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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권도간
    2021.04.19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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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님의 기본권 제한심사의 법익형량과 그 외 논문을 읽어가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국가완전주의 쟁점과 법해석'이라는 논문을 보다가 스캔론이 공리주의를 연성 목적론으로 분류한 것을 알았습니다. '공리주의와 같은 연성목적론에서는 사람들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욕구 충족이나 선호 만족과 같은 긍정적인 주관적 마음 상태는 그것이 어떻게 초래되었건 모두 내재적 가치를 갖는 것으로 간주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나 롤즈의 이론을 보면 공리주의를 '개인의 개별성'을 존중하지 않는다라고 하여, '각 개인은 그 자체로 내재적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이 문장의 후문은 저의 해석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공리주의에서 유정적 존재의 마음상태는 내재적 가치를 가지되, 각 개체는 내재적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an interview with professor peter singer'라는 글(구글에 있는 글입니다)을 보던 중 피터 싱어가 '제 생각에 유정적 존재는 내재적 가치를 가진다(for me sentient beings have intrinsic value)'라고 하는 글을 봤습니다.

    그래서 제 이해가 틀린 건지, 아니면 피터 싱어 교수의 입장이 정합적이지 않은건지 생각해보다가 교수님의 의견을 듣고 싶어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2. 익명
    2021.03.10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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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십니까? 선생님께 여쭤보고자 하는 질문이 있어서 이곳에 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데이비드 베너타 교수의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를 읽는 와중에 책날개를 보니 '삶은 왜 의미 있는가' 라는 책을 선생님께서 저술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카뮈의 말을 빌리자면) '삶이란 것이 과연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에 대해 오랜 고민을 해 오고 있기에 저 책의 제목은 굉장히 호기심을 동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던 도중, 이 책에 대한 인터넷 서점 서평을 읽다가 어떤 분이 선생님의 무의미/유의미 논증을 요약해 놓은 것을 보게 되었는데, 저로서는 의문스러운 데가 있어 혹시 선생님의 고견을 구할 수 있을까 싶어 이곳에 실례지만 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http://blog.yes24.com/blog/blogMain.aspx?blogid=svengali&artSeqNo=9826006)

    ● 무의미 논증
    1. 만약 인생이 무의미하다면, 나를 비롯한 인간 존재가 하는 모든 활동은 무의미하다.
    2. 인생은 무의미하다.
    3. 그러므로 나를 비롯한 인간 존재가 하는 모든 활동은 무의미하다.

    ● 유의미 논증
    1. 인생의 구체적인 경험이 삶에 참여하고 실천하는 관점에서 가치가 있고, 그 사람의 선택을 변경하는 이유의 힘이 되어 그 개별적인 경험들이 의미가 있다면, 인생이 무의미하다는 명제는 거짓이다.
    2. 선택을 변경하는 이유의 힘이 되는 구체적인 경험이 존재한다.
    3. 그러므로 인생이 무의미하다는 명제는 거짓이다.

    여기서 제가 궁금한 부분은 자기 자신이 삶을 살면서 겪는 경험들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본인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즉, '가치있는 경험들'이 반드시 존재한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경험'이 존재하는 것은 물론 사실이긴 하지만, 그 경험이 '어떠한가'는 정해져 있지 않으며 이것은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이 내리는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저 유의미 논증대로, 누군가가 자기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그러한 경험을 기쁘게 여긴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삶이 의미있다고 느낄 것입니다. 반면에 자기 자신이 자신의 삶을 가치없다고 여긴다면, 이 경우 이 사람은 자신의 삶이 무의미하다거나 더 이상 지속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제 우견이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인생에는 정해진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만약 인간의 삶에 어떠한 목적이 부여되어 있다면 모든 사람들은 다 그렇게 정해진 대로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다 제각기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관찰됩니다. 따지고 보면 사람의 삶이란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것 그 이하 그 이상도 아니지 않습니까? 따라서 의미는 부여하기 나름인 것 같습니다. 사과를 먹는 용도로 쓸 수도 있고, 장식하는 용도로 쓸 수도 있듯이 삶이 가치있는가 하는 문제는 개인의 자유에 달린 문제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자살은 개인의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2. 사람은 자신의 동의 없이 존재하게 되어진 것이다.
    3. 사는 것은 의무가 아니다.
    4. 따라서 죽을 것인지 살 것인지는 개인의 자유이다.

    1번과 2번은 자명한 것이니 자신있게 주장할 수 있으나, 3번의 경우는 제가 많이 배운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강력하게 주장하지는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사람은 존재당한 것이기 때문에 (만약 부모가 자식을 만들지 않았다면 그 자식은 없었을 것이므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에는 그 사람의 동의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살다 보니 삶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느끼고, 더 이상의 권리가 필요없으니 죽음을 택함으로써 더 이상의 의무도 지지 않겠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죽을 것인지 살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더 나아가 자살이 합리적인 선택인지는 다른 문제겠지만요.

    저는 안락사를 보급화해야 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왜 심각한 병에 걸린 사람은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데, 죽고 싶다는 건강한 사람은 편하게 죽지 못하는 것일까요? 깊은 의문입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가차없는 비판과 수정 부탁드리겠습니다.

    혹시라도 결례가 되는 표현이 있었다면 미리 사과드리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기를 바라겠습니다.
    • 2021.03.22 17:0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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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삶은 왜 의미 있는가>를 직접 읽지 않은 상태에서 내용을 짐작하여 하신 질문에는 답하기 어렵습니다.

      2. 데이비드 베너트의 책을 주의 깊게 읽으셨다면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은 애매한 질문이며, '삶을 지속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와 '삶을 시작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라는 두 질문으로 해석이 가능함을 먼저 짚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베너타는 후자의 질문(삶 시작 가치의 질문)에 대하여 '아니요'라고 답하지만, 그로부터 전자의 질문(삶 지속 가치의 질문)에 대하여 '아니요'가 도출된다거나 아니면 '예든 아니요든 어떻게 판단하여도 이성에 어긋나지 않는다'라는 결론이 도출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3. 삶 지속의 가치에 관하여 고려하여야 하는 사항들은, 개인이 그런 사항을 고려하지 않겠다고 결단하여도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가치 명제와 가치 명제태도는 상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에 데어 화상을 입고 신체적 고통을 겪는 것은 나쁜 것이며, 그 가치 명제를 누군가가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결단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있어서 그 가치 명제가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4. 그러나 첫째로, 또한 개개인에게 있어서 가치에 관한 사정은 워낙 세밀하고 다기하여 상당한 영역에서는 다른 사람이 대신 판단해줄 수 없는 심층적이고 내밀한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심각한 질병으로 인해 깨어 있는 시간의 상당 부분을 고통에 정신이 빼앗기고 나머지 시간의 삶을 살아갈 기능도 많이 훼손되는 경우 삶을 지속할 가치가 있는가에 결론은 그 개인의 기질, 능력, 여건에 따라 차이가 날 것입니다. 또한 둘째로, 가치 명제는 규범 명제를 함축하지 않습니다. 특정한 사상이 참이라고 하여도, 그 사상만을 말하고 듣도록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구체적인 삶에 대하여 삶 지속의 가치가 있다거나 없다고 하는 판단이 설사 (제가 보기에는 특히 문제되는 상황에서는 그 참을 보증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보지만) 참이라고 하여도, 그러한 판단을 당사자에게 부과내지 강요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평등하고 자유로운 규범적 지위에 반하는 일일 것입니다.

      5. 따라서 삶 지속의 가치 판단에 있어서 그것이 그 가치 판단과 실행이 다른 사람의 권리와 의무와 양립가능한 한, 그러한 판단과 실행에 관하여 개인은 주권적 존재의 지위를 가진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권적 존재는 삶의 지속을 중지하는 방식에 있어서 자신에게 가장 우호적인 방식을 선택할 권리도 일응 갖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다만 그러한 방식에 동원되는 수단이 임의로 활용가능하다면 개인의 의사에 반하는 살해나 자살 강요가 일어날 실질적 위험을 제어하기 위한 한도에서 국가가 그 수단에 대한 규제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국가는 그 위험방지에 비례적인 한도를 넘어서서 그 수단을 전면적으로 금지함으로써 위험 방지를 이유로 합리성의 범위 내에 있는 가치 판단에 있어 주권적인 존재가 취할 수 있는 수단 선택의 자율성 자체를 훼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즉 삶의 지속 중지의 수단을 최대한 고통스럽게 만들어 삶의 지속을 강요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네덜란드나 스위스 같은 국가에는 일정한 요건에 해당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적극적 안락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인정하는 법질서와 인정하지 않는 법질서를 비교하자면, 인정하는 법질서가 정당성이 있다고 판단됩니다.

      6. 질문하신 분과 유사한 결론에 이르렀지만, 그 논거와 논거구조가 상이함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질문하신 분의 논증 경로 중 일부는 삶의 개시와 지속을 구분하지 않고 그 전부의 문제가 그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가치 회의주의에서 규범적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치 회의주의는 삶의 개시나 지속 중단에 대한 개인적인 차원에서라 할지라도 진지한 가치 판단의 주장과는 양립불가능합니다. 또한 번호를 붙여서 논증처럼 제시하신 것은 긴밀한 논리적 함축 관계에 있는 진술들을 제시하신 것은 아닙니다.
    • 2021.03.23 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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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성 어린 답변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3. 2021.02.13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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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왜 의미있는가라는 책을 읽고 질문드립니 다. 우선 책 써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무의미함과 무기력함에 빠져있었던 제가 이 책을 읽고 상당히 삶의 기쁨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이 책의 주된 논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실천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가치가 있고 그런 가치가 인도하는 방향에 따라 실천하고 참여할 때 우리는 삶의 의미를 구성할 수 있다.” 이것이 삶은 왜 의미있는가의 주된 논지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의문이 드는 게 있습니다. 내용적 가치에 관한 부분입니다. 진리, 고통의 감소와 쾌락의 향유 및 증대, 진리, 아름다움의 창조 및 공유 등이 내용적 가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런 내용적 가치는 각각의 추론 과정(?)에 맞게 정당화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스승에 대한 존경심 혹은 순종 혹은 따름도 가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의 과정은 이러합니다.우리는 우리 삶의 생애 주기에 따라서 특정한 삶의 과제를 가지게 됩니다. 예를 들면 특정 시기에 그 시기에 꼭 학습해야 하는 과제를 수행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얻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늑대들 무리에서 자라다 인간 사회에 10살이 넘은 나이에 편입해도 언어를 절대 배우지 못했던 늑대인간의 예시를 떠올려 보면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시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의 과제를 이행시켜줄 돌봄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아기 뿐만 아니라 다른 시기에서도 이런 돌봄자 혹은 스승은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청년이 되거나 장년이 되면 특정 분야에 깊이 몰두하게 됩니다. 혹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직업을 가지게 되어서 직업적인 부분에서 전문성을 기르라는 압박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전문적인 부분은 우리 스스로 공부하기보다는 누군가 방향을 이끌어주고 피드백해줄 사람이 있을 때 더 효율적이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부분은 그런 스승이 없다면 아예 접근조차 할 수 없는 매우 전문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프로 축구 선수가 되기 위해서 혼자 축구를 한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한 경기도 못 뛰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는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세계에서 참여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전통 혹은 관습 혹은 스승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선대의 문화적 관습과 전통과 스승 없이 실천을 잘 해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공 상태에서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승에 대한 존경심과 과거의 문화에 대한 존중은 하나의 내용적 가치가 될 수 있고 우리는 이런 내용적 가치를 누리는 선에서 다른 내재적 가치를 누릴 때 다른 가치들을 더 잘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 이 점에 대해서 센터장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진리, 아름다움, 쾌락, 우정, 유대의 형성 모두 스승에 대한 존중과 과거에 대한 존경심을 가진다면 더 잘 누릴 수 이슬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 점에 관해서는 더 탐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혹시 스승에 대한 존경심과 과거의 문화에 대한 존중이 가치가 될 수 있다고 생각이 되시나요? 혹시 제가 제시한 이 잠정적인 가치가 센터장님께서 말한 유대의 형성에 포함되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2021.02.15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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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시된 목록은 검약적으로 제시된 것이며, 완전히 포괄적인 것으로 제시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시된 가치의 목록은 추상적인 본유적 가치의 형태로 제시됨으로써 불필요하게 많은 중복된 논의를 피하도록 하였습니다.
      말씀하신 스승에 대한 존경심과 과거 문화에 대한 존중은, 진리의 음미와 공유, 아름다움의 음미와 공유, 그리고 상호 유대와 애착이라는 인간적 상호작용으로 해명이 가능합니다. 또한 그러한 한에서 가치를 가진다고 하겠습니다. 반면에 과거 문화에 대한 존중이 진리/아름다움의 음미와 공유, 그리고 상호 유대와 애착이라는 인간적 상호작용에 기여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굴곡시킬 경우에는 그것은 가치를 갖지 않을 것입니다.
  4. 질문
    2021.01.30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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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님, 자세한 답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해외 대학에 온라인 과정이 개설되어 있는지는 전혀 몰랐는데 찾아보니 여러 과정들이 있는 것 같아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송구하지만 혹시 아예 새로운 분야로 입문하는 경우 외에, 철학 분과 내에서 새로운 분야를 학습하는 경우에 입문하는 방법에 관하여 질문을 또 드려도 괜찮으실지요.

    예컨대 윤리학을 공부하다가 언어철학으로 관심사가 확장되거나, 칸트 철학을 공부하다가 헤겔 철학을 건드려보고 싶은 경우 어떻게 지식체계를 쌓아나갈 수 있을지 여쭙습니다.
    • 2021.02.04 03:0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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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입문서'라는 제목이 붙은 책을 찾아 읽고 그 뒤에는 참고문헌이나 인용문헌들의 가지치기로 읽는 방법, 2. Standford Encyclopedia 같은 온라인 아카이브 등을 이용해서 관련 문헌들의 논의 맥락상 지도와 위치를 확보한 다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문헌들을 일단 읽히는 것부터 읽어나가는 방법, 3. 연관성이 높은 도서들로 잘 정리가 된 도서관에 가서 코너에서 가장 기본적인 내용들로 꾸며진 것부터 관심이 가는 쟁점들을 전문적으로 다룬 책까지 읽어나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5. 질문
    2021.01.29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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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정 분야에 입문하고자 할 때, 선행 지식이 많지 않은 경우, 어떻게 체계적으로 해당 분야의 기본적인 논점 및 그에 관한 논증들을 학습해나갈 수 있는지에 관하여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예컨대 심화된 탐구를 위하여 기존에 자신이 꾸준히 공부해오던 분야뿐만 아니라 인접 분야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을 보유하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참고할 수 있는 서적으로는 해당 분야의 입문서, 해당 분야의 저명한 학자들의 저작, 관련 논문들 등이 있을텐데 이에 관해 어떠한 순서 및 방법으로 접근해야 편향이 없으면서도 낭비되는 시간 없이 해당 분야에 관한 체계적 지식을 얻어갈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입문자의 관점에서는 해당 분야에 관해 축적된 막대한 연구성과들에 대하여 어느 지점에서부터 접근해나가야 하는지에 관해 곤란을 겪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이러한 질문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혹시 교수님께서 이러한 입문과정과 관련한 전략이나 지식을 공유해 주신다면 탐구과정을 영위해 나가는 데 있어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2021.01.29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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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비되는 시간이 아예 없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느 정도 인접 학문에 대한 지식이 쌓이고 나서야, 자신의 주력 분야와 연결해서 풀 수 있는 문제들이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추천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식은 다른 분야의 학부 커리큘럼과 그 순서를 참조하라는 것입니다.
      대학의 학부 과목의 학년별 커리큘럼 순서를 보고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과목들을 수학한다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만일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개설된 전공 학과 중에서 자신이 배우고자 하는 인접 분야가 있다면 그 전공 커리큘럼을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안이 될 것입니다. 혼자서 꾸준하게 진도나가는 습관에 보조적인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방송통신대학교에 학생으로 등록하는 방법도 있고, 스스로 스케줄을 짜고 진행해나가는 것이 익숙하다면 개별 과목별로 수강료를 내고 교과서와 함께 그 과목을 수강만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 외 학교들의 경우에도 커리큘럼을 찾아보고, 자기 계획을 세워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일단 과목들을 특정하고 그 과목의 교과서를 찾고, 순서를 세워놓으면,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필요한 강의를 그때그때 모아서 진행해나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영어로 새로운 과목의 내용을 흡수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면 해외의 많은 대학들이 온라인 과정을 개설하고 있으므로 이를 찾아보는 것도 한 방법일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 방법은 배우고자 하는 분야를 전공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자신이 고민하는 주제를 이야기하고, 그 주제에 맞는 커리큘럼을 짜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6. 권도간
    2020.12.11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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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교육감이 평준화 교육을 강조하였지만 정작 본인의 자녀는 특목고에 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평준화는 이상이고, 현실의 여건상 특목고에 보낼 수 밖에 없었다고라는 변명(또는 변론)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또한, 과거 운동권이었던 사람이 공적으로 미국반대를 주장하면서, 정작 본인의 자녀는 서구권(유럽)으로 유학을 보낸 일이 있습니다. 뭐 미국은 아니지 않냐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런 사람 중 자녀를 미국에 유학 보낸 사람들도 분명 있겠지요. 또한 미국 유학 후 국내에서 좋은 자리에 취직을 할 수 있겠지요. 반미가 한국에서 미국의 지배를 반대하는 것이지 미국에 유학가지 말라는 건 아니지 않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미국 유학을 개인적인 출세의 도구로 가는걸 그 사람들이 인정했을지는 의문입니다. 반미 사례가 좀 애매하다면, 위의 교육감 사례로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이런 예는 찾아보면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공적으로 어떤 주장(A라는 주장)을 하지만, 현실의 여건상 A에 반하는 행동을 개인적으로 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의 여건상 어쩔 수없는 것이니 A라는 주장을 하는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하는 데 있어서 비판점으로 작용할 수 없다"라는 견해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해야하는가, 그리고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에 대해서 어떤 윤리적 평가가 가능할까입니다. 즉 저는 A라는 주장의 당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위와 같은 견해와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에 대한 윤리적 평가를 묻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해결할려고 했으나, 주위 친구들에게 의견을 물어보면 이런 논의를 별로 하고 싶어하지 않아하고, 그냥 가벼운 얘기들만 하려고 하여 별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해서 물어보게되었습니다.
    • 2020.12.17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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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선
      Margaret Kohn, “If you are an egalitarian, why do you send your children to private school?”, Dissent, Vol. 58, No. 2, 2011을 읽고 이를 참조할 수 있겠습니다.
      마가렛은 미국에서 ‘학교제도는 학생들에게 평등한 기회를 부여하고 다양성에 대한 접촉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규범적 주장을 하는 평등주의자(egalitarian)가 자신의 자녀를 사립학교를 보내는 행위가 수행적 모순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일부 논자들은 규범주장과 함께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은 그러한 부모들을 평등주의자가 아닌 사람으로 만들며, 평등주의적 규범주장 자체를 무효로 만든다고 간단히 일축합니다.
      그러나 Margaret은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원래 주장이 평등주의적 규범주장이 아닌 것으로 되지는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이 문제는 부모들이 한편으로는 자신의 자녀의 복지를 최대한 보살피고 싶은 사적인 이해관심, 그리고 배경이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 하는 사회적 이해관심을 가지면서도, 교육기관이 평등한 기회와 다양성을 통해 공화적 시민성을 기르는 공간이 되기를 원하는 공적 관심에서 나오는 책무 사이에서 개인이 갈등을 느낄 수 있는 사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긴장을 적절히 해소하는 공적 해법으로, 평등한 기회와 시민적 유대에 기여하는 범위에서 공적 재정으로 지원되는 학교 선택 프로그램을 고안해볼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2.
      사실 이 문제는 여러가지 쟁점으로 분설할 수 있는 복합 문제입니다.

      따라서 그 문제를 구조와 유형에 따라 보다 단순한 문제와 쟁점으로 분석하지 않고 곧바로 일반적 질문을 던지고 일반적 답변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3.
      이에 관해서 분설하여 제기할 수 있는 쟁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어떤 사회정책적 주장행위 자체의 타당성과 그 주장을 하는 사람에 대한 도덕적 평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개인적 선택과 일관된 사회정책적 주장을 한다고 해서 그 사회정책이 타당한 것이 보증되지도 않으며, 자신의 개인적 선택과 비일관된 사회정책적 주장을 한다고 해서 그 사회정책적 주장 자체가 틀린 것이 되는 것도 아니다. 사회정책적 주장은 그 자체로 그것이 권리를 존중하며 고통을 줄이고 번영을 늘이는 것인지 아니면 권리를 침해하거나 고통을 늘이거나 번영을 줄이는 것인지 고유한 평가 기준에 따라 평가해야 한다.) [이는 행위의 도덕적 허부에 대한 평가와 행위자의 도덕적 인격에 대한 평가가 별개의 것이라는 토머스 스캔론의 <도덕의 차원들>에서의 일반적 논지의 한 예에 해당함]

      (2) 어떤 사회정책은 사회적 조정기제가 확립되기 전에는 그 사회정책이 지향하는 목표에 개인이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방도는 없는 유형에 속한다. 다른 사회정책은 사회적 조정기제가 확립되기 전에도 그 사회정책이 지향하는 목표에 개인이 그보다는 효과가 덜하지만 그래도 유의미한 정도로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방도가 있는 유형에 속한다.
      예를 들어 능력과 지식을 평가하는 대안적 제도가 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기존의 제도를 통해 자신의 능력과 지식을 최대한 확인 받는 것은 전자 유형에 속한다. 반면에 복지제도를 통해 소득이전을 하는 제도가 공적으로 성립되어 있지 않더라도 적어도 개인의 기부를 통해 세금으로 납부할 만큼의 소득을 이전할 수 있는 방도가 있으므로, 자비(beneficience)의 실현에 관한 사회정책적 주장은 후자에 속한다.

      (3) 외견상 비일관적인 문제는, 토머스 네이글이 그의 저서 <Equality and Partiality>에서 짚은 집단성의 관점(the standpoint of the collectivity)와 개인의 관점(the standpoint of the individual)의 관점이 도덕의 지평에 모두 포함된다는 점을 제대로 감안하지 못하고 전자(집단성의 관점)만을 고려하여 내린 잘못된 평가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모든 아이들의 삶이 동등하게 소중하다는 점을 인식하는 이가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아이가 기뻐할 만한 선물을 사주고 자신의 아이에게만 이야기그림책을 읽어주는 편애(partiality)의 실천은 모든 아이들에게 최대한 공정한 교육의 조건을 마련해주자는 주장과 직설적으로 비일관되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의 삶이 소중하다는 점을 인식하는 이가 있다고 하고 세계적 수준의 분배 정의를 주창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술에 대한 자신의 취향을 계발하는 데 얼마간의 잉여(그 잉여는 세계의 궁핍한 사람들에게 추가로 소용될 수 있는 잉여임)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세계적 수준의 분배 정의 주창과 직설적으로 비일관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결국 자비의 원리(the principle of beneficience)의 한계에 관한 문제이다. 이것은 비이상이론(non-ideal theory)에서 다루어야 할 질문인데, 이상적 질서 하에서라면 모든 구성원들이 똑같이 지게 될 부담을 지금 현실 세계에서는 극히 일부만 지고 있는 경우에, 개인에게 도덕이 요구하는 부담은 어느 정도인가 하는 문제를 풀 것을 요구한다. 이에 관해서는 Liam B. Murphy, “Institutions and the Demands of Justice”, Philosophy & Public Affairs, Vol. 27, No. 4 (Autumn, 1998), pp. 251-291와 함께 Liam B. Murphy, Moral Demands in Nonideal Theory, Oxford University Press, 2000를 참조하면 유용하다. 전자의 논문은 시민교육센터에 번역되어 있다.

  7. Chang jo
    2020.11.23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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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십니까? 이 사이트에서 '어떤 사람들은 윤리적인 주장을 하거나 그런 체제를 제안할 때, 은근슬쩍 자신이 어떤 체계의 최상위, 절대자적 관점에 있는 경우만 가정한다' 와 비슷한 내용이 있는 글을 본 기억이 있는데, 막상 이 글을 다시 제대로 읽어보기 위해 찾아보니까 어떤 글인지 찾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글을 대강 읽었기 때문에 내용 자체를 잘못 기억했을 가능성이나, 심지어는 전혀 다른 곳에서 본 글을 여기서 찾는 것일수도 있지만, 혹 유사한 내용의 글이 있다면 어떤 글인지 알려 줄 수 있으신지요?
    • 2020.11.24 09:36
      수정/삭제
      https://www.civiledu.org/1205

      혹은 홈페이지에서 '총독'으로 검색해 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 2020.11.25 21:19
      수정/삭제
      해당 내용은 아마 보증되지 않은 메타입지에 관한 반박일텐데, 학술지에 출간한 논문의 일부 내용으로 포함되어서 삭제하였습니다.
      해당 논문은 다음 링크로 들어가서 다운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kalp.kr/bbs/board.php?bo_table=sub4_2&wr_id=591&page=0
  8. 파란연꽃
    2020.11.10 16:49
    수정/삭제 댓글
    안녕하세요 교수님 공리주의 도덕철학자 조슈아 그린의 롤즈의 정의론을 비판한 글을 읽고 난 뒤에 반박이 가능한 부분들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롤즈 전문가이신 교수님이 비판문에 대해 어느 부분이 잘못된 추론을 하고 있거나 이론적으로 오류가 있는지 도와주시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전문은 밑에 첨부하겠습니다.



    롤즈 자신과 그의 업적에 대해 경탄할 부분이 많긴 하지만, 나는 그의 핵심 논증이 본질적으로 합리화라고 생각한다. 즉 그의 논증은 그가 직관적으로 선호하고 공리주의와 양립하지 않는다고 착각하는, 실제적이고 도덕적인 결론들을 제1원리들로부터 도출하려는 시도이다. 롤즈의 주요 논증은 그의 저서 <정의론>의 1, 2, 3장에서 전개되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공리주의는 두 가지 매우 일반적인 도덕적 견해에서 출발한다. 첫째로 행복은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이며 최대화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도덕은 공평해야 한다. 본질적으로 롤즈는 공평성 가정을 받아들이는 반면에 행복이 궁극적으로 중요하다는 가정은 받아들이지를 않는다. 그는 ‘행복이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가정을 ‘선택이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가정으로 대체한다. 그러므로 롤스에게 사회를 조직하기 위한 최선의 원리들은 사람들이 공평하게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선택하게 될 원리들이다. 이것은 칸트와 존 로크의 철학에 뿌리를 둔 훌륭한 사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들이 공평하게 선택하야 하는 상황에서 무엇을 선택할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롤즈는 한 가지 사고실험을 구성한다. 그는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선택을 하기가 불가능한, 이른바 ‘원초적 입장’이라는 상황을 상정한 뒤에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선택할까라는 물음을 던진다. 이 원초적 입장에서 노골적으로 이기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불가능한 까닭은 사람들ㅇ 무지의 장막 뒤에서 선택하기 때문이다. 즉 원초적 입장에 놓인 당사자들은 그들이 속하게 될 인종, 성별, 민속적 배경, 사회적 위치, 경제적 지위 그리고 그들이 타고날 재능의 종류와 정도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그들의 사회가 어떻게 조직될 것인지에 관해 협상해야만 한다.
    따라서 협상자들에게는 각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편향된 합의를 이끌어 내는 데 동원될 수 있는 모든 정보가 차단되어 있다. 여기서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은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선택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들은 무지의 장막 뒤에서 선택하므로 그들이 선택하는 사회 구조는 롤즈에 따르면 필연적으로 공정하고 정의로울 것이다. 무지의 장막 뒤에서 사회 구조에 대해 합의하는 것은 케이크 한 조각을 분배할 때 내가 나누고 네가 고르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이 경우에 공정성은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의 선의가 아니라 결정 절차에서 비롯한다.
    편향되지 않은 이기적 선택을 사회적 선택의 모델로 삼는 이 핵심 아이디어는 롤즈와 무관하게, 그리고 그보다 약간 이른 시점에 헝가리 출신의 경제학자 존 허르사니(john harsanyi)에 의해 개발되었다.(1953, 1955) 나중에 게임 이론에 기여한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허르사니는 롤즈와 달리 자신이 고안한 원초적 입장을 공리주의의 합리적 기초로 간주했다. 그는 사람들이 장차 그들의 사회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 사회의 조직 원리를 선택하는 상황을 상상했는데, 그러나 이때 사람들은 자신이 각각의 위치를 차지할 확률이 모두 같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가정 아래에서 만약 사람들이 공리를 최대화를 꾀하고 각자가 자신의 행복을 최대화하려고 한다면 그들은 공리를 최대화하도록 조직된 사회를, 즉 전체적으로 최대한 행복한 사회를 선택할 것이다. 이것은 인구의 크기가 고정되어 있다고 가정할 때 행복의 전체 양과 평균 양 모두를 최대화한다.
    그러나 롤즈는 원초적 입장에 있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선택할 사회의 종류에 대해 매우 다른 결론을 주장했다. 롤즈에 따르면 원초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공리적 원리 대신에 맥시민(maximin)원리(게임 이론에서 자신의 최소 이득을 최대화하는 전략)에 의해 조직된 사회를 선택할 것이다. 맥시민 원리는 오로지 사회에서 가장 못사는 사람의 지위를 토대로 여러 사회의 순위를 매긴다. 이 원리에 따르면 사람들이 어떤 사회 조직을 다른 사회 조직보다 선호하는 것은 각각의 조직 안에서 벌어질 최악의 시나리오에 전적으로 근거한다. 그러나 롤즈는 이것이 일반적으로는 의사결정의 좋은 규칙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는데, 이 점은 다음의 예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당신이 다음과 같은 특이한 방식으로 자동차를 구입한다고 상상해보라. 우선 복권 한 장을 사야 한다. 그러면 그 복권에 따라 당신은 1000대의 자동차 가운데서 추첨을 통해 무작위로 선정된 자동차 한 대를 갖게 된다. 복권 A는 1000대의 2류 자동차들로 구성된 추첨으로 이어진다. 1에서 10까지 점수를 매기면 이 자동차들은 모두 4점짜리이다. 당신이 복권 A를 사면, 당신은 이 차들 중 한 대를 갖게 된다. 복권 B도 1000대의 자동차들로 구성된 추첨으로 이어진다. 이 추첨에는 완벽한 10점짜리 자동차가 999대 포함되어 있으며 나머지 한 대는 3점짜리이다. 따라서 복권 B를 살 경우에 당신이 꿈에 그리던 자동차를 갖게 될 확률은 99.9퍼센트인 반면에, 그럭저럭 쓸 만하지만 나쁜 자동차를 갖게 될 확률은 0.1퍼센트이다. 이때 나쁜 자동차는 복권 A를 구입하면 확실히 갖게 될 자동차보다 약간 더 나쁘다.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 당연히 복권 B를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맥시민 규칙에 따르면 당신은 복권 A를 선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복권 A를 샀을 때 최악의 시나리오가 복권 B를 샀을 때 최악의 시나리오보다 좋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 영리한 방법이 아님에 틀림없다.
    맥시민 규칙의 문제는 이것이 최대한 위험을 회피한다는 점이다. 롤즈는 이런 위험 회피가 일반적으로 적절치 않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사회의 조직 원리를 선택할 때는 이것이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롤즈는 공리적 사회의 삶이 “용인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상상한다. 만약 당신이 공리적 사회 안으로 무작위로 떨어진다면, 결국 노예가 될 수도 있다고 롤즈는 경고한다. 그리고 이런 결과는 너무 나쁘기 떄문에 아무도 이런 위험을 감수하는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에 무지의 장막 뒤에서 선택하는 사람들은 맥시민 규칙을 사용해 가장 좋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진 사회를 선호할 것이다.
    롤즈는 그가 “기본적 자유들(basic liberties)”이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해 이런 논증을 펼친다. 원초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자유의 분배를 공리적 계산에 맡기는 대신에 “기본적 자유들”을 직접적으로 보증하는 원리를 선택할 것이다. 그는 교육의 기회와 경제적 기회, 경제적 결과에 관해 논의할 때도 똑같은 종류의 논증을 펼친다. 그에 따르면 이 경우에도 공리적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너무 나쁘기 때문에 그런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없다.
    첫째로 롤즈의 형식적인 논증은 앞 장에서 기술한 것처럼 부와 공리를 혼동하는 오류에 기초해 있다. 더 구체적으로 롤즈는 원초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과 똑같은 오류를 범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다시 말하지만 맥시민 규칙을 선호하는 이유는 공리적 사회에서 최악의 시나리오가 용인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富)주의적 사회에서 최악의 시나리오가 어째서 용인될 수 없는지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국내총생산의 최대화는 일부 억압을 필요로 할지 모른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세계를 최대한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현실적으로 억압을 필요로 할지 모른다는 생각은 설득력이 없다. 예컨대 노예가 됨으로써 겪는 고통이 노예를 소유함으로써 생기는 이익보다 작으려면 인간의 심성이 완전히 재설계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당신은 반평생 동안 노예를 소유하기 위해 나머지 반평생 동안 노예로 지낼 의향이 있는가? 이것을 결정 내리기가 쉽지 않은 상황을 현실에서 상상할 수 있는가?
    이것이 롤즈의 첫 번째 오류이다. 나는 이것이 합리화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그저 하나의 오류이다. 그러나 이제 롤즈가 옳다고 가정해보자. 즉 최대로 행복한 사회에서의 삶이 몇몇 사람들에게는 “용인될 수 없는”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설령 이렇게 그럴듯하지 않은 가정을 하더라도 롤즈의 논증은 여전히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롤즈의 맥시민 규칙은 모든 사회 조직을 오로지 최악의 시나리오를 토대로 해서만, 즉 해당 사회에서 가장 못사는 사람의 삶의 질을 토대로 해서만 평가한다. 다시 말해 롤즈는 용인될 수 없는 결과가 포함되어 있는 경우 사람들이 최대한 위험을 회피하려 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허르사니(1953, 1955)나 그밖의 사람들이 지적한 것처럼 이것은 결코 이치에 맞는 가정이 아니다. 당신이 차에 올라탈 때마다 당신이 자동차 사고로 처참하게 불구가 될 위험은 증가한다. 이것은 우리 중의 대다수에게 롤즈의 의미에서 “용인될 수 없는”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심야에 아이스크림 한 개를 사러 가는 일 같은 사소한 것들을 위해 이런 위험을 감수하곤 한다. 당신은 우리가 그냥 집에 머물러도 처참하게 불구가 될 수 있다고 반박할지 모른다. 예컨대 지붕이 무너지면 그럴 것이다. 이렇게 따지면 당신이 아이스크림을 사러 나가든 아니면 집에 머물든 최악의 시나리오는 실제로 똑같다. 좋다. 그러나 그렇다면 당신은 똑같은 논리를 롤즈의 주장에도 적용해야 한다. 삶은 맥시민에 의해 조직된 사회에서도 “용인될 수 없는” 것이 될 수 있다. 당신의 지붕은 그런 사회에서도 무너질 수 있다.
    위험 회피를 촉진하기 위해 롤즈는 허르사니가 묘사했던 원초적 입장을 불필요하게 변형시킨다. 허르사니가 묘사한 상황에서 사람들을 당신도 기억하겠듯이 해당 사회에서 자신이 각각의 위치를 차지할 확률이 모두 같다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선택한다. 그러나 롤즈는 상황을 조금 다르게 묘사한다. 그는 원초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가능한 각종 결과들과 그것들의 확률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갖고 있지 않다고, 따라서 위험률에 관해 완전한 무지 상태에 있다고 가정한다. 롤즈의 주장에 따르면 이 최대 무지의 상태에서 원초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고도로 위험을 꺼릴 것이고 그래야만 한다. “무슨 일이 닥칠지 어떻게 아는가!” 기술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롤즈는 원초적 입장을 단순히 불확실한 상황이라기보다 애매한 상황으로 만들고 있다.
    그렇다면 롤즈는 왜 원초적 입장에서 사람들이 내리는 결정을 최대한 애매하게 만드는가? 어째서 롤즈는 허르사니처럼 원초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가능한 각종 사회적 위치들을 알고 있으며 나아가 그것들 중 하나에 속하게 될 확률이 모두 같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단순히 가정하지 않는가? 롤즈는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내가 이해하는 한 그의 논증은 완전히 순환적이다.
    그는 원초적 입장을 사람들이 관련 확률들에 관한 정보를 전혀 갖지 않은 상황으로 정의한다. 그런 다음에 그는 이 가정을 바탕으로 사람들이 확률 추정치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실제로 관련 확률들을 알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155p, 168~169p) 허르사니가 지적한 것처럼, 설령 완전한 무지를 가정한다고 쳐도 모든 결과들의 확률이 같다는 가정은 최악의 결과가 일어날 확률이 사실상 100퍼센트라는 가정(맥시민 규칙에 내장된 가정)보다 훨씬 더 합리적으로 옹호될 수 있다. 이것을 제쳐놓아도 상관없다.
    무엇보다도 어째서 롤즈는 원초적 입장을 결과의 확률을 알 수 없는 상황으로 정의해야 하는가? 원초적 입장의 요점은 선택을 제약함으로써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이 사실상 공평토록 처신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공평하다는 것은 모든 개인들의 이익에 똑같은 비중을 두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에서 자신이 각각의 위치를 차지할 확률이 모두 같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황을 원초적 입장으로 정의한다면 완벽히 이치에 맞는다. 이것은 사람들의 선택을 어떤 식으로도 편향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공평성의 이상을 가장 명확하게 구현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롤즈가 원초적 입장의 확률 구조를 최대한 애매하게 만드는 이유는 정의, 공정성, 공평성 등과 아무 상관이 없다. 내가 이해하는 한 이것은 그의 직관적인 정답을 더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한 임시변통일 뿐이다. 정치철학의 영역으로 발을 들여놓을 때 롤즈에게는 위험 회피라는 극단적인 이론을 채택할 특별한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의론을 전개하기 위한 도구로서 매우 훌륭한 아이디어인 원초적 입장을 끌어들인 뒤에 갑자기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는 제 1원리의 문제에 해당하는 우선권이 최악의 결과를 맞은 사람들에게 부여되는 사회를 원한다. 그러나 그의 사고실험의 논리를 통해 걸러진 이런 바람은 롤즈의 가설적인 이기적 의사결정자들이 이기적인 선택을 하면서 최악의 결과에 극도로 집착할 것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극도로 위험을 꺼려야만 한다. 그리고 그가 바라는 결과를 어기 위해 롤즈는 그의 사고실험에 쓸데없는 애매함을 덧칠함으로써 극단적인 위험 회피가 더 그럴듯해 보이게 만들었다.
    칸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런 종류의 속임수는 롤즈가 정말로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그는 제 1원리에서 출발해 그것을 따라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논증의 종착 지점이 어디인지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그러므로 롤즈가 수행한 선의의 합리화 작업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보여준다. 첫째로 이것은 매우 똑똑한 사람들이 추론을 통해 자신의 도덕적 감정을 정당화하려고 마음먹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예이다. 둘째로 이것은 아마도 허르사니가 옳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만약 당신이 원초적 입장에 대한 사고실험을 적절하게 수행한다면, 즉 부와 공리를 혼동하지 않고, 사람들이 극도로 위험을 꺼린다고 가정하지 않으며, 가설적 결정 상황을 쓸데없이 애매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이 사고실험을 수행한다면 아마도 공리적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다시 말해 만약 당신이 행복 가정을 선택 선호 가정으로 대체한다면, 당신은 공리주의에 도달할 것이다. 왜냐하면 공평한 사람들을 이데올로기적 편향이 없다면 자신의 행복에 대한 정망을 최대화하는 사회를 자연스럽게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 2020.11.25 21:10
      수정/삭제
      이어서 달 답변과 아울러 아래 참고문헌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
      [발췌번역] 스캔론 "나는 어떤 식으로 칸트주의자가 아닌가"
      https://civiledu.tistory.com/1417

      2. [번역] 스캔론, "롤즈의 정의론"
      https://www.civiledu.org/532

      3. [번역] 토머스 네이글 <은폐와 노출> 제13장 "스캔론의 도덕 이론"
      https://www.civiledu.org/1537

      4. [조립물] 롤즈의 정의론은 원초적 입장 없이 더 잘 이해될 수 있는가
      카테고리 없음
      https://civiledu.tistory.com/1413

      5. 아울러 제가 번역한 원고로 2020년 말이나 2020년 1월에 서울대출판부에서 출간될 토머스 스캔론의 <관용의 어려움>도 참조하시면 해명을 더 정확히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 2020.11.25 21:18
      수정/삭제
      1. 조슈아 그린 비판의 목적론적 전형성과 큰 두 가지 오류.
      그린의 비판은 롤즈에 대한 목적론자의 전형적인 오독을 보여주고 있다. 그 오독의 원천이 된 전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어떤 정의의 원칙이건 모종의 상정되거나 융합된 1인칭 관점에서 합리적으로 채택할 수 있을 원칙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정의의 원칙 선택의 근거는 어떤 가치를 최대화하는 것 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린은 롤즈의 원초적 입장의 계약 당사자인 대표들이 모종의 합리화 전략을 추구하는 1인칭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복수의 주체가 그 근본적 관계에 비추어 ‘합의’와 ‘상호 수락’을 한다는 계약주의의 핵심 성격은 사라지고 비용-편익을 계산하는 관점만이 남도록 롤즈의 이론을 왜곡한다.
      다음으로 그린은 롤즈가 ‘행복’ 대신 ‘선택의 가치’를 최대화한다고 본다. 그러나 롤즈는 그런 말은 한 적도 없으며 어떤 모종의 가치, 즉 좋음 최대화하는 것이 정의의 원칙의 목표로 삼는 것은 틀렸다고 명시적으로 말했다. 정의의 원칙은 각자가 좋음을 추구할 수 있는 근본적 지위를 정해주는 원칙이지, 좋음의 추구를 위한 수단적 원칙이 아니다.

      2. 그린이 롤즈를 이렇게 곡해하여 ‘선택의 가치’ 최대화를 위한 ‘무지의 베일’을 다루면서 계속해서 1인칭 관점의 선택의 예를 드는 것은 따라서 애초 범한 오류의 연장에 불과하다. 그런 오류 속에서 하는 어떤 논증도 롤즈의 이론을 반박하지 못한다.

      3. 롤즈의 원초적 입장은 무지의 베일이 전부가 아니다. (물론 선택을 가치를 최대화한다는 당사자의 동기는 애초에 원초적 입장에 의해 배척된다.)

      원초적 입장은 계약주의적 사유의 근본 원칙과 여건을 반영하는 여러 가지 제약틀로 구성된 복합적인 계약 당사자들의 처지이다.

      4. 롤즈의 정의이론은 정의의 역할에 비추어 몇 가지 부인할 수 없는 기초적 이념들과 관념들에 입각하여 구성의 절차를 통해 정의의 원칙들을 도출하는 핵심 구조를 갖는다. 그러므로 롤즈의 계약주의의 중요한 특성은 단지 가상적 계약 장치를 사용한다는 점 및 그 계약 장치의 표면적 특성이 아니라, 이 구성 절차가 발 딛고 있는 기초적 이념들과 관념들이다.

  9. 권도간
    2020.11.03 15:54
    수정/삭제 댓글
    선불교의 선사처럼, 좋은 질문으로 인해 몇가지 찾아봤습니다. 교수님께서 쓰신 '기본권 제한심사의 법익형량'이라는 책의 22-23쪽에 있는 내용을 참조했습니다. '주관적인 것은 개인의 심적 상태에 따라 달리 파악될 가능성이 있는 것', '객관적인 것은 이성적 존재들이 동일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사이트에 있는 글, '윤리학의 분류 개념과 탐구의 출발점이 되는 지도'라는 글도 참고하여, 도덕판단은 (관점설정 불가피성 전제에 따라) 자유롭고 평등한 복수의 주체들의 관계를 왜곡시키는가 아닌가의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이성적 존재들에게 동일하게 파악될 수 있다(즉, 객관적이다)라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감사합니다.
    • 2020.11.25 22:15 신고
      수정/삭제
      잘 사유하셨습니다.
      좀 더 세분화된 해명으로는
      https://www.civiledu.org/1538
      를 참조하시면 되겠습니다.
  10. 권도간
    2020.11.02 13:19
    수정/삭제 댓글
    안녕하십니까. 윤리학을 공부하다보니 이 학문이 참으로 어렵다고 생각됩니다.공리(Axiom)나 정의에서 시작하는 수학과 달리, 또 엄밀한 정의와 실증적 규범에서 시작하는 법학과도 달리, 학문의 기본에 대한 합의도 없는 상탱에서 이론의 건축을 하려고 하니 여로모로 혼란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최근, '민주주의는 가능한가'라는 책을 읽어보며 윤리학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데, 이 책에서 드워킨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사는 것은 '객관적 가치'를 가진다고 합니다. 이 사이트의 다른 글에서 롤즈의 구성주의적 입장도 '객관주의'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의 견해에서, 규범과 가치에 객관적인 가치라는게 있을 수 있을까요? 객관적 가치라 하면, 논리실증주의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실적으로 검증가능하거나 논리적 참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견해인것 같습니다.(드워킨은 규범이나 가치에 객관성이 있다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견해라고 하지만 말입니다.)

    구성주의 또한 그 구성에 합의하는 사람들 내에서 객관적 가치를 가질지 모르지만, 그 구성에 합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객관적 가치를 가진다고 할 수 있을까요?

    과문(寡聞)한 사람이라 이렇게 질문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드워킨의 '믿는 것이 낫다'라는 논문을 여기서 다운받아 읽으려고 시도하다 몇번 실패하였지만,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되어 다시금 읽어보려고 합니다.
    • 2020.11.02 17:4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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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관해서 사고가 정리되지 않는다면 사유할 때 사용하는 기본 개념이 정리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음 두 질문에 먼저 답을 논증해보시기 바랍니다.

      1. 주관적인 것은 무엇이고 객관적인 것은 어떻게 정의됩니까? (이 질문에 예를 들어 답하지 말고 그 자체의 독립적인 정확한 정의를 시도해보시기 바랍니다. 검증할 수 있는 것이 객관적이다라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예를 제시한 것입니다. 제한적인 예를 거론하고서 그것을 어떤 개념의 정의로 착각한다면, 당연히 그 개념은 예로 거론된 것에 한정되는 것처럼 생각될 것입니다. )

      2. 위 1의 정의를 기반으로 할 때 논리법칙은 왜 객관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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