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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질문돌이
    2020.08.06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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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교수님에게 질문하고 싶은 게 있어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

    교수님은 종교를 믿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종교를 믿어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왜냐면, 종교는 언제나 자신의 종교가 완벽하다는 전제 하에서 자신의 종교를 믿으라고 하지 않습니까?
    근데 사실 모든 종교가 다 한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완전하지 않은 것을 완전하다고 믿는 것이 진실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는 태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류의 많은 전쟁과 폭력이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진 걸 보면, 종교라는 것의 불완전성을 우리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제가 종교를 믿는 것이 종교로 인한 전쟁, 폭력에 어느정도 기여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죄책감이 제 안에서 발생합니다. 그냥 종교를 안 믿으면 되는데, 왜 그걸 못해서 자꾸 종교를 믿고 있는지,, 제 자신이 한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생각은 굉장히 야박한 생각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종교를 믿게 되는 건 이 종교가 진실인지 따져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위로 받고 싶어서 믿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위로받고 싶은 인간의 특징을 생각하면, 종교를 믿는 것 쯤은 허락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여러 생각이 충돌하는데,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의견을 여쭙고 싶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 2020.08.08 16:3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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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과 믿지 않음은 명제의 참, 거짓 즉 세계에서 성립하는 것이나 규범으로서 타당한 것에 관한 것으로서, 오롯이 유관한 인식적 이유에 기초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유관한 인식적 이유 때문에 어떤 것을 믿는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많으나, 인식의 구조는 이를 포착할 수 없게끔 되어 있습니다. 개인이 어떤 것을 믿고 믿지 않고를 결정할 기초가 무엇인지, 그리고 적합한 기초를 어떻게 마련할지에 대해서는 <인생을 바꾸는 탐구습관>에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질문하신 문제에 대해서도 제시된 일반적 해명을 자신의 오성을 활용하여 적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 2020.08.08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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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님, 답변 감사합니다!! 답변을 한 번 만들어봐야 겠습니다 ㅎㅎ
  2. 권도간
    2020.07.13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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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에, 밀과 하트의 경우 공리주의자이면서 자유주의자라고 하셨습니다. 변호사님의 '가치와 규범의 구별과 기본권 문제의 해결' 논문을 보면(물론, 저한테는 어려워서 앞부분만 봤습니다) 자유주의를 가치에 대한 이론이 아닌 규범에 대한 이론으로 봐야한다, 즉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로서의 지위가 훼손되지 않을 규범에 의해 각인의 가치추구 권한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공리주의자라면, 전체 효용의 증진이라는 목적을 위해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라는 지위가 훼손되지 않겠습니까? 즉, 밀이나 하트의 경우에 자유라는 가치도 전체 효용증진이라는 가치에 종속되는 가치로 본다면, 공리주의이자 자유주의자라고 보는 것보다는 공리주의자라고 보는것이 더 맞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여쭤봅니다. 그 논문에서 개인주의적 완전주의와 자유주의는 차원을 달리하므로 양립가능하지만, 여기서 공리주의와 자유주의는 충돌이 일어나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입니다.
    • 2020.07.15 21:3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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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하신 내용은 용어법의 쟁점과 실질적 쟁점이 혼융되어 있습니다. 이 둘을 분리할 수 있는 한, 용어법을 어떻게 쓰는가는 논자가 고정하기 나름이라고 봅니다.
      용어법1: 의무론적 자유주의만을 자유주의라 칭하고, 그 이외의 모든 이념은 자유주의라 칭하지 않음.
      용어법2: 동등하고 양립가능한 자유의 전체계로부터 나오는 자유권을 다른 이익에 우선시하는 일련의 사상 사조.

      용어법1에 의하면 공리주의는 자유주의에 속하지 않을 것입니다.
      용어법 2에 의하면 공리주의자라 할지라도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은 경우에는 자유주의에 속할 것입니다. 아마도 허버트 하트의 경우에도 여기에 속할 것입니다. 파인버그도 명시적으로 의무론을 취하지는 않았지만 자유주의에 속할 것입니다. 근대 형법의 주요 원칙을 만들어낸 베카리아도 자유주의에 속할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상사에서 위에서 언급한 사상가들은 자유주의자들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논자가 고정한 특수한 맥락이 아니고서는 일반적으로는 용어법2가 적절할 것입니다.

      이와 다른 용어법을 쓸 수 있는 논의의 맥락이란, 자유주의의 이론적 기초로서 무엇이 궁극적으로 타당한지를 따지는 맥락입니다.

      그러한 이론적 기초를 따지는 작업이 실질적 쟁점에 관한 작업이라 할 것입니다.

  3. 2020.07.07 23:4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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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조적 이해와 실체적 이해에 대한 구분은 의무론/목적론 구분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목적론 중에서 엄격한 규칙 목적론의 형태를 취하는 이론들은 구조적 이해에 부합할 수 있습니다.
    구조적 이해란, 권리체계가 각 권리 보유자들에게 어떤 역할과 통제권, 재량을 할당했다고 보는 이해입니다. 그러므로 권리를 보유한다 함은 어떤 양과 질의 실체적 좋음을 누리도록 잠정적으로 보장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범위의 이유가 아니고서는 간섭될 수 없는 역할과 통제권, 재량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를 보장받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영업의 자유권을 보장받았다는 것은 그 영업을 잘하든 못하든 탁월한 경쟁자가 나타나든 나타나지 않든 천년만년 그 영업에서 최근 나오던 소득을 계속 올릴 수 있는 이득을 보장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경쟁자의 탁월함으로 인해 사업이 무너지는 것은 그 역할과 통제권, 재량에 전혀 어긋나지 않지만, 그 영업 내용이 다른 사람들의 종교적 신조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폐업시시키는 등의 간섭에 의해서는 할당받는 통제권이 훼손되지 않는다는 지위를 보장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나 <자유론>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목적론자들 중 일부는 어떤 규칙들은 아주 특별한 예외가 아니고서는 일반적으로 준수되는 것이 궁극적 목적을 최선으로 달성하게 해준다는 이론을 개진합니다. 이런 규칙 공리주의는 실체적 이해보다는 구조적 이해에 더 부합합니다. 의무론적 규칙의 존중을 주창하는 현대의 유명한 규칙 결과주의자로는 Hooker가 있습니다. 또한 H.L.A. Hart 역시 공리주의자이면서도 자유의 규칙을 지지하는 자유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목적론이 특별한 예외를 얼마나 느슨하게 보는가에 따라 실체적 이해에 위험할 정도로 가깝게 갈 우려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4. 권도간
    2020.07.06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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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권 제한 심사의 법입형량" 42-43쪽에 권리를 이해하는 두가지 방식, 즉 구조적 이해와 실체적 이해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정치철학에서 여러 학파를 크게 권리론진영(의무론 진영)과 공리주의 진영으로 나눕니다. 그런데, 위의 구조적 이해에 따르면 권리를 '더 많은 전체적 선의 산출이라는 이유'로 제한을 하는 경우도 권리론자라고 할 수 있는지요? 아니면 권리를 제한하는 이유의 성격에 따라 권리론자, 공리주의자로 분류되는지요? 즉, 앞의 예에서 '더 많은 전체적 선의 산출이라는 이유'로 권리를 제한했다면 그 이유의 성격으로보아 공리주의다라고 해야하는 건가요?
  5. 파란연꽃
    2020.06.17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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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교수님 이전에 올리신 '감사하는 습관의 수수께끼'를 매우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저는 그 내용을 심리학의 성급한 일반화와 조작적 정의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교수님이 연구하시는 규범윤리학과 정치철학에서도 최근에 심리학이 내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저 역시 도덕철학과 도덕심리학의 영역에서 도덕철학이 경직된 당위만을 내세우고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를 결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도덕심리학자 조슈아 그린(Joshua Greene)의 저서 옳고 그름을 인용하자면『 도덕심리학은 이따금 도덕철학의 추상적 영역에 끼어드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덕철학이 도덕심리학의 표현이다. 도덕철학은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깊은 심리적이고 생물학적인 빙산의 지적인 귀퉁이일 뿐이다. p.492』결국 인간이라는 주체가 작동하는 원리와 선험적인 조건을 간과한 채로 당위적인 윤리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찍이 맹자가 항산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항심을 갖추기 어렵다는 말처럼 규범 윤리학은 인간 조건을 도외시한 채로 항심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 2020.06.17 13:2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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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심리학의 실험방법론과 조작적 정의에 대한 비판의 함의는 글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경험적 연구는 경험적 연구방법에 따라 수행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만일 어떤 사회학자가 법이라는 것을 그 사회의 공직자들 대다수가 정규적으로 따르는 규칙이라는 의미로 조작적으로 정의하고 그러한 법이 성립, 와해, 약화되는 여건에 대하여 연구한다면, 그 연구는 그 자체로 유의미합니다. 문제는 어떤 사람이 그러한 기술적 학문에서 통용되는 법의 정의를 가져와서 참여자로서의 법해석에 사용할 때 발생합니다. 해당 글은 감사의 태도를 1인칭 관점에서 윤리적으로 어떻게 해명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의 논의로서, 심리학의 성급한 일반화라는 단어는 언급되지도 않았습니다.

      2. 규범윤리학이 인간 조건을 도외시한다는 것으로 느껴진다는 것은 전체 학문을 꿰뚫어 통찰하는 듯한 인상비평입니다. 데이비드 흄은 도덕 심리학과 도덕이론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한 학자입니다. 이러한 흄의 논의를 일부 받아들여 존 롤즈는 적절한 부족상태(온건한 희소성)이나 심층적으로 갈등하는 다원주의의 사실을 정의의 여건으로 포함시켰습니다. 존 롤즈의 정의의 원칙은 이런 여러가지 현실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성립하는 제약들을 구축해 넣은 원초적 입장에서 구성된 것입니다. 또한 존 롤즈는 안정성의 테스트를 통하여 질서정연한 사회의 시민들이 공지된 정의의 원칙을 이해하고 실천할수록, 그 정의의 원칙을 준수하고자 하는 성향이 강화되고 그 원칙에서 이탈하고자 하는 성향은 진압되는가 여부를 따졌습니다. 이에 반해 공리주의 원칙은 전체 총 공리에 기여분이 적은 개인은 추상적인 전체 총 공리를 최대화하기 위해 평생을 희생할 것을 감수하여야 하므로, 이는 분개의 감정이나 그렇지 않아도 소외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롤즈의 이론은 단지 사람들이 어떤 규범을 따르기 싫어한다는 관찰에서 그 규범은 타당하지 않다는 결론으로 나아가는 자연주의의 오류를 범한 것이 아닙니다. 도덕 심리학의 사실들이 규범 이론에서 고려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적절한 자리에서 적합한 방식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규범을 그저 따르기 싫어한다는 자기 관찰로부터 그 규범은 부당하다는 결론을 그 어떤 범죄자라도 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주제에 대하여 '-라고 느껴집니다'라고 하는 한 번에 꿰뚫는 듯한 인상비평에서 출발하는 것은 생산적이지 못한 접근입니다. 풀 가치 있는 문제를 설정하고 탐구에 접근하는 것이 좋습니다.
  6. 시민케이
    2020.06.06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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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교수님.

    < 인생을 바꾸는 탐구습관>의 독자입니다. 책 내용 중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질문을 드립니다.

    3장에선 "모듈 만들기"를 말씀하시는데요, 교수님이 말씀하신 모듈 혹은 모듈화의 개념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정보통신공학이나 설계/디자인에서 쓰이는 모듈을 차용한 개념이 아닌가 싶으면서도 살짝 뉘앙스는 다르다는 느낌이 듭니다.

    혹시 예시를 들어주실 수 있는지요?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 듯 한데 명쾌하게 이해되지 않으니 갑갑한 마음입니다.
    • 2020.06.06 22:4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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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듈과 기술은 모두 문제해결의 구성단위입니다. 그런데 기술은 잘 정의된 문제(well defined problems)에 대하여 이미 널리 확립된(widely established) 문제해결단위입니다. 예를 들어 사회과학방법론 교과서에 나오는 가장 표준적인 통계분석 방법이 그렇습니다. 반면에 모듈은 아직 제대로 정의되지 않은 문제(ill defined problems)에서 문제를 설정하고 정의하여 틀을 제대로 잡게 해주며 그렇게 새롭게 설정된 문제를 해결해주는 상대적으로 참신한 문제해결단위입니다. (예를 들어 통계학의 최첨단에서 새로이 제안되는 통계분석 방법의 일부가 그러할 것입니다.)
      모듈과 기술은 본질적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어떤 모듈이 문제해결의 중요한 단위로 널리 받아들여져서 소개되어 누구나 관련된 사안들을 해당 방식으로 문제설정하고 그 모듈을 쓸 정도로 널리 소개된다면 그것은 기술로 변환될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이 순간, 그 분야에서 그 문제설정과 해결의 방법이 널리 확립된 것이 아니라 한 명 또는 몇명의 선학자의 글에만 나와 있거나 그런 선학자의 연구에서 도움을 얻어 자신이 간취하고 구성한 것이라면, 그것은 아직 모듈입니다. 그런데 정말 풀 만한 가치 있는 문제들을 이렇게 참신한 문제해결단위들을 잘 갖추고 있어야 풀 수가 있습니다.

      책에 든 예시는, "소극적 자유", "적극적 자유", "실질적 자유", "형식적 자유" 등의 별도의 개념이 있다고 하면서 그런 자유들이 충돌할 때 적절히 균형을 잡아서 어느 한 자유만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지금의 엉터리 문제 설정과 해법을 비판할 수 있는 예리한 도구로 맥컬럼의 자유 개념의 일반 구조 분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맥컬럼의 자유 개념 일반 구조 분석에 따르면, 모든 자유개념은 주체 x가 장애 y로부터 행위z를 하기에(또는 상태z를 겪기에) 자유롭다는 삼항구조를 갖는 함수입니다. 그러므로 자유에 관한 모든 논쟁은 여러가지 별개의 자유개념들을 하나하나 저울에 올려두고 저글링을 하거나 저울질을 하듯이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x, y, z의 변항의 범위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로 변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듈을 잘 정리해두면, 다음부터 자유에 관한 문제를 마주하였을 때 바로 이 모듈을 부분적으로 활용하여 풀어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모듈을 잘 정리해두지 않으면, 이러한 맥컬럼의 연구가 법학계 등에 널리 확립되어 소개된 교과과정의 일부를 이루고 있지 않으므로, 다른 사람처럼 어리석은 나태한 사고 습관으로 돌아와 형식적 자유만을 추구해서는 안 되고 실질적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느니,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균형을 적절히 잡아야 한다느니 하는 알지 못할 헛소리를 하게 될 것입니다.
  7. 질문돌이
    2020.05.10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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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 안녕하세요.

    삶은 왜 의미있는가를 읽다가 궁금한 점이 생겨 질문드립니다.
    12장 철이 든다는 것 파트의 실존의 부담을 직시하는 것이라는 부분을 읽다가 질문이 생겼습니다.

    1. 선생님이 정의하는 이성이라는 단어가 무엇인가요?

    이 책을 읽다 이성이라는 단어의 정의가 궁금해졌습니다. 선생님이 생각하는 정의를 알고 싶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제가 느낀 바로는,
    이성이란, 객관적인 가치를 파악하는 능력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이성적 실재론이 무엇입니까?

    책을 보면, 이성적 인간은 허공의 충동과 의무감을 부인하면서 동시에 이성적 실재론자, 현실주의자가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라고 나옵니다. 이성적 실재론의 뜻을 알고 싶습니다. 제가 이성적 실재론이 무엇인지 궁금해 검색을 해보니 정의가 이렇게 나옵니다.

    경험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실재를 부정하고, 이성적으로 생각되는 개념만이 객관적 실재와 일치하며 또 인식할 수 있다는 이론.

    검색해보니 이렇게 정의가 나오는데, 이해가 안됩니다. 왜냐하면 쾌락과 고통은 경험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실재 아닌가요? 이 정의에 따라서 이성적 실재론자가 된다면, 쾌락의 증대와 고통의 감소는 가치가 아니게 됩니다. 보다 정확한 이성적 실재론의 정의를 알고 싶습니다. 혹시 알려주시기가 힘드시면,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책이라도 추천해주실 수 있을까요? 감사합니다.
    • 2020.05.17 15:1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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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성은 가치를 파악하는 것을 포함한 능력이 맞습니다.

      2. 해당 책의 맥락에서 이성적 실재론은 가치가 실제로 있고, (선택적 가치optional value가 아니라면) 한낱 명제 태도에 그치지 않는 이성적 추론을 사용한 공적인 논의로 파악될 수 있다는 관념을 뜻합니다.

      어떤 개념들은 개념 논의의 맥락에서 고유한 의미를 갖습니다. libertarianism은 정치철학의 논의에서는 자유지상주의를 뜻하지만, 자유의지론의 논의에서는 자유의지론(결정론과 양립가능론을 동시에 부인하며 세계는 미결정되어 있으며 자유의지는 있다고 보는 이론)을 가리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libertarianism을 인터넷에서 검색해보고 정치철학 논의의 맥락에 맞는 뜻을 본 다음, 그것을 자유의지론 논의에 가져와서 이해하려고 한다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가치란 행위의 이유로서 정당한 힘을 갖는 것으로 보며, 여기서 전제된 이유(reasons)에 대한 이해는 스캔론의 Being Realistic About Reasons를 따른 것입니다. 추가적인 논의가 궁금하시면 해당 문헌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8. 유튜브
    2020.05.07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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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몇주전에 '삶은왜의미있는가' 에 대해 질문했던 사람입니다. 제가 감사인사와 함께 윤리학에 관한 입문서를 추천해주실수 있냐고 답글을 남겼다가 변호사님이 강의해주신 자료들이 블로그에 있는걸 보고 답글을 지웠습니다. 답변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최근에 변호사님이 남겨주신 답글을 여러번 곱씹어 보다가 갑자기 생각난건데 쾌락주의가 아니라면 변호사님이 채택하고 계신 입장은 무엇인가요? '가치란 공적으로 확인되는것이다' 내용적의미와 배경적의미 등등 이책에서 나온 가치에 대한 내용들에 어떤 윤리학적 입장이 전제되는지 궁금해서 질문드립니다.
    • 2020.05.08 23:2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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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검약한 객관적 목록 이론(austere objective list theory)을 취하고 있습니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에는 좋음에 관한 이론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합니다. 첫째는 욕구 충족 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주체가 가진 욕구의 내용이 무엇이건 욕구를 충족하는 것은 그 주체에게 좋고, 그 욕구가 좌절되는 것은 그 줓에게 나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쾌락주의 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주체의 삶에 담긴 긍정적 마음 상태 또는 정신 상태(mind state)에서 부정적 마음 상태를 뺀 값인 순쾌락이 그 주체에게 좋음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객관적 목록 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인간이라는 주체의 모습이나 본성, 처해 있는 환경, 살아가는 삶의 형태에 맞는 객관적인 좋음들이 있으며, 그런 좋음들을 많이 누리는 삶은 그런 좋음들을 적게 누리는 삶보다 좋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 중 욕구충족이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비판이 결정적입니다. 욕구는 사실은 그 저변에 깔린 행위 이유를 가리키는 중간의 형식적 개념일 뿐, 근본적인 행위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물을 마시면 시원하고 신체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갈증이 날 때 물을 마시는 것이 좋은 것이지, 물을 마시는 욕구를 충족하기 때문에 물을 마시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욕구는 그런 이유를 수용하거나 최소한 저항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따르는 행위과정의 어떤 단계를 형식적으로 기술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저변의 좋음에 관한 이유가 없으면서 다른 좋음에 저해가 되는 욕구 그 자체를 충족시킬 이유가 없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강박증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강박증에 따라 반복적으로 특정 행위를 하려는 욕구가 있다 하더라도 그 욕구 자체를 없앨 수 있다면 없애는 것이 좋지 최대한 욕구 충족의 횟수를 늘리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 이론인 쾌락주의 이론은 아래 답변에서 설명했듯이 그것이 진리주장과 관련해서 수행적 모순에 빠지기 때문에 타당하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세 번째 객관적 목록 이론을 채택합니다. 다만 객관적 목록 이론은 남용되기 쉬우며 독단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즉, 실은 객관적 목록을 작성하는 사람 본인의 기질과 삶의 형태에 알맞은 것인데 모두에게 알맞은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여 자신의 기질과 삶의 형태를 다른 사람에게까지 부과하려는 후견주의적인 충동의 먹이가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저는 객관적 목록을 마음대로 작성해서 늘이기보다는 서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논증될 수 있는 최소한의, 그 목록 내에서 구분해서 사고하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사항(item)만으로 구성된 목록을 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한 목록을 1인칭 관점에서 검약적으로 작성해보면 크게 세 가지로 대별될 것입니다.
      첫째가 배경적 가치, 즉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 모든 이들의 권리를 존중하는 체계의 설립과 유지 및 강화에 자기 몫을 하는 일의 가치입니다. 이 배경적 가치는 복수의 주체들 사이의 정당한 관계를 설정하는 규범이 1인칭 관점에서 향유하는 가치보다 우선하기 때문에, 다른 가치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만일 환원하면 수행적 모순을 범하게 됩니다.
      둘째가 내용적 가치 중에서 우리가 그것을 더 향유하기를 바라는 것을 실천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적 애착과 유대(우정, 사랑 등등)와 같은 관계적 선, 아름다움 등등 많은 것들이 포함됩니다. 이 두 번째 목록이 쾌락으로 환원되는지 되지 않는지에 관해서는 반대하거나 찬성할 결정적 논증이 없습니다. 아마 질문하신 분은 여기에 속하는 좋음들이 쾌락으로 환원되는 논증에 대한 결정적인 논박이 없다는 점을 직감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직감이 아마 질문의 단초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쾌락으로 환원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실제 삶의 문제에 부딪혔을 때, 이를테면 친구를 특정 상황에서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등등의 문제에 부딪혔을 때 쾌락 계산을 통해 행위하는 쪽이 실천적으로 현명하게 되는 특별한 장점이 없다면, 그런 환원이 실천적으로 유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어떤 작품을 좋아할 때도 그 작품이 그 장르의 고유한 문법을 잘 구현하고 있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지, 그 작품이 쾌락을 최대치로 주기 때문에 좋아한다는 식으로 의식을 작동시키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결정적 논증이 없는 미해결의 문제지만, 실천적 쟁점에서는 우정, 아름다움, 쾌락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 사고하는 것이 오히려 더 타당한 실천적 결과를 가져온다고 봅니다.
      셋째는 진리입니다. 진리는 쾌락이나 아름다움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을 결정적 논증을 통해 보여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환원을 감행하게 되면 진리주장과 관련해서 수행적 모순을 범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객관적 목록 이론을 채택하되, 어떤 목록 전체를 한 개인의 삶에 다 구현하라는 조화로운 상을 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각 좋음이 실천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행위 이유를 제시해준다는 점을 잘 이해하면서, 자신의 기질과 여건에 맞는 삶의 방향을 잡고 그 안에서 현재에 집중하면서 가능한 한 즐길 수 있는 방안을 채택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요약된 설명을 참조하여 배경적 가치와 내용적 가치에 관한 해당 책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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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09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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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변 감사드립니다. 이한 님이 써준신 글과 책들을 읽는것만으로 허공의 충동과 강박이 많이 사라졌고 고통 또한 줄어들었습니다. 기나긴 무기력과 불안의 연속이던 제 삶에서 마치 개안이 된것만 같은 상쾌한 기분이 듭니다. 제 미래가 그저 무기력과 불안함의 연장선이 아닌 가치에 기반한 행위를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보여지기 시작했습니다. ‘삶은왜의미있는가’ 의 표지에 자유인을 위한 나침반이라고 적혀있는데 그냥 나침반이 아닌 자유인의 지름길로 인도할 수 있는 나침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질문드리고 싶은게 있는데 욕구충족이론 또한 진리주장에서 수행적모순을 일으키는게 맞나요?
    • 2020.05.09 19:5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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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책이 삶에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2. 정확하게 짚으셨습니다. 수행적 모순을 일으킵니다. 해당 증명은 다음 두 단계로 간단히 보여줄 수 있습니다.
      1단계: 진리라는 명제의 속성과 욕구라는 명제 태도의 속성은 다르다. 즉 그 둘의 진리조건(각각이 참이 되기 위해 성립해야 하는 것들)이 다르다.

      1단계의 증명: "아버지가 현재 집에 있다."라는 명제의 참, 거짓을 결정하는 진리조건은 "아버지가 현재 집에 있으면 좋겠다"라는 명제 태도의 참, 거짓을 결정하는 진리조건과 다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현재 집에 있지 않은데 아버지가 현재 집에 있으면 좋겠다고 욕구하는 일이 가능합니다. 만일 이 두 가지(p와 d(p))가 진리조건이 같았다면 ~p이면서 동시에 d(p)는 모순일 것입니다. 그러나 ~p&d(p)는 일상생활에서 무수히 경험합니다. 따라서 명제의 속성과 명제태도의 속성은 다릅니다.
      이는 현실세계의 반례에 의해서도 증명할 수 있지만 가능세계이론을 사용하여 증명할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가능세계론은 진리조건의 상이를 드러내기 위해 활용되기도 합니다. p가 가능한 세계는 d(p)가 가능한 세계와는 전혀 다릅니다. 현재 우주의 물리법칙과 완전히 동일한 물리법칙으로 작동되는 우주지만 그 안에 인간은 없는 그러한 사태가 가능한 세계들과 현재의 우주 물리법칙과 완전히 동일한 물리법칙으로 작동되는 우주지만 그 안에 인간이 없기를 바라는 욕구 사태가 가능한 세계들 전혀 다릅니다. 전자의 가능세계들에는 인간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가능세계들만이 속합니다. 후자의 가능세계들에는 인간이 존재하는 가능세계들만이 속합니다. 만일 명제와 욕구라는 명제 태도가 같은 것이라면, 두 가능세계가 이토록 상호 배제적으로 파악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1단계 증명은 완료됩니다.

      2단계 증명: 욕구충족총량에서 욕구좌절총량을 뺀 순욕구충족치를 유일한 가치로 보는 사람의 진리주장은 상이한 명제에 대한 명제 태도의 주장과 분간할 수 없다.

      욕구 충족 이론이 궁극적인 가치 이론이라고 보는 사람은 순욕구충족치를 최대화하는 행위만이 합리적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순욕구충족치를 최대화하지 않는 행위는 비합리적입니다. 그런데 진지한 진리주장은 합리적 행위입니다. 그런데 욕구 충족 이론가는 어떤 명제에 관하여는 오로지 비합리적일 때에만 진지한 진리주장을 할 수 있습니다. 즉 어떤 명제가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그 욕구 충족 이론가의 욕구의 만족치를 최대화한다면, 그 욕구 충족이론가에는 그 명제가 참이라고 (허위로) 주장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때때로 거짓을 주장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되는 진리주장은 진지한 진리주장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합리적인 존재로서 이야기하는 한, 그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은 욕구 충족 최대화를 충족시켜주는 명제 태도이지 명제 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같은 명제와 명제 태도가 문제될 때는 명제의 참과 욕구라는 명제 태도의 충족은 상응하기는 합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집에 있다'가 참이면 '아버지가 집에 있으면 좋겠다'는 욕구 충족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욕구충족이론에서 문제되는 것은 단 하나의 명제 태도로서의 욕구가 아니라 욕구 충족의 총합입니다. 따라서 욕구충족이론이 진지하지 못한 진리주장을 하게 되는 이유는,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명제 태도를 주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당파에 속한 사람이 공공정책 A를 주장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사람은 공공정책 A가 통과되면 자신에게 직접 이익이 되거나 아니면 자신의 당파가 또 하나의 승리를 쌓은 것이기 때문에 또는 자신의 당파가 옳은 것임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욕구가 충족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공공정책 A를 반대합니다. 그런데 공공정책 A를 뒷받침하는 사실이라며 p가 참이라고 주장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p입니다. 이 경우 p가 참이었으면 좋겠다는 욕구의 충족은 p의 참에 상응하고, 그 욕구의 좌절은 p의 거짓에 상응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욕구충족이론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욕구가 아니라 공공정책 A가 통과되었으면 좋겠다는 욕구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p가 참이라고 주장할 때 실제로 주장하는 것은 p가 관련 사실이 되는 욕구로서 자신에게 중요한 욕구가 공공정책 A가 통과되었으면 좋겠다는 욕구라는 명제태도입니다. 즉 p가 아닌 상이한 명제에 관한 명제태도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합리적인 욕구충족이론가의 진리주장은 특정 명제의 참에 관해 이야기한다고 하면서 실은 그와는 상이한 명제에 관한 명제태도인 욕구에 관해 이야야기하게 됩니다. 즉 그 주체가 합리적인 한, 특정 명제에 관한 진리주장이라는 발화수반적 행위를 한다고 하면서 그명제와는 상이한 명제에 관한 욕구표출이라는 언어행위를 하는 수행적 모순을 범합니다.
      이러한 수행적 모순을 범하는 행위는 의사소통행위가 아니라 타인을 기망하여 어떤 효과를 얻고자 하는 전략적 발화효과적행위이며, 이러한 전략적 행위는 진지한 발화수반적 행위에 기생해서만 존립할 수 있는 파생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그 문장양상(진리주장)에 적합한 논의의 장에서 시민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욕구충족이론가의 어떤 진리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면, 그 욕구충족이론가가 진리주장을 할 때에만 언제나 비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신뢰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신뢰할 수 있으려면 욕구충족이론가가 진리주장을 할 때에만 일관되게 행위의 기초의 예외를 두는 어떤 가치론을 채택해야 합니다. 그 가치론이란 바로 최소한 진리라는 좋음은 욕구충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욕구충족일원화론을 포기하는 가치론입니다.

      그래서 욕구충족이론은 쾌락주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수행적 모순을 범한다는 결점을 갖고 있으며, 이에 더해 쾌락주의 이론에 비해 궁극적 이유가 아닌 것을 이유로 지목했다는 결점까지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욕구충족이론은 쾌락주의 이론에 비해 더욱 더 그럴법하지 않은 이론이 됩니다. 우리가 욕구가 좌절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이유는 욕구가 좌절됨으로써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t1시점에 어떤 욕구를 가졌고 그 욕구가 t2시점에 좌절되더라도 우리가 그 욕구에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거나 아예 망각한다면 전혀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고, 그럴 경우 그 욕구가 좌절되지 않도록 어떤 비용을 들여 추가적 행위에 나설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 쾌락주의 이론이 우위에 있습니다. 쾌락주의 이론은 적어도 우리가 실천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궁극적 좋음 중 하나인 쾌락은 제대로 포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쾌락주의 이론은 그 궁극적 좋음이 좋음들의 세계를 전부 차지한다고 착각한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3. 같은 식의 수행적 모순 증명을 복수의 주체들을 규율하는 행위 이유로서 규범의 우선성을 부인하여 그 결과 1인칭 관점에서 배경적 가치와 내용적 가치의 구분을 부인하는 가치론에 대해서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유튜브님이 스스로 증명을 전개하셔 보시기 바랍니다. 이 증명을 위해 <기본권 제한 심사의 법익 형량>을 참조하실 수 있씁니다.
  9. 최혁준
    2020.04.26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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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이한열교수님 정말 우연하게도 최근 중간착취자의 나라를 읽었습니다. 평소 노동법이나 노동차별 등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감명깊게 책을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노동압착이라는 표현은 제가 처음본 단어라 그런지 굉장히 잘 표현된 단어같습니다.
    교수님께서 제시하신 3가지 주된내용(간접고용은 원칙적 금지, 기간제 노동 1.3배 임금, 특수고용직 법적근로자성 인정) 충분히 공감됩니다. 그중 기간제 노동 1.3배의 임금이 실제 된다면 좋겠으나 실제로 법으로 강제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교수님이 쓰신 다른 책들도 앞으로 읽어볼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10. 기린
    2020.04.21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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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세한 답변 고맙습니다. 난데없이 기본권을 들고나오며 그간 행했던 모든 평가의 정당성을 훼손할 수 있는 것으로 비약할 수 있는 주장으로 인해 토론 시에 좀 격앙되었던 것 같습니다. 수년 전에 사업장마다 성과가 좋으면 인센티브를 주고, 또 그 인센티브를 종사자의 임금으로 쓴 경우 유리하도록 평가한 적은 있었으나, 이러한 정도로는 종사자의 처우를 개선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판단해 지난해부터 임금 수준을 평가하자는 합의를 이루고, 지난해 하반기부터 논의한 구체적인 평가방법을 논하는 자리에서 나온 쟁점이었습니다.

    (더욱 제가 격앙되었던 지점은 임금 평가 시 사업주에게 임금을 얼마 주고 있는지 직접 조사하는 방법으로 평가하면 사적자치 및 평등 원칙에 위배되지만, 그게 아니라 종사자의 사회보험금액을 통해 파악된 임금자료를 통해 평가하면 위배되지 않는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어쨌든 평등원칙 위배 여부를 덜 엄격한 자의금지원칙에 의해 따질 경우에도 임금 수준을 평가하는 것이 그 사업이 목적으로 하는 바와 상당한 인과성이 있음을 정부가 먼저 입증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정부 부문의 담당자들을 비롯해 전문가집단, 민간 영역의 사업주와 종사자들 등 사이에선 이들 사이에 높은 상관성이 있다는 정도로 공감대는 형성돼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저희가 하는 모든 평가의 요소들이 인과성이 명확히 입증된 바는 없습니다. 예컨대 사업장이 갖추고 있는 시설의 규모라든가, 세금체납이나 임금체불 상황, 프로그램의 적합성 등등입니다. 이런 상황을 볼 때 임금을 포함해 현재 진행 중인 평가는 자의금지원칙을 충족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평등원칙에 위배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앞선 질의를 올리고 난 후 드워킨이 쓴 <자유의법> 11장을 읽게 되었는데 여기에 소개된 레이건 행정부의 사례를 보고 제가 드린 질의와도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장에서 소개된 레이건 행정부의 조치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의사가 직업적으로 갖는 양심이나 진실에 대한 책임을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이해됩니다. 그렇다면, (재정지원받는 병원의) 의사가 환자와 낙태를 논의하는 것을 금지하진 않더라도 이것을 정부 재정 지원 여부를 결정할 평가요소로 반영하는 것도 잘못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결론을 받아들인다면 제가 하고 있는 업무도 모두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가령 평가대상이 되는 사업주는 자신이 최선이라고 믿는 바에 따라 프로그램을 설계할텐데, 프로그램이 적합한지를 정부로부터 평가받아 재정지원 여부를 결정받게 된다면 사업주는 자신이 믿는 바에 따르는 진실과 양심에 책임을 질 권리를 침해받게 됩니다. 의사가 직업적 측면에서 환자에게 진실한 조언을 할 책임이 있는 것처럼, 제가 평가하고 있는 사업주도 직업적 측면에서 진실할 책임이 있을 것인데, 이러한 결론이 좀 극단적인 느낌도 들고 정부가 이렇게도 권한이 없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드워킨이 이런 걸 의도했다고 보이지는 않는데, 제가 무엇을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한편으로 드워킨이 11장에서 학문의 자유를 설명하는 것은 마치 학문자유의 침해는 진실을 추구하는 학문의 미덕을 훼손하기에 잘못되었다라는 식의 샌델 방식의 설명과도 유사하게 느껴집니다.

    제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뭔가 상식적이지도 않은 것 같고... 좀 혼란스럽게 느껴집니다.
    • 2020.04.22 20:53 신고
      수정/삭제
      1. 자유의 법 11장에서 발언금지명령의 경우에 위헌인 이유는, 정부가 관철하려는 목적이 순응이며, 발언금지명령이나 발언에 따른 이익과 불이익의 부과가 순응에만 적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순응이라 함은, 삶의 자연적 가치와 인위적 가치의 비중에 관한 개인의 인격적 통합성에 필수불가결한 판단을 정치적 권위의 판단에 일치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그것은 목적 자체가 정당성이 없는 이익(illegitimate interest)가 됩니다. 이런 경우는 목적 자체는 정당성이 있지만 그 목적의 수단에 적합하지 않거나 기본권을 덜 제한하는 수단이 있거나 법익 균형에 맞지 않다는 것과는 다를 것입니다. (물론 목적 자체가 정당성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다른 단계의 심사를 거치지 않고서는 비례원칙 및 법률유보원칙과 같은 헌법원칙을 준수하는지는 곧바로 판명되지 않습니다.)
      가치는 규범을 어기지 않는 한에서, 특수한 포괄적 신조가 아니라 입헌민주주의의 모든 각 구성원들이 공유할 수 있음이 공적 논증으로 보여지는 것일 때에만 정부에 의해 추구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저의 "가치와 규범의 구별과 기본권 문제의 해결"이라는 논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2. 학문의 자유에 대한 드워킨의 논증은 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민의 지위와 관계에 기반한 권리논증입니다. 샌델의 논증은 완전한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이 적실한가에 기반한 목적론적 논증입니다. 샌델에 의하면 진정한 의미에서 학문의 자유는 인정되기 어렵습니다. 즉 샌델의 논증에 의하면 어떤 학문활동이 완전주의의 관점에서 가치 있다고 승인할 수 있어야 그 학문을 할 자유를 공적으로 지지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샌델은 표현의 자유에 관한 논쟁에서 이 입장을 명시적으로 취했습니다. 학문의 자유에 관해서 샌델이 이 구체적으로 이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완전주의적 판단을 자의적으로 어느 추상 수준에서 멈춤으로써 자신의 이론 내에 명백한 부정합성을 들이기 때문에만 가능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제가 쓴 "국가 완전주의 쟁점과 법해석"이라는 논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기린
      2020.04.22 23:33
      수정/삭제
      답변 고맙습니다. 어렴풋하게나마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소개하신 논문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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