형을 매개로 인류 전반으로 확장하는 것은 표면적 연상관계에 의해 사고하는 것일 뿐이다.

 

5. 인간은 현재를 누릴 줄 모르며, 미래와 과거에 몰두해 제대로 살지 못하므로 필연적으로 불행하다.

 

파스칼은 말한다. "누구든 자신의 사고를 검토해 보면 그 사고는 항상 과거와 미래에 몰두해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거의 현재를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현재를 생각한다면, 그 생각에서 오로지 미래를 정할 빛을 붙잡기 위한 것이다. 현재는 결코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과거와 현재는 우리들의 수단이며, 유일하게 미래만이 우리의 목적이다." (<팡세>, 문단 [126])

"따라서 우리는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항상 행복하려고 준비하고 있으니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은 불가피하다." (Blaise Pascal, Pensés. 이환 역, <팡세>, 민음사, 2003, 63면.)

 

볼테르는 응수한다. "우리를 끊임없이 미래로 이끌어가는 이 본능을 주신 것에 대해 자연의 창조주에게 불평을 하기는커녕 감사해야 한다. 인간의 가장 귀중한 보물은 우리의 근심을 순화시켜 주고, 우리에게 현재의 기쁨을 누리는 가운데 미래의 기쁨을 그려 보이게 하는 이 희망이다. 만일 인간이 불행하여 현재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그는 결코 씨앗을 뿌리지 않을 것이고, 아무것도 건설하지 않을 것이고, 아무것도 심지 않을 것이고,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이 거짓된 기쁨 속에서 인간은 모든 것이 결핍된 채 있을 것이다. 파스칼 씨 같은 정신적인 인간이 저들처럼 거짓된 상투적인 말을 할 수 있는가? 자연은 인간들 하나하나가 먹고 살면서, 아이를 만들면서, 기분 좋은 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하고 느끼는 데 재능을 쓰면서 현재를 즐기도록 설계하였고, 또한 그 상태를 벗어나서, 흔히 그 상태 속에서 내일을 생각하도록, 그렇지 않으면 오늘 비참함으로 죽어가게 설계하였던 것이다."(Voltaire, Letters philosophiques, 이병애 옮김, 『철학 편지』, 동문선, 2014, 161-162면)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반복해서 후회하고, 다가올지 모르는 안좋은 일 때문에 불안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유익한 성향이 부적절하게 과도하게 발현된 것일 뿐이다.

 

A. C. Grayling은 흔히 이야기되는 격언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현재를 즐겨라'는 것이 파커의 첫 번째 계명이다. ‘과거는 이미 가고, 미래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계명의 문제점은 그것이 우리에게 소처럼 살라고 한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지적했듯이, 소는 인간보다 행복하다. 모든 것을 잊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그래서 완전히 현재에 살고, 그야말로 완전히 어쩌다 자기 입에 있게 된 되새김질거리를 씹는데 열중하기 때문이다. 파커의 잘못은 우리가 우리의 과거로 아주 그득하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우리의 과거가 우리를 현재의 우리로 만들고, 우리의 도덕적 목적은 미래를 향해 있으며, 우리는 미래도 좋은 미래로 만들려고 한다. 특히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예를 들면 우리 아이들-을 아끼는 최선의 방법을 생각하며. 물론 현재를 즐기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소 같은 식으로나 인간의 삶 전체라는 그보다 훨씬 큰 것을 무시하고서는 아니다."(A.C. Grayling, Thinking of Answers. 윤길순 옮김, <우리가 일상에서 부딪히는 철학적 질문들>, 블루엘리펀트, 2013, 337면).

 

과거에서부터 써온 서사는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그리하여 그러한 과거를 감정을 갖고서 회상하는 것은 참여자로서 인간의 삶에서 필수적인 것이다. 진정성 있는 후회가 없다면, 그러한 후회로부터 나오는 반성도 있을 수 없고,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상이 없다면 현재에 하는 과업들은 그 의미를 잃고 만다.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삶을 가치 있게 구성하는 본질적 요건이다. 다만 미래와 과거에 삶을 살아간다는 실천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지점까지 얽매인다면, 그것은 원래는 유익한 성향이 과도하게 발현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필요한 것은 인간이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능력이 있다는 점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생각을 적절하게 조정할 수 있는 삶의 기예를 갖추는 것이다.  

 

6. 인간이 자기 자신만을 직시한다면, 위로할 수 없을 정도의 비참에 직면한다. 그것이 인간 본질이다.

 

파스칼은 말한다. "사람들이 휴식에서 멀어지고, 또 자기 자신과 함게 머물기를 멀리하는 것은 상당히 실제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임을 나는 좀더 가까이 들여다보며 알게 되었다. 즉 나약하며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우리들 인간 조건의 선천적 불행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 조건은 너무도 비참해서 그에 대한 생각을 피할 수 없고, 오직 우리 자신만을 바라볼 때 아무것도 우리를 위로할 수 없다. (<팡세>, 문단[126])

 

그러나 볼테르가 말하길, "‘우리 자신만을 바라본다’는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전혀 행동하지 않고 자신만을 바라보기로 한 인간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런 사람은 백치이며 사회에서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 무엇을 바라본다는 말인가? 그의 몸, 그의 발, 그의 손, 그의 오감인가? 그는 바보이거나, 아니면 모든 것의 사용법을 만들어야 할지 모른다. 생각하는 능력을 계속 응시할 것인가? 그러나 생각하는 능력이란 그것을 실행할 때만이 응시할 수 있느 는 것이다. 아니면 그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거나, 그에게 이미 떠올랐던 생각만을 생각하거나 새로운 생각을 짜맞출텐데 그는 외부에 대해서만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감각이나 생각에 반드시 몰두해 있는 모습일 텐데, 그러니 정신이 나갔거나 백치일 것이다.
  한 번 더 말하거니와, 이런 상상 속에나 있는 동면에 빠지는 것이 인간 본성에는 맞지 않는 일이며,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당치 않고 그것을 주장하는 것은 정신나간 짓이다. 마치 불길이 위로 치솟고 돌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과 같이 인간은 행동을 위해 태어났다. 아무것에도 몰두하지 않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이 인간에게는 같은 것이다. 모든 차이는 그 몰두가 온화한지 격렬한지, 위험한지 유용한지에 달려 있다. (Voltaire, Letters philosophiques, 이병애 옮김, 『철학 편지』, 동문선, 2014, 163-164면)

 

인간 자체가 주위 환경에 대한 적응으로 진화한 것이다. 늑대가 우주의 허공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듯이, 인간도 인간을 둘러싼 다른 인간, 제도, 문화와 같은 다른 모든 것들과의 관계를 빼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자기자신만을 바라볼 때 비참하다면 본질적으로 비참한 것이다'라는 명제는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가치는, 다른 것과의 관계를 모두 없애버리고 살아간다는 것을 가정할 때, 본질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괴상한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능력은 외부와의 상호작용에 의해 발현되고, 그러한 상호작용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이 인간적 가치경험의 감각이다.

 

이와 연결되어 파스칼은 또한 "인간이란 너무도 불행해서 권태의 특별한 이유가 전혀 없어도, 인간 조건의 바로 그 상태에 의해서만도 권태롭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인간은 그 점에 있어서 행복하다. 이웃과 우리 자신에게 억지로라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행동하지 않으면 권태로워지도록 만들어 놓은 자연의 창조주에게 우리는 그만큼 많은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이다."고 하면서 "바로 얼마 전에 외아들을 잃었고, 재판과 싸움에 짓눌려 오늘 아침만 해도 너무 괴로워하던 그 사람이 어떻게 하여 이제는 그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가? 놀라지 마시오. 그는 지금, 여섯시간 전부터 그의 사냥개들이 열심히 추적하고 있는 사슴이 어디로 지나갈 것인가를 살피는 데 온 정신이 팔려 있다. 얼마나 슬픔에 가득 차 있든지 간에 인간에게는 많은 것이 필요없다. 만약에 그를 어떤 오락에 맛들이도록 끌어들일 수 있다면 그는 그동안 행복해지는 것이다."고 냉소적으로 관찰하고 있다.  (<팡세>, 문단 [126])

 

이에 대해 볼테르는 "그 사람은 놀랍게 행동한 것이다. 발산은 열이 났을 때 키니네를 처방하는 것보다 확실한 고통에 대한 처방이다. 그 점에 있어서 언제나 우리를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는 자연을 비난하지 말자."(Voltaire, Letters philosophiques, 이병애 옮김, 『철학 편지』, 동문선, 2014, 165면)이라고 지적한다.

 

파스칼은 '인간은 나쁜 일이 있을 때면 그 나쁜 일에 잠겨 일관되게 내적으로 골몰해야 한다'는 이상한 일관적 성향이 인간이 더 나은 존재이기 위한 전제인듯이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이 만일 하나의 외적 사건을 오롯이 자신의 내면에 투영한 뒤, 거기에 잠겨버리게 된다면, 인류의 존속은 불가능할 것이다. 상이한 여건에서 상이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인간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특성을 활용하여, 그러지 아니하고 일관되게 골몰하였다면 더 이상 삶을 살 가치가 없어 보이게 만드는 사건의 과도한 충격으로부터, 우리는 현명하게 벗어날 수 있다. 그것은 삶의 기예 중 하나이지, 비웃을 일이 아닌 것이다. 이쯤되면 파스칼의 비난이, 인간 조건을 비참하게 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아무것이나 그러모은 생각의 단편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왜냐하면 얼마전에 파스칼은 인간이 과거와 미래에 사로잡혀 불행하다고 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현재의 오락이나 일에 몰두하여 다른 근심들을 잊는 인간의 유익한 성향을 근거로 또한 비난을 제기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동그란 사각형의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간 혐오의 주장들은, 단편적으로 뜯어보았을 때에는 통찰을 주는 것 같지만, 체계적으로 집약하게 되면 내적 모순을 드러내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인간의 실존적 여건 자체를 수긍하면서 동시에 담을 수 없는 모순된 '완전한 존재가 되려면 - 해야 한다'는 가정들을 함께 담고 있기 때문이다.

 

파스칼은 날카롭게 관찰한다. "우리들의 모든 추론은 감정에 양보하는 것을 귀결된다."(<팡세>, 문단 470)

 

이러한 관찰은 부분적으로 타당하다. 이것은 현대 심리학 연구 결과에서도 많이 인정되는 바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감정상 끌리는 것에 먼저 결론부터 내어놓고, 근거들을 형식적으로 쥐어짜서 내어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본질인가?

 

볼테르는 말한다. "우리들의 추론은 학문에서가 아니라, 취향에서 감정에 양보하는 것이다."(Voltaire, Letters philosophiques, 이병애 옮김, 『철학 편지』, 동문선, 2014, 177면) 인간이 학문을 발전시켜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인간의 가능성은 여러 방향으로 발현될 수 있다. 인간은 억견과 어리석음에 사로잡힐 수도 있지만, 지식과 현명함을 갖출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억견과 어리석음을 물리치고, 지식과 현명함을 받아들이도록 할 것이며, 무엇이 조금이라도 그 방향으로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실천적인 질문이 된다. 이 정신을 사로잡는 흥미로운 질문을, 전일적인 인간혐오는 지워버린다. 분명히 타당하게 제기되는 질문인데도 말이다.

 

볼테르는 "너무나 긴 토론을 야기할 파스칼 씨의 <<팡세>>에 대한 나의 다른 언급들은 상기시키지 않겠다. 이 위대한 천재의 예기치 않은 몇 가지 오류를 알아냈다고 믿는 것으로 충분하다. 가장 훌륭한 사람들도 속인과 마찬가지로 잘못을 범한다고 확신하는 것이 나처럼 둔한 정신에게는 위로가 된다." <Voltaire, Letters philosophiques, 이병애 옮김, 『철학 편지』, 동문선, 2014, 181면)이라고 글을 맺고 있다. 볼테르가 말한 것처럼, 파스칼의 스케치 중 상당 부분은 일정한 여건에서 인간이 드러내기 쉬운 성향에 대한 관찰이라고 선해해서 볼 수 있다. 그렇게 한정해서 보는 시각이 두드러질 경우 그 통찰의 가치는 부인할 수 없다.

 

이를테면, 파스칼은 "상상적으로 유식한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유식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자기 만족을 느낀다. 그들은 당당하게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대담하고 자신 있게 논쟁하고, 이성적인 사람들은 두려움과 의혹을 가지고 이에 대응한다. 그래서 그들의 밝은 얼굴은 청중들의 의견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끌어간다. 그만큼 자기를 현자라고 상상하는 사람들은 같은 종류의 심판자들의 호감을 사게 된다. 상상은 어리석은 자를 영리하게 만들지는 못해도 행복하게는 만든다. 추종자들을 다만 비참하게 만들 뿐인 이성과는 반대로 상상력은 영광으로 감싸고 이성은 치욕으로 덮는다."(Blaise Pascal, Pensés. 이환 역, <팡세>, 민음사, 2003, 57면. 문단[81] [문단 번호는 Pensés, présentées par Louis Lafuma J. Delmas et Cie, 3e édition, 1960.라는 Lafuma 판을 역자가 따른 것임.]라고 예리하게 지적한다. 이것은 이성적으로 유식한 사람들이 있고, 그러한 이성에 근거한 지식들을 사람들이 터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전제에서만 나올 수 있는 발언이다.

 

또한 이와 연결되는 다음과 같은 지적을 보라. "절름발이는 우리를 화나게 하지 않는데 절름발이 정신이 우리를 화나게 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절름발이는 우리가 똑바로 걷는 것을 인정하지만 절름발이 정신은 젓는 것은 바로 우리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않으면 우리는 동정할 뿐 화내지는 않을 것이다."( Blaise Pascal, Pensés. 이환 역, <팡세>, 민음사, 2003, 102면, 문단 [188])

 

반면에 파스칼이 균형을 잃고 전면적인 인간 조건에 대한 혐오로 빠져들 때에는, 부지불식간에 "가치 있는 것이려면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모종의 전제들을 들여온다.

Blaise Pascal, Pensés. 이환 역, <팡세>, 민음사, 2003, 138-139면, 문단[269]

"그 어떤 신분을 상상해 보아도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모든 행복을 한곳에 모은다면 왕위야말로 이 세상의 가장 훌륭한 자리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왕이 누릴 수 있는 모든 만족에 에워싸여 있다고 가정해 보자. 만약 그에게 위락이 없다면 그리고 그가 자기를 바라보고 자기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이 맥빠진 행복은 그를 지탱하지 못할 것이고 또 그는 언제 일어날지 모를 반란, 끝내는 피할 수 없는 병고와 죽음 등, 그를 위협하는 이 모든 것들과 필연적으로 마주칠 것이다. 그 결과 위락이라 불리는 것이 없다면 그는 불행하며, 놀고 즐기는 가장 미천한 신하보다 더 불행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유일한 복은 자신의 조건을 생각하는 것에서 마음을 돌아서게 하는 데 있다. 이것을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 어떤 활동에 의해서나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즐겁고 새로운 정열, 도박, 사냥, 흥미를 끄는 관극, 결국 위락이라 일컬어지는 것에 의해서 말이다.]

도박, 여인들과의 대화, 전쟁, 높은 지위 등이 그처럼 추구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 안에 과연 행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진정한 행복이 도박에서 따는 돈이나 뒤쫓는 토끼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이 선물로 주어진다면 원치도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찾는 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불행한 조건을 생각하게 하는 맥빠지고 평온한 관습적 삶이 아니고 또 전쟁의 위험이나 직무의 노고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생각에서 마음을 돌아서게 하고 우리의 기분을 전환시키는 소란, 바로 이것이다. …… 사람들이 그처럼 소란과 법석을 즐기는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런 이유로 감옥살이는 참으로 끔찍한 형벌이고, 고독의 즐거움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왕의 신분이 지극한 행복이 되는 가장 큰 이유도 결국 이것이며, 왕의 기분을 끊임없이 전환시키고 모든 종류의 즐거움을 맛보게 하려고 사람들이 힘쓰는 이유도 이것이다.

왕은 오직 그를 즐겁게 하고 그 자신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일에 전념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다, 비록 왕이라 해도 자기를 생각하면 불행하기 때문에."

 

위 글 부분에서 파스칼은 몇가지의 지탱될 수 없는 명제들을 전제로 끌어들어오고 있다. 그 중 두 명제가 두드러진다.

(1) 관계를 맺고 주위 환경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인간의 진실한 조건은, 그러한 관계와 주위 환경 모두를 다 빼버리고 고독한 채로 있으며 자기자신만 바라보는 인간 삶의 조건이다.

(2) 어떤 것이 없다면 불안과 기운이 처진다면, 바로 그 부분이 행복의 본질이다.

 

(1)에 관해서는 앞서 비판했다. 인간은 관계와 환경 속에서 살아가며, 그러한 상호작용은 인간 삶의 필수적 구성부분이다. 그것을 빼고 인간의 삶의 조건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볼테르에 따르면 정신나간 백치를 억지로 상정하는 것이다.

(2)에 관하여 살펴보자. 우리가  며칠이고 소변을 보지 못한다면 불안하고 기운이 처질 것이며 큰 고통을 겪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소변이야말로 삶의 행복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논리 비약이다. 사람은 복합적인 존재이므로,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을 누리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것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기운이 처지는 것들에 대해서만 생각하자면, 늘 기운이 처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기운이 처지지 않는 일들도 있고, 그런 일들에 주의를 돌리는 일만 비본질적이고, 기운이 처지는 일에 주의를 돌리는 일만 본질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근거없는 선별이다.  

 

이러한 잡다한 전제들을 들여와서 파스칼이 다다른 결론은 다음과 같다.

"쇠사슬에 묶인 한 무리의 사람들을 상상해 보라. 모두가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그중 몇몇이 매일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교살당한다. 남은 사람들은 동료들의 운명에서 자기의 운명을 읽으며 고뇌와 정말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자기 차례를 기다린다. 이것이 인간 조건의 모습이다." (Blaise Pascal, Pensés. 이환 역, <팡세>, 민음사, 2003, 171면. 문단 [314])

 

총명한 정신을 가진 파스칼조차, 자신이 인간 조건을 평가하면서 부지불식간에 들여온 전제들을 검토하지 않으면, 이 세속의 세계에서 참여자로서 인식할 수 있는 인간 삶의 가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해버리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허황된 놀음이다.

 

현대의 속된 판본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해보라.

"세상 사람들은 거개가 다 못생겼다. 못생긴 것을 직시한다면 비참할 것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스마트폰이니 인터넷이니 하는 것을 보고, 가족을 돌보고, 일을 하고, 테니스를 치고, 산채을 하면서 자신의 못생긴 것에 대해서는 잊는다. 그렇게 잊지 않는다면 비참할테니까. 가련한 존재다. 그러므로 인간은 혐오스럽다."

 

이것은 "모든 인간은 아주 잘생기고 예뻐야 삶을 살 가치가 있다."는 이상한 전제를 들여왔기 때문이다.

 

인간 혐오자들은 인간이나 인간 조건을 혐오한다는 아주 추상적인 정식 하에서는 서로 동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추상적인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 은연중에 도입한 전제들을 명시적으로 꺼내어 비교해보면, 인간 혐오자들 사이에는 커다란 의견 불일치가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전제들은 어쨌거나 자의적으로 도입한 독단들, 모종의 성질을 완벽하게 갖추어야 살 가치가 있다는 독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독단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 짧은 생을 낭비하지 않고 가치 경험을 향유하는 제일보이다. <끝>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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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르엔
    2015.05.11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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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읽었습니다.
    파스칼이 '기독교를 믿는 것이 밑져야 본전이므로 이득이다'라고 말한 사람이 맞나요? 다른 사람이었나요? ;;
    • 이한
      2015.05.12 19:41
      댓글 주소 수정/삭제
      맞습니다.
      팡세 문단397에서 파스칼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신이 존재한다는 쪽에 내기를 걸지 않는 것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편에 내기를 거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느 편에 내기를 걸겠는가? 신이 존재한다는 편에 내기를 걸어서 잃는 것과 얻는 것을 비교해 보자. 만일 내기에 이긴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고, 만일 진다 하더라도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주저 말고 신이 존재한다는 편에 내기를 거시오. -좋소. 내기를 걸어야 하지만 너무 많이 거는 것 같소. -보시오! 이기고 지는 확률이 똑같은 이상, 하나에 걸어서 얻을 수 있는 목숨이 두 개라면 당신은 한 번 더 내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볼테르의 답은, 신념이나 신앙이라는 것은 증거에 의해 믿을 수 밖에 없는 것이지, 자신이 보상에 의거하여 마음대로 골라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었습니다.

      "신이 존재한다는 편에 내기를 걸지 않는 것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편에 내기를 거는 것과 같다는 것은 분명 틀린 말이다. 왜냐하면 의심하여 분명한 증거를 요구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이쪽에 걸거나 저쪽에 걸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대목은 약간 무례하고 유치해 보이는데, 얻느냐 잃느냐 내기를 한다는 생각은 주제의 무거움에 비할 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특히 어떤 사물이 존재한다고 믿어서 얻게 되는 이익이 그 사물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당신 말이 옳다고 내가 믿으면 이 세상의 왕국을 주겠노라고 당신이 내게 말했다 치자. 그러면 나는 당신 말이 옳기를 진심으로 바라지만 당신이 내게 증명할 때까지 나는 당신을 믿을 수 없다."(철학편지, 149면)
  2. 마테차돌이
    2019.10.31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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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잘 읽었습니다.
    명글이네요.

    인간혐오자들의 독단은 그러면 어디서부터 오게되는 건가요? 파스칼은 그러면 왜 저런 독단에 빠졌을까요? 제 생각에는 파스칼이 많이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건강한 방식으로 풀지 않고 자꾸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서 그 안에서 사고를 하려고 하니까 그게 결국 독단적인 태도까지 간 거 아닌가 싶네요. 그러면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 데 그런 독단에 빠지는 건 어떻게 방지해야 하는 거죠? 요즘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세계에서 나오지 못하고 굉장히 독단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 해결책이 뭘까요?
    • 2019.10.31 15:17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1. 위 글에서 말한 독단이라는 것은 파스칼이 인간조건과 인간 삶에 대하여 아주 나쁘게 평가한 것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모종의 성질을 완벽하게 갖추어야 살 가치가 있다"의 "모종의 성질"에 이러저러한 것을 임의로 넣은 명제를 믿는 것을 독단이라 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외모가 잘 생겨야 살 가치가 있다"와 같은 것이 독단이라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속의 인생을 계속 살 가치는 그 살아가는 과정에서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 있는가의 문제이지, 어떤 단언된 성질을 갖추었는가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2. 파스칼이 그냥 범상하고 세속적인 조건에서 특별히 많이 힘들었기 때문에 인간조건과 인간에 대한 그러한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고 추정하는 것은 학적 근거가 없습니다. 그것은 오래 전에 사망한 사람의 뇌 속을 단지 현재의 사람들의 관심사에 비추어 곧바로 직관할 수 있다는 보증되지 않는 전제를 취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범상한 조건에서 특별히 많이 힘들게 느끼는 아주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이 파스칼과 같은 견해를 갖지는 않기 때문에, 이러한 설명이 그럴법하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파스칼의 독실한 종교적 믿음이 인간과 인간조건에 대한 그러한 진술에 이르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파스칼은 본인이 기적을 몸소 체험했다고 생각했으며, 이것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점을 염두에 두면 파스칼의 논의는 모두 내세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을 인생의 의미의 알파이자 오메가로 삼고 살라는 결론으로, 현실의 형편없는 것들에 집착하지 말라는 결론으로 이어지도록 짜여 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즉 현세의 삶의 조건은 정말로 비참하지만 내세의 지복과 그 지복을 누리기 위해 예비된 시험이므로 의미가 있다는 논의로 전체 그림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현세의 삶의 조건을 비참하게 묘사하여 사람들이 그 묘사에 납득하면 할수록 그 명령의 사실적인 매력은 더 강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현세에서는 어차피 누릴 것이 헛된 것, 기껏해야 괴로움을 일시적으로 망각하는 것밖에 없다면, 현세의 즐거움이라고 착각하는 것에 주의가 흩뜨려지고 마음을 뺏길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세의 지복과 그 지복을 누리기 위한 예비시험을 통과하는 일이 더욱 더 중요해질 것이며 사람들을 세속적 욕구에 몰두하는 일에서 충실한 신앙생활로 좀 더 잡아끌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파스칼이 볼테르와 정반대되는 형태로 인간조건과 인간을 묘사한 것은 두 가지 이유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파스칼은 볼테르와 달리 인간조건과 인간을 영원의 상에 비추어 파악해얐다.
      둘째, 파스칼은 영원의 상에 비추어도 완벽한 지복의 삶이 예비되어 있다는 것을 진리라고 생각하였으며, 그 지복의 삶을 준비하는 일의 중요성을 사람들이 깨닫도록 하고 싶어했다.

      3. 위와 같이 파스칼이 적어도 현세에 한정해서 염인주의와 염세주의를 논의한 차원을 파악하게 되면, 몇 년 전에 제가 쓴 위 본문 글에는 크나큰 오류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위 본문 글은 독실한 파스칼과 나이롱 신자였던 볼테르의 견해를 그저 같은 차원에서 병치하여, 오로지 인간의 관점에서 현세의 삶이 살 가치가 있는가의 문제로 전체 문제를 축소하여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믿음이 그리는 지복의 상을 고려하지 않을 때, 현세에 대한 파스칼의 묘사의 취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즉, 현세를 살아가는 참여자이자 실천자인 인간의 관점에서 파스칼의 묘사가 세부적으로 부정확한 부분에 집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위 본문 글은 내세의 지복에 몰두해 있는 파스칼의 묘사를 평가하면서, 내세에 대한 관심은 오로지 현세의 비종교인이 누리는 것들과 같은 것을 누리는 생활과 양립가능한 한에서만 약간 립서비스식 나이롱으로 있는 볼테르가 저지른 오류를 그대로 답습한 것입니다.

      그 오류의 흐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인간의 관점에서, 오늘 하루, 내일, 그리고 1년,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기에 그리고 누리기에 만족스러운 것들, 탁월한 것들, 정의로운 것들이 있다.
      (2) 그것들을 누리거나 하는 것(예를 들어 아픈 사람을 아프지 않게 해주는 일)은 그렇지 않은 것에 비해 더 나음을 살아가는 실천자로서 부인할 수 없다..
      (3) 그렇다면 부조리한 실존의 조건이 현세의 삶을 살 가치가 없는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4) 또한 할 가치가 있음(worth doing)을 파악하는 관점은 인간이 숙고할 수 있는 관점의 전부다. 즉 실천자의 관점만이 인간이 자신의 행위와 관련하여 숙고할 수 있는 유일한 관점이다.
      (5) 그러므로 인간 및 인간조건을 영원의 관점에서 보고는 그것이 비참하고 핍진적이며 형편없다고 하는 것은 아예 없는 관점에서 사고하는 것이므로 성립할 수 없다.

      위 논증 흐름 중에서 (1), (2), (3)은 참이지만 (4)과 (5)가 거짓입니다.

      물론 파스칼은 (4), (5)를 이야기하면서 부지불식간에 not (1), not (2), not (3)를 주장하는 실책을 때때로 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실책의 세부사항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4),(5)에 담긴 자신의 오류는 보지 못하는 것은 더 큰 실책인 것 같습니다.

      (1), (2), (3)은 <삶은 왜 의미 있는가>의 기본 요지입니다. 그러나 (1), (2), (3)이 실천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참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의 관점만이 유일하게 실천과 관련하여 보증되는 관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적어도 출산에 대한 개인적 결정 및 사회적인 출산 정책과 관련하여 영원의 관점을 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원의 관점을 취한 것으로 새기게 되면, 파스칼의 묘사는 상당 부분 정확하고 오히려 진실에 가까운 것이 됩니다. 그리고 볼테르의 묘사는-본인이 <캉디드>를 썼음에도 불구하고-비이성적으로 낙천적이고 낙관적이며 무대책에다가 자기매몰적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과 같은 것을 이제 완전히 새로이 창출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는, 이미 태어난 사람 본인의 무엇인가를 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따져보는 실천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게 아니라, 논리적인 가치공간 속에서 어떤 인간 삶이 새롭게 탄생하여 차지할 자리에 대한 숙고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형편없고 비참하다면 그러한 삶을 새로이 만들어내지 않는 것이 도덕적으로 타당할 것입니다.

      4. 이상과 같은 이유로 위 본문 글을 쓸 당시에 제가 모종의 독단에 빠졌다고 생각합니다. 즉, (4)와 (5)를 충분히 정당화할 근거가 없음에 불구하고 (1),(2),(3)에서 (4)와 (5)가 도출된다고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을 기존의 저와 볼테르의 오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반면에 파스칼의 오류는 not (4) 와 not (5)가 참이라는 근거로, (1),(2),(3)을 부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저의 견해는 (1),(2),(3)과 함께 not (4)와 not (5)를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저의 견해를 기준으로 생각할 때 저의 과거의 견해는 독단에 빠져 있었습니다.

      5. 이와 같은 독단은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어서, 특별한 현상이 아닙니다. 임마뉴엘 칸트도 데이비드 흄의 저작을 읽고는 독단의 잠[합리론 또는 이성주의의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고 하였습니다. 독단은 어떤 믿음을 그것을 정당화하는 충분한 근거 없이 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저도 칸트도 얼마든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6. 독단 자체보다 더 유의해야 할 것은, 독단의 잠에서 깨어날 기회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에 가졌던 믿음을 완고하게 고집하는 어리석음입니다. 만일 제가 인간 삶의 재상산, 즉 출산과 관련하여 영원의 관점을 준거로 삼아야 된다는 데이비드 베너타의 논증을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몇십년 동안 받아들였던 친출생주의 편향 때문에 베너타의 그 논증을 건전한 반대논증 없이 거부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리석은 일은 독단의 잠에서 깨어날 적정한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의도적으로 물리치는 것입니다.

      7. 어리석음에 빠지는 원인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제가 식별하는 원인은 크게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잘못된 사고와 추론을 유도하는 부패한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개념은 사고를 규정하기 쉬운데, 일단 부패한 개념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 개념이 내는 길을 따라서만 사고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그 길에 어긋나는 것들은 마치 사물본성의 법칙에 의해 배제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충분한 경험 이전에 개념을 퍼붓는 교육은 잘못된 것이라고 루소는 <에밀>에서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소속감을 느끼는 집단에서 따돌림이나 미움을 받기 싫어하고 또 칭송 적어도 승인을 받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그런 욕구는 문제되는 명제의 참과 거짓과는 무관한(irrelevant)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바로 그런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이런저런 명제들을 손쉽게 받아들입니다. 그 결과 남는 것은 내가 소속감을 느끼는 집단에서 지배적으로 통용되는 견해가 무엇인가 눈치의 더듬이를 세우고는, 그 견해를 일단 채택하면 그 다음은 생각하지 않고 마치 파리를 본 개구리처럼 혀를 내밀듯이 부패한 개념들을 툭툭 내뱉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 마테차돌이
      2019.11.01 20:11
      댓글 주소 수정/삭제
      선생님, 좋은 답변 정말 감사합니다!

      영원의 관점에 관해서는 제가 선생님이 시민교육센터에 올리신 몇가지 글을 참고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글들을 보고나서 이 댓글을 보면 좀 더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답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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