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윤리학의 분과

 

여기서 학문으로서의 윤리학이란 널리 당위를 다루는 학문을 의미한다. 이러한 학문 명칭으로서 윤리학은 도덕철학과 상호교환적으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이 용법을 따르겠다.  

 

윤리학은 탐구 주제와 탐구 방식에 따라 세 가지로 거칠게 구분된다.  

 

(1) 응용윤리학.(Applied Ethics) 규범윤리학을 적용하여 특정한 구체적인 사안의 윤리적 문제를 다루는 것. 동물의 권리, 표현의 자유, 사형, 낙태, 안락사 등등을 다루는 학문이다. 응용윤리학은 이미 어느 정도 정립된 도덕 이론과 원리 그밖의 방법을 타당하게 적용하는 것에 주안점을 둔다. 그렇기 때문에 심층적으로 이론이나 원리, 방법 자체를 깊이 있게 파고 들어가지는 않는다.

 

(2) 규범윤리학(Nortmative Ethics): 인간의 행위와 제도를 지도하는 원리들을 검토하는 학문. 이것은 적용하게 되면 구체적 규범적 함의를 갖는 원리들을 도출하는 이론적 구조를 갖는다. 공리주의, 의무론,덕 이론 등등.

 

(3) 분석윤리학(Metaehics): 분석윤리학은 윤리학적 주장이나 논의라는 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그것이 어떤 앎의 구조를 갖고 있는가를 다루는 학문이다. 도덕적 진술의 의미는 무엇인가. 도덕적 진술이 참, 거짓이 되는 것은 가능한가. 도덕적 사실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도덕이란 그 본질상 보편적인 것인가 아니면 상대적인 것인가.

 

그런데 윤리학의 탐구는 이런 식으로 엄밀하게 분리되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다만 이러한 분류는 문제 논의의 쟁점과 층위가 어디에 있는가를 포착하는 데 용이하다. 이를테면 만일 논의하는 두 사람이 규범적 이론과 원리 자체에 합의하고 있다면, 그것을 올바르게 적용하는 응용윤리학적 쟁점에 집중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이 적용하고자 하는 규범적 이론과 원리 자체가 다르다면, 논의는 곧바로 이론적 상승(theoretical ascent)를 거쳐 규범윤리학적 논의에 곧장 이를 수밖에 없다.

 

물론 실질적 규범 원리와 이를 정립하는 이론을 달리 한다 해도 쉬운 사안에서는 결론의 중첩이 있게 된다. 그러나 논쟁이 벌어지는 사안들은 어려운 사안들이다. 어려운 사안에서 결론의 차이를 가져오는 부분이 추가적인 사실의 이해나, 공유하는 이론에 대한 이해를 서로 교정해가는 것만으로도 해소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논의는 완결될 것이다. 그러나 결론의 차이를 가져오는 부분이 규범적 이론과 원리 자체에 있다면 이에 대해서 논의하지 않고서는 단지 상이한 결론만 서로 주장하는 것 이외에는 더 이상 할 일이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게다가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쟁점은 이론적 상승을 필히 수반하게 된다. 왜냐하면 겉으로 보기에 유사한 원리와 이론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조차도, 그 원리와 이론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에 관한 적용 원리 및 이론에 관하여 의견을 달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규범적 논증대화는 무의미하다고 하며 자신의 결론을 논증 없이 주장하고 있다면, 그 사람과의 논증대화는 분석윤리학적 논증대화로 이동해야만 한다. 다만 어떤 분석윤리학적 견해 내지 메타윤리학적 견해가 정말로 그 견해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메타적인 것인가 하는 점은 그저 '메타'라는 이름을 내세움으로써 확보될 수 없다. 로널드 드워킨이 말했듯이, 만일 어떤 견해가 메타윤리학적으로는 윤리학적 진술에는 아무런 참이나 거짓 또는 타당과 부당의 값이 할당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규범윤리학적으로 p는 옳다, p는 그르다를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고 해도, 그런 견해는 지탱될 수 없는 견해이기 때문이다.  

 

2. 이론적 쟁점에 따른 분류 개념들

 

분석윤리학 내에는 몇가지 쟁점을 두고 이론적 대립이 형성되어 있다.

 

(1) 인지주의 대 비인지주의

 

도덕적 진술은 참이나 거짓인가.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인지주의.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비인지주의다.

 

인지주의Cognitivism.

인지주의는 노예제는 그르다와 같은 도덕적 진술 역시 진리속성을 갖는다고 한다. , 위 진술은 참이다. 반면에 무고한 이를 고문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허용된다는 거짓이다.

 

비인지주의 Noncognitivism 

비인지주의는 도덕적 진술moral statement이 진리속성truth-apt을 갖는 것을 부인한다. 도덕적 진술은 명령(command)이나 규정(prescription), 지시, 호오를 표시할 뿐이라고 한다.

 

, 서술문 형태로 되어 있는 도덕적 진술을, 인지주의는 나무는 물 위에 뜬다와 같이 참, 거짓을 따질 수 있는 종류의 진술의 집합에 귀속시키고, 비인지주의는 우우라든가 오늘 홍대 클럽에 가자’, '저 창문을 닫아라'와 같이 참, 거짓을 따질 수 없는 종류의 진술의 집합에 귀속시킨다.

 

비인지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정서주의Emotivism이다. ‘노예제는 그르다노예제 우우 싫어와 같다는 것이다.

 

극단적이지 않은 비인지주의인 규정주의Prescription는 도덕적 진술은 명령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노예제는 그르다노예제를 실시하지 마라!’와 같은 뜻이라는 것이다.

 

정서주의와 규정주의는 모든 종류의 도덕적 진술에 대하여 한결같이 취해야 하는 상호 배타적인 입장은 아니다. 발화의 맥락에 따라 정서를 표현하거나 명령을 표현한 것 어느 하나에 속한다는 이론을 채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규정주의를 택하는 이들은, 중요한 도덕적 진술에 대해서는 정서주의에 한정된 설명에 만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인지주의의 주된 근거 중 하나는, 참/거짓을 따질 수 있는 서술문들은, 사실에 대한 기술이 갖는 속성을 모두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즉 비인지주의는 일종의 논리실증주의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예를 들어 노예제는 그르다고 했을 때, ‘그르다라는 속성을 세계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속성은 객관적 세계에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존엄하다고 했을 때 존엄이라는 속성도 전혀 관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동일한 호모 사피엔스를 보고 어떤 사람은 얼마든지 비루하다고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존엄하다고 말할 수 있으며 사실에 대한 관찰을 통해 이 두 견해 중 누가 옳은지를 가려내는 테스트 방법은 전혀 없다고 한다. 따라서 이는 발견할 수 없는 속성을 주장하는 것이고, 따라서 참, 거짓을 따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성립하려면, 도덕적 진술의 논의 차원, 즉 도덕적 당과 부당을 따지는 화용의 차원이 정확히도 사실 진술과 같다는 것을 먼저 보여야 한다. 즉 타당성 요구가 제기되는 모든 화용의 차원이 사실의 기술이 문제되는 차원이라는 점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비인지주의는 이러한 점을 보여주지 못한다. 이를테면 수학적 진리를 논의하는 차원은 사실을 기술하는 차원이 아니다. 1+1=2라는 진술은, 물 한 방울에 물 한 방울을 더했는데도 여전히 물 한 방울이라는 점을 내세워서 거짓으로 판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타당성 요구가 제기되는 모든 논의의 차원이 사실의 진술에 관한 것이라는 전칭명제가 틀렸다. 그리고 그 전칭명제조차도 사실의 진술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장을 하는 이는, 그런 전칭명제가 틀렸다는 점을 보일 수 있는 사실상의 증거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버마스가 밝힌 바대로 규범적 진술은 타당성 요구와 무관한 화행이 아니라, 요구하는 타당성의 종류가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

 

표출적 진술은 진술된 명제가 내심의 믿음 및 태도와 진실되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사실 진술은 그 진술된 명제가 실재와 일치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규범 진술은 그 진술된 명제가 평등하고 자유로운 구성원들 사이에서 강제 없이 숙고 후 보편적 행위 격률로 승인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즉 표출적 진술은 진실성(진정성)을 요구하고, 사실 진술은 진리성(사실성)을 요구하고, 규범 진술은 정당성(타당성)을 요구한다.

 

이와 같이 인간 생활에서 제기되는 타당성 요구가 다르기 때문에, 그 타당성 요구의 종류가 같다는 전제 하에서 규범 진술과 대응하는 물리적 세계의 대상이 없다는 이유로, 규범 진술의 당, 부당을 따질 수 없다는 비인지주의는 보증되지 않는다.

 

물론, 비인지주의가 보증되지 않는다는 것을 넘어서, 비인지주의가 그른 것인가까지 보여주려면 추가적인 논증이 필요하다. 즉, 규범적 논증대화가 자의적인 심리적 과정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는 판정의 기준을 갖고 있으며, 이 판정의 기준은 바로 그 규범적 논증대화의 논증논리에 의해서 마련된다는 점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논증논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규범적 논증대화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당사자들 사이에 승인될 공동의 규율을 확립하고자 하는 대화이며, 따라서 이러한 전제와 수행적 모순을 가져오는 규범명제는 도입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비인지주의를 따르면서, 즉 규범적 명제의 참, 거짓의 정당화 요구를 거부하면서 자신이 내세우는 규범명제에 타인이 복종할 것을 주장하거나, 아니면 타인의 이해관심에 영향을 미치면서 그것을 정당화하기를 거부한다면, 이는 수행적 모순에 해당한다. 따라서 비인지주의는 타인에 대한 정당화 요구를 촉발하는 실천에 연결되는 순간 수행적 모순을 범한다. 따라서 비인지주의는 그르다.

 

(2) 객관주의 대 주관주의 

 

다음 쟁점으로, 도덕적 진술이 참, 거짓이 될 수 있다고 할 때, 쟁점은 다음과 같다.

이 쟁점을 표현하는 한 가지 방법은 '도덕적 진술의 참과 거짓은 사람들의 의견에 달려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방법은 '어떤 도덕적 명제는 그 명제를 받아들이기로 한 사람에게만 행위의 이유가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행위의 이유가 되지 않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이 질문들에 대하여 예라고 답하는 이론이 주관주의Subjectivism이다.

 

주관주의는 적어도 도덕 명제에 관해서는, 명제(proposition)와 [어떤 조정을 거친] 명제태도(propositional attitude)가 같다고 보는 이론, 즉 명제와 명제태도의 간극이란 없다고 보는 이론이다.

 

우리는 사실적 진리나 아니면 수학적 진리에 관하여 명제와 명제태도의 간극을 분명히 인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이미 퇴근하여 방에 들어와 있는데도(사실 명제), 음악감상에 몰두하여 아버지가 아직 집에 있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사실에 관한 명제태도). 또한 페르마의 정리가 참이고 증명될 수 있는데도(수학적 명제) 페르마의 정리의 참과 거짓은 증명될 수 없다고(수학적 명제태도)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명제와 명제태도는 [명제태도 자체 내에서의 조정으로 소진되지 않는] 간극이 있는 것이 통상적이며, 이 간극이 없다고 주장하는 이가 특별한 증명책임을 진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주관주의는 이러한 증명책임을 충족하는가?   

 

개인주의적 주관주의는, 도덕적 진술은 그것을 발화하거나 듣는 사람 각자의 태도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 ‘노예제는 그르다라는 발화를 하는 사람이 그것을 수용하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이다.

 

개인주의적 주관주의가 분석윤리학적 쟁점에 관한 입장에서 정서주의 같은 비인지주의와 다르다는 점을 주의하라.

주관주의자는 도덕적 진술의 참, 거짓을 인정한다. 다만 참, 거짓을 가리는 기준이 주관에 있다는 것이다.

주관주의자가 도덕적 진술을 할 때, 그것은 자기 자신 또는 준거 집단의 도덕적 태도를 알림으로써 도덕적 참, 거짓을 진술하는 것이다. (즉, 참, 거짓이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주관주의는 인지주의의 입장에 선다.) 다만 그 참 거짓이, 말하는 사람 마음(심적 표상의 내용)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참, 거짓은 있다. 그 참 거짓은 그 사람의 수용이라는 심적 상태 내지는 욕구라는 심적 상태라는 기준에 의거하여 판정된다.

 

문화적(집단적) 주관주의(Cultural subjectivism), ‘노예제는 그르다고 하는 것이 전체로서의 문화나 집단의 지배적 견해에 따라 참, 거짓이 정해진다고 한다. 이것은 관례적 윤리 상대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문화적 주관주의는, 문화집단의 경계를 나누는 준거가 핵심이 되는데, 이 준거는 규범적 토대가 없다. 따라서 이 준거는 적어도 규범적인 측면에서는, 아무렇게나 나눌 수 있다. 따라서 문화적 주관주의는 개인주의적 주관주의로 미끄러진다. 왜냐하면 준거 집단을 나누는 것 자체가 결론을 좌우하는 규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준거 집단을 나누는 규범에 대해서는 준거 집단의 견해를 근거로 삼을 수 없다. 왜냐하면 행위자가 따라야 하는 준거 집단을 준거 집단을 나누기 전에는 특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적 주관주의가 어떤 집단 내에서는 준거 집단의 단위를 바로 그 집단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선결문제요구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예를 들어 국가가 준거 집단의 단위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문화적 주관주의자는, 인류 세계 전체가 준거 집단의 단위가 되어야 한다는 문화적 주관주의자의 단언을 타당한 것으로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거꾸로 한 문화적 주관주의자는, 준거 집단을 자기보다 더 좁게 설정하고자 하는 다른 문화적 주관주의자의 시도를,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를 범하지 않고서 거부할 수 없다. 

준거 집단을 계속해서 주장자가 좁게 좁게 설정하다보면, 준거집단의 단위를 한 개인으로 잡는데 이른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도 문화적 주관주의자는 아무런 타당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문화적 주관주의는 개인주의적 주관주의로 붕괴한다. 

그런데 개인주의적 주관주의는, 규범으로서의 승인의 자격이 있다는 점을 정당화하지 않고 그냥 자기 선호를 내세우는 것으로 규범 진술을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규범적 주장으로서 수행적 모순을 범한다. 즉 규범을 공적으로 주장하면서도 그 타당성을 전혀 승인받고자 하지 않고 그저 사적인 기호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 어떤 주관주의도, 자신이 설정한 내집단 바깥에 대해서 정당화의 요구를 부인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이 설정한 내집단의 지배적 선호를 내세우는 것으로 정당화를 대신한다. 즉, 정당화의 요구가 가장 예리하게 제기되는 곳에서 정당화를 하지 않는다. 따라서 주관주의는 화행이라는 행위의 수행으로서나 아니면 행위조정의 지침을 제공한다는 실천적 측면으로서나 모순적이다. 그것은 공적인 것을 실은 사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주관주의는 그르다.

 

한편, 이 갈림길에서 만일 도덕적 진술이 그러한 주관적 근거에 의해 참 거짓이 결정되지 않는다고 했을 때, 객관주의로 가게 된다. 즉, 내가, 또는 사람들이 어떻게 믿고 있느냐가 변해도 도덕적 참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객관주의의 타당성은, 명제태도와 명제의 진리조건이 다르다는 점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명제태도는 어떤 명제를 믿고 있다는 행위자의 마음 상태를 기술한다. 따라서 명제태도를 진술하는 문장의 참, 거짓은 행위자가 그런 마음 상태를 갖고 있는가에 따라 좌우된다.  

반면에 명제의 참, 거짓은 행위자의 마음 상태와 무관하게 그 명제의 내용이 성립하는가에 따라 좌우된다.

예를 들어 (1)과 (2)는 진리조건이 다르다.

(1) 영희는 '아버지가 방에 있다'고 믿는다.

(2) 아버지가 방에 있다.

 

(1)의 경우에는 아버지가 설사 화장실에 있다 하더라도, 영희가 아버지가 방에 있다고 믿는 마음상태를 가지기만 한다면, 참이다.

반면에 (2)의 경우에는 영희가 어떻게 믿든지 상관 없이 아버지가 실제로 방에 있어야 참이다.

 

마찬가지로

(1) 영희(또는 X종교집단은 또는 A국가는 또는 세계 인류의 과반수는) '아기를 재미로 고문하는 것은 그르지 않다'고 믿는다.

(2) 아기를 재미로 고문하는 것은 그르지 않다.

의 진리조건은 다르다.

 

극악한 AI가 나타나 사람들의 뇌 신경체계를 망가뜨리면 사람들은 실제로 그런 터무니없은 규범 명제를 믿게끔 될지도 모른다. 즉 (1)이 참이 되는 가능세계를 그려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고 해서 그 가능세계에서 (2)가 참이 된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2)는 Judith Jarvis Thomson이 말한 것처럼 필연적 참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관주의는 명제태도와 명제의 진리조건이 적어도 규범의 영역에서는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생각은 보증되지 않으며, 더 나아가 수행적 모순을 범하므로 틀린 것이다.

 

따라서 객관주의가 타당하다는 것이 다시 확인될 수 있다.

 

(3) 실재론 대 비실재론

 

도덕 실재론Moral Realism은 도덕적 진술이, 세계의 마음 독립적인 특성에 의거하여 참이나 거짓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을 발화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지금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이, 그것은 참이라고 한다. 그것은 도덕의 세계에서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도덕적 속성과의 부합에 의해 결정된다. 다만 도덕 실재론의 언어는 다분히 주어부의 대상에 술어부의 속성을 귀속시키는 단칭술어논리의 사고를 유발하여 규범명제의 자유롭고 평등한 당사자들 사이의 정당화 요구의 차원을, 관찰의 차원으로 오도하는 취약점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단칭술어논리는 1인칭 관점에서 세계에서 성립하는 사태(사실)와 성립하지 않는 사태(거짓)을 구분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라고 보는 관점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 실재론의 언어는 때때로 오해를 빚어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외부세계에서 어떠한 도덕적 입자도, 또는 그 외에 도덕의 실재를 입증하는 물리적 실체도 관찰할 수 없는데, 어떻게 도덕이 '실재'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물음은 말했듯이, 오해에 기반한 것이다. 도덕이 실재한다는 것은, 도덕입자(그것을 moron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가 물리적 세계에서 물리적 실체로서 관찰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맥키(Mackie)와 같은 이론가는, 도덕 실재론을 그런 도덕입자를 주장하는 이론으로 잘못 이해하고는, 자신의 잘못된 이해에서 오류의 증명을 뽑아내었다. 그러니까 도덕입자라는 것이 있는 한, 그 입자에 감응하는 행위자는 어떤 식으로 행위할 수밖에 없는 동기부여를 받아야 하는데, 그런 움켜쥠을 가진 도덕입자를 발견할 수 없으므로 도덕 실재론이 오류라는 것이다.

이러한 공박을 설득력 있다고 받아들이는 이들은 모종의 욕구 기반 이론(또는 정체성 이론)으로 돌아간다. 즉 비록 객관주의자로서 규범성의 원천이 있다고 보기는 하지만, 그 원천은 바로 행위자 또는 행위자들의 내적 욕구나 그 행위자들의 정체성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욕구 기반 이론은 겉보기에 많은 이론적 강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수수께끼 같은 규범적 개념들을 해명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이러한 해명의 범위는, 사실 욕구 기반 이론에 의하지 않고서도 모두 커버가 된다. 그리고 욕구 기반 이론은 오히려 세부사항에서 해명을 그르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Parfit의 <On What Matters> Vol. 1이 상세히 다루고 있다. 또한 아래에서 이야기할 스캔론의 책에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욕구 기반 이론은 명백한 난점들을 발생시킨다.

 

첫째는 욕구 기반 이론들이 당장 제기되는 반례를 피하기 위해 도입하는 '유관한 사실들을 모두 숙지하고 합리적으로 추론하였을 때의 욕구'라는 중개적 개념이다. 이 개념을 도입하지 않으면 욕구 기반 이론은, 독물을 포카리 스웨트로 잘못 알고 마시려고 하는 이가, 그 독물을 마실 실천적 이유가 있다고 판정하게 된다. 그래서 그 액체가 독물인 것을 알았더라면 그 행위자가 가졌을 욕구라는 개념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명백한 반직관적 사례들은 피하게 된다. 그러나 이 중개적 개념은 욕구 기반 이론이 그 도입을 실제로는 정당화할 수 없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무엇이 유관한 사실인가마저도 욕구에 의해 평가되어야 하고, 그리고 실천적 문제에서 합리적 추론이 무엇인가도 욕구에 의해 평가되어야 하는데, 실제로 이 이론가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논지를 정초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의 주체의 욕구 아니라 이와 같이 스스로 그 도입을 욕구에 기반해서 정초할 수 없는 중개 개념을 거쳐서 상정되는 가상의 주체의 욕구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이는, 환원불가능한 규범적 이유를 적어도 하나 이상 도입하는 셈이다.

 

둘째는 욕구 기반 이론의 중개개념들이 수정할 수 있는 욕구의 깊이에 관한 것이다. 욕구 기반 이론의 중개개념이 행위자의 궁극적 욕구 자체까지 수정할 수 있다고 본다면, 욕구 기반 이론은 더 이상 욕구를 궁극적 이유로 보지 않는 것이 된다. 그것은 궁극적 욕구의 당/부당을 가리는 기준에 규범성의 궁극적 원천을 두는 이론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욕구 기반 이론은 이미 구성된 행위자의 자아를 기반으로 해서, 즉 행위자의 현재 욕구의 핵심을 건드리지 않는 범위에서의 유관한 사실들과 추론 능력만을 보충하여 실천적으로 할 이유가 있는 행위들의 세트를 뽑아내려고 한다. 그러나 그 건드리지 않아야 하는 범위에 이런 한계를 두게 되면, 욕구 기반 이론은 관련 사실을 알고 숙고한 뒤에도 미래의 극심한 고통을 피하려고 하는 욕구가 없는 사람은, 미래의 극심한 고통을 피하는데 효과적인 행위를 취할 이유가 없다는 터무니없는 결론을 수용해야 한다.(Derek Parfit의 미래의 극심한 고통 논증) 다시 말해 욕구 기반 이론의 해명이 그럴법해 보이는 모든 사안들은, 그것이 욕구라는 형식적 개념이 아니라, 그 욕구가 지향하는 대상들 자체에 의해 주어지는 쾌락, 고통, 우정, 진리 등등의 환원불가능한 실천적 이유가 있는 그런 사안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욕구 기반 이론에 끌리는 사람들이 도덕 실재론에 제기하는 공박은 어떻게 되는가? 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겠다: 도덕이 실재한다는 것은, <Being Realistic About Reasons>에서 T.M. Scanlon이 말했듯이, 도덕명제의 참, 거짓을 논할 수 있는 논의 차원을 정립할 수 있으며 그 차원에서 주장을 근거짓는 이유들이 환원불가능하게 규범적이어서 다른 차원의 이유로 변환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는 수학적 진리들의 근거들이 다른 물리적 사실로 환원될 수 업음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이유가 실재한다는 것은, 단지 그것이 정당한 논의영역을 갖고 있고 그 논의 영역이 다른 논의영역(domain)과 독립성을 갖고 있다는 두 조건의 축약어(shorthand)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도덕 실재론의 언어가 이런 고질적인 오해를 일으키는 원인인, 주부의 대상에 술부의 속성을 귀속시키는 형식으로 도덕 명제를 논의해나가는 스타일은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것은 주부의 대상에 대응하는 술부의 그름이나 옳음을 찾아야 하지 않는가라는 잘못된 사고를 촉발시키기 때문이다. 그 스타일을 피한다는 것은, 논증대화의 맥락에 명시적으로 도덕명제를 위치지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논증대화의 맥락이 입헌 민주주의의 정치사회 구성원들 간의 논증대화일 때, 도덕 실재론의 언어는 사실상 롤즈가 이야기한 정치적 구성주의의 언어에 한없이 가까이 다가간다.

 

이와 같이 규범적 논증대화에 도덕명제의 참, 거짓 또는 당, 부당의 논의를 위치지울 때, 욕구 기반 이론의 불합리성은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나는 당신이 그 고통에 대응되는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도 미래에 극심한 고통을 겪기를 원하는 강렬한 욕구를 가진다. 따라서 나는 당신과 나의 관계를 규율하는 규범을 설정하는 근거로서 당신이 미래에 극심한 고통을 겪도록 만들 이유가 있다."

 

고통에 대응되는 잘못을 하지 않았음에도 큰 고통을 겪기를 원하는 마음을 악의(malice)라고 한다. 악의는 인간사에 널리 만연한 현상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좋아해서 쫓아다녔지만 그 사람이 결국 자신을 거절하면서 게다가 무시까지 했다는 이유로 그 사람이 사고 등으로 끔찍하게 압살되기를 바라는 바라는 마음은 종종 눈에 띠는 인간 현상이다. 그리고 이런 욕구는 너무도 강렬하여 그런 욕구를 가진 사람의 삶과 정신을 지배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런 욕구를 가졌고 이 욕구 충족이 그 사람의 1인칭 관점에서는 마치 이유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2인칭 관점에서 정당화하는 이유, 또는 복수의 주체를 자유롭고 평등한 수범자로서 규율하는 공동 원리를 수립하는 이유로 인정되기에는 부적절함은 단박에 드러난다. 왜냐하면 그런 원리에 복종하여야 한다는 결론은, 논의 과정에서 고통을 겪게 될 사람이 열등하고 부자유한 존재라는 명제가 도입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그런 결론은 수행적 모순을 범하는 논증에 의해서만 도출될 수 있다.

 

이처럼 1인칭에서의 행위의 이유인 가치(value)와 2인칭 관점 내지는 복수의 주체 관계를 규율하는 논의 평면에서의 이유인 규범(norm)을 하버마스와 같이 구분하는 것은 도덕 실재론을 오해 받지 않고 되살리는 주된 묘수가 될 것이다. 

 

(4) 자연주의 대 비자연주의

 

 도덕 명제의 참, 거짓이 자연적 사실로 환원될 수 있는가 아니면 도덕 명제는 그런 사실로 환원될 수 없는가? 질문에 대한 답에 따라, 도덕적 자연주의Moral Naturalism(환원가능하다)과 도덕적 비자연주의Moral Non-Naturalism(환원불가능하다)으로 나뉜다.

 

자연주의는 도덕적 속성이란 결국 자연적 속성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도덕 명제의 참 거짓을 좌우하는 것은 빠짐없이 자연적 속성을 가진 사실들이라고 한다. 자연적 속성이란 세계에 대한 과학적 기술에 의해 드러나는 특성들이다. 즉 경험적 연구나 감각 경험에 의해 알게 되는 것이다. 자연적 속성에는 인간의 신체적 구조’, '진화적 적응' ‘쾌락’ '복종의 습관'과 같은 것이 있다.

자연주의자들이라면, 도덕 실재론의 취지를 바로 앞3)에서 설명한 것과는 다르게 받아들일 것이다. 즉, 다른 논의 영역으로 환원은 인정하지만, 참/거짓을 따질 수는 있다고 할 것이다.

 

자연주의는 흄의 원칙 위반, 즉 무어가 '자연주의의 오류'라고 부른 것은 실제로는 오류가 아니고, 잘못 이름 붙은 것(misnominer)이라고 한다. 즉 그들은 사실에서 당위를 도출하는 것을 오류(fallacy)라고 보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본다. 

 

이에 관하여 세 가지 유명한 논증이 있다.

하나는 필리파 풋이 <Natural Goodness>에서 시도한 자연적 삶을 위해 필수적이거나 유익한 종 전형적 기능에서 규범성의 원천을 찾는 접근이다. 예를 들어 꿀벌이 꽃을 발견하고 춤을 출 수 없다면 그 일벌은 결함 있는 일벌이다. 그 꿀벌은 춤을 출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경우에는 종 전형적 기능 중 하나가 인간의 원활한 집단 생활을 위하여 약속을 하고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약속을 어기는 것은 이러한 기능상의 경험을 의미한다. 따라서 약속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자연적 사실들은 당연히 규범명제의 세부사항을 채우는 자료가 되지만, 그것이 규범명제 전체를 도출한다고 보는 기획은 틀렸다. 왜냐하면 당장 반례가 제기되기 때문이다. 필리파 풋이 계속해서 강조하는 종 전형적 기능 중 하나가 재생산이다. 따라서 재생산하지 않는 동물은 결함 있는 동물이다. 그러한 결함은 제거되어야 한다. 따라서 재생산하지 않는 남녀의 믿음체계는 결함 있는 믿음체계이며, 이러한 결함은 그 정신머리를 뜯어고침으로써 제거되어야 한다. 따라서 재생산 자율성은 기본권이 아니며 오히려 결함으로 제거되어야 하는 악덕이다. 이와 유사한 다른 접근들도 마찬가지 반례에 부딪힌다.

 

다른 하나는 힐러리 퍼트넘이나 찰스 테일러, 버나드 윌리엄스처럼 두꺼운 윤리적 개념thick ethical concept을 통해 사실과 가치의 이분법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다. 예를 들어 '잔인하다', '정숙하다'에서 규범적 부분과 사실적 부분을 분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단어의 문형을 유지하면서 그것을 인위적으로 분리할 수 없다는 것과, 그런 개념을 사용하는 규범적 명제에 환원불가능한 규범적 속성이 없다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말이다.

 

예를 들어 'A씨는 정숙하다'라는 명제를 정숙함을 'A씨는 불특정 내지 많은 수의 성적 파트너와 단기적인 성행위를 하는 경향이 결코 없으며 이는 윤리적으로 좋다'라고 분해하는 것은 상당히 부자연스러워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두꺼운 윤리적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부자연스러움은 그 두 부분이 우리의 논의상에서 분리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반박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분명히 그 두 부분은 논의상에서 분리되기 때문이다.

이는 다음과 같이 증명할 수 있다.

'A씨는 정숙하다. 그러나 정숙한 것은 그 자체로 윤리적으로 가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물며 의무가 수반되는 도덕적 당위는 더더욱 아니다.'(이에 관한 반박은 Derek Parfit의 <On What Matters> Vol. 2에서 자세히 전개되고 있다.)

즉 두꺼운 개념으로 기술된 사태 자체의 당위성을 따지거나 가치평가가 가능하다. 따라서 두꺼운 윤리적 개념들이 있다는 것은 사실과 가치의 이분법이 틀렸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그저 우리가 쓰는 언어 중에는 사실과 가치를 함께 언급하도록 전문화된 그런 종류의 개념들이 있다는 것을 단지 지적할 뿐이다.

 

세 번째는 설(J. Searle)의 논증이다. 설은 A가 B에게 약속을 했다는 것에서, A가 B에게 약속한 것을 지켜야 하는 책무를 진다를 도출한다. 그리고 이 도출 과정에서는 약속을 한다는 것의 언어적 의미 외에는 아무것도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약속을 한 것을 지켜야 하는지 지켜야 하지 않는지는 단지 약속하는 말을 하였다는 사실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며, 약속을 한 사람이 처하게 되는 다른 사정에도 의존한다. 그런 다른 사정들을 고려하는 규범적 원리들은 약속하였다는 사실로 포괄되지 않는 규범적 요소들이다. 게다가 책무는 어떤 실질적인 규범 이론을 지지하는가에 따라 달리 파악된다. 행위 공리주의자들의 경우에는 약속이 책무를 발생시킨다는 것조차 받아들이지 않는다. 약속한 사람에게 약속한 대로의 행위를 할 것인가는 오로지 그 행위를 하는 것이 사회의 공리를 최대화하는가에 달려 있는 계산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니 약속을 했다는 사실 그 자체는 이 문제를 결정짓지 못하고, 행위 공리주의가 도대체 옳은 것인가, 그리고 약속을 준수할 책무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변명이 되는 사유는 무엇이며 어떻게 판정하는가에 대한 규범적 논증을 필히 포함하게 된다.

 

따라서 자연주의를 구출하려는 논증들은 실패한다. 그러므로 자연주의의 오류는 정말로 오류가 맞다. 우리는 대전제가 되는 '해야 한다'에 관한 명제를 갖지 않고서는, 소전제가 되는 '이다'에서 곧바로 '해야 한다'는 결론을 끌어낼 수 없다.

 

만일 오류를 범하지 않으면서도 실제로 구체적 사안에 적용할 수 있는 지침을 만들려면, 자연주의는 순수 자연주의에 머무를 수 없다. 왜냐하면 is 에서 ought를 도출할 수 없기 때문에,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사실이 아닌 당위에 관한 대전제를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노예제는 그르다라는 진술은 노예제는 노예에게 고통을 가져온다는 사실에서부터 곧바로 도출될 수는 없다. 그것은 오로지 무고한 자에게 고통을 가져오는 것은 그르다라는 전제가 있어야 도출될 수 있다. 고전적인 쾌락주의를 따른다고 하더라도, 공리주의의 규범명제들은 자연주의적으로 수립될 수는 없다. 쾌락들이 있고 고통들이 있다는 것에서부터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달성하는 것이 옳다는 결론이 나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의 쾌락에 도움이 되는 한 그냥 지금 쾌락과 고통이 분포된 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옳다는 결론은, 전적으로 그 진술의 자연적 속성에 의거해서만 평가해 보면 앞의 결론보다 못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자연주의는 도덕에 관하여 무언가를 수립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해석학적 지평에서 행위자가 왜 그 자연주의의 도덕을 따라야 하는가의 질문에 대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자연주의적으로 답할 수는 없다.

 

또한 자연주의는, 필연적으로 그래야하 하는 것은 아니긴 하지만, 보통은 어떤 사태들을 총체적으로 '옳음'으로 평가하기보다는 그 사태의 요소 중 일부를 특별히 골라서 '좋음'으로 평가하는 결과주의적 형태를 띤다. 예를 들어 A가 수고를 들여 X를 하여 B에게 쾌락을 발생시켰다고 하면 이 사태 전체를 고려하기보다는 A의 수고 투여 부분과 B의 쾌락 발생 부분만 뽑아서 그것을 독립된 대상으로 다루어 고려한다. 이것은 이해할 만한 일인데, 각 사태의 모든 자연적 부분을 다 고려해서는 어떤 원칙이라는 걸 만들어 낼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자연주의는 결과주의나 유사 결과주의에 이르기가 쉽다. 그런데 결과주의자가 된 자연주의자들은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대상들의 집계(aggregation)가 이러이러하다는 한낱 사실이 왜 결정적인 규범적 이유가 되는지를 정당화하는 독자적인 메타윤리학적 문제를 안는다. (비자연주의자인 결과주의자는 그러한 메타윤리학적 문제에 직면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실질적 규범적 논증으로서 집계량이 결정적 이유라는 점을 정당화해야 할 책임을 질뿐이다.)

 

마지막으로, 도덕적 견해에서 불일치가 발생할 때, 자연주의는 그 의견불일치는 어느 한 쪽이 자연적 사실을 잘못 관찰했기 때문이라고 결론 짓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노예제 사회에서 노예제를 비판한 사람과 노예제를 찬성한 사람은 노예제에 관한 순수한 사실명제에는 모두 동의할 수 있었다. 실제로는 그 사실들로 인해 범주화되는 도덕적 사태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한 불일치가 지배적인 것이다.

 

비자연주의는 도덕적 속성은 자연적 속성이 아니라 별개의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규범 고유의 성격을 인정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환원불가능한 규범적 이유(irreducible normative reasons)를 인정한다.

 

롤즈가 이야기한 구성주의(constructivism)는, 롤즈 자신의 설명과는 달리, 파고 들어가 보면 특수한 실천적 관심에 초점을 맞춘 실재론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즉 구성주의는 입헌 민주주의 사회의 공통된 정의의 원리를 효과적으로 합의하기 위하여, 도덕적 진술이, 어떤 대상에 속성을 귀속시키는 문제라는 오해를 부르는 사고틀을 벗어날 것을 논의의 방식에서부터 촉구한다.

구성주의에서 도출하고자 하는 원리들은 인간 사회의 여건에서 평화적인 갈등 분쟁과 권리-의무 할당의 기능과 역할을 하는 기본적 규율 체계들의 총체이다. 그리고 이 원칙들을 우리는 과학적 탐구방식과 유사한 것으로 발견할 수 없고,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여건(희소성과 같은 자연적 여건에서부터, 평등하고 자유로운 인간관을 인정할 때 뒤따를 수 밖에 없는 합당한 다원주의와 같은 규범적 여건 등등)을 제약 조건으로 하여 다만 우리가 확고하게 믿고 있는 신념들을 출발점으로 하여, 다소 모호하거나 자신 없어 하는 쟁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정합적인 원칙들의 망을, 자유롭고 평등한 이들의 논증대화를 통해 발견해나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수행적 모순을 범하지 않고서는 그 논증대화의 매개틀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중간 개념들(질서정연한 사회, 공정으로서의 정의, 협동적 과업의 전제로서의 사회구조, 공지성,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관)이 중대한 역할을 하게 된다. 

정의의 원리는 평화로운 공존과 공정한 협동을 가능케 하는, 자유롭고 평등한 이들이 합당하게 거부할 수 없는 공동 규범이다. 그리고 그 정의의 원칙 하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포괄적인 교설에 따라 자신에게 적절한 해답을 찾아나갈 수 있다. 따라서 롤즈의 정의 원리는 좋음 내지는 가치에 대한 완전한 해명 없이도 옳음 내지 규범에 대한 합의를 이룰 수 있는 이론적 출구를 보여준다.

 

3. 함의

 

결국 결론적으로, 

윤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은,

인지주의, 객관주의, 비자연주의, 구성주의적으로 다시 틀 지워진 규범실재론이 잠정적으로 타당한 출발점이라 보고 윤리학을 공부해 나가는 것을 추천할 만하다.

물론 자신의 탐구 여정에서 오히려 여기서 편을 들었던 주의주장들이 틀렸다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지도를 가지고서 잠정적으로 출발하는 것이 크게 잘못된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여기서 제시된 일련의 출발점들은 어쨌거나 입헌 민주주의 사회에 가장 잘 부합하는 해명들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일러둘 것은, 반복해서 이야기했듯이, 대상에 속성을 귀속시키는 틀로 메타윤리학적 문제를 설정하고 분류하는 것은 다소 시대에 뒤떨어진(obsolete) 것이라는 점을 주의할 필요다.

 

인간의 행위와 실천과 엮인 화용론적 전제들을 확고히 이해하고 나면, 대상에 속성을 귀속시키는 논리적 모형을 기초로 하여 설정된 문제의식들에 그리 많은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규범을 이야기함에 있어 규범 주장의 타당성 승인 요구를 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의 대부분의 쟁점에 관하여 우리는 이미 롤즈적 구성주의를 취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끝>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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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6.18 01:29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롤스의 구성주의를 객관주의에 두셨는데, 그러면 인지주의 아닌가요? 3.함의를 보면 비인지주의를 기반으로 해야한다는 말이 이해가 안돼서요.
    • 2016.06.18 02:26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오기였습니다. 수정하였습니다.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 2016.06.18 01:42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즉, 서술문 형태로 되어 있는 도덕적 진술을, 인지주의는 ‘나무는 물 위에 뜬다’와 같이 참, 거짓을 따질 수 없는 종류의 진술의 집합에 귀속시키고....라는 문장이 있는데, 참,거짓을 따질 수 없는이 아니라 참,거짓을 따질 수 있는이 아닌가요?^^
    • 2016.06.18 02:26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오기였습니다. 수정하였습니다. 꼼꼼하게 읽고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3. 보릿자루
    2016.07.06 22:11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아닙니다. 항상 좋은 글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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