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음의 평정에 대한 동적 잉해

 

가치를 경험하는 능동적 삶을 위해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은, 마음이 늘 스트레스와 번민과 불안과 우울에 사로잡혀서 현재의 감각들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의 평정은 고정된 마음의 평화 수준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요구다. 마음의 평정이라는 것은 그보다는 좀 더 동적 개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은 일종의 회복력(resilience)을 보유하는 능력 개념이다.

 

아주 간단한 예를 보자.

방금 복사기에 A4 용지를 다시 채워넣다가 부주의해서 예기치 못하게 손을 베였다. 생각보다 강하게 베여서 보기에 좀 으스스하다. 이 순간에는 짜증이 난다. 왜 이렇게 부주의했을까, 왜 하필 이렇게 바쁘고 손 쓸 일이 많을 때 이렇게 다쳤을까. 그러나 회복력을 지닌 사람은 "아이 참, 다음부터 A4 용지들을 다룰 때는 철저히 조심해야지"라며 다음부터 조심하는 행동 동선을 그려보고, 약국에 가서 소독약을 사서 바르고, 밴드를 붙인다. 상처를 회복시키는 약도 사놓고 어느 정도 아물면 바를 수 있도록 가방에 넣어 놓는다. 밴드는 충분히 사서 이미 붙인 밴드가 물에 젖거나 하면 금방금방 갈수 있도록 주닙한다. 이렇게 하면, 다시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일로 돌아올 수 있다. 결국 그것은 자신이 대응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경로를 파악하고, 그 행위경로로 진행해간 후, 더 이상 그 사건에 휘둘리지 않는 태다.

 

이 예에서 드러났듯이, 부주의하게 손을 벤 순간,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 사람은 소독도 제대로 하지 않고 다음 번에도 또 부주의하게 할 것이다. 그 순간에 일시적으로 아픔과 짜증은 느끼겠지만 거기에 휘둘리지 않고 할 일을 하고 다시 원래의 과업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지금 손은 베인 상태지만, 적절한 조치를 하고 나서 지금 흘러가는 경험에는 다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더 이상 손을 베인 상태에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다는 것은, 사태로부터 회복력을 발휘해서, 가치 경험을 예리하게 인식하는 평소의 상태로 돌아올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을 보유할 때, 대부분의 실존적 여건이 허락하는 범위에서는 적어도 자신의 삶을 자신이 살아나가는 것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된다.

 

2. 마음의 평정에 대한 정적 이해의 실패

 

마음의 평정을 정적인 것이나 공간적으로 이해하려고 할 때는 잘 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을 무조건 절대적으로 방어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공간적인 침범에 절대적으로 대항하는 마음은 어떤 방식으로 방어되는가?

보통은 '철갑'을 두르는 시도를 한다.

외부에 대한 기대를 철저히 끊거나 외부와의 접촉을 끊거나 하는 것이다.

 

그러나 외부와의 접촉을 최소환도로 할 수 있는 여건에 있는 사람이면 모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외부와의 접촉을 할 수 밖에 없다. 또한 먹고 산다는 생리적인 필요 이외에도 인간은 가치 경험을 위해서 인간과의 접촉과 소통을 적정한 정도로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무조건적으로 가능한 한 접촉과 소통을 줄이기만 한 사람은, 오히려 외적 자극에 대하여 더 민감해진다. 이 점은 쇼펜하우어가 지적한 바 있다. 사람이 싫어서 사람과 떨어져 있는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이후에 사람들을 대면하였을 때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더 싫어지는 데다가, 불쾌한 일이 발생하면 그것을 오히려 훨씬 오랫동안 곱씹어 보게 된다. 이것은 오히려 회복력이 떨어진 것이며, 동적 개념으로서 파악한 마음의 평정이 오히려 약화된 것이다.

 

철갑보다는 '해석과 회복의 기제'가 필요하다. 외부의 자극은 피할 수 없다. 또한 우리에게 일정한 순간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모두 차단할 수 없다. 외부 자극은 우리 몸속으로 정신 속으로 일단 들어온다. 우리는 그 뜻을 이해하고 음미한다. 그러나 거기에 휘둘릴 것인가 아닌가는 그것에 대하여 우리가 생각하는 바에 달려 있다. 그것에 응당 주어야 할 비중을 준다면 휘둘리지 않고 대응하는 것이고, 그것에 응당 주어야 할 비중보다 훨씬 많은 것을 준다면 휘둘리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철갑을 두른 방어'와 '전면적인 취약' 사이의 대립으로 마음의 평정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과 회복의 기제'를 타당하게 형성하는 것에 관하여 우리 사회에서는 별다른 조언이 주어져 있지 않다.

 

3. 해석과 회복 기제를 형성하기 위한 지침의 결여

 

이 사회에서는 동적인 마음의 평정, 즉 해서과 회복의 기제를 든든하게 갖추어놓기 위한 조언이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보통 세상에서 말하는 대로 생각하고 살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회복하는 능력이 고장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 

 

격정에 빠지라는 것이다. 죄책감 느끼고, 수치심을 느끼고, 화를 내고, 번뇌하라는 것이다.

 

왜 세상 사람들은 그런 말 하는가?

 

첫째로,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이 통제력을 행사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조언을 받아들이거나 최소한 듣는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통제력을 극대화하는 방향의 내용을 조언을 준다. 이를테면 어린 시절에 부모나 교사로부터 가장 강조해서 듣는 덕목은 '정직'(honesty)이다. 반면에 군대에서 중대장으로부터 가장 강조해서 듣는 덕목은 '지휘명령계통을 어겨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행위와 사고를 해야 한다고 하고, 저런 신분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저러한 행위와 사고를 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즉, 사람들이 언어로 발화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가 타인을 조종(manipulate)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종이라는 것은 타인의 정신에 영향을 미쳐서,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유도하려는 것이다.

 

조종의 목적으로 자동발화기계들이 이리저리 지침들을 내뱉을 때 결여된 것은, 그러한 지침이 과연 지속가능한 가치 경험을 하는 삶에서 일관되게 준수할 수 있는 지침이 될 수 있는가를 검토하는 반성이다. 그래서 스스로도 지키지 않는 수많은 말들을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한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입지가 그러한 발화를 되풀이할 때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마음이 허약한 이들은 그런 발화에 영향을 받는다.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 맞추어 살고자 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조종하는 말을 되풀이 해서 들으면 사실 빚을 지지도 않는데 빚을 지고 있는 기분이 된다. 주위 사람들이 자신의 기대에 맞추게끔 하고, 자신의 말에 영향을 많이 받으면 좋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종하는 말의 효력을 은연중에 실감한다.

 

이런 일이 사회에 만연하게 되면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착취적인 기대를 하고 그것을 '규범'적인 용어로 변화시킴으로써, 반성과는 동떨어진 지침의 그물망 속에 풍덩 빠져 살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착취적인 기대의 그물망들은 마음의 평정을 해친다. 우리의 회복 탄력성을 떨어뜨린다.

 

조종하고 착취하는 기대 발화의 그물망 속에서 쌓여 지내는 사람은 매일 지나치게 스스로를 몰아대게 되며, 채권자에 둘러쌓여 얻어맞고 있는 채무자의 기분을 느끼게 된다. 늘상 뭔가를 해야 하는데 아직 하지 않은 느낌이 들고,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을 늘 받는다.

 

4. 응급 처방이 되는 두 원칙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는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 자유인은 스스로 검토하고 인정한 가치를 능동적으로 경험하는 것만이 삶을 향도하는 지침임을 명료하게 인식한다. 그러한 것 이외의 것은 어느 것도 자신을 휘둘리게 하지 못한다.

 

자유인이 되는 과정은 점진적인 수련의 과정이다. 자유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을 부조리한 실존에 의해 100% 지배되는 희생자가 아니라, 주어진 여건 안에서 스스로 구성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인식하고 수행해 나간다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는 자유인을 '현자'(wiseman)이라고 불렀다.

 

점진적인 수련인 까닭에, 자유인이 하루 아침에 될 수는 없다.

 

따라서 늘 무언가에 쫓기며, 일상에 지나치게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응급 처방이 필요하다.

 

응급처방은 두 가지 원칙을 명료하게 인식함으로써 이전과는 달리 세계를, 그리고 나의 행위를 바라보는 것이다.

 

 

첫째는 호혜성의 원칙이다.

상대방이 타당한 대우를 나에게 해줬다면 나도 그러한 대우를 해주면 된다. 상대방이 규범적으로 부당한 대우를 한다 해도, 나는 그의 권리를 위배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 이외에는 나에게 아무런 주장할 수 있는 바를 갖지 못하게 된다. 

 

자신은 전혀 나의 복지에 신경을 쓰지 않거나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데도 우겨서 이상한 것을 해주고 나서, 그 대가로 내가 상대에게 많은 것을 해주기를 바란다면, 나는 그러한 기대를 충족시킬 필요가 없으며, 충족시키지 않아도 된다. 그들의 기대는 비본질적인 허상일 뿐이다. 그것은 착취적인 조종일 뿐이다.

 

이것은 얼핏 보기에는 간단한 원칙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평범한 얼굴을 한 착취적 기대 자동발화기계들이 사실은 엄청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의 삶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의 일로 골몰해 있다. 그리고 사실 내가 그들의 요구 때문에 괴로워하는 이유도, 그들의 복지에 진정으로 주의하기 떄문이 아니다. 나는 단지 그들의 요구를 잘 들어주지 않으면 기대에 어긋난 인간이 될까봐 두려워하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이 경우 나의 괴로움은 '기준과 근거를 검토해보지도 않고 주위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신념을 받아들여 생긴 자업자득이다. 그러나 그 신념은 거짓이다. 그것은 허공의 충동과 의무감을 자동발화기계가 불어넣으면 곧 그 충동과 의무감이 실재의 것이 된다는 잘못된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식이라면 무슨 내용이라도 반복해서 먼저 말하는 이가 세상의 질서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상대방이 정당하게 기대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자동발화하여 조종을 유도하는 기대들은 굳이 반박하거나 할 필요는 없다.  응급처방으로서의 호혜성의 원칙은 외부에 일일이 공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평정을 일단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 내부에서 인식해야 할 준칙이다.

 

응급처방으로서 호혜성의 원칙을 실천할 때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기대를 스스로 부주의하게 창출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아무런 요구를 한 바 없는데도, 어떤 약속을 별 생각도 하지 않고 한다거나, 부주의하게 확고한 언질을 주어 생기는 문제는 자업자득이다. 조건(qualification)은 언제나 세심하게 달아 말을 해야 하며, 확고한 이야기는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응급처방 둘째 전략은 '퍼즐'의 원칙이다.

 

지나치게 괴로워하는 것은 지나치게 상황에 휘말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휘말려 들어가서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총을 등 뒤에 두고 밥을 빨리 먹으라는 명령을 받고 밥을 먹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정말로 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가상의 총을 치우는 요령은, 인생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퍼즐로 보는 것이다. 퍼즐이란 무엇인가? 퍼즐은 구조를 가진다. 그 구조를 잘 파악해서 해법을 내는 경우, 퍼즐은 풀린다. 문제를 퍼즐로 바라볼 때, 자연스러운 거리두기가 달성된다. 그러면서도 수행력은 올라간다. 또한 엉켜 있는 거대한 덩어리로 다가오는 문제들이 실은 여러 개의 퍼즐들임을 더욱 명확하게 인식하게 된다. 이렇게 여러개의 퍼즐들을 풀어 나가는 작업으로 인생을 인식할 때, 하나의 퍼즐이 맥락도 없이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떠오르지는 않는다.

 

어떤 퍼즐은 그 퍼즐 경계를 갖는다. 그 경계를 부풀리는 것은 지나치게 상황에 휘말려 들어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착각하는 것이다. 그런 착각에 빠지면 x를 못하면 y가 발생하고, z가 연이어 발생하고 하는 식으로 연쇄적 연상관계에 빠져 고민하게 된다. 그러나 x를 못하면 x를 못했을 뿐이다. y가 발생하지 안할지는 x2, x3, x4라는 다른 퍼즐들을 푸느냐에 달려 있으며, 또 y가 발생한다고 z가 자동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수행 부족으로 인해 자신의 본질을 단언하는 것은 인생의 과업들을 퍼즐로 보지 못해 생기는 과도한 일반화하는 버릇 때문이다.

 

어떤 문제든 일정한 파급력의 한계를 갖는다. 그것은 다른 퍼즐들을 풀 기회까지 통째로 엎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5. 두 원칙의 기능 - 가치의 면도날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다른 사람들을 유도하려고 조종하는 말을 하기 때문에 모든 문제를 죽고 사는 심각한 문제로 바라보게 한다. 그러나 일상의 모든 문제들이, 과연 그러한가.

 

퍼즐과 호혜성의 원칙은 일종의 면도날로 기능하게 된다.

이 처방의 두 원칙에 따라 감정적으로 휘말려 들어갔던 커다란 문제들은 실제로 상상된 부분이 잘리게 된다. 호혜적이지 않은 부분은 잘리게 되며, 구조를 파악해서 풀 수 없는 부분도, 그리고 다른 것과 연관되지 않은 부분도 잘리게 된다.

 

이 지점에서 다시금 근본적인 본질로 돌아간다. 사실과 규범에 관한 근본적인 본질은 어떤 사태에 즉하여 사람들이 느끼는 심리적인 경향성과는 무관하다. 예를 들어 근본주의 이슬람 사회에서는 간통을 한 여자를 돌려 쳐죽여야 한다는 심리적인 경향성을 느끼지만 그것은 간통에 관한 응분의 책임의 정도와는 무관한 것이다. 그러한 심리적인 경향성은 가치와는 무관한 자동발화들에 의해 만들어낸 기대의 그물망에 빠져 생긴 것일 뿐이다.  그들의 경향성이나 그들이 내는 자의적인 소리에 어떠한 무게를 줄 필요가 없다. 달려 있는 것은 결코 그런 문제가 아니다. 가치의 면도날로 잘라내고 나면 그러한 소리들의 터무니없음은 자연히 드러난다.

 

6.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에 대한 인식

 

특히 이 점은 어떤 일의 결과가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사태에 의해서 좌우되는 확률이 큰 경우에 명심해야 할 바다. a, b, c, d, e, f의 요소가 있어야 하는데, 자신이 맡은 일은 a라는 요소다. 그런데 나머지 요소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a를 잘해도 결과는 안나온다.

 

그러나 a를 시키는 사람이 마치 그 결과 전체에 대하여 당신이 책임지라는 듯이 요구한다면 어떠한가? 그렇다면 그것때문에 괴로워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호혜성의 원칙에 의하면, 다른 사람도 내가 요구하는 일에 대하여  b, c, d, e, f까지 갖추어줄 수 없다.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a와 관련해서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 a는 퍼즐이다. 구조를 파악하고 수행하면 적정 수준으로 할 수 있느 ㄴ일이다. 그러므로 내가 맡고 나의 행위에 의해 결정되는 a라는 과제 자체만 하면 된다.

 

7. 적정 수준의 수행

 

퍼즐을 풀 때 가장 중심적으로 생각할 것은, 그 퍼즐을 얼마나 최대한 멋지게 완벽하게 풀까가 아니라, 그 퍼즐을 어떻게 하면 최소한의 노력을 들이고 적정 수준으로 풀 수 있을까이다. 

 

'최선'이라는 개념은 착취적 기대에 특히 취약한 개념이다. 그런 착취적 맥락에서 요구되는 최선으 '탈진하라'는 명령인데, 이 명령을 지키면서 사는 사람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 중에 아무도 없다. 스스로도 지키지 않지만 타인을 조종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다. 자기계발 강사가 그런 말을 한다면, 동기부여의 느낌이 불어넣어졌다는 기분을 강조하고 자신의 조언이 실패했을 때 빠져나갈 구석을 만들기 위해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직장상사가 그런 말을 한다면 최소한의 임금으로 과도한 노동을 시키기 위해 그러는 것이다. 교사가 그런 말을 한다면, 친절하지 않은 설명으로 학업성취도를 높이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다.

 

그 과업은 그 사람들이 대신 해주지 않으며, 그 과업 이후에도 다른 과업이 기다리고 있는 삶을 그 사람들이 대신 살아주지도 않는다. 탈진하면 내일도 없다. 하나의 과업에 탈진하면 다른 과업에 대하여 착취적 기대를 내뿜는 이에게는 어떻게 대응할 것이다. 타인이 자동발화하는 지침은 오히려 정신을 흐릴 뿐이다. 스스로 적정 수행의 요령을 터득하고 실천하는 것이 마음의 평정을 위한 첫걸음이다.

 

8. 결론

 

일상에서 지나치게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일종의 함정에 빠져 있다.

일관된 가치 경험의 지침을 제대로 형성해주지 못하고, 그때그때 타인을 조종하기에 적합한 발화만을 자동적으로 내뱉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함정에.

그들은 그렇게 괴로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는 말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보지도 않기 때문이고,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착취적 기대의 그물망에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이 함정에서 나오기 위한 첫 단계의 조치다.

 

이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타인의 착취적 기대를 자기 자신이 부과한 규범적 기대로 잘못 오해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이 규범적 기대는 오히려 수행력을 떨어뜨리는데 매사에 지나치게 정서적으로 골몰하여 문제의 해법을 제대로 파악하고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호혜성의 원칙과 퍼즐의 원칙은, 이 함정에서 상대적으로 단기간에 나올 수 있는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다.

 

그리하여 적정 수준의 수행을 위한, 자신만의 길과 테크닉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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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7.16 20:00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사람 경험이 없을 수록 함정에 빠지기 쉽더라구요 ㅋㅋ 경험은 해봐야 걸러낼 수 있는 패턴 같아요.
  2. 2016.05.04 01:06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감탄 하고 갑니다. 좋은 글로 다가옵니다.
    감사합니다
  3. 2019.10.18 08:44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이 글을 다섯 여섯번째 읽어봅니다. 여러모도 도움도 많이 되고 깨달음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글쓴이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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