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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주공원
    2019.06.14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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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청소년 교육 김선아입니다.

    부산에서 청소년논술토론한마당 행사에 강연자로 모시고 싶습니다.

    메일을 보냈습니다 확인 부탁립니다.
  2. 2019.05.20 20:2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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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jh님의 아래 질문에 답변이 되는 글을 게시하였습니다.
    https://www.civiledu.org/1459
    • Pjh
      2019.05.21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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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합니다! 이런 양질의 긴 글을 읽을 수 있어 정말 영광입니다 :)
  3. Pjh
    2019.04.23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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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 안녕하세요.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를 읽는 도중 책의 반직관적인 결론에 동의하기가 어려워 글을 올립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첨언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비대칭성 문제를 거부해도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281p에 보면, "우리가 비대칭성을 다른 방식으로 -- 즉 시나리오 B에서 부재하는 고통은 단지 '나쁘지 않음'이라고 주장함으로써 -- 거부하려고 한다면 사태는 더 나빠진다. 그것으로 우리로 하여금 가능한 미래의 괴로움을 겪는 사람의 이익에 근거하여 그 사람을 창조하는 것을 피할 아무런 도덕적 이유가 없다고 말하게끔 만들 것이다. 우리는 괴로움을 겪는 아이의 이익에 기반하여 우리가 그 아이를 창조했다는 것을 더 이상 후회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우리는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 괴로움을 겪는 비참한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이 창조되었다는 점을 유감스러워할 수도 없게 된다." 이런 설명이 있는데요.

    여기서 고통의 부재가 '나쁘지 않음'이면 사태가 더 악화된다고 했는데, 저는 뒤에 열거한 사태가 왜 더 악화된 사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사태가 왜 더 악화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시나리오B에서 고통의 부재가 '나쁘지 않음'이라면, 비존재가 존재에 비해 반드시 우위점을 갖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경우에 따라 시나리오A에서 좋음이 나쁨보다 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베너타 교수님은 단순히 좋음과 나쁨의 크기만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좋음과 나쁨의 분포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저는 쾌락의 빈도나 순서, 그리고 수명을 고려하는 것, 즉 분포의 특성까지도 모두 좋음과 나쁨으로 환원하여 비교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경우는 오히려 시나리오A가 시나리오B보다 우위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나리오A는 좋음(+)에 가까운 반면 시나리오 B는 나쁘지 않음(=<0) 이므로) 따라서 이 경우 비존재가, 즉 창조되지 않는 것이 더 뛰어난 대안일 이유가 없으므로 창조했다는 (혹은,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후회할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시나리오A에서 좋음과 나쁨의 합계가 '나쁘지 않음' 이상이기만 하다면, 시나리오B가 더 우위점에 있는 대안이라고 볼 수 없고 오히려 시나리오 A가 더 우위점에 있으므로, 사태가 더 나빠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좋아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위 진술이 참이라면, 인용문에서 악화되는 사태로 들은 예시들은 타당하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낙천편향과 적응의 영향으로 인해서 시나리오A에서 좋음과 나쁨의 합계가 좋음(+)에 가깝다고 '착각'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의 관점(sub specie aeternitatis)에서 좋은 삶을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관점(sub specie humanitatis)에서 맥락 특수적으로 좋은 삶을 바라 본다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 아닌가요? -- 이에 대해 책에서는 겸손(modesty)을 미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원의 관점을 택할 수 밖에 없다고 진술하는데, 그렇다면 겸손이 미덕이라는 관점을 포기하면, 인간의 관점으로 좋은 삶을 판단하는 것이 부적절한 것은 아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관점에서 좋은 삶을 판단한다면, 시나리오A, 즉 존재가 비존재보다 가치있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히려 이게 직관에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에 있는 주장을 잠재적 참으로 여기신다는 댓글을 봤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제가 무언가 놓치는 함의가 있는 것 같아서 궁금한 마음에 방명록에 글을 남겼습니다.
    • 2019.05.14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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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베너타는 시나리오 A, B를 제시할 때, (1)을 ‘나쁨’, (2)를 ‘좋음’, (3)을 ‘좋음’, (4)를 ‘나쁘지 않음’ 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이 평가들은 가치론적(axiological) 평가입니다.
      (David Benatar, Better Never to Have Been: The Harm of Coming into Existence, 이한 옮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존재하게 되는 것의 해악』, 서광사, 2019, 72-73면 참고.), (“[요약번역] 데이비드 베너타 "여전히 결코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내 비판자들에 대한 답변." 4.2.절. 시민교육센터. 2017년05월05일 01:31 수정, 2019년5월14일 00:06 접속, https://www.civiledu.org/1204 참고.)

      위의 (1)에 대해 '나쁨'이라고 평가한 이유는 'x가 존재하면서 그에게 고통이 존재하는 사태'는 x가 존재하면서 그에게 고통이 부재하는 사태'보다 더 나쁘기 때문입니다.

      (2)에 대해 '좋음'이라는 평가한 이유는 'x가 존재하면서 그에게 쾌락이 존재하는 사태'는 'x가 존재하면서 그에게 쾌락이 부재하는 사태'보다 더 낫기 때문입니다.

      (3)에 대해 ‘좋음’이라고 평가한 이유는 ‘애초에 x가 존재하지 않아서 고통이 부재하는 사태'는 'x가 존재하면서 그에게 고통이 존재하는 사태’보다 더 낫기 때문입니다.

      (4)에 대해 '나쁘지 않음'이라고 평가한 이유는 '애초에 x가 존재하지 않아서 쾌락이 부재하는 사태'는 'x가 존재하면서 그에게 쾌락이 존재하는 사태'보다 더 나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배고픔을 느끼지 않고 있을 때, 그 사람의 경험적 질(experiential quality)에 대해서는 ‘중립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배고프지 않은 것은 즐거움도 아니고 고통도 아닙니다.

      그러나 배고프지 않은 상태는 배고픈 상태보다 상대적으로 더 나은 상태입니다. 베너타는 이렇게 사태들 중에서 가치론적으로 더 나은 사태를 두고 ‘좋음’이라고 평가한 것입니다. 내재적인 경험적 질에 대한 평가를 한 것이 아닙니다.


      2. 베너타가 제시한 사분면상의 (3)에 대한 '좋음'이라는 평가를 (질문자님께서 주장하시는 대로) '나쁘지 않음'으로 바꿨다고 해봅시다.

      이렇게 (3)에 대한 평가를 ‘나쁘지 않음’으로 바꿔놓은 사분면에서 (1)과 (3)의 가치론적 가치를 비교할 때, 다음 두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i) ((1)은 ‘나쁨’이고, (3)은 ‘나쁘지 않음’이니까) 그래도 (1)보다는 (3)이 더 낫다.
      (이 경우 (3)에 대한 '나쁘지 않음'이라는 평가는 가치론적으로 (3)과 (1)을 비교해서 내린 평가가 아니라, 그와는 다른 맥락의 평가입니다. 이 경우는 베너타의 (3)에 대한 '좋음'이라는 평가가 (3)을 (1)과 가치론적으로 비교해서 내린 평가임을 이해하지 못한 경우입니다.)

      (ii) (1)보다 (3)이 더 낫지도 않고 더 나쁘지도 않다.

      만약 (i)이라고 한다면, (1)과 (3)의 가치론적 가치를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측면에서는 베너타의 주장과 같게 됩니다. (ii)라고 해야 베너타의 기본적 비대칭성을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ii)를 선택하고 기본적 비대칭성을 거부하게 되면, ‘X가 존재하면서 그에게 고통이 존재하는 사태’보다 ‘X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고통이 부재한 사태’가 더 나은 점이 하나도 없다는 주장이 됩니다.

      그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면, 어떤 사람 x가 태어나자마자 끔찍한 고통만을 겪다가 하루 만에 죽었다고 했을 때, ‘x가 애초에 안 태어나서 어떠한 고통도 없는 사태’가 ‘x가 태어나서 고통만 겪다가 하루 만에 죽는 사태’보다 가치론적으로 나은 점이 하나도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1)과 (3)의 가치론적 가치가 같다고 할 때, 즉, (1)보다 (3)이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고 할 때의 이 함의를 질문자님께서 정말로 받아들이고 계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질문자님께서는 시나리오A에서의 ‘좋음’과 ‘나쁨’의 합계가 ‘나쁘지 않음’ 이상이기만 하다면 시나리오A가 시나리오B보다 더 낫다는 주장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1)과 (3)의 가치론적 가치가 같다면, 시나리오 A와 시나리오 B를 비교하는 맥락에서 ‘삶의 나쁨’은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1)과 (3)이 같으면, 시나리오A의 (2) ‘좋음’과 시나리오B의 (4) ‘나쁘지 않음’ 만 서로 비교하면, 시나리오 A, B 둘 중에 무엇이 더 나은지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질문자님의 (3)에 대한 ‘나쁘지 않음’이라는 평가는 (3)을 (1)과 가치론적으로 비교해서 내린 ‘가치론적 평가’가 아니라 제가 1번에서 언급한 ‘경험적 질에 대한 평가’이거나 또는 다른 맥락의 어떤 평가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3. 질문자님께서는 (3)에 대한 베너타의 ‘좋음’이라고 평가를 ‘나쁘지 않음’으로 바꾸고, 각각의 평가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값을 부여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1): 나쁨 (-), (2): 좋음 (+), (3): 나쁘지 않음 (=<0), (4): 나쁘지 않음 (=<0)

      위의 값 할당에서 직관적으로 의문이 생기는 지점은 ‘나쁘지 않음’에 대한 (=<0)이라는 부등식 표현입니다.

      베너타는 (위의 책, 78면.)에서 사분면 각각에 어떤 값을 할당해서 자신의 주장을 반박하려는 시도에 대해 소개합니다. 그 시도에서는 좋음을 양(+)으로 나쁨을 음(-)으로 나타내고, ‘나쁘지 않음’에 대해서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기 때문에 ‘0’이라고 놓습니다. 이 시도는 베너타에 의해 곧바로 반박당하긴 하지만, 좋음이 ‘양’이고 나쁨이 ‘음’이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은 ‘0’이라고 한 것은 일견 그럴듯합니다.

      그런데 나쁨을 음(-)으로 두면서, ‘나쁘지 않음’을 (=<0)이라고 표현한 것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 부등식 표현 그대로 보면, ‘나쁘지 않음’ 또한 ‘나쁨’과 같은 음의 값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위와 같이 값을 할당하게 되었을 때 발생하는 다른 문제점들은 이러합니다. (위의 책, 76-81면 참고.)

      (i) 위와 같이 값을 할당하게 되면, (2)가 (4)보다 가치론적 가치가 크다는 주장이 됩니다. 그러나 (2)는 (4)보다 더 낫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K가 존재하면서 그가 쾌락을 느끼는 사태는 K가 존재하면서 쾌락을 느끼지 못하는 사태보다는 분명히 더 낫습니다. 왜냐하면 K에게서 쾌락을 박탈한 사태는 그에게서 쾌락을 박탈하지 않은 사태보다 나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애초에 K가 존재하지 않아서 쾌락이 부재하게 된 사태에서는 쾌락을 박탈당해서 나쁠 수 있는 사람 자체가 없습니다. 이는 쾌락이 있었으면 좋았을 누군가에게서 쾌락을 박탈한 사태가 아닙니다.

      따라서 ‘K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아서 쾌락이 부재한 사태’ 는 ‘K가 존재하면서 쾌락이 존재하는 사태’보다 나쁘지 않습니다.

      (ii) 위와 같이 값을 할당한 다음에 단순히 (1)과 (2)의 값을 합산해서 양의 값이 나오면 비존재보다 존재가 낫다는 결론을 내리는 비교방법은 ‘시작할 가치가 있는 삶’(life worth starting)과 ‘지속할 가치가 있는 삶’(life worth continuing)을 구별하는 우리의 직관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팔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은 너무나 나쁘기 때문에 인생을 끝내는 것이 계속 사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동일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임신을 하면 팔이 없는 아기A가 태어난다고 할 때, ‘지금 임신을 해서 A가 존재하게 되는 사태’보다 ‘지금 임신을 하지 않아서 그 A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사태’가 그 A를 위해서 더 나은 사태라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는 ‘시작할 가치가 있는 삶’과 ‘지속할 가치가 있는 삶’을 구분하고 “손상이 너무 나빠서 삶을 지속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만든다는 판단은 손상이 아주 나빠서 삶을 시작할 가치가 없게 만든다는 판단보다 훨씬 더 높은 문턱(threshold) 수준에서” 내립니다. (위의 책, 48면.)

      그런데 우리가 깊이 견지하고 있는 이 구별을, (단순히 삶의 좋음과 나쁨을 합산해서 +가 되면, 존재가 비존재보다 낫다고 판단내릴 수 있다는) 위의 비교방법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존재와 비존재를 비교하는 방법으로 질문자님께서 제시하신 비교방법을 받아들인다면,

      (a) 만약에 x가 태어났다면 겪었을 좋음과 나쁨을 합산하여 ‘태어나는 것’(존재)과 ‘애초에 안 태어나는 것’(비존재)을 비교하는 것.

      (b) 어떤 존재하는 사람 x가 지금 죽게 되면 못 겪는 좋음과 나쁨을 합산하여 ‘계속 사는 것’(존재)과 ‘지금 죽는 것’(비존재)을 비교하는 것.

      이 (a)와 (b)는 (위의 제시된 비교방법 내에서는)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iii) 위와 같이 값을 할당하여 삶의 질을 평가하게 되면, 삶의 질을 평가할 때 고려해야만 하는 다른 여러 고려사항들을 무시하게 됩니다. 베너타는 (위의 책, 81면.)에서 자신이 사분면을 제시한 이유는 시나리오B가 시나리오A보다 항상 더 낫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지 삶의 질을 평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삶의 질은 단순히 ‘삶의 좋음’에서 ‘삶의 나쁨’을 빼는 것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질문자님께서는 “분포의 특성까지도 모두 좋음과 나쁨으로 환원하여 비교가능”하다고 하셨지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불가능합니다.

      한 단위의 좋음에는 양(+)의 값, 한 단위의 나쁨에는 음(-)의 값을 할당해서 그 삶에 담긴 좋음의 양과 나쁨의 양을 각각 양의 값과 음의 값으로 환산한 뒤, 둘을 합산하여 삶의 질을 평가하는 방법은 [A(좋음의 양을 환산한 양의 값) + B(나쁨의 양을 환산한 음의 값)]라는 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삶의 질을 평가할 때에는 A 또는 B로 환원되지 않는 변수들을 고려해야만 합니다.

      '좋음과 나쁨의 순서', '좋음과 나쁨의 강도', '삶의 길이'와 같은 "삶의 좋음과 나쁨의 분포 형태"는 A나 B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4. 베너타는 2장 <왜 존재하게 되는 것은 항상 해악인가>에서 “삶이 가장 적은 양의 나쁨만을 담는다고 할지라도 나쁨을 담는 한, 존재하게 되는 것은 해악이라고 논증”한 것입니다.(위의 책, 97면.)

      그리고 3장 <존재하게 되는 것은 얼마나 나쁜가?>에서는 “모든 인간 삶이 보통 인정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나쁨을 담는다는 점”을 논증한 것입니다.(위의 책, 98면.)


      5. 영원의 관점에서(sub specie aeternitatis) 본다는 것은 어떤 초월적 존재의 관점에서 본다는 것도 아니고 이 세계를 초월한 어떤 지점에서 본다는 것도 아닙니다. (John Rawls, “A Theory of justice”. 황경식 옮김, 『정의론』, 이학사, 2003, 749-750면 참고.)

      그것은 합리적인 인간이 가능한 한 최대한 객관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베너타는 (Benatar, David, The human predicament: A candid guide to life’s biggest question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p86)에서 인간의 삶을 맹목적으로 숭배(fetishizes)하지 않고 감정적 거리(emotional distance)를 두고 객관적으로 인간의 삶의 질을 평가하기 위해서 인간이 아닌 상상의 종(imaginary species)의 삶을 생각해볼 것을 제안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질병과 노화가 없으며 인간보다 훨씬 더 인지능력이 뛰어나고 훨씬 더 도덕적이고 훨씬 더 수명이 긴 상상의 종(imaginary species)의 삶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종의 객관적 좋음의 목록을 기준으로 할 때, 병들지 않는 능력, 늙지 않는 능력, 인지 능력, 도덕적 능력, 적당한 수명을 극도로 결여하고 있는 인간은 삶의 중요한 좋음을 극도로 결여하고 있는 매우 비참한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객관적 좋음의 목록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삶에서의 객관적 좋음들로 구성하는 것은 특정 시점(현재)의 특정 종(Homo sapiens)에게 가능한 좋음들로 목록을 구성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객관적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목록을 구성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최대한 객관적으로 사고하는 것, 즉, 영원의 관점에서(sub specie aeternitatis) 사고하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6. 미덕은 특정 상황과 맥락에서 가치 있는 행위를 하는 데 도움을 주는 성격과 태도입니다. 따라서 미덕은 어떤 주체의 어떤 행위가 어떤 상황에서 가치 있는지를 해명하는 윤리적, 도덕적 신념들을 이미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립물] 실체화된 미덕 증진의 오류." 시민교육센터. 2015년07월13일 21:55 수정, 2019년5월13일 23:58 접속, https://www.civiledu.org/823 참고.)

      따라서 그 윤리적, 도덕적 신념들의 그물망 속에서만 우리는 무엇이 미덕인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겸손’을 미덕으로 볼 수 있도록 최선의 해석을 한다는 것은, 가치, 미덕, 권리, 의무와 관련된 수많은 윤리적, 도덕적 신념들이 서로를 지지하고 있는 이 네트워크망에 미덕으로서 편입될 수 있는 겸손이라는 말의 뜻을 겸손이라는 말의 용례에서 찾아내겠다는 것입니다.

      가치 있는 행위란, 타인의 의사소통주체로서의 지위를 존중할 의무(배경적 의미의 요소)를 준수한다는 전제하에서, “내용적 가치를 자신의 기질과 능력, 여건에 비추어 자신에게 기꺼운 방식으로 풍부하게 채우고 창출하고 경험”하기 위한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한, 『삶은 왜 의미 있는가: 속물 사회를 살아가는 자유인의 나침반』, 미지북스, 2016, 65면.)

      그리고 베너타가 책에서 인용한 겸손에 대한 최선의 해석은 ‘다른 인간들과 비교했을 때 자신이 상대적으로 뛰어나다는 점은 정확히 인지하고 있으나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보다 높은 규준으로 자신을 평가하여 자신이 부족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태도나 성격’입니다.

      이와 같은 태도가 내용적 가치가 있는 학문이나 예술의 어떤 분야에서 다른 인간들보다 뛰어난 인간에게 도구적 가치가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가 최선으로 해석한 겸손이 편입되어 있는 이 윤리적, 도덕적 신념들의 네트워크망에는 인간은 영원의 관점을 취할 수 있으며, 이러한 관점을 취할 실천적인 이유가 있다는 신념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베너타가 겸손의 예를 들면서 보여주려고 한 것들입니다.
    • 873
      2019.05.15 20:00
      수정/삭제
      (1) 'x가 존재하면서 그에게 고통이 존재하는 사태'는 'x가 존재하면서 그에게 고통이 부재하는 사태'와 비교하고,

      (3) ‘애초에 x가 존재하지 않아서 고통이 부재하는 사태'는 'x가 존재하면서 그에게 고통이 부재하는 사태'가 아니라 'x가 존재하면서 그에게 고통이 존재하는 사태’와 비교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제가 보기에는 같은 기준으로 비교해야 알기 쉬울 것 같은데요. (2)와 (4)도 마찬가지고요. 책에 나오는 비대칭성 네 가지에서 든 예시도 공평하게 비교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 Pjh
      2019.05.15 20:49
      수정/삭제
      자세한 답변 감사합니다. 말씀해주신 내용들을 곰곰히 생각해보니, 제가 (1)과 (3)을 비교할 때는 '가치론적 평가'를, 그리고 (2)와 (4)를 비교할 때는 어떤 존재(를 가정하고 그 존재)의 '경험적 질'에 대한 판단 -- 시나리오 B의 가정과 양립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 을 했었네요. 즉, 비일관적으로 범주를 전제했었네요. 또, (1)과 (2)를 합산할 경우 삶을 시작할 가치와 삶을 지속할 가치를 구분하지 않게 된다는 점을 고려하지 못했네요.
      개념들을 상세히 설명해주셔서 -- 영원의 관점과 미덕에 대한 설명 등 -- 감사합니다. 덕분에 뒤엉킨 개념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볼 수 있었습니다.
    • 성우맨
      2019.05.18 16:35
      수정/삭제
      Pjh/ 위의 제가 드린 답변의 2번에서, 오도할 수 있는 표현을 수정하고, (3)이 (1)보다 가치론적으로 더 낫다고 판단하는 동시에 베너타의 (3)에 대한 '좋음'이라는 평가를 '나쁘지 않음'으로 바꾼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설명을 추가했습니다.
    • 2019.05.20 20:22 신고
      수정/삭제
      https://www.civiledu.org/1459
    • Pjh
      2019.05.21 21:40
      수정/삭제
      @성우맨
      앗! 친절한 첨언 감사합니다 :) 덕분에 여러 개념들을 한층 깊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4. 탐구자2
    2019.03.26 21:46
    수정/삭제 댓글
    오늘도 '매일 지나치게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위하여'를 읽습니다.

    물론 예전처럼 언제나 모든 것이 괴롭지는 않습니다. 타인을 그저 착취적인 자동발화기계이자 속물로 바라보지 않으려, 부조리한 현실에 때때로 고통받는 일 또한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려 합니다만, 그럼에도 여전히 스스로를 어느 방향으로든 탈진에 이르게끔 방치하곤 합니다.

    그래서 다시금 호혜성의 원칙과 퍼즐의 원칙을 떠올립니다. 저에게 주어진 일을 내팽개치거나 지나치게 몰아붙이지 않고 적정 수준을 찾아가면서 조금씩 나아가려고 합니다.
  5. 대학원생
    2019.02.23 23:16
    수정/삭제 댓글
    선생님, 안녕하세요? 선생님의 글과 노하우를 종종 접하며 많은 자극을 받고 있는 박사과정 학생입니다.
    제게는 올해와 내년이 졸업을 앞두고 논문을 많이 써야하는 굉장히 중요한 시기인데요. 최근 '중요한 시기'라는 점이 너무나 압박스럽게 다가와, 정작 해야할 일들에 온전히 집중을 못하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의 [행동전환기술]이 많은 도움이 되는거 같아 여러번 읽어보고 실행해보려고 하는 중인데요. 마인드컨트롤을 잘하여 결과에 대한 망상에 사로잡히지 않고 공부에만 오로지 집중하려면 또 도움이 되는 기술들이 있을까요? 선생님이 생각나서 게시판에 적어봅니다. 아참. 제가 두달여전에 지하철 6호선에서 두정거장 정도 선생님 옆자리에 앉았던 적이 있습니다. 지하철에서도 노트북을 꺼내서 창을 두개 띄우시고 열심히 무언가를 작업하시다 동묘앞 역에 이르자 황급히 노트북을 닫고 내리시던 선생님 모습에 많은 자극을 받았습니다. 짧은 기간이었고 용기가 부족해서 말은 걸지 못하였습니다 ^^; 자투리 시간마저 알뜰하게 활용하시는 선생님을 본받고 싶은데,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못해 늘 죄책감에 시달리는것 같습니다. 바쁘신데 감사합니다 선생님 ^^
    • 2019.02.25 23:05 신고
      수정/삭제
      https://www.civiledu.org/1422
    • 대학원생
      2019.02.27 17:38
      수정/삭제
      너무나도 주옥같은 글.. 정말 감사합니다. 깊이 새기고 실천해보겠습니다 ^^ 항상 건강하세요 선생님 ^^
  6. 김성우
    2019.01.16 23:05
    수정/삭제 댓글
    따라서 공부란, 지식을 검색하고 확인하거나 머리에 그대로 담아놓는 일이 아니다. 어떤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 시험을 치르는 것을 준비하는 활동은 ‘시험준비 활동’이나 ‘자격취득 활동’이라고 달리 표현해야 마땅하다. 그런 활동들은 한 개인의 인생에서 필요할 때가 있고, 사회적으로도 유용한 기능을 가지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을 공부의 대표주자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 점을 명심하면 다음 질문에 대한 답도 분명해진다.

    라고 <제대로 공부법 2회차>에서 하셨습니다.

    그럼 혹시 변호사님 , 제가 아마 곧 노무사 자격증 취득을 위해 '시험준비 활동'을 하게 될 것 같은데요. 혹시 시험준비 활동을 위한 노하우 있을까요? 제가 읽어본 '제대로 공부법' 칼럼들은 기본적으로 문제해결활동을 위한 공부 노하우를 담은 것 같아서요. 개인적으로 시험공부에 관한 원칙이나 노하우가 있다면 참고하고 싶습니다 ㅠㅠ 아무래도 노무사 시험이 만만하지 않은만큼 두려움이 앞서서요..ㅠㅠ
  7. 성우맨
    2018.11.29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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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 L. Ten의 <밀의 자유론> 강의 (http://www.civiledu.org/71?category=143741) 6장 문단 46 보조논의 mp3파일 21분 30초부터, 영국 성공회 계열 초등학교 영어 보조교사 아이샤 아즈미가 눈만 내놓고 얼굴 전체를 가리는 니캅을 썼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은 사건에 대해서 설명해주셨는데요.

    학생들 앞에서 니캅을 쓰지 말라는 학교측의 요구가 i)성희롱, ii)종교적 차별에 해당되는지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셨습니다.

    i) 성희롱에 해당되는지 아닌지는 특이한 종교적 가치관이 아니라 ‘통상인의 판단’에 의해야 하기 때문에 니캅을 쓰지 말라는 학교측의 요구는 성희롱이 아니다.

    ii) 학교측이 아이샤에게 니캅을 쓰지 말라고 요구하면서 든 이유는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니캅을 착용함으로 인해서 교사로서의 통상의 영어 학습 지도가 현저히 어렵다는 것이었다. 니캅 착용 때문에 교사가 업무를 수행하기 어렵다고 하는 이 학교측이 내세운 이유가 타당한지는 경험적인 조사를 통해 밝혀야 하는 문제다.

    그런데 아이샤의 학교가 성공회 계열의 학교가 아니라 공립 학교라고 한다면, 공립 학교 교사 또한 공무원과 마찬가지로 공정성이 요구되는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 상징물 착용이 금지될 수 있다고 말씀해주셨는데요.

    국가의 재정 지원을 받고 국가로부터 학력 인정을 받는 사립 학교의 교직원들 또한 업무 수행 과정에서 학생들에게 공정성의 관념을 보여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 상징물 착용이 금지돼야 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 2018.12.02 02:05 신고
      수정/삭제
      "국가의 재정 지원을 받고 국가로부터 학력 인정을 받는 사립 학교의 교직원들 또한 업무 수행 과정에서 학생들에게 공정성의 관념을 보여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 상징물 착용이 금지돼야 한다"라는 진술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히 말하자면, (i) 국가는 엄격한 중립성을 준수할 의무를 지고 국가행위가 거기서 이탈할 때마다 보편적 공익에 근거해서 그 이탈을 정당화할 책임을 지지만 (ii) 사인은 편애의 자유를 포함한 자유를 누리는 지위를 보장받으며, 논증책임은 반대방향으로, 특정한 영역에서 일정한 요건-대표적으로 다른 사람의 권리와 기회에 변경을 가져온다는 요건-을 충족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정당화할 책임이 역시 국가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입헌질서에서 정체 자체의 결정은 개인의 윤리적 결정과는 별개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를 단절 논제(discontinuation thesis)라고 합니다. 단절 논제는 정치질서의 정당성에 관한 계약주의적 사고의 두드러지는 중심 특성입니다.(Steven Lecce, Against Perfectionism: Defending Liberal Neutrality, University of Toronto Press, 2008, 제10장의 주석 5 참조.) 개인의 윤리적 결정에서 허용되는 이유가 입헌적 정체의 결정에서 허용되는 이유가 곧 되는 것도 아니고, 입헌적 정체에게 의무인 것이 곧 개인에게 의무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인은 원칙적으로 완전히 불편부당한 내용의 기획이 아니라, 자신에게 특별히 가치 있는 기획을 중심으로 자신의 행위를 수행할 자유를 가집니다. 즉, 국가는 언제나 행위자 중립적 이유(agent-neutral reasons)에서 행위해야 합니다. 이는 일응 중립적 행위에서 이탈했을 때에는 그것이 중립의무를 위배하지 않는 다른 근거에서 정당화됨을 보여주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사인은 행위자 관련적 이유 내지는 행위자 상대적 이유(agent-relative reasons)에서 행위할 자유를 가지며, 다만 이것이 입헌민주주의 구성원에게 구성원전형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영역에서 권리와 기회가 불리하게 변경되는 경우에 제한될 수 있을 따름입니다. (행위자 관련적(또는 상대적) 이유와 행위자 중립적 이유의 구분에 관해서는 Stephen Darwall, “The Value of Autonomy and Autonomy of the Will”, Ethics, Vol. 116, No. 2, 2006, 263-284 참조.)
      사립학교는 그것이 사회의 필요에 따라 일정한 지원이나 규제를 받는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 법적 지위가 사인입니다. 이는 기업이 사회의 필요에 따라 일정한 지원이나 규제를 받는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 법적 지위가 사인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공립학교에서는 선택과목으로도 예배수업을 실시할 수 없는 반면에 사립학교에서는 선택과목으로 예배수업을 실시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사인은 다른 사람의 권리와 기회 구조에 허용되지 않는 불리한 변경(즉, 침해)을 가져오지 않는 한에서,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프로젝트(학교의 경우에는 건학이념)를 추구할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립학교는 독자의 수입원을 가지며, 그 수입원을 가지고서 그 프로젝트를 추구하는 것을, 다른 활동에 보조한다는 이유로 금지할 수가 없습니다.
      사립학교의 교원은 따라서 편애의 자유를 포함하는 자유의 지위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다른 구성원인 사인이 전시하는 상징물을 보지 않는 것은 타 구성원의 권리에 속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를 권리로 인정한다면 일반적으로 사인이 전시하는 종교 상징물을 보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셈이 되는데, 이는 결국 덜 밀접한 지배권을 인정하면서 더 밀접한 자유권을 부인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원칙적으로, 편애의 자유는 입헌 민주주의 국가의 평등 원칙과 양립가능할 수 있을 뿐더러, 일정 범위의 편애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은 평등원칙에 필수적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아니하고서는 세속적인 사람의 자유가 결국 종교적인 사람의 자유에 비해 우대되는 결과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와 같은 논증 방향을 취하지 않는다면, 일부라도 지원을 받거나 규제를 받는 국민들의 모든 행위는 공동체 전체에 대하여 정당화될 수 있는 것만이 허용될 것입니다. 즉 이런 처지의 사람의 모든 행위는 자신에게 중요한 이유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게 중요한 이유를 우선시하여 정당화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경우 공동체는 여러 행위 선택지 중에서 무엇이 가장 바람직한가에 대한 가치 결정을 철저히 행위자 중립적인 관점에서 집단적으로 내려줘야 하며, 이러한 집단적 가치결정은 오히려 동등한 양립가능한 자유를 침해하게 됩니다.
      Ronald Dowrkin은 <Freedom's Law>에서 다음과 같이 논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Rust v. Sullivan에서 연방 재정으로 지원을 받는 어떤 병원에서도 의사가 낙태에 관한 논의를 하거나 낙태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 (148) 또는 낙태에 관해 논의하기를 특별히 요청한 여성에게조차도 그러한 정보를 어디 가면 구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일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합헌으로 인정하였다. (...) 이 판결들 중 마지막 판결은 헌법학자들에게 특히 끔찍한 것으로 보인다. 처음으로 연방대법원은, 종종 합당한, 정부의 돈을 받는 사람들에게 그 돈으로 무엇으로 할지에 관한 제약을 부과하는 정부의 권한 뿐만 아니라, 그들이 직업상의 의무를 수행하면서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도 제약을 부과하는 정부의 권한까지 합헌으로 인정했다. 이는 표현의 자유의 핵심을 건드리는 것이다. 특히 우리 사회 같이 의료, 연구, 교육이 정부의 재정지원과 그토록 많이 얽혀 있는 곳에서는 말이다."
      말씀하신 진술에 따르면 오히려 위 Rust 판결의 태도가 옳은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에는 국가가 조금이라도 지원을 하거나 규제를 하는 분야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적 의무라고 스스로 판단하는 것도 수행하지 못하게 하는, 진정성을 침해하는 반자율적인 규제를 옹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얼핏 보기에는 자의적인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구별은, 깊은 심층적인 원리상의 정합성을 반영하고 있으며, 각 개인이 자신의 진정성 있는 판단에 따라 양립가능한 자유를 누리는 경계를 파괴하지 않고서는, 이 구별을 형해화할 수는 없습니다.
    • 성우맨
      2018.12.03 16:25
      수정/삭제
      자세하게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위의 제가 인용한 <밀의 자유론> 강의에서 은행에서 대출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의 경우에는 종교 상징물을 드러내는 것이 금지될 수 있다고 설명해주셨는데요.

      은행에서 대출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이 종교 상징물을 겉으로 드러나게 착용한 경우에는 (실제로 은행 직원의 입장에서는 모든 고객을 공정하게 심사했다고 하더라도) 종교 상징물을 착용한 직원을 대면한 고객이 공정성 관념에 위협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입헌민주주의 구성원에게 전형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영역에서 권리와 기회가 불리하게 변경된 문제라고 할 수 있다면,

      사립학교에서 학생들을 평가하는 교사가 종교 상징물을 겉으로 드러나게 착용한 경우에도 (교사가 실제로 불공정하게 학생들을 평가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학생들이 교사의 종교상징물을 보고 공정성 관념에 위협을 느낄 수 있을 것인데 이 경우에는 전자와는 다르게 입헌민주주의 구성원에게 전형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영역에서 권리와 기회가 불리하게 변경된 문제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 2018.12.03 16:50 신고
      수정/삭제
      당시 강의의 설명이 틀렸다고 할 것입니다. 오래 전 강의이므로, 공부가 부족하여 일관되게 설명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해당 강의의 댓글로 이 문답을 달겠습니다.
  8. 안성
    2018.10.24 14:34
    수정/삭제 댓글
    선생님 안녕하세요. 최근 혐오표현과 표현의 자유 관련 서치를 조금 하고 있는데, 표현의 자유의 "안"과 "바깥"이 구분되는 것을 보고 배움을 청하려 글 남깁니다. 표현의 자유의 보호 영역 안에 있지만 제한한다는 것과, 애초에 표현의 자유 보호 영역 바깥에 있는 것이 구분되더라고요.... 이 구분이 어떠한 논리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며 구분의 의미, 나아가 효과는 무엇인지를 배울 만한 자료가 있을까요? 최대한 검색을 해 보았는데 잘 안 되네요... 번거로움을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 2018.10.26 16:04 신고
      수정/삭제
      1. 자유의 안과 바깥은, 권리의 잠정적 보호영역 안에 있는 것과 바깥에 있는 것을 나눈다고 보통 이야기됩니다. 즉 애초에 권리 제한 논증이 시작되기 위한 자유의 구성요건을 충족하는지 아닌지를 말한다고 보통 이해됩니다.

      2. 어떤 행위를 일반적으로 금지하고자 하는 주장을 하는 사람은, 두 가지 논증 갈래 중 하나를 택하게 될 것입니다.
      (i) 그 논증 갈래 중 하나는 그 행위가 자유의 잠정적 보호영역에는 해당하지만, 다른 법익 보호를 위해 제한되어야 한다는, 제한 정당화 논증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목적이 정당하고, 수단이 적합하며, 제한 정도가 필요한 최소한에 그치며, 법익의 균형성을 충족한다는 비례성 논증이 이와 같은 제한 정당화 논증의 하나입니다.
      (ii) 다른 논증 갈래는, 아예 그것이 자유의 구성요건에 해당하지조차 아니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자유 제한 정당화를 거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논의는 그것이 자유의 구성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점에 집중될 것입니다.

      3. (i)의 논증 갈래를 취하는 경우를 우리는 이를테면 밤 12시 이후의 집회와 시위를 금지하는 사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밤 12시 이후에 사람들이 모여 집단적으로 의견을 표출하고 행진하는 행위도 집회와 시위의 잠정적 보호영역이기는 하지만, 거리와 주거의 평온과 질서를 위해 이를 제한하는 것이 정당화된다는 논증방식이 구성됩니다.
      (ii)의 논증 갈래를 취하는 경우를 우리는, (정당방위 등의 경우가 아닌한) 다른 사람을 살해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사안에서 볼 수 있습니다.

      4. 권리 제한 정당화 논증에서 (i)의 논증 갈래를 취하는 경우를 넓게 보는 이론을 '넓은 구성요건 이론'이라고 하고, 반대로 (ii)의 논증 갈래를 취하는 경우를 넓게 보는 이론을 '좁은 구성요건 이론'이라고 합니다.

      5. 넓은 구성요건 이론을 취할 때에는 권리 제한 논증의 중심이, 제한 정당화 논증에 가게 됩니다. 좁은 구성요건 이론을 취할 때에는, 애초에 그것이 권리라고 불리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자격 검사 논증, 즉 구성요건 검토 논증에 중심이 가게 됩니다.

      6. 저의 견해는, 좁은 구성요건 이론은 부당하게 논증을 생략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타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기본권 제한 정당화 논증이 주제화되는 맥락에서는, '타인에게 동등한 법적 자유를 인정하면서 수립가능한 모든 법적 자유’라는 형식적 호혜성(formal reciprocity) 요건, 또는 형식적 보편화 가능성을 충족하는 한 기본권의 잠정적 보호영역에 들어가는 것이 타당하고 생각됩니다.(발화 행위 중에서 형식적 호혜성을 갖추지 못한 대표적인 예는 범죄의 교사죄로 처벌될 수 있는 말들입니다.) 이와 같이 정하지 아니하면 지배적인 관습이나 직관, 다수의 선호, 어떤 시점의 정치적 우세, 특정한 언어적 용법에 기댐으로써 결론을 논증 없이 선언하면서 자유의 보호범위를 근거 없이 또는 필요한 범위 이상으로 축소하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자유 제한의 정당화에 필요한 논증을 낱낱이 명시적이고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법규범성의 최소 요건을 갖춘 것을 모두 자유권의 잠정적 보호영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됩니다. 좁은 구성요건을 채택할 때에는 보통 결론을 선취한 설득적 정의를 가져와서 선결문제요구의 오류를 범하기 쉽습니다.
      반면에 좁은 구성요건 이론이 권리 제한 논증으로 빈틈이 없으려면, 사실은 그 권리의 보호영역을 결정하는 부분의 논증이, 권리 제한 정당화 논증의 내용을 고스란히 담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혼동이며, 아무런 실익도 없으며, 임의성만 증가시킵니다.

      7. (1) Robert Alexy, 『기본권 이론』, 367-371면에서는 Alexy의 좁은 구성요건 이론 비판을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2) David L. Faigman, “Reconciling Individual Rights and Government Interests”, 1543면에서 Faigman은 “정부 목적을” 어떤 기본권이 연루되고 그 제한이 문제되는가를 파악하는 “정의 단계(definition prong)에 포함시킴으로써” 법원이 자의적으로 경험적 문제의 입증 책임과 기본권의 보호영역에 속한다는 논증 책임을 원고에게 돌려 버리게 됨을 지적합니다. 같은 논문의 1556-1557면에서는 “예를 들어 Street v. New York 394 U.S. 576 (1969) 사건에서 Black 대법관은 수정헌법 제1조를 국기 태우기에 적용할 수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 행위는 말을 발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의 견해에서는 그 표현적 내용에도 불구하고 행위는 표현을 구성하지 않는 것이었다.”라는 예를 들었다. 국기 태우기(국기 소각)라는 표현의 제한이 정당화되는가라는 형량의 문제를, 간단히 개념을 축소해서 정의함으로써 축출해버린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즉 간단히 어떤 정부 목적만을 언급함으로써 그 목적에 배치되는 행위를 기본권 보호영역에서 간단히 축출해버리는 것은, 논증책임을 기본권 주체에게 돌려버리는 논증 생략의 원인이 됨을, 좁은 구성요건을 채택하는 실제 법률가들의 사고방식이 충분히 예증하고 있습니다.

      (3) <기본권 제한 심사의 법익 형량> 제3장 제1절 IV. 자유 개념의 단계적 구조에서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자유 개념이 3층위가 있으며, 1인칭 관점에서 본 실존적 가능태로서의 자유, 형식적 보편화가능성 심사를 거친 잠정적 보호영역으로서 자유, 그리고 제한 정당화 논증에 의해 그런 사안에서 제한될 수 없는 것으로 도출된 확정적 보호영역으로서 자유가 있다는 설명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4) 윤정인, “자유권 보호영역의 범위와 한계”, 고려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박사학위논문, 2013는 질문하신 주제에 바쳐진 논문입니다. 자유권의 보호영역은 헌법상 자유보장 체계와 보장의 의의, 일반적 자유 보충성에 비추어 논증의 ‘진입구’로서, 가능한 넓게 파악하되, 그 행사가 인간의 존엄이나 생명과 같은 절대적 가치를 갖는 타인 법익을 침해하는 경우에는 한계를 벗어나 보호영역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본질내용유보이론을 구성·주장하고 있습니다.

      8. 또한 어떤 행위를 권리의 잠정적 보호영역에서 배제하기 위해서 성립하여야 하는 필요조건은 그 배제를 작동시키는 매개개념이 명석판명하여 명확성 요건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점입니다.
      <끝>
    • 안성
      2018.11.01 14:51
      수정/삭제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9. 탐구자2
    2018.09.29 15:52
    수정/삭제 댓글
    선생님께서는 [생활이야기]나 삶은 왜 의미있는가에서 많은 부분을 마음의 평정을 추구하는 태도와 좋은 삶에 대한 정적인 개념은 어떤 식으로든 실패할 수 밖에 없으며, 1속물 매트릭스로 오염된 2부조리한 사회와 인간관계 안에서 자유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1속물적인 자동발화 속에 자신을 내던지지 말고 가치의 면도날로 벼려낸 참여자로서의 삶과 경험에서 오는 가치들을 충실히 음미할 것과, 2자신이나 타인을 착취, 조종하려고 하지 않는 호혜적이거나 최소한 기꺼운 마음으로 해낼 수 있는 관계를 맺되 그렇지 못한 경우에도 상대를'예'로서 대하라고 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의식과 요령이 앞서 구분한 2가지로, 그러니까 1정서적이고 사회적인 압력 속에서 거짓?으로 생겨나고 강화되는 것과 2진정 마주해야할 문제이나 혼자서는 해낼 수 없고 타인과의 협동을 요하는 것으로 나뉘어지면서, 지나칠 정도로 명징하고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후자와 달리 그로 인해 유발된 전자가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것 같다고 느낍니다. 물론 선생님께서 속물 매트릭스와 그것을 유발하는 부조리한 인간관계를 구분하려고 하신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저로서는 글을 읽을 수록 그로 인해 더더욱 기꺼운 삶을 위한 해석과 회복의 기제가 효과를 보기 힘들다고 느껴집니다.
    • 2018.10.01 13:37 신고
      수정/삭제
      게재하신 두 문단 중 첫 번째 문단은 의미가 이해가 되나, 후자의 문단은 어떤 의미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무엇이 부정적으로 묘사되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타인과의 협동을 제가 부정적으로 묘사한 적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질문의 정확한 의미와는 관계없이 제가 짐작하자면 아마 '기꺼움'의 느낌을 갖지 못한다는 불만이 있는 듯 합니다. 여기서 '기꺼움'이라는 것은 '신남'이나 '재미있어 죽을 지경임'이라든지 '기분이 방방 떠서 어쩔 줄 몰라함'과는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기꺼움'이란 삶에 진정성이 있다는 것으로, 자신의 삶의 선택을 타인이 대신 내려줘서 휘둘린 것으로 이해하면서 억울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삶에 책임을 지려면 1인칭 관점에서 가치의 구조를 이해하여야 하고, 그런 지침 하에 자신의 관할권 내의 일을 처리하여 나가는 것이 인간이 실천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입니다.
      '기꺼움'을 '부조리로 괴로움을 겪지 않음'으로 이해할 경우에는 기꺼운 삶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조리는 이 세상에 유정적 존재자가 존재하게 됨으로써 이미 발생하게끔 운명지어져 있습니다.
  10. 롤즈
    2018.09.28 08:53
    수정/삭제 댓글
    이한선생님께선 일기를 쓰시나요? 쓴다면 공책에 쓰시는지 전자기기에 타이핑하시는지, 매일 쓰시는지 아닌지도 알려주실수 있나요? 개인적인 질문이라고 생각되시면 답변안해주셔도 괜찮습니다...'.'
    • 2018.10.01 13:32 신고
      수정/삭제
      일기를 씁니다.
      타이핑합니다.
      다만, 여러 주제를 구획해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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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민주주의와 사회윤리학 담론 형성을 위해 노력하는 '시민교육센터-배움의 연대망’ 홈페이지 입니다. 이곳에서는 열린 강의 형태의 시민교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트위터 아이디: civiledulee, 이메일: civiledulee@gmail.com (이한)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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