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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질문돌이
    2020.05.10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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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 안녕하세요.

    삶은 왜 의미있는가를 읽다가 궁금한 점이 생겨 질문드립니다.
    12장 철이 든다는 것 파트의 실존의 부담을 직시하는 것이라는 부분을 읽다가 질문이 생겼습니다.

    1. 선생님이 정의하는 이성이라는 단어가 무엇인가요?

    이 책을 읽다 이성이라는 단어의 정의가 궁금해졌습니다. 선생님이 생각하는 정의를 알고 싶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제가 느낀 바로는,
    이성이란, 객관적인 가치를 파악하는 능력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이성적 실재론이 무엇입니까?

    책을 보면, 이성적 인간은 허공의 충동과 의무감을 부인하면서 동시에 이성적 실재론자, 현실주의자가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라고 나옵니다. 이성적 실재론의 뜻을 알고 싶습니다. 제가 이성적 실재론이 무엇인지 궁금해 검색을 해보니 정의가 이렇게 나옵니다.

    경험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실재를 부정하고, 이성적으로 생각되는 개념만이 객관적 실재와 일치하며 또 인식할 수 있다는 이론.

    검색해보니 이렇게 정의가 나오는데, 이해가 안됩니다. 왜냐하면 쾌락과 고통은 경험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실재 아닌가요? 이 정의에 따라서 이성적 실재론자가 된다면, 쾌락의 증대와 고통의 감소는 가치가 아니게 됩니다. 보다 정확한 이성적 실재론의 정의를 알고 싶습니다. 혹시 알려주시기가 힘드시면,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책이라도 추천해주실 수 있을까요? 감사합니다.
    • 2020.05.17 15:1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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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성은 가치를 파악하는 것을 포함한 능력이 맞습니다.

      2. 해당 책의 맥락에서 이성적 실재론은 가치가 실제로 있고, 한낱 명제 태도에 그치지 않는 이성적 추론을 사용한 공적인 논의로 파악될 수 이를 파악할 수 있다는 관념을 뜻합니다.

      어떤 개념들은 개념 논의의 맥락에서 고유한 의미를 갖습니다. libertarianism은 정치철학의 논의에서는 자유지상주의를 뜻하지만, 자유의지론의 논의에서는 자유의지론(결정론과 양립가능론을 동시에 부인하며 세계는 미결정되어 있으며 자유의지는 있다고 보는 이론)을 가리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libertarianism을 인터넷에서 검색해보고 정치철학 논의의 맥락에 맞는 뜻을 본 다음, 그것을 자유의지론 논의에 가져와서 이해하려고 한다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가치란 행위의 이유로서 정당한 힘을 갖는 것으로 보며, 여기서 전제된 이유(reasons)에 대한 이해는 스캔론의 Being Realistic About Reasons를 따른 것입니다. 추가적인 논의가 궁금하시면 해당 문헌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2. 유튜브
    2020.05.07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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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몇주전에 '삶은왜의미있는가' 에 대해 질문했던 사람입니다. 제가 감사인사와 함께 윤리학에 관한 입문서를 추천해주실수 있냐고 답글을 남겼다가 변호사님이 강의해주신 자료들이 블로그에 있는걸 보고 답글을 지웠습니다. 답변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최근에 변호사님이 남겨주신 답글을 여러번 곱씹어 보다가 갑자기 생각난건데 쾌락주의가 아니라면 변호사님이 채택하고 계신 입장은 무엇인가요? '가치란 공적으로 확인되는것이다' 내용적의미와 배경적의미 등등 이책에서 나온 가치에 대한 내용들에 어떤 윤리학적 입장이 전제되는지 궁금해서 질문드립니다.
    • 2020.05.08 23:2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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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검약한 객관적 목록 이론(austere objective list theory)을 취하고 있습니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에는 좋음에 관한 이론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합니다. 첫째는 욕구 충족 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주체가 가진 욕구의 내용이 무엇이건 욕구를 충족하는 것은 그 주체에게 좋고, 그 욕구가 좌절되는 것은 그 줓에게 나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쾌락주의 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주체의 삶에 담긴 긍정적 마음 상태 또는 정신 상태(mind state)에서 부정적 마음 상태를 뺀 값인 순쾌락이 그 주체에게 좋음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객관적 목록 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인간이라는 주체의 모습이나 본성, 처해 있는 환경, 살아가는 삶의 형태에 맞는 객관적인 좋음들이 있으며, 그런 좋음들을 많이 누리는 삶은 그런 좋음들을 적게 누리는 삶보다 좋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 중 욕구충족이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비판이 결정적입니다. 욕구는 사실은 그 저변에 깔린 행위 이유를 가리키는 중간의 형식적 개념일 뿐, 근본적인 행위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물을 마시면 시원하고 신체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갈증이 날 때 물을 마시는 것이 좋은 것이지, 물을 마시는 욕구를 충족하기 때문에 물을 마시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욕구는 그런 이유를 수용하거나 최소한 저항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따르는 행위과정의 어떤 단계를 형식적으로 기술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저변의 좋음에 관한 이유가 없으면서 다른 좋음에 저해가 되는 욕구 그 자체를 충족시킬 이유가 없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강박증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강박증에 따라 반복적으로 특정 행위를 하려는 욕구가 있다 하더라도 그 욕구 자체를 없앨 수 있다면 없애는 것이 좋지 최대한 욕구 충족의 횟수를 늘리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 이론인 쾌락주의 이론은 아래 답변에서 설명했듯이 그것이 진리주장과 관련해서 수행적 모순에 빠지기 때문에 타당하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세 번째 객관적 목록 이론을 채택합니다. 다만 객관적 목록 이론은 남용되기 쉬우며 독단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즉, 실은 객관적 목록을 작성하는 사람 본인의 기질과 삶의 형태에 알맞은 것인데 모두에게 알맞은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여 자신의 기질과 삶의 형태를 다른 사람에게까지 부과하려는 후견주의적인 충동의 먹이가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저는 객관적 목록을 마음대로 작성해서 늘이기보다는 서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논증될 수 있는 최소한의, 그 목록 내에서 구분해서 사고하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사항(item)만으로 구성된 목록을 작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한 목록을 1인칭 관점에서 검약적으로 작성해보면 크게 세 가지로 대별될 것입니다.
      첫째가 배경적 가치, 즉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 모든 이들의 권리를 존중하는 체계의 설립과 유지 및 강화에 자기 몫을 하는 일의 가치입니다. 이 배경적 가치는 복수의 주체들 사이의 정당한 관계를 설정하는 규범이 1인칭 관점에서 향유하는 가치보다 우선하기 때문에, 다른 가치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만일 환원하면 수행적 모순을 범하게 됩니다.
      둘째가 내용적 가치 중에서 우리가 그것을 더 향유하기를 바라는 것을 실천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적 애착과 유대(우정, 사랑 등등)와 같은 관계적 선, 아름다움 등등 많은 것들이 포함됩니다. 이 두 번째 목록이 쾌락으로 환원되는지 되지 않는지에 관해서는 반대하거나 찬성할 결정적 논증이 없습니다. 아마 질문하신 분은 여기에 속하는 좋음들이 쾌락으로 환원되는 논증에 대한 결정적인 논박이 없다는 점을 직감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직감이 아마 질문의 단초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쾌락으로 환원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실제 삶의 문제에 부딪혔을 때, 이를테면 친구를 특정 상황에서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등등의 문제에 부딪혔을 때 쾌락 계산을 통해 행위하는 쪽이 실천적으로 현명하게 되는 특별한 장점이 없다면, 그런 환원이 실천적으로 유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어떤 작품을 좋아할 때도 그 작품이 그 장르의 고유한 문법을 잘 구현하고 있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지, 그 작품이 쾌락을 최대치로 주기 때문에 좋아한다는 식으로 의식을 작동시키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결정적 논증이 없는 미해결의 문제지만, 실천적 쟁점에서는 우정, 아름다움, 쾌락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 사고하는 것이 오히려 더 타당한 실천적 결과를 가져온다고 봅니다.
      셋째는 진리입니다. 진리는 쾌락이나 아름다움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을 결정적 논증을 통해 보여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환원을 감행하게 되면 진리주장과 관련해서 수행적 모순을 범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객관적 목록 이론을 채택하되, 어떤 목록 전체를 한 개인의 삶에 다 구현하라는 조화로운 상을 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각 좋음이 실천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행위 이유를 제시해준다는 점을 잘 이해하면서, 자신의 기질과 여건에 맞는 삶의 방향을 잡고 그 안에서 현재에 집중하면서 가능한 한 즐길 수 있는 방안을 채택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요약된 설명을 참조하여 배경적 가치와 내용적 가치에 관한 해당 책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유튜브
      2020.05.09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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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변 감사드립니다. 이한 님이 써준신 글과 책들을 읽는것만으로 허공의 충동과 강박이 많이 사라졌고 고통 또한 줄어들었습니다. 기나긴 무기력과 불안의 연속이던 제 삶에서 마치 개안이 된것만 같은 상쾌한 기분이 듭니다. 제 미래가 그저 무기력과 불안함의 연장선이 아닌 가치에 기반한 행위를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보여지기 시작했습니다. ‘삶은왜의미있는가’ 의 표지에 자유인을 위한 나침반이라고 적혀있는데 그냥 나침반이 아닌 자유인의 지름길로 인도할 수 있는 나침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질문드리고 싶은게 있는데 욕구충족이론 또한 진리주장에서 수행적모순을 일으키는게 맞나요?
    • 2020.05.09 19:5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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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책이 삶에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2. 정확하게 짚으셨습니다. 수행적 모순을 일으킵니다. 해당 증명은 다음 두 단계로 간단히 보여줄 수 있습니다.
      1단계: 진리라는 명제의 속성과 욕구라는 명제 태도의 속성은 다르다. 즉 그 둘의 진리조건(각각이 참이 되기 위해 성립해야 하는 것들)이 다르다.

      1단계의 증명: "아버지가 현재 집에 있다."라는 명제의 참, 거짓을 결정하는 진리조건은 "아버지가 현재 집에 있으면 좋겠다"라는 명제 태도의 참, 거짓을 결정하는 진리조건과 다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현재 집에 있지 않은데 아버지가 현재 집에 있으면 좋겠다고 욕구하는 일이 가능합니다. 만일 이 두 가지(p와 d(p))가 진리조건이 같았다면 ~p이면서 동시에 d(p)는 모순일 것입니다. 그러나 ~p&d(p)는 일상생활에서 무수히 경험합니다. 따라서 명제의 속성과 명제태도의 속성은 다릅니다.
      이는 현실세계의 반례에 의해서도 증명할 수 있지만 가능세계이론을 사용하여 증명할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가능세계론은 진리조건의 상이를 드러내기 위해 활용되기도 합니다. p가 가능한 세계는 d(p)가 가능한 세계와는 전혀 다릅니다. 현재 우주의 물리법칙과 완전히 동일한 물리법칙으로 작동되는 우주지만 그 안에 인간은 없는 그러한 사태가 가능한 세계들과 현재의 우주 물리법칙과 완전히 동일한 물리법칙으로 작동되는 우주지만 그 안에 인간이 없기를 바라는 욕구 사태가 가능한 세계들 전혀 다릅니다. 전자의 가능세계들에는 인간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가능세계들만이 속합니다. 후자의 가능세계들에는 인간이 존재하는 가능세계들만이 속합니다. 만일 명제와 욕구라는 명제 태도가 같은 것이라면, 두 가능세계가 이토록 상호 배제적으로 파악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1단계 증명은 완료됩니다.

      2단계 증명: 욕구충족총량에서 욕구좌절총량을 뺀 순욕구충족치를 유일한 가치로 보는 사람의 진리주장은 상이한 명제에 대한 명제 태도의 주장과 분간할 수 없다.

      욕구 충족 이론이 궁극적인 가치 이론이라고 보는 사람은 순욕구충족치를 최대화하는 행위만이 합리적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순욕구충족치를 최대화하지 않는 행위는 비합리적입니다. 그런데 진지한 진리주장은 합리적 행위입니다. 그런데 욕구 충족 이론가는 어떤 명제에 관하여는 오로지 비합리적일 때에만 진지한 진리주장을 할 수 있습니다. 즉 어떤 명제가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그 욕구 충족 이론가의 욕구의 만족치를 최대화한다면, 그 욕구 충족이론가에는 그 명제가 참이라고 (허위로) 주장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때때로 거짓을 주장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되는 진리주장은 진지한 진리주장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합리적인 존재로서 이야기하는 한, 그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은 욕구 충족 최대화를 충족시켜주는 명제 태도이지 명제 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같은 명제와 명제 태도가 문제될 때는 명제의 참과 욕구라는 명제 태도의 충족은 상응하기는 합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집에 있다'가 참이면 '아버지가 집에 있으면 좋겠다'는 욕구 충족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욕구충족이론에서 문제되는 것은 단 하나의 명제 태도로서의 욕구가 아니라 욕구 충족의 총합입니다. 따라서 욕구충족이론이 진지하지 못한 진리주장을 하게 되는 이유는,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명제 태도를 주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당파에 속한 사람이 공공정책 A를 주장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사람은 공공정책 A가 통과되면 자신에게 직접 이익이 되거나 아니면 자신의 당파가 또 하나의 승리를 쌓은 것이기 때문에 또는 자신의 당파가 옳은 것임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욕구가 충족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공공정책 A를 반대합니다. 그런데 공공정책 A를 뒷받침하는 사실이라며 p가 참이라고 주장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p입니다. 이 경우 p가 참이었으면 좋겠다는 욕구의 충족은 p의 참에 상응하고, 그 욕구의 좌절은 p의 거짓에 상응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욕구충족이론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욕구가 아니라 공공정책 A가 통과되었으면 좋겠다는 욕구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p가 참이라고 주장할 때 실제로 주장하는 것은 p가 관련 사실이 되는 욕구로서 자신에게 중요한 욕구가 공공정책 A가 통과되었으면 좋겠다는 욕구라는 명제태도입니다. 즉 p가 아닌 상이한 명제에 관한 명제태도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합리적인 욕구충족이론가의 진리주장은 특정 명제의 참에 관해 이야기한다고 하면서 실은 그와는 상이한 명제에 관한 명제태도인 욕구에 관해 이야야기하게 됩니다. 즉 그 주체가 합리적인 한, 특정 명제에 관한 진리주장이라는 발화수반적 행위를 한다고 하면서 그명제와는 상이한 명제에 관한 욕구표출이라는 언어행위를 하는 수행적 모순을 범합니다.
      이러한 수행적 모순을 범하는 행위는 의사소통행위가 아니라 타인을 기망하여 어떤 효과를 얻고자 하는 전략적 발화효과적행위이며, 이러한 전략적 행위는 진지한 발화수반적 행위에 기생해서만 존립할 수 있는 파생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그 문장양상(진리주장)에 적합한 논의의 장에서 시민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욕구충족이론가의 어떤 진리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면, 그 욕구충족이론가가 진리주장을 할 때에만 언제나 비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신뢰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신뢰할 수 있으려면 욕구충족이론가가 진리주장을 할 때에만 일관되게 행위의 기초의 예외를 두는 어떤 가치론을 채택해야 합니다. 그 가치론이란 바로 최소한 진리라는 좋음은 욕구충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욕구충족일원화론을 포기하는 가치론입니다.

      그래서 욕구충족이론은 쾌락주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수행적 모순을 범한다는 결점을 갖고 있으며, 이에 더해 쾌락주의 이론에 비해 궁극적 이유가 아닌 것을 이유로 지목했다는 결점까지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욕구충족이론은 쾌락주의 이론에 비해 더욱 더 그럴법하지 않은 이론이 됩니다. 우리가 욕구가 좌절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이유는 욕구가 좌절됨으로써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t1시점에 어떤 욕구를 가졌고 그 욕구가 t2시점에 좌절되더라도 우리가 그 욕구에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거나 아예 망각한다면 전혀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고, 그럴 경우 그 욕구가 좌절되지 않도록 어떤 비용을 들여 추가적 행위에 나설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 쾌락주의 이론이 우위에 있습니다. 쾌락주의 이론은 적어도 우리가 실천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궁극적 좋음 중 하나인 쾌락은 제대로 포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쾌락주의 이론은 그 궁극적 좋음이 좋음들의 세계를 전부 차지한다고 착각한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3. 같은 식의 수행적 모순 증명을 복수의 주체들을 규율하는 행위 이유로서 규범의 우선성을 부인하여 그 결과 1인칭 관점에서 배경적 가치와 내용적 가치의 구분을 부인하는 가치론에 대해서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유튜브님이 스스로 증명을 전개하셔 보시기 바랍니다. 이 증명을 위해 <기본권 제한 심사의 법익 형량>을 참조하실 수 있씁니다.
  3. 최혁준
    2020.04.26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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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이한열교수님 정말 우연하게도 최근 중간착취자의 나라를 읽었습니다. 평소 노동법이나 노동차별 등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감명깊게 책을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노동압착이라는 표현은 제가 처음본 단어라 그런지 굉장히 잘 표현된 단어같습니다.
    교수님께서 제시하신 3가지 주된내용(간접고용은 원칙적 금지, 기간제 노동 1.3배 임금, 특수고용직 법적근로자성 인정) 충분히 공감됩니다. 그중 기간제 노동 1.3배의 임금이 실제 된다면 좋겠으나 실제로 법으로 강제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교수님이 쓰신 다른 책들도 앞으로 읽어볼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4. 기린
    2020.04.21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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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세한 답변 고맙습니다. 난데없이 기본권을 들고나오며 그간 행했던 모든 평가의 정당성을 훼손할 수 있는 것으로 비약할 수 있는 주장으로 인해 토론 시에 좀 격앙되었던 것 같습니다. 수년 전에 사업장마다 성과가 좋으면 인센티브를 주고, 또 그 인센티브를 종사자의 임금으로 쓴 경우 유리하도록 평가한 적은 있었으나, 이러한 정도로는 종사자의 처우를 개선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판단해 지난해부터 임금 수준을 평가하자는 합의를 이루고, 지난해 하반기부터 논의한 구체적인 평가방법을 논하는 자리에서 나온 쟁점이었습니다.

    (더욱 제가 격앙되었던 지점은 임금 평가 시 사업주에게 임금을 얼마 주고 있는지 직접 조사하는 방법으로 평가하면 사적자치 및 평등 원칙에 위배되지만, 그게 아니라 종사자의 사회보험금액을 통해 파악된 임금자료를 통해 평가하면 위배되지 않는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어쨌든 평등원칙 위배 여부를 덜 엄격한 자의금지원칙에 의해 따질 경우에도 임금 수준을 평가하는 것이 그 사업이 목적으로 하는 바와 상당한 인과성이 있음을 정부가 먼저 입증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정부 부문의 담당자들을 비롯해 전문가집단, 민간 영역의 사업주와 종사자들 등 사이에선 이들 사이에 높은 상관성이 있다는 정도로 공감대는 형성돼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저희가 하는 모든 평가의 요소들이 인과성이 명확히 입증된 바는 없습니다. 예컨대 사업장이 갖추고 있는 시설의 규모라든가, 세금체납이나 임금체불 상황, 프로그램의 적합성 등등입니다. 이런 상황을 볼 때 임금을 포함해 현재 진행 중인 평가는 자의금지원칙을 충족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평등원칙에 위배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앞선 질의를 올리고 난 후 드워킨이 쓴 <자유의법> 11장을 읽게 되었는데 여기에 소개된 레이건 행정부의 사례를 보고 제가 드린 질의와도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장에서 소개된 레이건 행정부의 조치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의사가 직업적으로 갖는 양심이나 진실에 대한 책임을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이해됩니다. 그렇다면, (재정지원받는 병원의) 의사가 환자와 낙태를 논의하는 것을 금지하진 않더라도 이것을 정부 재정 지원 여부를 결정할 평가요소로 반영하는 것도 잘못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결론을 받아들인다면 제가 하고 있는 업무도 모두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가령 평가대상이 되는 사업주는 자신이 최선이라고 믿는 바에 따라 프로그램을 설계할텐데, 프로그램이 적합한지를 정부로부터 평가받아 재정지원 여부를 결정받게 된다면 사업주는 자신이 믿는 바에 따르는 진실과 양심에 책임을 질 권리를 침해받게 됩니다. 의사가 직업적 측면에서 환자에게 진실한 조언을 할 책임이 있는 것처럼, 제가 평가하고 있는 사업주도 직업적 측면에서 진실할 책임이 있을 것인데, 이러한 결론이 좀 극단적인 느낌도 들고 정부가 이렇게도 권한이 없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드워킨이 이런 걸 의도했다고 보이지는 않는데, 제가 무엇을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한편으로 드워킨이 11장에서 학문의 자유를 설명하는 것은 마치 학문자유의 침해는 진실을 추구하는 학문의 미덕을 훼손하기에 잘못되었다라는 식의 샌델 방식의 설명과도 유사하게 느껴집니다.

    제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뭔가 상식적이지도 않은 것 같고... 좀 혼란스럽게 느껴집니다.
    • 2020.04.22 20:5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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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유의 법 11장에서 발언금지명령의 경우에 위헌인 이유는, 정부가 관철하려는 목적이 순응이며, 발언금지명령이나 발언에 따른 이익과 불이익의 부과가 순응에만 적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순응이라 함은, 삶의 자연적 가치와 인위적 가치의 비중에 관한 개인의 인격적 통합성에 필수불가결한 판단을 정치적 권위의 판단에 일치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그것은 목적 자체가 정당성이 없는 이익(illegitimate interest)가 됩니다. 이런 경우는 목적 자체는 정당성이 있지만 그 목적의 수단에 적합하지 않거나 기본권을 덜 제한하는 수단이 있거나 법익 균형에 맞지 않다는 것과는 다를 것입니다. (물론 목적 자체가 정당성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다른 단계의 심사를 거치지 않고서는 비례원칙 및 법률유보원칙과 같은 헌법원칙을 준수하는지는 곧바로 판명되지 않습니다.)
      가치는 규범을 어기지 않는 한에서, 특수한 포괄적 신조가 아니라 입헌민주주의의 모든 각 구성원들이 공유할 수 있음이 공적 논증으로 보여지는 것일 때에만 정부에 의해 추구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저의 "가치와 규범의 구별과 기본권 문제의 해결"이라는 논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2. 학문의 자유에 대한 드워킨의 논증은 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민의 지위와 관계에 기반한 권리논증입니다. 샌델의 논증은 완전한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이 적실한가에 기반한 목적론적 논증입니다. 샌델에 의하면 진정한 의미에서 학문의 자유는 인정되기 어렵습니다. 즉 샌델의 논증에 의하면 어떤 학문활동이 완전주의의 관점에서 가치 있다고 승인할 수 있어야 그 학문을 할 자유를 공적으로 지지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샌델은 표현의 자유에 관한 논쟁에서 이 입장을 명시적으로 취했습니다. 학문의 자유에 관해서 샌델이 이 구체적으로 이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완전주의적 판단을 자의적으로 어느 추상 수준에서 멈춤으로써 자신의 이론 내에 명백한 부정합성을 들이기 때문에만 가능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제가 쓴 "국가 완전주의 쟁점과 법해석"이라는 논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기린
      2020.04.22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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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변 고맙습니다. 어렴풋하게나마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소개하신 논문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5. 기린
    2020.04.14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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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직장에서 기본권 관련된 논의가 있어 질문드립니다. 검토받고자 하는 의견은 두 가지입니다.

    (공적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이를 진행할 우수한 사업체를 선정하기 위한 평가절차에서)
    1. 소속 근로자의 임금수준을 고려하는 것은 헌법 상 사적 자치 원칙을 위배함(헌법 제10조 근거)
    - 왜냐하면, 사용자는 근로계약에 관해 근로기준법, 최저임금법을 위배하지 않는 한 자유롭게 내용을 정할 수 있음에도 정부지원 여부를 결정하는 절차에서 임금수준을 평가하면, 앞서 말한 사용자의 자유로운 임금 지급의사를 강제하거나 개입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음
    - 그러나 소속 근로자의 역량/전문성을 고려하는 것은 가능함. 왜냐하면 헌법 상 교육받을 권리가 있으며, 교육의 질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기 때문임(사업체의 업종은 교육서비스 성격이고, 근로자는 강사입니다)

    2. 소속 근로자의 임금수준을 고려하는 것은 헌법 상 평등 원칙을 위배함(헌법 제11조 근거)
    - 왜냐하면, 자본력을 가진 사업체만 우대하기 때문임

    저는 위 두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1. 사적 자치의 원칙은 법률 내에서 사인 간에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는 원칙이지 그 행동에 따른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면제하는 것은 아님
    2. 따라서 국가는 개인이 합법적인 영역 내에서 행동했더라도 그 행동을 고려하는 것이 헌법이 금지하는 차별에 해당되지 않는 한 급부를 제공할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음
    3. 임금 수준은 사업장이 제공하고자 하는 교육서비스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임. 따라서 임금 수준을 고려하는 것은 국민에게 제공될 교육서비스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합당한 평가지표에 해당되며 이를 평가하는 것은 부당한 차별이 아님

    다른 때 같으면, 제 업무와 관련이 별로 없는 내용이라 그냥 가볍게 의견만 서로 얘기하고 넘어갔을텐데 쟁점이 헌법상 기본권이다보니 한번 여기에 질의드려 좀더 의견을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질의드립니다.
    • 2020.04.17 22:15 신고
      수정/삭제
      1. 업무의 상세한 내용을 공개하지 못하시기 때문이지만 제시된 내용만 가지고서는 확정적인 의견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관련된 헌법적 쟁점과 가능한 결론들을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2. 제시된 의견 공방은 헌법에 대한 문외한인 두 분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되며 그와 같이 한 줄씩의 논거를 그 논거의 위치에 관한 명확한 상호 이해 없이 주고 받는 것으로는 어떤 합의에 도달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3. 관련된 헌법적 쟁점
      (1) 국가 작용의 종류에 따른 헌법적 구속 면제 여부

      국가의 모든 작용은 그것이 권력적 작용이건 국고작용을 포함한 비권력적 작용이건 헌법의 구속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동일한 국가사무를 고권적 지위에서 처리할 수도 있고 형식상 사인의 지위에 서는 사법상 지위에서 처리하도록 사무의 성질을 바꿀 수도 있는데, 비권력적 작용이라고 하여 만연히 전적으로 사법관계로 보게 되면 국가가 사무의 형식을 바꿈으로써 헌법에의 구속을 면탈할 수 있는 자의적 결정권을 진다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권력적 작용의 경우에는 주로 자유권 등 방어권이 문제되고 비권력적 작용의 경우에는 평등권이나 기본권보장의무 등이 문제됩니다.
      해당 사업 선정이 수혜적 국가 작용임은 분명한 것 같고, 해당 사업의 법적 지위가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므로 그것이 권력적 작용인지 비권력적 작용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설사 비권력적 작용이라고 하더라도 법률유보원칙과 평등원칙의 적용은 받습니다.

      (2) 법률유보원칙 쟁점

      법치주의 원칙에 따라 국가 사업에의 선정과 비선정의 사유는 의회가 입법한 법률에 근거를 두어야 하며, 그러한 법률에서 위임을 했다면 그 위임 범위에 한정되는 사유만을 사업선정주체는 도입할 수 있습니다.
      만일 법률에서 범위를 한정하여 선정 사유를 사업선정주체인 국가기관이 행정입법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하여 부여하지 않았다면, 그 사업을 시행하는 근거가 된 법률의 목적에 부합하는 범위의 사유만을 사업선정의 사유로 삼을 수 있다고 판단됩니다. 그리고 어떤 사유가 법률에 직접 근거를 두고 있거나 법률이 위임한 권한 범위 내에 속하는지 여부는 해당 법률 조항들을 직접 검토해보아야 판단할 수 있씁니다.

      (3) 평등원칙 쟁점
      1) 평등원칙의 적용과 금지되는 차별 사유의 범위
      헌법재판소는 평등원칙의 적용을 헌법 제11조가 명시적으로 열거한 사유에 한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헌법은 피부색이나 출생지는 언급하고 있지만 합리적 근거가 없이 이러한 표지에 의한 차별이 이루어진다면 그것도 위헌으로 판정됩니다. 따라서 헌법이 명시적으로 예시한 사유에 의거하지 않은 행위라면 모두 포괄적으로 허용되었다고 보는 견해는 잘못된 것입니다. 헌법은 구체적인 규칙의 집합 문서가 아니라 추상적 원리 문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임금수준에 의한 사업선정여부를 달리 대우하는 것 역시 일단 평등원칙의 적용 대상이 됩니다. 토론의 상대방에 의해 거론된 바대로, 그것은 기업규모 등에 의해 중소기업을 차별하는 결과에 이르기 떄문입니다. 다만 그것이 평등원칙의 적용에 의하여 합리적 차별인지 불합리한 차별인지는 심사기준에 따른 심사를 해보아야 알 수 있는 일입니다.
      2) 평등원칙의 심사기준은 자의금지원칙과 엄격한 비례원칙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헌법이 명시적으로 금지한 사유에 의한 차별이나 관련된 기본권의 중대한 제한을 가져오는 차별대우는 엄격한 비례원칙에 의하여 심사하고 그 외는 자의금지원칙에 의합니다.
      해당 사업이 관련 사업체의 사업운영에 어느 정도의 중대성을 갖는지를 알 수 없으므로 두 심사기준 모두에 의하여 판단하여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 자의금지원칙에 의할 때는 차별대우가 정당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고 차별취급이 그 목적과 합리적 관련성이 있으면 합헌으로 판단됩니다. 시행되는 사업의 성과 질을 높이기 위한 것은 정당한 목적에 해당하고, 문제는 기 지급되고 있는 임금 수준이 그 결과와 합리적 관련성이 있는지 여부입니다. 이 문제는 구체적인 사정들을 보아야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국민의 대표인 입법자가 한 합리적 관련성 판단에 대해서는 일정한 범위의 예측평가권이 인정되어 헌법재판소가 존중하나, 해당 사업시행의 구체적인 담당자들이 임의로 내린 합리적 관련성 판단에는 그러한 합헌성 추정은 부여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한낱 사변적 추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존의 사업시행 결과에서 사업체의 임금 수준과 그 사업 시행 결과에 대한 평가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음을 그러한 사업선정을 하는 국가기관 측에서 입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업 시행의 결과의 질에 대한 예측은 사업체가 이전에 수행한 성과물들에 대한 평가를 통해 직접 할 수 있으므로 이러한 간접 표지를 통해서 하려는 것이 합리적 관련성을 가진다고 보는 점에는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엄격한 비례원칙은 차별목적의 정당성, 차별취급의 적합성, 차별취급의 필요성, 차별취급의 법익 균형성 모두를 따지게 됩니다. 이 경우에 차별취급의 적합성에까지는 위 자의금지원칙 적용에 관하여 이야기한 것과 동일합니다. 문제는 차별취급의 필요성인데, 차별을 덜 하는 수단으로 동등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필요성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이 경우에는 사업체를 선정 후 이 사업에 한정해서 사업비용 중 일부는 임금으로 반드시 지출하도록 하여 임금 수준을 일정 수준으로 맞추도록 하거나 하는 등의 덜 차별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판단될 수 있으므로 인정되지 아니할 수 있습니다.

      (4) 사적자치원칙 쟁점
      사적자치원칙은 사인들 사이의 계약 등 법률관계의 형성은 국가의 개입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칙으로서 해당 사안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습니다. 그러나 간접적 관련은 있습니다. 간접적 관련이 있다고 해서 사적자치원칙이 완전히 무관한 쟁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국가가 계약의 내용에 직접 개입하지는 않아도 어떤 계약을 하였는가에 따라 세율이나 수혜적 작용에서 처우를 달리한다면 이는 간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이어서 때로는 사적자치원칙 위배로 평가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적자치원칙과 관련이 있다고 해서 곧바로 사적자치원칙 위배가 되는 것은 아니며, 간접적으로 관련된 부분은 평등원칙 심사에 포함되어 어차피 다루어질 부분일 것입니다.
  6. 유튜브
    2020.04.0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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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삶은왜의미있는가'에 대하여 궁금한점이 생겨서 또 질문드립니다. 책에서 말씀해주신 내용적가치들에 대해 생각을 하다가 자신의 고통감소와 쾌락증대를 제외한 나머지 가치들은 전부 수단적 가치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타인과 애착을 형성할때 외로움으로 느껴지는 고통이 감소되고 진리를 추구하는 책을 읽을때 쾌락이 느껴지고 등등. 물론 그 쾌락이 지향하는 가치와 부합할때 느껴지는 쾌락이라는것은 이해가 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진리,애착,타인의고통감소와 쾌락증대와 같은 가치들은 자신의 고통감소,쾌락증대를 위한 수단적가치이다 그렇기때문에 지향할만한 가치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고통감소,쾌락증대만이 내재적 가치라는 생각이 들었구요. 변호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2020.04.17 22:26 신고
      수정/삭제
      쓰신 견해는 가치론에서 보통 쾌락주의 견해라고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쾌락주의를 채택하고 있지 않습니다. 쾌락주의의 가장 결정적인 난점은 그것이 가치에 관한 의미 있는 논증대화를 수행적 모순으로 만든다는 점입니다. 가치에 관하여 어떤 주장을 한다 함은 그것이 가치에 관한 진리로서 타당하다는 승인을 받고자 하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쾌락주의자는 진리 주장을 하는 행위자체도 어떤 내용을 주장을 하는 것이 쾌락적이라면 그대로 하고 비쾌락적이라면 내용을 바꾸어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쾌락주의자가 논증대화에서 하는 주장은 '이것은 참이다'라는 주장이 아니라 '이렇게 말하고 주장하면 나의 또는 다수의 쾌락이 증진된다'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해당 주장은 진지한 타당성 주장이 아니게 되고 그러한 타당성 주장으로서는 자멸적인 수행적 모순을 범하게 됩니다.

      쾌락주의가 가치론에 관한 논증대화에서 수행적 모순을 범하게 된다는 점 이외에도 쾌락주의를 논박하는 여러 논거들이 있습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아래 링크의 논문들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s://www.civiledu.org/1503

      그리고 질문자님은 고전적인 쾌락주의가 아니라 윤리적 이기주의적 쾌락주의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치 주장으로서 추가적인 난점을 갖습니다. 어떤 종류의 현상이 누구에게나 가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경험하고 판정하는 것은 오직 나 뿐이라는 유아론적인 관점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아론적 관점은 동등한 인식적 지위를 갖고 있는 타인의 존재를 배제하는 관점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또한 논증대화로서 수행적 모순을 범하게 됩니다.
      질문자님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명제는, 가치론에 관한 진리 주장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이나 쾌락의 증대, 진리 등은 나의 쾌락 증진과 고통에 봉사하지 않는 한 지금 나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는, 내성에 의해 알아낸 자기자신의 심리적 현상에 대한 관찰 진술입니다.
      그러나 내성에 의해 파악한 자신의 심리 현상에 대한 관찰 진술은 곧바로 가치론의 주장으로서 격위(status)를 갖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방금 손을 10분이나 씻었는데 또 손을 씻고자 하는 강력한 충동이 들고 실제로도 또 손을 씻게 되는 현상을 경험하는 사람은 '다른 행위의 이유들은 지금 나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오직 손을 또다시 씻고자 하는 충동이 나의 마음을 움직인다'라고 진지하게 자기 보고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복해서 손을 씻는 일의 가치에 대한 어떤 논거를 가진 주장은 되지 않습니다.
  7. 유튜브
    2020.04.06 10:10
    수정/삭제 댓글
    안녕하세요 '삶은왜의미있는가'를 읽던중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생겨서 질문드립니다. 이 책에서 나온 관찰자는 모두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인간을 관찰하는 초월적인 존재’를 뜻하는것인가요? 45p 아래에서 6번째줄에 나온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인간의 시각과 미각으로 전체그림을 음미하는 실천적인 차원의 평가이다’ 라는 문장이 저를 헷갈리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헷갈리는 이유는 이 책에서 사용하는 관찰과 일상적인 용법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아름답다는 것이 가치의 영역이기 때문에 관찰자의 관점이 아니라는 뜻인가요?
    생각을 좀 해보다가 관찰자의 관점이라는 걸 당위(도덕)의 영역은 배제한 채 사실(과학)의 영역만을 고려하는 관점이라고 이해했는데 제가 올바르게 이해한걸까요? 혹시 제가 틀렸다면 관찰자라는게 무엇인지 설명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 2020.04.17 22:32 신고
      수정/삭제
      참여자 관점은 실천을 인도하는 궁극적 이유로서 대상을 해석하고 이해하고 음미하는 관점입니다. 반대로 관찰자 관점은 실천을 인도하는 궁극적 이유는 논의되는 대상 자체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마련해놓고는, 논의되는 대상에 대해서는은 오로지 그 다른 곳에서 마련된 이유를 적용하기 위하여 외적 사실들을 식별하는 것처럼 파악하는 관점을 의미합니다.
      이 차이는 해당 책에서 어떤 법의 합헌성에 대한 참여자 관점과 관찰자 관점을 대비하여 논의하였으므로 그 부분을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가치에 관하여 참여자 관점을 취하게 되면 지금 내가 그것을 추가로 또는 새로이 향유하기 위해서 어떤 행위로 나아가거나 어떤 행위를 삼갈 이유가 있는가를 묻는 관점을 취하는 것입니다.
      가치에 관하여 관찰자 관점을 취하게 되면, 누구는 어떤 연유로 그것을 삶에 많이 담게 되었으며 또 다른 누구는 어떤 연유로 그것을 삶에 적게 담게 되었으며 각각의 총점은 어떻게 되는가입니다.
      관찰자 관점의 범형(패러다임)이 물리적인 사실을 관찰하는 관점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물리적 현상에 대한 관찰에만 취할 수 있는 관점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속성을 줄세워서 평가하고 자신의 속성이 여기 있으니까 점수가 낮다고 하는 관점 역시 관찰자 관점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8. 탐구자2
    2020.04.02 11:30
    수정/삭제 댓글
    '인생을 바꾸는 탐구습관'을 구매해 읽고 있습니다. 교수님께서 로이 바우마이스터가 기자와 함께 집필한 '의지력의 재발견'의 내용을 다수 인용하시는듯 하여 알려드립니다만, 책의 출간 당시와 달리 최근의 연구들은 바우마이스터 교수가 주장한 의지력이 근육과 같이 사용할수록 소모되는(지치는) 자원이며 혈당치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자아고갈(ego depletion) 개념의 진위를 강하게 의심하고 있습니다.

    자아고갈 실험의 재현성 위기에 대해서는 다음 기사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s://newspeppermint.com/2017/03/26/m-will1/
    https://newspeppermint.com/2016/03/14/m-ego1/

    요컨데 의지력은 동기나 습관(환경)과 같은 여러 변수에 영향을 받으며, 낮은 혈당치는 의지력을 발휘하기 위한 역치를 높이지만 그것이 곧 '의지력이 고갈되었다'는 주장의 증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의지력과 동기, 또는 습관의 구분은 사람들에게 유용할지 몰라도 심리학적으로 엄밀한 구분은 아닙니다.

    '의지력의 재발견'이나 '왜 나는 항상 결심만 할까'와 같은 자기조절능력self-regulation, 자제력self-control, 의지력willpower에 대한 실험이나 그 신경과학적 근거를 설명하거나 언급하는 자기계발서들 전부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캐롤 드웩의 성장형 사고나 윌터 미쉘의 마시멜로 테스트, 최근 유행하는 안젤라 더그워스의 그릿을 비롯한 여러 (긍정)심리학자들의 연구는 충분히 통합적인 모델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자제력을 잃고 충동적으로 행동하거나 미래를 평가절하하고 근시안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를 어느 정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 2020.04.02 15:45 신고
      수정/삭제
      새로운 정보 소개 감사드립니다. 같은 과업에 대해서 그날 깨어 있는 동안 무한정 의지력을 같은 정도로 계속 쓸 수 있다거나 습관의 신호에 따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보다 매번 의사결정하는 것이 적어도 같은 정도로 행동에 효과적이라는 실험결과가 나오지 않는 한, 의지력에 기대기만 하지 말고 안정된 습관을 뿌리내리는 구체적인 요령을 확립하라는 책의 주된 논지 중 하나를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된 한도 내에서는 커다란 문제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해당 분야에서 앞으로 확립될 지식의 추이는 상당히 흥미로워 보입니다. 이후 논쟁의 전개를 보고, 책의 표현 중 명백히 부정확하게 되었다고 판단될 부분이 있을 정도가 되면 개정판을 낼 수 있는 기회에 개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9. 권도간
    2020.04.01 05:57
    수정/삭제 댓글
    안녕하세요. 책을 읽거나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사람들이 윤리학, 정치철학적 개념에 대해 오해를 하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다음과 같습니다.

    오해1. <의무론은 결과를 고려하지 않는다. 의무론의 대표자인 칸트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니 결과를 고려하는 이론은 의무론이 아니다.>
    =>사견: 하지만 롤즈같은 학자는 정의론에서 관심을 기울일만한 이론중에 결과를 고려하지 않는 이론은 없다고 합니다. 즉 의무론자로 평가되는 롤즈 또한 결과를 고려하는 것이죠. 그러면 사람들은 혼란에 빠집니다. 롤즈는 의무론인데 왜 결과를 고려하지? 그런데 제 생각에는 결과를 고려하느냐, 아니냐가 핵심쟁점이 아니라 결과에 고려되는 가치에 다른 가치가 종속적이냐 아니냐인것 같습니다.

    오해2. <자유주의는 공공선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공공선을 주장하는 것은 공동체주의의다.>
    =>사견: 그런데 제 생각에는 자유주의도 공공선을 이야기합니다.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를 가르는 핵심은 국가가 좋음을 이유로 개인의 삶에 개입할 수 있느냐 아니냐라는 국가중립성인 것 같습니다.

    문제는 위와 같은 저의 생각은 제가 이책 저책, 또는 변호사님의 이칼럼 저칼럼을 읽으면서 파편적으로 습득한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자신도 위와 같은 생각에 확신이 있다기 보다는 "그런것같다"라는 80%정도의 확신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너의 그런 생각이 옳다는 근거가 뭐냐?"라고 물으면 "그냥 이책 저책에서 읽은 것들이야."라고 피상적으로 답할 수 밖에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가능한가'라는 글에서 드워킨이 말한 것처럼 현대의 자유주의자들은 명확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기술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엇이 자유주의인지에 대하여 잘 정립된 글이나 책들이 잘 없는 듯 합니다. 그래서 자유주의에 대해 잘 정립된 책이 있으면 추천해 주시거나, 아니면 변호사님께서 그런 책을 저술할 생각은 없으신지 여쭤봅니다.
    • 2020.04.02 15:47 신고
      수정/삭제
      제가 제시한 해명으로는 <기본권 제한 심사의 법익 형량>(경인문화사), "가치와 규범의 구별과 기본권 문제의 해결"(법철학 연구) "국가 완전주의 쟁점과 법해석"(법철학 연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의무론과 결과론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다루는 단행본을 집필할 생각은 있습니다. 그러나 빠른 시기에 나오기는 어렵습니다.
  10. 질문돌이
    2020.03.31 00:00
    수정/삭제 댓글
    선생님 안녕하세요.
    궁금한 점이 생겨 이렇게 질문드리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선생님의 글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고 있으며
    최근에는 요약번역이나 논문번역으로 올리는 글까지 읽고 있습니다.
    글을 써주시고 공유해주시는 것에 대해서 정말 깊이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혹시 방통대 로스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최근 한 당이 총선 공약으로 내걸었던데 혹시 알고 계시나요?
    저는 지금 대학 입학을 앞둔 학생인데 방통대 로스쿨이 생긴다면
    직장에 취업하고나서 그 이후에 천천히 방통대 로스쿨을 다니면서 시험을 준비해서
    변호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다양한 업무를 경험한 후
    변호사가 되어서 법적으로 학술적인 글을 쓰면서 노동 쪽에 소송대리도 하는 삶을 살고 싶은데
    방통대 로스쿨이 생긴다면 직장인 수험생에게는 상당히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2020.03.31 09:34 신고
      수정/삭제
      말씀하신 대로 직장인이 법률전문가가 될 수 있는 경로가 하나 늘어날 것입니다. 다만 엄청난 수의 직장인들이 같은 경로를 활용하고 싶어할 것인데 비해 로스쿨제도의 본질상 규모는 100여명 수준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 경로를 자신은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인생계획을 구성하는 것은 합리적인 일은 아닐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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