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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허당학생
    2019.08.18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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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에릭 올린 라이트의 『리얼 유토피아』, 권화현 옮김, 들녘 2012, 44-51쪽을 읽다가 의문이 생겼습니다. 어떤 사회가, 모든 이들이 번영(flourishing)할 기회를 누리게 하기 위해 모두에게 평등한 접근권을 제공하고자 할 때 맞닥뜨릴 수 있는 문제에 대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질문을 드릴 수 있을까요?

    질문을 구체화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라이트는 정의에 대한 "급진 민주평등주의적" 이해는, '사회정의'라는 다음과 같은 규범적 원칙에 근거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정의로운 사회에서, 모든 사람은 발달하고 번성한 삶을 사는 데 필요한 물질적, 사회적 수단에 대해 대체로 평등한 접근권을 가질 것이다."(44쪽)

    그러한 원칙을 받아들였을 때 다음과 같은 사항이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1) 즉 "번영에 "필요한 수단"은 사람들마다 다르다"(48쪽)는 것입니다. 그리고 번영을 위해 재능을 개발하는 데에 "이용될 수 있는 자원에 예산 제약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재능 개발 수단에 평등하게 접근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51쪽)입니다. 이를테면 문학을 열심히 읽고 쓰는 것을 번성하는 삶으로 생각하는 영희와 승마 등 즐기는 데에 자원이 많이 투자될 수밖에 없는 스포츠에 집중하는 것을 번성하는 삶으로 생각하는 철수가 있다고 할 때, 자원에 제약이 있는 사회에서는 철수 같은 이들에게 재능을 개발하는 데에 있어 다른 이들이 누리는 것만큼의 개발 수단을 제공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2) 다른 문제로 "어떤 재능은 다른 재능보다 인간의 번영을 위한 사회적, 물질적 조건을 창조하는 데 더 많이 공헌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재능은 다양한 인센티브를 통해 다른 종류의 재능보다 더 격려를 받아야 하는가?"(50쪽)가 책에서 제시됩니다.

    개발 비용이 큰 재능에 대한 문제는 어떻게 해결될 수 있는지 (혹은, 일견 보기에 불평등해 보이는 접근권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다룬 글은 없을까요? 언젠가 우연히 읽은 것 같기도 한데, 평소에 관심을 가지던 주제가 아니어서 검색해도 결과가 마땅하지 않아 질문을 남겨 봅니다!


  2. 익명의 질문자
    2019.08.08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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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 제가 삶은 왜 의미있는가를 읽고 반박겸 질문을 드리고싶습니다. 가능하실까요? 가능하다고 댓글 남겨주시면 제가civiledulee@gmail.com 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3. 대학원생
    2019.07.11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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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 안녕하세요?

    선생님 글로부터 공부하는데 정말 많은 도움을 얻고 있는 박사과정 학생입니다. 특히 <단순화의 기예>와 최근 올려주신 작독운향 으로부터 많은 용기를 얻고 또 실질적인 조언을 받아 매일매일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문득 선생님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는 궁금증이 들어 다시 여기에 와서 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제가 전공하고 있는 사회과학 분야는 논문의 양과 질을 모두 중시하는 실적 압박이 심한편입니다. 특히 학계에서 자리를 잡으려면 졸업하기 전에 박사과정 학생으로서 써야하는 SSCI급 논문 몇편이라든가 하는 양의 최소기준이 자리하고 있기도 합니다 (다다익선이기는 하지만요..). 국내에서 공부하며 여러가지로 많은 제약을 느끼지만, 더디지만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는 영어논문이 이미 유사한, 사실 그보다 훨씬 더 진일보한 아이디어와 세련된 방법론으로 쏟아져나오고 있는 해외 논문들을 볼때면.. 사실 논문 쓰는데 힘이 많이 빠지고 무력감이 듭니다. 학계의 변방인 한국에서 내가 이리 애써서 겨우겨우 논문을 하나 써낸들 그때는 이미 뒤쳐진 논문이겠구나, 하는 뭐 그런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합니다. 규범학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선생님도 한국에서 공부하시는 입장에서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공부하시는지 궁금합니다.
    • 2019.07.15 19:3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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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구를 하는 사람의 위치가 탐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몇 가지 요소들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i) 어떤 전폭적 지원이 없다면 구할 수 없는 고가의 실험장비가 필요하다. (ii) 어떤 전폭적 지원이 없다면 수행할 수 없는 조사의 재원이 필요하다. (iii) 어떤 종류의 자료를 얻기 위해 필수적인 행정적 지원이 필요하다. (iv) 문제 해결에 탁월한 기량과 아이디어가 있는 사람들의 네트워크에 들어가서 사고의 자극을 자주 받을 필요가 있다.
      (i)의 경우에는 자연과학이나 공학의 경우에 특히 문제될 것이고, (ii)나 (iii)의 경우에는 경제학이나 사회과학 같은 대규모 자료를 이용해야 하는 경우에 문제될 것입니다. 그리고 (iv)의 경우는 모든 학문의 경우에 마찬가지로 문제될 것입니다.
      따라서 탐구를 하는 사람은 가능하다면, (i), (ii), (iii), (iv)의 필요 충족에 상대적으로 유리한 곳에서 탐구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필요 충족에 상대적으로 불리하다고 해서 탐구가 필연적으로 무의미한 잉여의 것이 되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탐구 공동체는 그 주제와 접근 방식의 수직적 범위에서나 수평적 범위에서나 대규모의 분업이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비교 우위를 가지고 있는 작업을 하면 기여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비교 우위는 위치뿐만 아니라 자신의 기질과 여건, 자신이 속한 네트워크에 의해서도 결정됩니다. 주위를 둘러 보면 어떤 사람은 자료의 탐색과 종합, 어떤 사람의 다른 연구자들의 작업에 대한 메타적 검토, 어떤 사람은 정리, 어떤 사람은 시스템 빌딩, 어떤 사람은 시스템 확장과 응용, 어떤 사람은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재빠른 적용에 알맞은 기질들은 갖고 있습니다. 충분히 공부한 후에 자신이 어느 쪽 기질을 갖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학위논문은 그러한 기질에 맞아떨어지는 주제와 내용으로 쓰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이후 학위논문을 보고 그 사람의 기질을 판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학위를 받고 난 뒤에도 이런저런 주제를 백화점식으로 건드리는 것보다는 같은 종류의 역량을 계속해서 발휘하는, 연결된 주제들을 다루는 것이 좋습니다. 이와 같이 분업에서 어떤 역할을 맡을 것인가는, 충분히 공부한 후에 파악되는 자신의 비교우위-자신이 계속해서 그와 같은 종류의 주제를 그와 같은 방법론으로 연결해서 파고들 수 있는 지점-로 결정하는 것이므로, 뭉뚱그러진 지리적 위치보다는 훨씬 중요한 사항입니다.
      또한 (iv)의 경우에는, 학회에 나가서 업데이트를 주고 받는 이상, 홀로 생각을 진득하게 많이 해야 하는 분야의 경우에는, 그렇게까지 영향이 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형식적인 아이디어의 교환이 아닌, 논문이나 책으로 완결된 아이디어는 전세계 누구나 같은 시기에 접근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위를 잘 둘러 보면 최소한 자기 이상의 역량을 갖고 있는 동료를 찾을 확률이 높습니다. 동료와는 배경지식이 상당부분 겹치면서도 또 일정부분은 다른 배경지식을 갖고 있을 때 아이디어 교환이 가장 생산적입니다. 따라서 위치는 무력감을 필연적으로 생성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점을 전제로 하면 자신의 분야에서의 태도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자신의 세부 탐구 분야의 선학자에게 구체적인 조언을 얻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또한 저는 아카데미아에 속한 전업 연구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저로서는 특정 분야의 학생의 마음가짐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드릴 수는 없을 것같습니다.
      다만 일반론으로서, 때때로 무력감은 위치에 의한 것보다는, 중심이 될 기초가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할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기초가 부족한 경우에는 선학자나 동료 학자의 작업 속에서 개선할 부분이나 틀린 부분, 확장할 부분, 또는 자신이 독창적으로 기여할 부분을 찾아내는 중심적인 사고 역량이 없기 때문에, 표면의 새로움에 의해 다소 압도되는 느낌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기초라 함은 우선은, 전공분야의 방법론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들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단순히 통계프로그램을 돌리기 위해 겉핥기 식으로 통계적 분석방법에 대해서 배우는 데 그치지 않고 통계학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가 있는 사람은, 어떤 새로운 분석 방법에 제시되었을 때 그 장단점을 주의깊게 가려내고, 스스로도 어떤 개선된 판본을 구성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철학적 사유 방법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들 수 있겠습니다.
      철학적 사유 방법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는 모든 학문에 도움이 되지만, 특히 인간의 규범과 가치, 그리고 믿음과 행위, 성향을 다루는 학문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분석철학에 대한 이해는 개념을 잘못 다룸으로 인해 생기는 헛소동을 막는데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읽어본 책이 없다면 존 호스퍼스의 <철학적 분석 입문>에서 시작해볼 것을 추천합니다.
  4. ㅇㅇ
    2019.07.05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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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선생님께서 작성하신 추천도서목록 pdf 파일을 다운받으려고 찾아보는데 도무지 찾지를 못하겠습니다.
    혹시 게시글 링크를 걸어주시면 안될까요?
    • 2019.07.06 22:3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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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도서 파일을 작성한지 시일이 많이 지나서 목록의 적정성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어 일부러 삭제하였습니다.
  5. 우륵
    2019.06.26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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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 안녕하세요!
    최근에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는데, 저로서는 어떻게 대답을 내려야 할 지 몰라서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최근에 한 과학주의자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 분은 세상에서 가장 엄밀한 학문은 과학이라고 주장하는 분이었습니다. 물론 철학적 방법론 자체도 엄밀하긴 하지만, 과학이 가진 경험의존성이야말로 우리 현실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하더군요. 따라서 과학이 머지 않아 철학을 대체할 것이라고 말하는데..
    저는 대륙철학쪽에만 관심을 두고 있어서 이러한 분석철학적인 주장에 대해 달리 어떻게 반박해야할 지를 모르겠더라고요. 학문이 어떤 참인 것을 밝히는 과정이라면 대륙철학이나 문학연구 등은 뭔가 열등한 것이 되는 걸까요??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찾아보니 과학주의에서 말하는 '인과적 폐쇄론'? 이런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진화론을 통해 인간의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느낌이었습니다.
    또 저는 헤겔을 좋아하는데, "현대의 정치철학을 논의하는데 헤겔의 인정투쟁이론이 왜 필요한가? 현대의 과학적 연구만으로도 충분한데"라고 말하는데, 뭔가 할 말이 없더군요. 이 과정에 콰인과 '이론적재성' 등의 개념이 등장하는데, 솔직히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 좀 난감했습니다..
    달리 어디에 여쭤보아야 할지를 몰라서 글 남깁니다.. 혹시 철학 서적 중에 이런 문제들(과학주의와 기타 학문의 우위문제)을 다루는 책이 있다면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추가덧글) 아 선생님, 그리고 학문이란 세상이 어떻게 이루어져있는지 밝히는 것에만 국한되는 것인가요?? 그러니까 세계를 바꾸는 실천은 운동가의 영역이고, 세계에 대한 이해는 연구자의 영역인 것인가요??
    • 2019.06.27 03:1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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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음 책을 참조하여 주십시오.
      힐러리 퍼트넘, <과학주의 철학을 넘어서>.
      앨런 차머스, <과학이란 무엇인가>.
      쇠렌 오버가르 (외), < 메타철학이란 무엇인가?>
      스티븐 툴민, <논변의 사용>.
      박병철, <쉽게 읽는 언어철학>.
      위 책 중 하나만 고르자면 스티븐 툴민의 책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위 소개된 책 중 가장 쉬운 책은 박병철 저의 책입니다.

      과학과 다른 학문을 예리하게 구분하고 과학의 지식체계로서의 우위를 주장하는 맥락에서 콰인을 인용했다면 콰인을 잘못 인용한 것입니다. 콰인은 오히려 과학과 다른 학문의 예리한 구분을 지우고자 했던 학자입니다. 예를 들어 콰인은 논리학조차도 과학의 일부라고 봅니다. 다만 그것이 경험적 테스트에 의해 논박되기에는 지나치게 이론의 내부에 있어서 그것을 논박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했을 분입니다. 수학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콰인은 유클리드의 삼각형 내각은 180도이다라든가 평행선은 만나지 않는다는 공리들은 시공간에 대한 새로운 물리학의 발전에 따라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수립함으로써 변경된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이론적재성은 콰인만의 개념은 아니고 오늘날 과학철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인정하는 개념입니다. 즉 어떤 사실명제의 테스트와 테스트 통과/실패의 판단도 그 판단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보조가설들을 내포하는 이론이 짐지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실명제 단 하나만 떼어내서 검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긴밀하게 연결된 이론 전체를 검토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용어입니다. 콰인의 입장은 그의 가장 중요한 논문들을 번역한 모음집인 허라금 역, <논리적 관점에서>를 보시기 바랍니다.

      2. 세계에 대한 탐구와 탐구된 진리의 공유와 검토는, 인간의 실천 중 중요한 일부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제 책 <삶은 왜 의미 있는가> 제13장과 제14장을 참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3. 철학은 이차적으로 사고하는 활동입니다. 즉 철학은 무엇인가를 메타로 검토하는 것입니다. 과학은 과학 내부에서 지식을 확립하는 방법론 자체가 타당한 방법인가를 검토하는 체계를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검토를 과학철학이 합니다. 우리가 인습적으로 받아들이는 도덕도 그 도덕 규칙에 어긋나는 것과 어긋나지 않는 것을 가려내줄 뿐 그 도덕 규칙 자체가 정당한가, 그것이 정당하다고 검사하는 방법이 정당한가를 내부에서 알 수 없습니다. 그런 검토를 도덕철학이 합니다.
      우리의 정치체계도(심지어 헌법도) 스스로 정당성이 있다고 자기선언을 할 뿐이지, 그 정당성을 메타로 검토할 이론적 자원을 갖추고 있지 못합니다. 그것 역시 정치철학이 할 일입니다.
      철학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점의 생활세계와 체계에서 주어진 배경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지 않고 정말로 그 배경은 받아들일 만한 것(앎, 또는 옳은 규범)인가를 메타적으로 조사해 들어가는 탐구 활동입니다. 과거 철학자들의 사상은 자기 나름대로 그런 탐구를 한 자신들의 결과물입니다. 정치철학을 한다 함은 그런 결과물들의 개념들을 엮어 읊고는 보기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질서의 정당성을 검토하고 부당한 것을 가려내고 정당한 것을 제시하는 이성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이성의 능력을 발휘함에 있어 과거 선학자들이 나름대로 탐구한 결과들이 참조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과거 철학자의 탐구 내용을 아는 것은, 성급히 메타문제에 답하지 않고 인내심을 가지고 철학에서 다루는 문제의 맥락과 진의, 그리고 실패한 방법, 유망한 방법을 가려내기 위해서 필수적인 기초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구체적인 주장 내용이 정말로 유용하고 유망한 참조점이 되는가는, 그것을 주장하는 이에게 입증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니 헤겔의 인정투쟁이론이 없었다면 해결하지 못했을 현 시대의 정치철학적 문제를 풀이하는 글을 쓸 수 있는가 쓸 수 없는가가 중요한 것이지, 추상적으로 과거 특정 철학자의 이론은 도움이 안된다느니 아니면 도움이 된다느니 하는 공론은 별로 중요치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 풀이에 유망하다는 어떤 근거 있는 직감이 든다면, 그 문제 풀이틀을 좀 더 부여잡고 발전시켜서 해결책을 공유하면 될 것입니다.
      이를테면 악셀 호네트는 헤겔을 가지고서 그런 일을 했습니다. 저는 호네트의 번역된 세 권의 책을 읽은 현재, 한 명의 독자로서, 악셀 호네트의 작업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그것은 그의 이론틀이 아니고서는 포착하거나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포착하거나 해결하지도 않으며, 범주들을 혼동시키고 섞어놓으며 권리의 지위에 승격할 수 없는 것들까지 끼어 있는 이해관심의 주장을 그런 지위에로 승격시키는 겉보기의 지렛대를 제공한다는 것이 한 명의 독자로서 저의 판단입니다. 다른 독자는 달리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독자는 악셀 호네트의 이론의 결점을 고치고 수선하고 더 발전시켜서 무언가 더 좋은 것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일에 착수하기 전에 그것이 과연 다루고 있는 주제에 비추어 보아 유망한 것인지는 검토해볼 만합니다.

      탐구의 방법은 그 탐구의 주제 영역에 따라 적합한 것이 정해집니다. 철학은 메타로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활동에 적합한 방법론이 있습니다. 이는 수학의 방법론이 물리학의 방법론과 다른 것, 도덕철학의 방법론이 인류학의 방법론과 다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 자세히 논의한 것이 스티븐 툴민의 책이므로 일독을 권합니다. 영어로 책을 읽는 데 어려움이 없으시다면, T. M. Scanlon의 Being Realistic About Reasons도 일독을 권합니다.
    • 우륵
      2019.06.27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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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심한 답변 정말 감사합니다! 최근에 악셀 호네트의 책도 샀었는데 바로 언급을 해주시네요 ㅎ
      매번 느끼지만 선생님 덕분에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배워갑니다. 지식을 단순히 받아들이기만 하는게 아니라, 그 지식이 서 있는 바탕들도 이해하는 것이 진짜 철학 공부인 것 같습니다. 추천해주신 책(선생님 책은 나오자마자 구매했었습니다 ㅎ)들 꼭 읽어보겠습니다!!
  6. 민주공원
    2019.06.14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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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청소년 교육 김선아입니다.

    부산에서 청소년논술토론한마당 행사에 강연자로 모시고 싶습니다.

    메일을 보냈습니다 확인 부탁립니다.
  7. 2019.05.20 20:2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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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jh님의 아래 질문에 답변이 되는 글을 게시하였습니다.
    https://www.civiledu.org/1459
    • Pjh
      2019.05.21 21:42
      수정/삭제
      감사합니다! 이런 양질의 긴 글을 읽을 수 있어 정말 영광입니다 :)
  8. Pjh
    2019.04.23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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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 안녕하세요.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를 읽는 도중 책의 반직관적인 결론에 동의하기가 어려워 글을 올립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첨언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비대칭성 문제를 거부해도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281p에 보면, "우리가 비대칭성을 다른 방식으로 -- 즉 시나리오 B에서 부재하는 고통은 단지 '나쁘지 않음'이라고 주장함으로써 -- 거부하려고 한다면 사태는 더 나빠진다. 그것으로 우리로 하여금 가능한 미래의 괴로움을 겪는 사람의 이익에 근거하여 그 사람을 창조하는 것을 피할 아무런 도덕적 이유가 없다고 말하게끔 만들 것이다. 우리는 괴로움을 겪는 아이의 이익에 기반하여 우리가 그 아이를 창조했다는 것을 더 이상 후회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우리는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 괴로움을 겪는 비참한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이 창조되었다는 점을 유감스러워할 수도 없게 된다." 이런 설명이 있는데요.

    여기서 고통의 부재가 '나쁘지 않음'이면 사태가 더 악화된다고 했는데, 저는 뒤에 열거한 사태가 왜 더 악화된 사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사태가 왜 더 악화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시나리오B에서 고통의 부재가 '나쁘지 않음'이라면, 비존재가 존재에 비해 반드시 우위점을 갖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경우에 따라 시나리오A에서 좋음이 나쁨보다 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베너타 교수님은 단순히 좋음과 나쁨의 크기만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좋음과 나쁨의 분포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저는 쾌락의 빈도나 순서, 그리고 수명을 고려하는 것, 즉 분포의 특성까지도 모두 좋음과 나쁨으로 환원하여 비교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경우는 오히려 시나리오A가 시나리오B보다 우위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나리오A는 좋음(+)에 가까운 반면 시나리오 B는 나쁘지 않음(=<0) 이므로) 따라서 이 경우 비존재가, 즉 창조되지 않는 것이 더 뛰어난 대안일 이유가 없으므로 창조했다는 (혹은,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후회할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시나리오A에서 좋음과 나쁨의 합계가 '나쁘지 않음' 이상이기만 하다면, 시나리오B가 더 우위점에 있는 대안이라고 볼 수 없고 오히려 시나리오 A가 더 우위점에 있으므로, 사태가 더 나빠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좋아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위 진술이 참이라면, 인용문에서 악화되는 사태로 들은 예시들은 타당하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낙천편향과 적응의 영향으로 인해서 시나리오A에서 좋음과 나쁨의 합계가 좋음(+)에 가깝다고 '착각'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의 관점(sub specie aeternitatis)에서 좋은 삶을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관점(sub specie humanitatis)에서 맥락 특수적으로 좋은 삶을 바라 본다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 아닌가요? -- 이에 대해 책에서는 겸손(modesty)을 미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원의 관점을 택할 수 밖에 없다고 진술하는데, 그렇다면 겸손이 미덕이라는 관점을 포기하면, 인간의 관점으로 좋은 삶을 판단하는 것이 부적절한 것은 아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관점에서 좋은 삶을 판단한다면, 시나리오A, 즉 존재가 비존재보다 가치있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히려 이게 직관에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에 있는 주장을 잠재적 참으로 여기신다는 댓글을 봤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제가 무언가 놓치는 함의가 있는 것 같아서 궁금한 마음에 방명록에 글을 남겼습니다.
    • 2019.05.14 03:28
      수정/삭제
      1. 베너타는 시나리오 A, B를 제시할 때, (1)을 ‘나쁨’, (2)를 ‘좋음’, (3)을 ‘좋음’, (4)를 ‘나쁘지 않음’ 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이 평가들은 가치론적(axiological) 평가입니다.
      (David Benatar, Better Never to Have Been: The Harm of Coming into Existence, 이한 옮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존재하게 되는 것의 해악』, 서광사, 2019, 72-73면 참고.), (“[요약번역] 데이비드 베너타 "여전히 결코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내 비판자들에 대한 답변." 4.2.절. 시민교육센터. 2017년05월05일 01:31 수정, 2019년5월14일 00:06 접속, https://www.civiledu.org/1204 참고.)

      위의 (1)에 대해 '나쁨'이라고 평가한 이유는 'x가 존재하면서 그에게 고통이 존재하는 사태'는 x가 존재하면서 그에게 고통이 부재하는 사태'보다 더 나쁘기 때문입니다.

      (2)에 대해 '좋음'이라는 평가한 이유는 'x가 존재하면서 그에게 쾌락이 존재하는 사태'는 'x가 존재하면서 그에게 쾌락이 부재하는 사태'보다 더 낫기 때문입니다.

      (3)에 대해 ‘좋음’이라고 평가한 이유는 ‘애초에 x가 존재하지 않아서 고통이 부재하는 사태'는 'x가 존재하면서 그에게 고통이 존재하는 사태’보다 더 낫기 때문입니다.

      (4)에 대해 '나쁘지 않음'이라고 평가한 이유는 '애초에 x가 존재하지 않아서 쾌락이 부재하는 사태'는 'x가 존재하면서 그에게 쾌락이 존재하는 사태'보다 더 나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배고픔을 느끼지 않고 있을 때, 그 사람의 경험적 질(experiential quality)에 대해서는 ‘중립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배고프지 않은 것은 즐거움도 아니고 고통도 아닙니다.

      그러나 배고프지 않은 상태는 배고픈 상태보다 상대적으로 더 나은 상태입니다. 베너타는 이렇게 사태들 중에서 가치론적으로 더 나은 사태를 두고 ‘좋음’이라고 평가한 것입니다. 내재적인 경험적 질에 대한 평가를 한 것이 아닙니다.


      2. 베너타가 제시한 사분면상의 (3)에 대한 '좋음'이라는 평가를 (질문자님께서 주장하시는 대로) '나쁘지 않음'으로 바꿨다고 해봅시다.

      이렇게 (3)에 대한 평가를 ‘나쁘지 않음’으로 바꿔놓은 사분면에서 (1)과 (3)의 가치론적 가치를 비교할 때, 다음 두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i) ((1)은 ‘나쁨’이고, (3)은 ‘나쁘지 않음’이니까) 그래도 (1)보다는 (3)이 더 낫다.
      (이 경우 (3)에 대한 '나쁘지 않음'이라는 평가는 가치론적으로 (3)과 (1)을 비교해서 내린 평가가 아니라, 그와는 다른 맥락의 평가입니다. 이 경우는 베너타의 (3)에 대한 '좋음'이라는 평가가 (3)을 (1)과 가치론적으로 비교해서 내린 평가임을 이해하지 못한 경우입니다.)

      (ii) (1)보다 (3)이 더 낫지도 않고 더 나쁘지도 않다.

      만약 (i)이라고 한다면, (1)과 (3)의 가치론적 가치를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측면에서는 베너타의 주장과 같게 됩니다. (ii)라고 해야 베너타의 기본적 비대칭성을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ii)를 선택하고 기본적 비대칭성을 거부하게 되면, ‘X가 존재하면서 그에게 고통이 존재하는 사태’보다 ‘X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고통이 부재한 사태’가 더 나은 점이 하나도 없다는 주장이 됩니다.

      그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면, 어떤 사람 x가 태어나자마자 끔찍한 고통만을 겪다가 하루 만에 죽었다고 했을 때, ‘x가 애초에 안 태어나서 어떠한 고통도 없는 사태’가 ‘x가 태어나서 고통만 겪다가 하루 만에 죽는 사태’보다 가치론적으로 나은 점이 하나도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1)과 (3)의 가치론적 가치가 같다고 할 때, 즉, (1)보다 (3)이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고 할 때의 이 함의를 질문자님께서 정말로 받아들이고 계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질문자님께서는 시나리오A에서의 ‘좋음’과 ‘나쁨’의 합계가 ‘나쁘지 않음’ 이상이기만 하다면 시나리오A가 시나리오B보다 더 낫다는 주장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1)과 (3)의 가치론적 가치가 같다면, 시나리오 A와 시나리오 B를 비교하는 맥락에서 ‘삶의 나쁨’은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1)과 (3)이 같으면, 시나리오A의 (2) ‘좋음’과 시나리오B의 (4) ‘나쁘지 않음’ 만 서로 비교하면, 시나리오 A, B 둘 중에 무엇이 더 나은지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질문자님의 (3)에 대한 ‘나쁘지 않음’이라는 평가는 (3)을 (1)과 가치론적으로 비교해서 내린 ‘가치론적 평가’가 아니라 제가 1번에서 언급한 ‘경험적 질에 대한 평가’이거나 또는 다른 맥락의 어떤 평가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3. 질문자님께서는 (3)에 대한 베너타의 ‘좋음’이라고 평가를 ‘나쁘지 않음’으로 바꾸고, 각각의 평가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값을 부여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1): 나쁨 (-), (2): 좋음 (+), (3): 나쁘지 않음 (=<0), (4): 나쁘지 않음 (=<0)

      위의 값 할당에서 직관적으로 의문이 생기는 지점은 ‘나쁘지 않음’에 대한 (=<0)이라는 부등식 표현입니다.

      베너타는 (위의 책, 78면.)에서 사분면 각각에 어떤 값을 할당해서 자신의 주장을 반박하려는 시도에 대해 소개합니다. 그 시도에서는 좋음을 양(+)으로 나쁨을 음(-)으로 나타내고, ‘나쁘지 않음’에 대해서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기 때문에 ‘0’이라고 놓습니다. 이 시도는 베너타에 의해 곧바로 반박당하긴 하지만, 좋음이 ‘양’이고 나쁨이 ‘음’이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은 ‘0’이라고 한 것은 일견 그럴듯합니다.

      그런데 나쁨을 음(-)으로 두면서, ‘나쁘지 않음’을 (=<0)이라고 표현한 것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 부등식 표현 그대로 보면, ‘나쁘지 않음’ 또한 ‘나쁨’과 같은 음의 값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위와 같이 값을 할당하게 되었을 때 발생하는 다른 문제점들은 이러합니다. (위의 책, 76-81면 참고.)

      (i) 위와 같이 값을 할당하게 되면, (2)가 (4)보다 가치론적 가치가 크다는 주장이 됩니다. 그러나 (2)는 (4)보다 더 낫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K가 존재하면서 그가 쾌락을 느끼는 사태는 K가 존재하면서 쾌락을 느끼지 못하는 사태보다는 분명히 더 낫습니다. 왜냐하면 K에게서 쾌락을 박탈한 사태는 그에게서 쾌락을 박탈하지 않은 사태보다 나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애초에 K가 존재하지 않아서 쾌락이 부재하게 된 사태에서는 쾌락을 박탈당해서 나쁠 수 있는 사람 자체가 없습니다. 이는 쾌락이 있었으면 좋았을 누군가에게서 쾌락을 박탈한 사태가 아닙니다.

      따라서 ‘K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아서 쾌락이 부재한 사태’ 는 ‘K가 존재하면서 쾌락이 존재하는 사태’보다 나쁘지 않습니다.

      (ii) 위와 같이 값을 할당한 다음에 단순히 (1)과 (2)의 값을 합산해서 양의 값이 나오면 비존재보다 존재가 낫다는 결론을 내리는 비교방법은 ‘시작할 가치가 있는 삶’(life worth starting)과 ‘지속할 가치가 있는 삶’(life worth continuing)을 구별하는 우리의 직관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팔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은 너무나 나쁘기 때문에 인생을 끝내는 것이 계속 사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동일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임신을 하면 팔이 없는 아기A가 태어난다고 할 때, ‘지금 임신을 해서 A가 존재하게 되는 사태’보다 ‘지금 임신을 하지 않아서 그 A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사태’가 그 A를 위해서 더 나은 사태라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는 ‘시작할 가치가 있는 삶’과 ‘지속할 가치가 있는 삶’을 구분하고 “손상이 너무 나빠서 삶을 지속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만든다는 판단은 손상이 아주 나빠서 삶을 시작할 가치가 없게 만든다는 판단보다 훨씬 더 높은 문턱(threshold) 수준에서” 내립니다. (위의 책, 48면.)

      그런데 우리가 깊이 견지하고 있는 이 구별을, (단순히 삶의 좋음과 나쁨을 합산해서 +가 되면, 존재가 비존재보다 낫다고 판단내릴 수 있다는) 위의 비교방법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존재와 비존재를 비교하는 방법으로 질문자님께서 제시하신 비교방법을 받아들인다면,

      (a) 만약에 x가 태어났다면 겪었을 좋음과 나쁨을 합산하여 ‘태어나는 것’(존재)과 ‘애초에 안 태어나는 것’(비존재)을 비교하는 것.

      (b) 어떤 존재하는 사람 x가 지금 죽게 되면 못 겪는 좋음과 나쁨을 합산하여 ‘계속 사는 것’(존재)과 ‘지금 죽는 것’(비존재)을 비교하는 것.

      이 (a)와 (b)는 (위의 제시된 비교방법 내에서는)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iii) 위와 같이 값을 할당하여 삶의 질을 평가하게 되면, 삶의 질을 평가할 때 고려해야만 하는 다른 여러 고려사항들을 무시하게 됩니다. 베너타는 (위의 책, 81면.)에서 자신이 사분면을 제시한 이유는 시나리오B가 시나리오A보다 항상 더 낫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지 삶의 질을 평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삶의 질은 단순히 ‘삶의 좋음’에서 ‘삶의 나쁨’을 빼는 것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질문자님께서는 “분포의 특성까지도 모두 좋음과 나쁨으로 환원하여 비교가능”하다고 하셨지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불가능합니다.

      한 단위의 좋음에는 양(+)의 값, 한 단위의 나쁨에는 음(-)의 값을 할당해서 그 삶에 담긴 좋음의 양과 나쁨의 양을 각각 양의 값과 음의 값으로 환산한 뒤, 둘을 합산하여 삶의 질을 평가하는 방법은 [A(좋음의 양을 환산한 양의 값) + B(나쁨의 양을 환산한 음의 값)]라는 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삶의 질을 평가할 때에는 A 또는 B로 환원되지 않는 변수들을 고려해야만 합니다.

      '좋음과 나쁨의 순서', '좋음과 나쁨의 강도', '삶의 길이'와 같은 "삶의 좋음과 나쁨의 분포 형태"는 A나 B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4. 베너타는 2장 <왜 존재하게 되는 것은 항상 해악인가>에서 “삶이 가장 적은 양의 나쁨만을 담는다고 할지라도 나쁨을 담는 한, 존재하게 되는 것은 해악이라고 논증”한 것입니다.(위의 책, 97면.)

      그리고 3장 <존재하게 되는 것은 얼마나 나쁜가?>에서는 “모든 인간 삶이 보통 인정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나쁨을 담는다는 점”을 논증한 것입니다.(위의 책, 98면.)


      5. 영원의 관점에서(sub specie aeternitatis) 본다는 것은 어떤 초월적 존재의 관점에서 본다는 것도 아니고 이 세계를 초월한 어떤 지점에서 본다는 것도 아닙니다. (John Rawls, “A Theory of justice”. 황경식 옮김, 『정의론』, 이학사, 2003, 749-750면 참고.)

      그것은 합리적인 인간이 가능한 한 최대한 객관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베너타는 (Benatar, David, The human predicament: A candid guide to life’s biggest question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p86)에서 인간의 삶을 맹목적으로 숭배(fetishizes)하지 않고 감정적 거리(emotional distance)를 두고 객관적으로 인간의 삶의 질을 평가하기 위해서 인간이 아닌 상상의 종(imaginary species)의 삶을 생각해볼 것을 제안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질병과 노화가 없으며 인간보다 훨씬 더 인지능력이 뛰어나고 훨씬 더 도덕적이고 훨씬 더 수명이 긴 상상의 종(imaginary species)의 삶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종의 객관적 좋음의 목록을 기준으로 할 때, 병들지 않는 능력, 늙지 않는 능력, 인지 능력, 도덕적 능력, 적당한 수명을 극도로 결여하고 있는 인간은 삶의 중요한 좋음을 극도로 결여하고 있는 매우 비참한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객관적 좋음의 목록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삶에서의 객관적 좋음들로 구성하는 것은 특정 시점(현재)의 특정 종(Homo sapiens)에게 가능한 좋음들로 목록을 구성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객관적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목록을 구성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최대한 객관적으로 사고하는 것, 즉, 영원의 관점에서(sub specie aeternitatis) 사고하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6. 미덕은 특정 상황과 맥락에서 가치 있는 행위를 하는 데 도움을 주는 성격과 태도입니다. 따라서 미덕은 어떤 주체의 어떤 행위가 어떤 상황에서 가치 있는지를 해명하는 윤리적, 도덕적 신념들을 이미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립물] 실체화된 미덕 증진의 오류." 시민교육센터. 2015년07월13일 21:55 수정, 2019년5월13일 23:58 접속, https://www.civiledu.org/823 참고.)

      따라서 그 윤리적, 도덕적 신념들의 그물망 속에서만 우리는 무엇이 미덕인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겸손’을 미덕으로 볼 수 있도록 최선의 해석을 한다는 것은, 가치, 미덕, 권리, 의무와 관련된 수많은 윤리적, 도덕적 신념들이 서로를 지지하고 있는 이 네트워크망에 미덕으로서 편입될 수 있는 겸손이라는 말의 뜻을 겸손이라는 말의 용례에서 찾아내겠다는 것입니다.

      가치 있는 행위란, 타인의 의사소통주체로서의 지위를 존중할 의무(배경적 의미의 요소)를 준수한다는 전제하에서, “내용적 가치를 자신의 기질과 능력, 여건에 비추어 자신에게 기꺼운 방식으로 풍부하게 채우고 창출하고 경험”하기 위한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한, 『삶은 왜 의미 있는가: 속물 사회를 살아가는 자유인의 나침반』, 미지북스, 2016, 65면.)

      그리고 베너타가 책에서 인용한 겸손에 대한 최선의 해석은 ‘다른 인간들과 비교했을 때 자신이 상대적으로 뛰어나다는 점은 정확히 인지하고 있으나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보다 높은 규준으로 자신을 평가하여 자신이 부족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태도나 성격’입니다.

      이와 같은 태도가 내용적 가치가 있는 학문이나 예술의 어떤 분야에서 다른 인간들보다 뛰어난 인간에게 도구적 가치가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가 최선으로 해석한 겸손이 편입되어 있는 이 윤리적, 도덕적 신념들의 네트워크망에는 인간은 영원의 관점을 취할 수 있으며, 이러한 관점을 취할 실천적인 이유가 있다는 신념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베너타가 겸손의 예를 들면서 보여주려고 한 것들입니다.
    • 873
      2019.05.15 20:00
      수정/삭제
      (1) 'x가 존재하면서 그에게 고통이 존재하는 사태'는 'x가 존재하면서 그에게 고통이 부재하는 사태'와 비교하고,

      (3) ‘애초에 x가 존재하지 않아서 고통이 부재하는 사태'는 'x가 존재하면서 그에게 고통이 부재하는 사태'가 아니라 'x가 존재하면서 그에게 고통이 존재하는 사태’와 비교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제가 보기에는 같은 기준으로 비교해야 알기 쉬울 것 같은데요. (2)와 (4)도 마찬가지고요. 책에 나오는 비대칭성 네 가지에서 든 예시도 공평하게 비교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 Pjh
      2019.05.15 20:49
      수정/삭제
      자세한 답변 감사합니다. 말씀해주신 내용들을 곰곰히 생각해보니, 제가 (1)과 (3)을 비교할 때는 '가치론적 평가'를, 그리고 (2)와 (4)를 비교할 때는 어떤 존재(를 가정하고 그 존재)의 '경험적 질'에 대한 판단 -- 시나리오 B의 가정과 양립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 을 했었네요. 즉, 비일관적으로 범주를 전제했었네요. 또, (1)과 (2)를 합산할 경우 삶을 시작할 가치와 삶을 지속할 가치를 구분하지 않게 된다는 점을 고려하지 못했네요.
      개념들을 상세히 설명해주셔서 -- 영원의 관점과 미덕에 대한 설명 등 -- 감사합니다. 덕분에 뒤엉킨 개념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볼 수 있었습니다.
    • 성우맨
      2019.05.18 16:35
      수정/삭제
      Pjh/ 위의 제가 드린 답변의 2번에서, 오도할 수 있는 표현을 수정하고, (3)이 (1)보다 가치론적으로 더 낫다고 판단하는 동시에 베너타의 (3)에 대한 '좋음'이라는 평가를 '나쁘지 않음'으로 바꾼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설명을 추가했습니다.
    • 2019.05.20 20:22 신고
      수정/삭제
      https://www.civiledu.org/1459
    • Pjh
      2019.05.21 21:40
      수정/삭제
      @성우맨
      앗! 친절한 첨언 감사합니다 :) 덕분에 여러 개념들을 한층 깊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9. 탐구자2
    2019.03.26 21:46
    수정/삭제 댓글
    오늘도 '매일 지나치게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위하여'를 읽습니다.

    물론 예전처럼 언제나 모든 것이 괴롭지는 않습니다. 타인을 그저 착취적인 자동발화기계이자 속물로 바라보지 않으려, 부조리한 현실에 때때로 고통받는 일 또한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려 합니다만, 그럼에도 여전히 스스로를 어느 방향으로든 탈진에 이르게끔 방치하곤 합니다.

    그래서 다시금 호혜성의 원칙과 퍼즐의 원칙을 떠올립니다. 저에게 주어진 일을 내팽개치거나 지나치게 몰아붙이지 않고 적정 수준을 찾아가면서 조금씩 나아가려고 합니다.
  10. 대학원생
    2019.02.23 23:16
    수정/삭제 댓글
    선생님, 안녕하세요? 선생님의 글과 노하우를 종종 접하며 많은 자극을 받고 있는 박사과정 학생입니다.
    제게는 올해와 내년이 졸업을 앞두고 논문을 많이 써야하는 굉장히 중요한 시기인데요. 최근 '중요한 시기'라는 점이 너무나 압박스럽게 다가와, 정작 해야할 일들에 온전히 집중을 못하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의 [행동전환기술]이 많은 도움이 되는거 같아 여러번 읽어보고 실행해보려고 하는 중인데요. 마인드컨트롤을 잘하여 결과에 대한 망상에 사로잡히지 않고 공부에만 오로지 집중하려면 또 도움이 되는 기술들이 있을까요? 선생님이 생각나서 게시판에 적어봅니다. 아참. 제가 두달여전에 지하철 6호선에서 두정거장 정도 선생님 옆자리에 앉았던 적이 있습니다. 지하철에서도 노트북을 꺼내서 창을 두개 띄우시고 열심히 무언가를 작업하시다 동묘앞 역에 이르자 황급히 노트북을 닫고 내리시던 선생님 모습에 많은 자극을 받았습니다. 짧은 기간이었고 용기가 부족해서 말은 걸지 못하였습니다 ^^; 자투리 시간마저 알뜰하게 활용하시는 선생님을 본받고 싶은데,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못해 늘 죄책감에 시달리는것 같습니다. 바쁘신데 감사합니다 선생님 ^^
    • 2019.02.25 23:05 신고
      수정/삭제
      https://www.civiledu.org/1422
    • 대학원생
      2019.02.27 17:38
      수정/삭제
      너무나도 주옥같은 글.. 정말 감사합니다. 깊이 새기고 실천해보겠습니다 ^^ 항상 건강하세요 선생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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