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인간 존엄성에 따른 준칙을 "너는 다른 사람들을 수단으로 대우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우하라"라고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즉 수단으로서의 대우 금지 원칙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한 다음, 자신이 반대하고자 하는 사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수단으로 대우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나서 그러한 사안에 '대상화'(objectification)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러니까 수단으로 대우하는 측면만 있으면 대상화라는 이름을 붙이고 금지할 대상으로 바로 간주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논리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보지 않는다.

 

칸트가  <윤리 형이상학 기초 놓기>(I. Kant,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in: Digitale Bibliothek Band 2: Philosophie, 75면)에서 실천적 정언명령의 정식으로 제시한 것은 다음과 같다.

 

 “너는 너 자신의 인격(Person)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모든 다른 사람의 인격에 있어서도 인간성
(Menschheit)을 단지 수단으로서만 사용하지 말고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도록 행위하라”

(Handle so, daß du die Menschheit, sowohl in deiner Person, als in der Person eines jeden andern, jederzeit zugleich als Zweck, niemals bloß als Mittel brauchest.)

 

"단지 (...)만" "항상 동시에"라는 중요한 문구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 문구는 왜 들어가 있는 것일까? 

 

"칸트는 인간(성)을 단지 수단으로만 사용하지 말고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칸트가 인간성을 ‘전적으로 목적으로만 대하라’고 말하지 않았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기위해서는 인간관계가 상호 수단적으로 연결될 수 밖에 없는 측면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예컨대, 내가 이발소에 머리를 깎으러 간다고 해보자. 내게 있어서 이발사는 머리를 깎기 위한 수단이지만, 이발사에게 있어서 나는 생계를 위한 수단이 될 것이다. 교수학생의 관계는 어떤가? 이 관
계에도 상호 수단적인 측면이 있다. 학생들에게 있어서 교수는 지식을 전수받아 학점을 따고 졸업하여 취직자리를 구하는데 필요한 수단이고, 교수들에게 학생은 급여를 받기 위한 수단이다. 부모자식 관계건, 성직자 신자의관계건 아니면 부부관계이건 사제관계이건. 모든 인간관계에는 상호 수단적인 측면이 있다. ‘수단적인’ 이란 말은 ‘나의 욕구와 행복과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이란 의미이다. 칸트는 모든 인간관계가 오로지 상호 수단적으로만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수단으로 사용하면서도 동시에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 칸트가 인간성의 정식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문성학,인간 존엄성 테제에 대한 칸트의 증명과 문제점, 「哲學硏究」 第96輯, 2005. 11. 241면.)

사람들의 오해는 '목적'으로서의 인간성에는 칸트가 부여한 특수한 의미가 있다는 것도 잘 알지 못하는데서 생긴다. 여기서 목적은 인격체 외부에 있는 타겟이 아니다. 예를 들어 산정상이나, 승진, 시험합격같은 것이 아니다. 여기서의 목적은 '의지'가 어떤 법칙을 표상함에 따라 행위를 규정할 때, 그 법칙의 기초가 되는 객관적인 근거가 되는 인격성이다. 결국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실천이성의 자율성을 존중하라는 말이 된다."(위 논문, 249면) 

 

실천이성의 자율성을 가진 존재는, 자신이 행위의 준칙의 입법자가 되는 존재다. 그리고 자율성을 가진 존재를 존중한다는 것은, 이러한 궁극적 결정권을 상호 존중할 수 있는 동등하게 양립가능한 자유를 보편적 법칙으로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발사가 머리를 잘 깎으면 그 이발소에 자주 가고, 머리를 잘 못 깎으면 그 이발소는 가지 않는 것은, 그 이발사를 '오직 수단으로만 대우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발사 자신도 '원하는 서비스를 받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한 명의 서비스 제공자에게 서비스를 받고 돈을 줘야 한다'는 원리를 합당하게 거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발사가 이발 기능에 의해 손님의 방문이 결정되도록 하는 것은, 이러한 보편적 입법의 원리에 따라 이발사 자신이 동의한 관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발사와 손님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의 자유를 존중하고, 그리하여 실천이성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동시에 목적으로서 대우하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관련 당사자의 이성적 자율성의 행사로 동의된 상호작용은, 그것이 어떤 기능에 초점을 맞추더라도, '목적으로서의 존중'을 내포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어떤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 신조대로 생각하고 말을 하는 것이 '진정한 공동체 속의 사람'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행위라고 하면서, 그러한 '진정한 해방된 인간', 또는 '혼이 비정상에서 정상으로 제대로 돌아온 인간'으로 다른 이의 자아를 상승, 승격시켜 주기 위해서, 정치적 자유와 종교적 자유 그리고 표현의 자유와 행동의 자유를 제약하고 자신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교조를 불공정하게 주입시키는 것은, 그 사람을 오직 수단으로만 대우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을 신조를 담는 그릇으로만 바라본 것이며, 그 사람 스스로가 신조를 반성하고 숙고하고 선택하고 기여할  동등한궁극적 자율성이 있다는 점을 무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의 실천적 정언명령에 대한 오해는 위 두 사안을 오히려 거꾸로 생각하게 만든다. 이러한 도치된 착각과 결부된 '대상화'(objectification)라는 말 역시 대단히 많은 사안에서 잘못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말은 차라리 쓰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며, 굳이 쓰자면 '객체화'라는 동일한 용어로 쓰되, '수단으로서 대우하는 것'에 쓰이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지 않는 것', 즉 '평등한 자유를 부인하거나 자기 결정권을 탈취하는 것'에 쓰여야 한다. <끝>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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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2.03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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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댓글입니다
    • 2016.06.29 14:09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칸트와 헤겔 철학에 대한 기초적 설명은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를 읽어 챙겨두시면 될 듯 합니다. 또한 앤서니 케니의 <근대철학>도 보시면 됩니다.
      칸트에 대하여 입문서를 추천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입문서들이 칸트를 형식주의(formalism)으로 잘못 소개하고 있거나, 아니면 칸트의 목적으로서의 대우 정식을 위 본문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오해해서 소개하고 있거나 해서, 중요한 오류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롤즈와 드워킨, 스캔론과 같은 현대 계약론 자유주의의 철학을 먼저 공부하신 다음, 그 근저에 있는 칸트의 근원을 따져 묻는 것이 적합한 방식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이해가 쌓이면 칸트의 실천철학에 대한 원전을 스스로 읽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현대 자유주의 정치철학과 도덕철학에 대한 사전 배경지식 없이 칸트를 곧바로 읽으면, 칸트 스스로도 잘못 적용하곤 했던 정식들의 미로 속에서 헤메기가 쉽습니다. 헤겔이 칸트와 반대되는 사상가라고 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은 것입니다. 형이상학의 측면에서 헤겔은 칸트의 관념론과 경험론의 종합을, 다시 관념론의 방향으로 한 발 더 밀고 나가 다시 종합을 깨뜨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분석철학과 논리학의 발전을 통해 헤겔이 형이상학에 기여한 것 중에 지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유효한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은 사실상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천철학에서 헤겔은, 자신의 목적론적 역사관을 제외하고는, 사실은 칸트의 철학에서 추가로 더한 것은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헤겔은 조화로운 자유가 더 폭넓고 더 높은 수준에서 완성되는 체계를 바란 자유주의 사상가였습니다. 그러한 체계에 헤겔 특유의 목적론적 역사의식은 오히려 부당한 혼입물만을 낳았고, 이러한 부당한 혼입물들을 전거로 쓰고 있는 현대 철학자들도 있으나, 헤겔이 말했다고 해서 그것이 타당한 것으로 변모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인정 관계에 의해 구성원들의 관계를 살펴본 것은 독특한 지점인데, 이러한 지점은 오늘날 악셀 호네트에 의해서 추가로 발전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실천철학에서 헤겔에서 건질 것을 오늘날 보자면 악셀 호네트를 읽으시고, 거기서 만일 흥미가 생긴다면 헤겔을 읽으시면 될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사상가를 이해하는 일반적인 방식과는 배치됩니다. 왜냐하면 현대적 관심에서 거꾸로 과거 사상가들을 발굴해서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쟁점을 푸는 데 관심이 있다면 오히려 이러한 방식이 지름길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홉스, 루소, 로크와 같은 사상가들에게서 치열한 쟁점의 근거를 뽑아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사상가들의 문제 설정과 문제 풀이는 그들이 당면한 역사적 과정에 깊이 묻혀 들어가 있으며, 역사의 이해는 그들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궁극적으로 알고 싶은 것은, 옛날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였고 어떤 맥락이었는가를 충실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벌어지고 있는 논쟁에서 합리적이고 합당한 근거들을 직접 제시하는 것입니다.
  2. ㅇㅇ
    2020.01.27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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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요한 대목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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